아인슈타인의 건강도 나빠지기 시작했다



몇 차례의 약한 뇌졸중으로 건강이 악화된 밀레바 마리치는 여전히 취리히에 살면서 요양소에서 점점 더 이상하고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에두아르트를 돌보고 있었다.
재정문제가 다시 어려워지면서 전남편과의 갈등도 되살아났다. 노벨 상금에서 그녀를 위해 미국의 신탁에 넣어두었던 돈의 일부가 대공황 때에 사라져버렸고, 그녀가 소유하고 있던 세 채의 아파트 중 두 채는 에두아르트를 돌보는 비용에 사용되었다.
1946년 말 아인슈타인은 남아있는 집을 팔아 그 돈을 에두아르트를 위해 지명된 법적 보호자에게 맡기려고 했다.
그러나 마리치는 그 집의 사용권과 수익금은 물론 대리 위임권까지 갖고 있었으며, 그런 권리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해 겨울 어느 추운 날 마리치는 에두아르트를 만나러 가던 길에 쓰러져 낯선 사람이 그녀를 발견할 때까지 의식을 잃고 있었다.
그해 5월에 마리치는 다시 뇌졸중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녀는 석 달 후 숨을 거뒀다.
그녀의 아파트를 팔아서 받은 8만5천스위스 프랑이 그녀의 침대 밑에서 발견되었다.

멍한 상태가 된 에두아르트는 어머니에 대해서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근처에 살고 있던 아인슈타인의 친구 카를 젤리히가 그를 자주 찾아갔고 정기적으로 아인슈타인에게 그의 상태를 알려주었다.

1948년에 아인슈타인의 건강도 나빠지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그는 소화불량과 빈혈에 시달려왔으며, 그해 말에 심한 통증과 구토를 경험했고, 그로 인해 브루클린에 있는 유대인 병원에 입원했다.
진단을 위한 수술에서 복부 대동맥에 동맥류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의사들은 치료할 방법이 없다고 판정했다.
그것이 그의 사망 원인이 되었지만 건강식을 하면 덤으로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건강을 되찾기 위해 아인슈타인은 플로리다주의 사라소타로 갔다. 헬렌 듀카스가 그를 따라갔다.
엘자가 타계한 후 그녀는 충성스러운 보호자 이상의 역할을 했다.
그녀는 한스 알베르트의 양녀 에벌린이 보낸 편지를 그에게 전해주지 않기도 했다.
버클리 대학의 공대 교수가 된 한스 알베르트는 그녀가 자신의 아버지와 연애를 하고 있다고 의심했으며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듀카스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아인슈타인의 여동생 마리아의 건강도 나빠지고 있었다.
그녀는 무솔리니가 반유대인 법률을 시행하면서 프린스턴으로 왔지만 몇 년 동안 소원하게 지냈던 그녀의 남편 파울 빈텔러는 자신의 여동생과 매제 미셸 베소가 살고 있던 스위스로 돌아갔다.
그들은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마리아는 뇌졸중을 겪었고, 1948년에 이르러서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 누워서 지냈다.
아인슈타인이 그녀를 돌보았다.
매일 저녁 그는 큰 소리로 책을 읽어주었다.

1951년 6월에 마리아가 사망하자 아인슈타인은 몹시 슬퍼했다.
그의 양녀 마르고트가 그를 위로했다.
마르고트 역시 그녀의 남편을 떠났다.
그녀의 남편은 오래 전부터 원했듯이 아인슈타인에 대한 비공식 전기를 썼다. 마리아와 마르고트 모두 나이가 들면서 남편과 사는 것보다 아인슈타인과 함께 사는 것을 더 좋아했다.

아인슈타인이 플로리다주에서 요양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친구들이 70회 생일기념학술대회를 열어주었다.
강연은 아인슈타인의 과학에 대한 것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지만 대부분은 그의 따뜻함과 인간적인 면에 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연구소에서 그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 선물로 마련한 첨단 AM-FM 라디오와 고음질 녹음기는 어느 날 그가 연구소에 있는 동안 그의 집에 몰래 설치되었다.
아인슈타인은 감격했으며, 그 기기를 음악뿐만 아니라 뉴스를 듣는 데도 사용했다.

그는 이미 바이올린을 포기했다.
대신 그는 익숙하지는 않지만 피아노에 열중했다.
한 번은 한 구절에서 계속 실수를 하던 그가 마르고트에게 웃으면서 “모차르트가 이렇게 엉터리로 곡을 만들었군”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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