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는 어디든지 존재하며 성령 또한 마찬가지이다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도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는 성령 안에 있고,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논리에 의해 그리스도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보고, 성령의 부음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과도 같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고 보았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린도전서 3:16)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한 I서 4:13)

아타나시우스는 예수가 신약성경 저자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독생자로 불리운 점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이 한 분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또한 한 분 뿐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성령에 관한 지식은 그리스도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도 그리스도와 같이 한 분뿐임을 믿었다.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고린도전서 8:6)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한복음 1:18)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2:13)

그리스도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어디든지 존재하며 성령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한복음 14:10)

우주를 창조하고 다스리는 분은 그리스도이며 한 장소에 있을 수밖에 없는 피조물과는 달리 그리스도는 하나님 안에 있는 분이기에 한 장소에 속하지 않고 어느 곳에도 동시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왕권과) 주관들이나 (주권과)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권세와 세력의 여러 천신들과)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로새서 1:16-17)

그리고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도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성령 또한 어느 곳에서나 동시에 있다고 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시편 139:7)

또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창조주이며, 하나님의 그리스도이고, 그분의 대리인이라고 보았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요한복음 5:19)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또한 창조주로서 우주를 창조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보더라도 그리스도는 피조물이 될 수가 없고 이는 성령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아타나시우스에게 그리스도와 성령 모두는 예수를 지칭한 명칭이었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할 때 성령이 협조했는데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주를 창조한 것이므로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는 성령도 있고 그리스도가 창조한 것들이 성령으로 존재한다고 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시편 33:6)

성령은 그리스도와 분리될 수 없는 분이다.
그리스도가 선지자들에게 내려졌을 때 그들은 성령 안에서 자신들이 받은 그리스도를 전했다.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앞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사도행전 1:16)

내가 종 선지자들에게 명한 내 말과 내 전례들이 어찌 네 열조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돌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하였다 (스가랴 1:6)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신으로 (당신의 영을 부어 주시며)
이전 선지자를 빙자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노가 나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나왔도다 (스가랴 7:12)

성령을 받은 사람은 능력 있는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저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고린도후서 13: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사도행전 20:23)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어느 도시에 들어가든지 투옥과 고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령께서 나에게 일러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공동번역)

아타나시우스는 성령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안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성령의 선물이 삼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거듭 강조했다.
또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성령과 주 예수와 하나님이 같은 분이라고 한 말을 지적하고 하나님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주를 통치한다고 역설했다.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고린도전서 12:6)

또한 바울이 삼위 안에서 기도했듯이 삼위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지어다 (고린도후서 13:13)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에베소서 4:6)

아타나시우스는 가톨릭주의에는 한 믿음이 있을 뿐이며, 예수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을 때는 예수 자신이 삼위일체에 속함을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19-20)


그리고 그는 하나님은 혼자만으로도 온전한 분이므로 부족함 때문에 그리스도와 성령에 일체를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이사야 1:11)

이렇듯 아타나시우스는 바울의 삼위일체론에 동조했다.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에베소서 4:5)

그는 세례받기를 바라는 사람에게 세례와 믿음은 하나라고 가르쳤으며, 그리스도를 아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를 아는 성령 또한 알게 되므로 세례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믿게 될 것이라고 했다.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히 존재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세례 받을 사람에게 그는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을 늘 기억할 것을 당부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 지니라 (갈라디아서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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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 성령론을 가장 논리적이고 충분한 방법으로 설명한 사람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성령론을 가장 논리적이고 충분한 방법으로 설명한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는 성령의 존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낸다는 논리를 펴면서 하나님의 성령이라거나 그리스도의 성령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고 두 분 모두의 성령이라고 말해야 타당하다고 했다.
그리고 사랑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사랑이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지 사랑이 하나님이라고 불릴 만한 가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한 I서 4:8)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한1서 4:16)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의 “주여, 바라느니 당신뿐이요 Lord, thou art my patience(또는 hope)”(시편 71:5, 공동번역) 라는 구절을 예로 들어 ‘바라느니 patience, or hope’를 하나님의 실체가 아니라 그분으로부터 우리에게 온 것으로 해석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시편 62:5)

그는 ‘바라느니 당신뿐이요 Thou art my patience’는 ‘야훼를 너의 피난처라 하고 Thou, Lord, art my hope’(시편 91:9, 공동번역)라고 말할 수 있으며, ‘하나님은 나의 사랑이시다 My God is my compassion’(시편 59:17)라고 말하거나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다르게 표현하여 ‘주님은 나의 사랑이시다 the Lord is my charity’, ‘당신은 나의 사랑이시다 Thou art my charity’, ‘하나님은 나의 사랑이시다 God is my charity’라고 말할 수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God is charity’라고 말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예수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God is spirit”(요한복음 4:24)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이 같은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이해를 구하라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성경구절은 삼위일체를 시사한 것이었는데 사랑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령에게도 해당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또한 삼위일체가 세 분 하나님에 관한 기억에서 비롯하는 개념이 아님을 강조했는데 ‘기억’이란 말은 플라톤으로부터 구한 개념으로 지식의 원천을 의미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논리 하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과 성령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과 그리스도와 성령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기억, 또는 지식의 원천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성령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거나 기억하지 못하고 오로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사랑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성령을 기억하고 그리스도가 성령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삼위가 각기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논리를 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부와 성자, 성령에게는 불변하는 지혜가 있지만 그 지혜 자체는 실체가 아니며, 삼위가 각각 지혜로 불리지만 세 지혜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의 지혜라 불리어지며 또한 각각 사랑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이라고 불리는 점을 들며 삼위일체론의 타당성을 강조했다.
마찬가지 이유로 그는 성부가 하나님이고, 성자가 하나님이며, 성령도 하나님이지만 삼위는 하나의 하나님으로 불린다는 점을 들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그리스도라 말하고, 성령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부르고 있는 점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낳고 성령을 본래 나타나도록 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여기서 본래란 말을 사용한 것은 성령이 하나님으로부터 나타났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성령은 스스로 존재한 적은 없었으며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낳을 때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준 선물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 모두의 것임을 강조했으며 하나님과 성령은 지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로 부르는 것은 타당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지혜와 달리 사랑은 실체이기 때문에 실체와 사랑은 구별되지 않으며 삼위 모두에게 존재하긴 하지만 특별히 성령만이 실체로서의 사랑이라고 불리어진다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울이 이사야의 말을 율법으로 기술한 적이 있음을 예로 들어 구약성경이 율법서로 불렸음을 지적했다.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더듬거리는 말씨와)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고단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사야 28:11-12)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외국인의 입술을 빌어) 이 백성에게 말할 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고린도전서 14:21)

예수도 구약성경을 율법서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15:25)

무리하게 나의 원수된 자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 (시편 35:19)

율법이란 모세의 법을 지칭하는 말이다.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마태복음 11:1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생각하느냐 강령이니라 (골자이니라)
(마태복음 22:37-40)

성경에서는 율법을 선지자와 시편 저자들의 말과 구별한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누가복음 2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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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성령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왔지만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약성경 저자들이 일반적으로 율법에 예언서와 시편을 포함시켰음을 상기시키면서 특별한 경우에만 모세의 법에 한정해서 율법이란 말을 사용했음을 지적했다.
그에 의하면 신약성경 저자들은 시편 저자들을 선지자 그룹에 포함시켰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그들을 그룹에서 제외시켰다고 한다.
일반적인 경우와 특별한 경우에 따라서 각기 다른 말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문제로 삼으려는 것은 성령만을 사랑이라고 부른 것이라고 했다.
그리스도도 사랑임을 역설하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 모두를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성령만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류임을 지적했다.
또한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구약성경 저자들이 특별히 지혜라고 부른 구절을 지적한 후 성령과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지혜이며 삼위는 일체로서 분리가 가능하지 않음을 강조했다.
그는 바울이 예수를 지혜라고 부른 것과 요한이 성령을 사랑이라고 부른 것도 지적했다.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신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for love is of God)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신께로부터 났으며 신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신을 알지 못합니다
신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for God is love) (요한1서 4:7-8)

아우구스티누스는 인용한 구절에서 사랑이란 말이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하나님을 사랑(for love is of God)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라 보고 사랑을 하나님의 하나님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하나님으로 해석했다.
그리스도와 성령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왔지만 하나님만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하나님이 아니며 사랑과 하나님은 서로로부터 왔기 때문에 사랑이 그리스도와 성령 둘 가운데 하나여야 한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 같이 우리를 사랑하였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요한1서 4:9-12)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은 사랑이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게 된다는 요한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한1서 4:13)

하나님은 성령을 주어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 있게 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게 하는데 이것을 사랑의 결과라고 본 것이다.
이렇게 그는 성령 자체가 사랑인 하나님을 강조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한1서 4:16)

그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까닭은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바울은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로마인에게 다음과 같이 적어 보냈다고 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로마서 5:5)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보다 더욱 큰 하나님의 선물이란 있을 수 없다면서 사랑의 가치를 강조했다.
그는 성령을 통해 받는 것이 사랑 외에 더 있으나 사랑이 없다면 무가치하다고 했던 바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조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have not charity)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I am nothing)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3:1-3)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울의 사랑 예찬을 영생의 길이라고 극찬하면서 love와 charity는 모두 사랑이란 뜻으로 사랑은 그리스도인을 천국으로 이끌며, 사랑이 없는 믿음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이런 믿음은 유익하지 못하다고 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갈라디아서 5:6)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어리석은)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야고보서 2:19-20)

결론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성령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심어줌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성령은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의 선물로도 불리었음을 지적했다.
그는 선물이란 특별한 사랑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나아가도록 만들기에 사랑이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나아가지 못한다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하나님의 은총인데 인성의 회복은 은총 또는 사랑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은총이란 상대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절대적인 의미에서 필요로 하기 때문에 구원이라는 개념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은총은 구원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포착하는 것이다.
또한 은총은 세례로부터 시작되므로 세례는 은총을 필요로 하는 그리스도인과 하나님 사이에 관계를 맺게 하는 최초의 행위이다.
세례를 통해서 만이 아담으로부터 비롯한 원죄가 제거되기 때문에 유아도 세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
은총의 역사를 하나님의 창조적인 행위로 이해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새 삶의 과정에서 성령이 사람의 마음 안에 믿음을 만들어 주며 타락을 통해 사람을 지배했던 영적 무지를 몰아내 준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이후에야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를 찬동하게 되며 차츰 영적인 일에 대한 수준 높은 지식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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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미술품 바라보기
(다음은 석유공사 기관지에 기고한 글입니다.)

동시대의 예술가들에 의해서 다양한 미술품들이 연일 생산되고 있어 양과 질에서 엄청나다. 어떤 작품은 평론가의 일견에도 과연 미술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그렇다면 일반 관람자들의 혼란은 더욱 클 것이다. 관람자가 평론가에게 “동시대 미술품을 어떻게 감상해야 할까요?” 하고 물을 수 있다. 필자는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우선 질문에 들어있는 주요 단어들의 개념을 정립해야 여기에 답할 수 있다. ‘동시대’, ‘미술품’, ‘감상’의 의미를 알면 질문이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다.
동시대’는 한 세대를 말하는데, 과거에는 세대의 기간이 짧았지만, 오늘날에는 50년을 말한다. 50년 전부터 지금까지가 동시대로서 1960년부터 지금까지가 여기에 해당된다.

미술품’에 대해 ‘시각예술’이라고 말하는 것 외에 그 본질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건 어려운 일이다. 정의를 내릴 수 없다는 의견이 1980년대 초에 제기된 이래 많은 예술철학자들이 나름대로 정의를 내렸지만,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런 현상은 미술에만 한정되는 건 아니다. 시를 ‘언어예술’, 음악을 ‘소리예술’이라고 말하는 것 외에 그 본질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것이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이다. 동시대인은 과거에 정의되던 것들이 오늘날에는 정의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미술, 시, 음악이 한정된 지역, 특히 유럽의 몇 나라들을 중심으로 권위를 가졌을 때는 그 지역 사람들의 공통된 ‘감상’ 방법이 정의가 되어 통용되었지만, 1980년대 다양한 지역의 다양한 문화가 동등한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자각과 더불어서 어느 한 문화가 권위를 독점하는 것이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것이 보편적 인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위에서 ‘감상’이란 단어를 자연스럽게 ‘미술품’과 연관시켜서 사용했다. 공통된 감상 방법이 미술품을 정의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공통된 감상 방법이란 예를 들면 회화란 어떠해야 한다는 선입견을 말한다. 그래서 그런 선입견에 일치하지 않을 때 관람자는 “저것은 그림이 아냐!” 하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회화란 어떠해야 한다는 선입견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 즉 기원전 400년 전부터 생성되어 서양인이 고수해온 확고부동한 것이었다. 많은 회화론이 선입견을 갖게 만들었다. 선입견, 혹은 감상 방법이 정해져 있었으므로 과거에는 서양에서 아카데미, 동양에서 화원이란 기관이 생겨 화가들을 훈련시켰으며, 오늘날에는 미대가 그 역할을 맡았다.

1980년대에 들어서 나라와 나라의 울타리가 무너지고 세계가 하나의 문화권이 되면서 모든 문화가 존중되고 동등하게 취급되면서 서양식 회화의 선입견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회화에는 반드시 어떠해야만 한다는 규정이 사라진 것이다. 따라서 미대는 화가를 훈련시킬 수 있는 기관이 될 수 없게 되었다. 미대 무용론은 그런 의미에서 제기된 것이다.

1980년대 이래 양식과 장르 사이의 구분이 허물어진 해체주의 경향으로 절대양식의 붕괴와 과거의 모든 양식을 포함해 다양한 양식이 공존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새로운 양식이 이전의 양식에 비해 더 낫다, 혹은 더 진전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지만, 오늘날에는 모든 양식이 동등한 위치에서 표현의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우월한 양식이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미술사와 일상문화로부터 양식을 차용하는 소위 혼성모방이 두드러지게 되었고, 기존의 양식과 형상을 공공연하게 차용하거나 모방, 혹은 변조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복제의 발달, 대량전달, 정보화 등이 작품의 독창성과 가치를 약화시키며, 그로 인해 창작과 평가, 감상의 방법에 변화가 왔다. 관람자가 동시대 미술품 앞에서 혼란스러운 건 당연하다.

감상과 관련해서 필자는 ‘일상의 오브제’가 ‘미술의 오브제’로 ‘변용’되는 것에 주목하라고 권한다. 미술관이나 화랑에 진열된 미술품에서 일상의 오브제, 예를 들면, TV 모니터, 일상적인 장면을 찍은 필름, 우리 주변에 있는 것과 똑같은 물품, 폐품, 플라스틱, 용기, 건축자재 등이 발견된다. 그것들이 미술관이나 화랑 밖에 진열된다면 어느 누구도 미술품으로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주된 개념은 ‘변용’이다. 변용이란 물질의 본질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이 달라진 걸 말한다. 오래 교제한 남자친구, 혹은 여자친구가 어느 날 사랑스럽게 보인다면 그 사람이 변용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팝아트, 아상블라주, 비디오아트를 포함한 미디어아트, 정크아트, 펑크아트, 대지아트, 해프닝, 바디아트, 퍼포먼스아트, 아르테 포베라, 네오지오 등 다양한 장르의 미술품에서 일상 오브제의 변용을 발견한다. 일상 오브제와는 다른 용도,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관람자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만든다. 관람자는 일상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의 차이가 오로지 예술가와 관람자의 시각, 혹은 바라보는 태도에 달렸다는 걸 알아야 한다. 이것이 그런 장르의 작품들을 감상하는 방법인 것이다.

팝아트의 황제 앤디 워홀의 작품을 예로 들면 그 특성이란 반복repetition과 무nothing, 혹은 하찮음nothingness이다. 거기에는 반복되는 이미지 외에 아무것도 없다. 워홀은 그런 작품들을 통해 이미지의 의미와 정체성을 물었다. 진부한 것에 의미와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예술가와 관람자의 몫이다. 반복은 관람자로 하여금 그것이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정말, 사랑 해”보다는 “정말, 정말, 정말, 사랑 해”가 더 중요한 표현처럼 들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관람자는 일상의 평범하고 통속적인 재료를 사용한 작품을 감상할 때 드러나는 평범함과 통속성 이면에 숨겨진 예술가의 ‘고도한 솜씨’와 ‘디자인’을 발견해야 한다. 그것을 보지 못하면 감상에 실패하는 것이다.

동시대 미술품 대부분은 고도한 솜씨와 디자인으로 이뤄졌다. 디자인에 고도한 솜씨가 내재되었기 때문에 디자인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동시대 미술품에 TV 모니터와 동영상물, 그리고 설치가 더욱 많이 사용되고 있다. 삼차원의 표현이 예술가의 의도를 전달하기에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작품들을 디자인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쉽게 이해된다. 수십 개, 혹은 수백 개의 모니터가 사용된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작품을 예로 들면 그것을 바라보면서 이미지가 개별적으로 그리고 전체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관찰한다면 아주 간단한 공식에 따라 변하면서 반복될 뿐이란 걸 알게 된다. 어려운 음악이라도 멜로디가 변하는 과정을 숫자로 적으면 소나타, 론도 등 간단한 공식에 따라 변하면서 반복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결론으로 말하면 동시대 미술품에는 반드시 어떠해야 한다는 공식이 없다. 다만 예술가와 관람자의 바라보는 의도와 감상이 있을 뿐이다. 관람자의 역할이 과거와 달리 창작의 일부분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미술품이 미술품으로 인정받으려면 관람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미술품이 관람자에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미술품이 아니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더라도 당분간 미술품으로 규정하는 걸 보류해야 한다. 왜냐면 미술품은 소통의 대상물이다. 미술품에는 예술가 자신의 의도가 담겨있어야 하고 그것이 관람자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미술품이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미술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관람자가 미처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술가 혹은 평론가가 그것을 설명해야 한다. 설명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단지 보이는 하나의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시각 현상을 우리는 미술품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필자는 끝으로 관람자에게 “누가 동시대 미술품을 두려워하랴?” 하고 자신 있게 말하라고 권한다. 이해가 되지 않거나 맘에 들지 않으면 당당하게 “그건 미술이 아냐!” 하고 말해야 한다. 그러기에 앞서 작품 이면에 숨겨진 예술가의 ‘고도한 솜씨’와 ‘디자인’을 발견해야 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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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이야기 - 사랑의 총서 2
김광우 지음 / 지와사랑 / 1999년 4월
평점 :
절판


예수는 과연 누구일까?
 <예수 이야기> 중에서


이 물음은 이 책 전체를 통틀어 알아봐야 할 주제이지만 여기서 간략한 답을 먼저 찾아보자.
그는 산타클로스처럼 가공의 인물도 아니고 상징주의자들의 인격화된 신화적 인물도 아니다.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답은 사도 바울에게서 들을 수 있다.
바울은 그를 가리켜 여인에게서 나고 율법 아래 놓였던 사람이라고 했다.
예수는 모든 유대인들의 자식과 마찬가지로 태어난 지 여드레 후에 할례를 받았으며 아주 흔한 이름인 여호수아로 불리었다.

그의 청소년기는 베일에 싸여 있다.
그래서 유언비어 같은 가설들이 전해졌다.
그가 장사꾼들을 따라 영국까지 갔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인도로 가서 불교 교리와 요가를 몸소 익혔다는 주장도 있다.
그가 십자가에서 사망한 것이 아니라 요가법으로 살아남아 인도로 가서 여생을 보냈다는 주장도 있다.

예수는 누구일까?
복음서 저자들은 한결같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자연히 우리는 무엇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도록 했는가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누가복음서에 유일하게 어린 시절의 기록이 있는데 예수가 열두 살 때의 에피소드이다.

예수의 부모는 해마다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에 갔다.
예수가 열두 살이 되는 해에도 그들은 절기관습을 따라 유월절을 지키러 올라갔다(관례에 따르면 열두 살의 어린이는 율법과 예배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글쓴이).
그런데 그들이 절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데, 그의 부모는 이것을 모르고 일행 가운데 있으려니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다음에, 비로소 그들의 친척들과 친지들 가운데서 그를 찾다가 찾지 못했으므로, 그들은 그를 찾으려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
사흘 뒤에야 그들은 성전에서 예수를 찾았는데, 그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슬기와 대답에 경탄하였다.
그의 부모는 예수를 보고 놀랐다.
어머니가 예수에게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가 부모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부모는 예수가 자기들에게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누가복음서 2:41-50】

유월절이 되면 면적이 약 30만 평 되는 예루살렘 성내 전체가 북새통을 이룬다.
유대의 각 지역뿐 아니라 국외에 거주하는 유대인들도 유월절에는 순례자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망국의 한을 푼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의 모든 거리는 순례자들의 행렬로 파도를 이루며, 그들 틈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외국인들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예루살렘의 거리들은 아주 비좁아서 흔히 미아들이 속출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를 잃어버린 줄 알고 몹시 낙담했다가 사흘 후 성전에서 아들을 발견하자 매우 기뻤다.
그러나 열두 살 난 아들의 말은 아주 뜻밖이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누가는 예수를 감히 예루살렘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하는 조숙한 소년으로 묘사하여 경건함과 지혜가 이미 어린 소년에게 깃들어 있었으며, 그가 운명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정해져 있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열두 살 때의 에피소드를 끝으로 이후 약 20년에 걸친 예수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글을 쓴 누가마저도 이 시기에 대해서는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다만 그 무렵 유대에 정치적인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헤롯 대왕이 B.C. 4년에 사망한 후 그의 유언에 따라 세 아들이 유대를 분할하여 다스렸다.
아켈라오는 예루살렘에 터전을 마련하고 유대, 이두매아, 사마리아를 다스렸으며, 안디바는 갈릴리와 요르단 동편 베레아를, 빌립은 다마스커스와 레바논에 접경을 둔 게네사렛 호수(갈릴리 호수) 북부와 북동부를 다스렸다.
마태복음서에 나오는 베들레헴 주변의 사내아이를 죽인 헤롯은 B.C. 4년에 사망한 헤롯 대왕을 가리키며 그 이후에 나오는 헤롯은 아들 안디바를 가리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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