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 성령론을 가장 논리적이고 충분한 방법으로 설명한 사람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성령론을 가장 논리적이고 충분한 방법으로 설명한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는 성령의 존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낸다는 논리를 펴면서 하나님의 성령이라거나 그리스도의 성령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고 두 분 모두의 성령이라고 말해야 타당하다고 했다.
그리고 사랑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사랑이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지 사랑이 하나님이라고 불릴 만한 가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한 I서 4:8)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한1서 4:16)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의 “주여, 바라느니 당신뿐이요 Lord, thou art my patience(또는 hope)”(시편 71:5, 공동번역) 라는 구절을 예로 들어 ‘바라느니 patience, or hope’를 하나님의 실체가 아니라 그분으로부터 우리에게 온 것으로 해석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시편 62:5)
그는 ‘바라느니 당신뿐이요 Thou art my patience’는 ‘야훼를 너의 피난처라 하고 Thou, Lord, art my hope’(시편 91:9, 공동번역)라고 말할 수 있으며, ‘하나님은 나의 사랑이시다 My God is my compassion’(시편 59:17)라고 말하거나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다르게 표현하여 ‘주님은 나의 사랑이시다 the Lord is my charity’, ‘당신은 나의 사랑이시다 Thou art my charity’, ‘하나님은 나의 사랑이시다 God is my charity’라고 말할 수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God is charity’라고 말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예수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God is spirit”(요한복음 4:24)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이 같은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이해를 구하라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성경구절은 삼위일체를 시사한 것이었는데 사랑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령에게도 해당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또한 삼위일체가 세 분 하나님에 관한 기억에서 비롯하는 개념이 아님을 강조했는데 ‘기억’이란 말은 플라톤으로부터 구한 개념으로 지식의 원천을 의미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논리 하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과 성령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과 그리스도와 성령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기억, 또는 지식의 원천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성령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거나 기억하지 못하고 오로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사랑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성령을 기억하고 그리스도가 성령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삼위가 각기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논리를 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부와 성자, 성령에게는 불변하는 지혜가 있지만 그 지혜 자체는 실체가 아니며, 삼위가 각각 지혜로 불리지만 세 지혜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의 지혜라 불리어지며 또한 각각 사랑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이라고 불리는 점을 들며 삼위일체론의 타당성을 강조했다.
마찬가지 이유로 그는 성부가 하나님이고, 성자가 하나님이며, 성령도 하나님이지만 삼위는 하나의 하나님으로 불린다는 점을 들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그리스도라 말하고, 성령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부르고 있는 점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낳고 성령을 본래 나타나도록 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여기서 본래란 말을 사용한 것은 성령이 하나님으로부터 나타났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성령은 스스로 존재한 적은 없었으며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낳을 때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준 선물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 모두의 것임을 강조했으며 하나님과 성령은 지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로 부르는 것은 타당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지혜와 달리 사랑은 실체이기 때문에 실체와 사랑은 구별되지 않으며 삼위 모두에게 존재하긴 하지만 특별히 성령만이 실체로서의 사랑이라고 불리어진다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울이 이사야의 말을 율법으로 기술한 적이 있음을 예로 들어 구약성경이 율법서로 불렸음을 지적했다.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더듬거리는 말씨와)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고단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사야 28:11-12)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외국인의 입술을 빌어) 이 백성에게 말할 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고린도전서 14:21)
예수도 구약성경을 율법서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15:25)
무리하게 나의 원수된 자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 (시편 35:19)
율법이란 모세의 법을 지칭하는 말이다.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마태복음 11:1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생각하느냐 강령이니라 (골자이니라)
(마태복음 22:37-40)
성경에서는 율법을 선지자와 시편 저자들의 말과 구별한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누가복음 24: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