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주의자들의 이원론을 이해하는 것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영지주의자들의 이원론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데 이 개념에서 세계와 인간, 죄와 고통의 본래적 개념을 발견할 수 있으며 또한 구속의 필요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의 이원론은 조로아스타 종교의 영향 아래 형성된 시리아 사상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페르시아인의 이원론은 신화적이며 상반되는 원리 즉 빛과 어둠의 대립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빛과 어둠의 신화적 이원론이 영지주의자들에 의해서 정신과 물질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으로 발전되었는데 사악한 물질세계는 선한 하나님에 의해서 지배되는 정신세계와는 태초부터 대립된다.
그리고 이런 충돌에서 정신적 원리 중 일부가 물질세계에 갇혔기 때문에 세계와 인간이 시작되었으며 죄와 고통도 생겨났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자들의 주된 문제는 영혼이 어떻게 사악한 물질세계로부터 해방되어 선한 정신세계에 참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인간에게 아직 정신세계의 원리가 다소 남아 있기 때문에 해탈이 가능하다고 보았으며 해탈은 구속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예수를 그 구속자로 보았다.
예수의 가르침은 물질세계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어 모든 사물에 대한 통찰력을 주고, 사람으로 하여금 신비적 마법의 교의에 정통하게 하며, 세속의 영역을 초월해서 하나님에게 도달해 빛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도록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았으며 따라서 최후의 심판도 믿지 않았다.
그들에게 구원이란 해탈해서 영혼이 본래 있던 곳 즉 빛의 나라로 올라가서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모든 신비적 의식을 다시 행하여, 결국 충만한 신적 존재 속으로 흡수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개인의 인격적 불멸에 대한 소망은 없었다.


니브(J.L. Neve)와 헤이크(O.W. Heick)는 공저 『그리스도교 교리사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Vol. I History of Christian Doctrine』(1946)에서 초대교회에 미친 영지주의의 영향을 열거했다.


1. 영지주의가 스스로 보편적인 종교임을 자처한 것은 교회로 하여금 보편성(Catholicity)을 주장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2. 영지주의는 구약성경과 사도들의 저작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구약성경의 영감과 신약성경의 내용을 영구적으로 확정하는 일이 교회의 긴급한 과제가 되었다.

3. 그리스도교를 근본적으로 하나의 교리적 체계로 볼 수 있다고 하는 영지주의의 논란에 대해 교회는 이 같은 교리가 실제로 어떠한 것인가를 진술함으로써 답변했다.

4. 교회의 교리를 통일하기 위해서는 ‘신앙의 표준 regula fidei’이 요구되었다.
지역에 따라서 상당히 다양한 것이긴 하지만 이런 ‘신앙의 표준’으로부터 고대의 그리스도교적 신조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5. 영지주의가 방관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자 교회는 유능한 수호자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감독이 선두에 나서서 이단 전체를 대항해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감독의 우위성이 확보되었으며 감독직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자극이 주어졌다.

6.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영지주의는 신비주의를 어느 정도 교회에 제공하는 데 성공했다.

7. 마지막으로 영지주의자들의 금욕주의 사상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교회의 수도원 제도를 위해 길을 예비해주었다.


니브와 달리 하르낙은 저서 『교의사』에서 영지주의에 대해 지나치게 과대평가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영지주의자들은 실로 첫 세기의 신학자들이었으며 그들은 그리스도교와 그리스 문화의 신속한 상호융합을 꾀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고 했다.
영지주의에 대한 니브와 하르낙의 견해 차이는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스 문화가 두드러진 시대에 지지받는 종교로 위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리스도교는 그리스 문화와 신속한 융합을 꾀하지 않을 수 없었을 줄 안다.
그리고 이런 일에 앞장을 선 사람들이 영지주의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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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시온은 그리스도가 구주의 역할을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마르시온은 그리스도가 구주의 역할을 하기 위해 사람의 모습으로 출현한 것이며 처형될 때 그리스도는 예수와 더불어서 사망하지 않았다고 했다.
불멸하는 그리스도가 사망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므로 그리스도가 예수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그리스도의 형체가 예수의 모습으로 보여졌을 뿐 그리스도가 인간의 육체로 변질된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하나님의 대리자인 그리스도가 사악한 물질인 육체로 변질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며 그리스도가 수난당한 후 사망하는 것은 창조주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므로 창조주에게 회귀하기 전 그리스도는 사망한 적이 없다고 했다.
이런 신학은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마르시온은 요한복음서를 정경에서 제외시켰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사망과 부활을 부정했으므로 교회는 그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단(heresy)이란 말은 50년대부터 사용된 말인데 바울의 신학을 유대인이 이단이라고 했다.
85년경 유대교 회당 예배 때 유대인은 나사렛 사람들과 이단자들을 처치해야 한다고 했으며 그 후 이단은 상대방 신학을 배척하고 비난하는 말로 종종 사용되었다.


마르시온은 그리스도와 성령이 그노시스를 제공한다고 했는데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을 곡해한 것 같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로마서 8:13-17)


하르낙은 초대교회시대에 바울을 이해한 유일한 사람으로 마르시온을 꼽을 수 있지만 바울의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마르시온은 바울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지만 구약이 신약을 위한 준비의 말씀이었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율법이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는 가르침도 깨닫지 못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구원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라디아서 4:4-5)


교부들이 마르시온을 영지주의자라고 비난했지만 그에게서는 반영지주의 요소도 발견된다.
영지주의자들은 죄악과 죽음의 권세로부터 영혼을 구해 주는 그노시스는 누구나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소수 현인들에게만 가능하다는 지성주의를 표방했는데 마르시온은 지성주의의 만능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의 구원론은 지성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용서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노시스를 구하려 하기보다는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순수한 사랑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믿음을 가지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라고 했다.
하나님의 순수한 사랑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믿음을 바울의 가르침에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마르시온은 사도들 가운데 바울이 유일하게 율법과 복음 사이에 화해가 가능하지 않음을 지적했다고 했는데 이는 바울의 가르침을 곡해한 것이다.
바울에 대한 그의 신뢰는 대단했는데 열두 사도를 바울의 가르침에 상반되는 사람들로 규정했으며 열두 사도는 유대교로부터 계속 영향을 받아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한 채 거짓되고 허황된 전승을 후세에 남겼다고 비판했다.
바울의 서신을 보면 그를 제외한 나머지 사도들이 여전히 율법주의에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며 사도에 대한 불신을 나타냈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을 회복시킨 유일한 사람으로 바울을 꼽으며 바울이 유일하게 예수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했으며 그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은 누가도 복음서의 권위를 구약성경을 인용해 나타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구약성경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이스라엘 역사에 관심이 없었고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를 관련시키려는 어떤 신학도 용인하지 않았다.
그는 바울의 목회서신과 히브리서를(당시 바울이 저자라고 믿었다) 제외한 10편의 서신과 일부 삭제된 누가의 복음서만을 정경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예수가 구약성경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구절과 예수와 관련된 구약성경의 인용구절들을 삭제했다.


정경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부족할 때였으므로 마르시온이 선택한 정경은 교회사에 신약성경의 첫 정경이란 의미를 남긴다.
당시 교부들은 복음서와 바울의 서신을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권위 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였는데 마르시온이 그 신학적 내용을 정경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404년 라틴어로 출판된 가톨릭의 공식정경 불가타(Vulgate)에는 바울 서신에 관한 마르시온의 견해가 적혀 있어 그의 영향이 컸음을 알게 한다.


결론으로 말하면 마르시온은 영지주의자로 정죄 받았지만 영지주의자가 아니다.
구원이 그노시스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한 것만 보아도 영지주의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영지주의자들의 지성주의와 원죄에 관한 이론도 용인하지 않았으며 그들과 달리 교회 안에 사변적인 교리를 가진 신비주의 단체를 형성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선의 하나님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리스도는 단지 명칭에 있어서만 하나님과 구별이 된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는 구약의 하나님이 율법에 패한 그리스도를 보복하기 위해 그를 유대인의 손에 맡겨 십자가에 처형되도록 했다는 논리를 폈으며 또한 선의 하나님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만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바울의 서신은 진리의 첩경으로 바울의 가르침이 믿음과 사랑에 불을 지피고 교인으로 하여금 금욕주의를 통해 경건한 삶에 이르게 한다고 보았다.
그는 교회와 마찰했지만 교회는 이 분쟁을 통해 배운 바가 있었다.
창조주와 구속자는 동일한 분이라는 점과 하나님은 공의와 자비가 융합된 분이라는 점이다.


교회로부터 축출된 마르시온은 가톨릭 교회와 대립되는 교회를 세움으로써 율법주의에 집착한 교회를 부정하고 교회가 복음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점을 시위했다.
마르시온은 160년에 사망했지만 추종자들은 로마 전역에 확산되었다.
추종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300년경 마니교(Manicheanism)로 개종했는데 마니교는 페르시아의 예언자 마니(Mani, 210-75)를 교주로 한 신흥종교였다.
마니교는 3, 4세기에 지식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아우구스티누스도 개종하기 전 약 8년 동안 마니교에 심취했다.
선과 악의 신이 공존하는 마니교는 금욕주의 생활로 최후에 승리할 선의 신의 편에 서라고 했는데 이는 영지주의자들의 신학과 일치했다.
그러나 마르시온이 구약성경의 창조주를 악의 신이라고 비난했더라도 제2의 신을 허락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마니교의 이원론적 신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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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주의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묵시주의는 기원전 수세기부터 이스라엘 사람에게 알려진 사상인데 요한이 묵시주의를 받아들였다.
묵시주의자들은 성령을 통해 신비스러운 진리를 얻을 수 있으며 진리가 영혼을 구원한다고 믿었다.
요한은 예수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가 보낼 협조자, 보혜사, 또는 진리의 영을 고대하라고 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한복음 14:15-17)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 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요한복음 16: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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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타누스
Montanus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성령에 대한 관심은 2세기에도 여전했는데 환상과 꿈을 통해서 성령과 교섭할 수 있다는 묵시주의(apocalypticism)의 영향이었다.
요한의 묵시주의에 전적으로 동조한 사람은 몬타누스였다.
소아시아 프리기아(Phrygia)에서 태어난 그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 전 이교 시벨레(Cybele) 종교의 장로였다.
개종한 후 그는 156년경부터 활약하기 시작했다.


마르시온과 마찬가지로 몬타누스에게도 교회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 모두 교회로부터 일탈한 타락자라는 비난을 받았는데 마르시온의 신학은 이교와 그리스도교에 반반씩 근거한 이설로 규정받았고 몬타누스의 신학은 그리스도교에 근거한 이설로 규정받았다.


유세비우스가 전한 바에 의하면 몬타누스는 172년에 성령을 체험하고 자신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사이의 중재자(paraclete)라는 자각이 생겼다고 한다.
유세비우스는 그에 대한 익명의 신랄한 비판을 인용하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몬타누스를 비난했다.


근래 몬타누스라고 하는 개종자는 정신적으로 흥분해서 갑작스럽게 일종의 졸도와 같은 황홀경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헛소리를 하며 웅얼거렸는데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그는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은밀히 부추기고 자극했으며 이런 방법으로 두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
그는 두 여자를 헛된 정신으로 채워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과 마찬가지로 미친 듯이 시도 때도 없이 아무렇게나 웅얼대도록 만들었다.


교회는 성령의 역사를 인정했으며 오순절에 500명 그리스도인에게 내린 성령의 역사가 전래되었다.
몬타누스는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계시의 시한이 다 되었으며 계시의 단절과 더불어 세상에 종말이 닥칠 것이라고 예언했다.
구약과 신약성경 그리고 이에 발전된 교리를 통해 계시가 나타났다고 주장한 것을 보아 몬타누스는 정통주의자이지만 다음과 같은 말에서는 성령의 계시를 윤리적으로 해석했음을 알 수 있다.


보혜사 성령은 윤리적인 면에서 우리의 결함을 온전하게 만든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육체의 연약함을 알고 우리에게 명하지 않은 바를 성령이 제정한다.
새 예언은 계율을 강화함으로써 새 율법을 온전하게 할 것이다.


몬타누스는 초대교회 교인들이 성령을 체험한 후 광적이고 비정상적인 행동을 취한 것에서 자신의 성령운동의 타당성을 확보하려고 했다.
그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발적인 예배형식을 만들었으며, 엄격한 금욕주의 생활을 교인들에게 요구했고, 요한계시록을 내세워 종말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성령이 여자에게도 신비스러운 지혜를 알게 해 준다고 말함으로써 성령이 남녀를 차별하지 않음을 강조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몬타누스를 교회의 적으로 간주했다.
보수정통주의를 대표할 만한 테르툴리아누스는 여자가 교회에서 가르치고, 신학적인 논쟁을 벌이며, 귀신을 내쫓고, 병자를 치료한다는 것에 분개했다.
그는 여자가 목회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몬타누스를 이단으로 규정한 테르툴리아누스는 말년에 몬타누스주의자가 되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말했다.

“우리 중에 자매 한 사람이 있는데 그녀는 예언하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주일예배를 볼 때 성령의 환희적 영상을 통해 이런 은사를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보수정통주의자가 몬타누스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그의 신학이 진지했으며 호감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성령에 대한 몬타누스의 신뢰는 대단했는데 성령으로부터 받는 계시가 예수와 바울을 포함한 어느 누구의 가르침보다도 우월하다고까지 말했다.
교부들은 그의 가르침에 우려를 나타냈으며 그의 교설에 귀를 기울이지 말 것을 교인들에게 당부했다.
교부들은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만이 권위를 지닐 수 있을 뿐 어느 누구의 가르침도 이보다 우월할 수 없다고 했다.
성령이 이미 말했으므로 스스로 성령의 계시를 들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윤리와 계율 면에서 보면 몬타누스주의는 신약성경보다 훨씬 엄격했다.
이런 윤리적 체계는 훗날 몬타누스주의를 용납한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해서 더욱 확고하게 수립되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재혼을 금하고 철저한 금식과 순교의 결단과 세상으로부터 성별되는 행위를 요구했다.


몬타누스는 새 예루살렘이 브리기아 사람들의 동네인 페푸자(Pepuza)에 세워질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새 예루살렘이란 요한이 말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을 뜻한다.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요한계시록 21:2)


몬타누스는 자기에게 보혜사 성령이 나타났으며 자기는 성령의 도구가 되어 예언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성령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언했다.
그에게 두 명의 여제자 프리스킬라(Priscilla)와 맥시밀라(Maximilla)가 있었는데 몬타누스와 마찬가지로 성령을 체험한 후 예언했다.
두 제자는 몬타누스의 용인 하에 남편과 헤어졌다.
둘 중 한 사람은 “나 이후에 예언하는 자가 더 이상 없을 것이며 말세가 임할 것이다”라고 했다.
몬타누스와 제자들은 성령의 강림을 강조했으며 종말이 임박했음을 선언하고 하늘로부터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브리기아에 임할 것이기 때문에 브리기아로 모여 철저한 금욕주의 생활을 통해 거룩한 성의 시민이 될 수 있는 준비를 하라고 했다.
몬타누스는 성도들에게 육식하지 말 것, 단식할 것, 섹스하지 말고 독신으로 살 것을 요구했다.


결론으로 말하면 몬타누스주의는 2세기 말 급격히 감소하는 초대교회의 종말론 신앙을 보존하려는 반동적 시도였는데 성령론과 금욕주의 윤리 그리고 종말론의 종합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교회사에 앞으로 지속적으로 일어날 개혁운동을 위한 길을 닦았다는 의미를 남긴다.
몬타누스주의는 교회 내에서 일어난 반동적 개혁운동이었으며 교회가 세속화되는 것에 대한 최초의 개혁이기도 했다.


또한 몬타누스는 사도들이 세운 교회를 이상적인 교회로 인식하고 세속화되어 가는 교회를 초대교회의 상태로 환원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엄격하고 철저한 윤리적인 생활을 요구했으며 성결한 그리스도인만으로 교회를 구성하려고 했기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종교개혁시대 광신자들과 오늘날의 지나치게 성결운동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비록 자신들이 자각하지 못해도 몬타누스주의자라고 말할 만하다.


감독들이 몬타누스주의를 제거한 것은 정경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일이기도 했으며,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기도 했다.
또한 교회가 교인들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어야 하는 단체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몬타누스를 따르는 교인의 수가 불어나자 소아시아 감독들은 160년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종교회의를 열고 몬타누스주의를 성토했으며 200년 이전에 몬타누스주의를 이단으로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소아시아 감독들이 모인 회의는 첫 종교회의라는 의미를 가진다.


몬타누스주의의 마지막 지도자 맥시밀라가 179년에 사망한 후에도 몬타누스주의자들의 수는 늘었고 170년경 로마에서도 성행하면서 교회와 잦은 마찰을 빚었다.
몬타누스주의는 점차 쇠퇴해 갔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생존할 당시까지 존속했으며 동방에서는 더욱 오래 존속했다.
그들의 엄격한 금욕주의는 훗날 수도원제도에 이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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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가톨릭 신학자들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교부와 변증가들의 시대가 지나고 초기 가톨릭시대가 도래한시기를 170년부터 325년까지로 본다.
이 시기에는 그리스도 신학이 뿌리를 내렸으며 특히 네 학파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알렉산드리아 학파
Alexandrian school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도 신학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독특한 신학을 발전시켰는데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와 변증가들의 사상을 받아들였고 그리스 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이교적 영지주의자들에 대적하면서 성경적 영지주의를 확립했는데 그 결과 비복음주의에 근거한 사변적 경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학파를 대표할 만한 사람은 클레멘트(216년 사망)와 오리게네스(254년 사망)이다.


안디옥 학파
Antiochene school

오늘날 터키에 속한 안디옥과 캅파도키아 주변 지역은 지중해 북동지역인데 이른 시기부터 그리스도교가 강력한 위치를 차지한 곳이다.
안디옥은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목회한 곳이며 바울은 캅파도키아 주변지역에서 선교활동을 벌였다.
안디옥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듯이 초대교회의 여러 시점마다 의미 있는 역할을 담당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마찬가지로 안디옥 학파도 그리스도론과 성경해석에 있어서 독특한 접근법을 가졌지만 그리스 철학에 대한 관심은 덜했다.
캅파도키아 교부들도 4세기에 신학적으로 활약했는데 그들의 삼위일체론은 유명하다.
안디옥 학파는 그리스도의 신성문제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대립했다.


소아시아 학파
Asia Minor school

이레네우스(200년경 사망)와 제자 히폴리투스가 주로 활약한 소아시아 학파는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생겨난 학파로 성경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확고한 신앙, 대내적인 회유책, 이단에 대한 열정적 논쟁을 특징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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