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회화 

타타르키비츠의 <미학사>(미술문화) 중에서



이와같이 전통적인 객관적인 미가 주관적인 것으로 전의되고, 숭고 등 다른 미적 가치의 대두로 상대화하면서 미의 대이론은 서서히 퇴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한 퇴조를 몰고온 18세기의 취미론조차도 취미의 기준으로서 객관적 미의 공식을 찾으려는 기도가 여전히 주된 관심사였다. P. 나이트나 D. 스튜어트 등이 미의 개념을 분석하여 이러한 작업이 무익하며, 동시에 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판명할 때까지 '미'는 서구 미학사를 통해 가장 중요한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20세기 현대에 이르러 '미'는 미학적 논의에서 사라졌거나, 기껏해야 동일 문맥의 미적 경험에 대한 논의 속의 한 요소로 해소되어버렸고, 대신 예술이 주된 관심사로 대두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미적 경험은 예술을 통해서만 획득되는 것이 아니며 자연을 통해서나 인간에게서도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경향이 짙어졌다. 이것은 개념적으로 미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 간에 근본적인 구별이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 구별은 단순히 두 개념의 외연이 아니라 내포의 차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본래 '미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세계에 대해 어떻게 지각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취하는 어떤 태도의 특성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고, '예술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무엇을 창조(그것이 제작이든 표현이든)한다 할 때 그 창조활동의 특성을 지적하기 위한 말이다. 따라서 '미적 경험'이라든가 '예술적 창조'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도 경험의 일환이라 생각하여 창조적 경험이라는 말을 할 수도 있지만 그 경우 원칙적으로는 창조를 위한 전 단계의 예술가의 경험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서구 미학사상의 초기단계에서 미론과 예술론의 문맥이 각기 달리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에 연유한다. 즉 미적 경험은 미론의 문맥이고, 예술은 창조론(영감론이든 제작의 일환으로서 모방론이든)의 문맥에 속한다. 두 이론이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많은 이론을 낳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근대 이후 서구 미학이론의 특징이지 애초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는 예술이 주된 관심사이지만 고대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는 미가 주된 관심사였다. 그러므로 미를 논할 때 예술이라 할 것이 거론되는 경우가 있다 해도 그것은 지극히 지엽적이거나, 그나마도 부정적인 입장에서였다. 그렇다면 고대를 통해서 예술이라 할 것들은 어떻게 이해되었을까? 예술이란 말과 그 근대적 체계가 없었음은 이미 언급한 바이다. 그렇다면 서구 근대인들이 예술이라 부른 활동을 고대인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애초에는 없었던 말과 체제가 성립되었다면 그것이 성립되는 과정을 알아보는 것은 서구 미학사상의 발전의 중요한 문맥을 파악하는 일이 된다.

영감으로서의 시·음악·춤


발생 초기에 시·음악·춤은 상호 미분화된 활동이었다. 이처럼 말(시)과 리듬(음악)과 동작(춤)이 미분화된 채 통합된 인간활동의 특수한 형태를 고대 그리스인들은 '코레이아'(choreia)라 불렀다. 이 말은 현재 합창을 뜻하는 'chorus'에서 파생된 것으로 당시에는 군무를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코레이아란 특히 춤과 깊이 관련된 말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것은 고대 원시종교 형태인 제의의 일환인 축제와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인간활동의 형태이다. 제의가 신의 메시지를 기구하는 행사라면 축제는 그러한 기구를 촉진하기 위해 수반되는 행사이다. 이처럼 제의와 축제가 서로 분리되지 않은 채 진행된 것이 초기에는 인간 삶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따라서 제의는 오늘날의 입장에서 볼 때 종교적 측면과 예술적 측면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H. 쿤은 "축제는 예술의 모태"라고 말한 바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종교행사에서 사제가 신의 메시지를 기구하기 위해 신과 교감하는 신적인 상태가 되는 것을 엔토우시아스모스(enthousiasmos)라 했다. 이 말이 오늘날 영어 'enthusiasm'의 어원이 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신적인 상태란 열광적인 상태, 즉 제정신이 아닌 상태를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대 미학사상에서 이같은 사실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까닭은 종교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이 말이 예술현상이라 할 코레이아를 설명하는 데에도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코레이아가 동일한 종교행사의 일환으로서 참여되고 있다는 사실에서뿐 아니라 사제로부터 신의 메시지를 전달받기 위해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 역시 사제와 같이 신에 열광된 상태에 빠져야 하며, 코레이아는 그러한 상태를 촉진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암시해준다.


이러한 엔토우시아스모스가 춤과 음악, 미분화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시의 발생에 적용될 때 '시적 정열'이 되기도 했고 라틴어 'inspirare'로 번역되면서 영어의 '시적 영감'이라는 말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시적 영감은 어떠한 의미로 고대 미학사상에 수용되었을까? 플라톤에 의하면 시인이 된다는 것은 시인 외부의 어떤 신적인 존재, 즉 뮤즈 여신에 게 사로잡힌 상태임을 뜻한다. 이것은 시인이 뮤즈에 홀렸음을 뜻하는 것이며 정신이 나간 일종의 광기(mania)의 상태임을 뜻한다. 시인에 대한 플라톤의 이같은 설명은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에게서도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그 이전부터 내려온 오래된 사고로서 플라톤 역시 이성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비밀스러운 요소가 개입되고 있음을 인식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원 때문에 시에 대한 플라톤의 평가는 긍정적이거나 호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플라톤은 시에 지식의 자격을 부여할 수 없다는 인식론적 입장과 아울러 순전히 이성에 의해 인도되어야 할 젊은이에게 격정을 불러일으켜 그들의 영혼을 타락시킨다는 윤리적 입장에서 시인추방론을 역설하게 되었다.


이처럼 시인과 시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플라톤의 태도를 두고 그가 시적 창조와 경험을 너무 천박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가 시의 창조를 영감에 결부시키고자 했던 것은 시의 창조가 이성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어떤 특별한 힘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시가 지니는 불가항력적인 힘, 곧 시의 매력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플라톤이 시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피력하게 된 것은 시의 발생과 그 경험이 그러한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찬미될 수는 없다는 시대적·사회적 요구 때문이었다. 반대로 이러한 요구 때문에 플라톤이 비난하게 된 바로 그러한 시를 찬미하게 된 낭만주의 철학자들의 평가태도는 플라톤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 점에서 플라톤의 시적 영감론은 오랜 세월을 거친 후 19세기 낭만주의에 이르러 상상과 무의식의 입장에서 다시 그 현대적 형태로 부활하고 있다.

모방으로서의 회화·조각


시가 영감의 개념에 관련되어 이해되었던 데 반해 회화와 조각은 고대 그리스적인 의미의 '테크네'(techne)라는 개념에 관련되어 이해되었다. 테크네란 동물과는 다른 인간의 한 특징을 이루는 기억에 의해 인간이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것을 만들면서 경험을 쌓고, 그렇게 경험을 쌓는 중에 그것이 지성에 의해 조명됨으로써 그로부터 유도되는 일단의 규칙체계에 기초한 기술(craft)을 뜻하는 말이다. 이러한 의미의 테크네가 라틴어 'ars'에서 영어 'art'가 되었지만 본래의 테크네는 오늘날 예술이라고 불리는 회화·조각·건축과 같은 활동뿐 아니라 제약·농업과 같은 과학, 목공·제화·요리와 같은 단순한 기능(technique)에 적용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제작(making)은 실천(doing)과 함께 테크네의 일환이 되고 있다.


플라톤은 이러한 테크네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분류했는데, 미학적 논의에 관련되는 것으로서는 〈소피스트〉편에 나오는 것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제작기술은 실물을 제작하는 기술과 실물의 이미지를 제작하는 기술, 달리 말해 실물을 모방하는 기술로 분류되어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 당연히 예술이라는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건축은 전자에 속하며, 회화나 조각은 후자인 모방에 속하고 있다. 플라톤은 이러한 모방기술을 다시 분류하여 실물을 실물 그대로 닮은 이미지(eikon)의 제작과 실물을 변형함으로써 실물처럼 보이도록 하는 이미지(phantasma)의 제작으로 나누고 있다. 플라톤이 회화를 모방이라고 했을 때는 우리의 눈을 기만하는 이미지의 제작이라는 후자의 의미에서였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모방이라는 말은 어느 점에서는 회화나 조각만이 아니라 시에도 적용되고 있다. 시인의 시는 시인의 창조가 아니라 신의 말씀을 대변하는 것일 뿐이다.


이처럼 시인은 신의 통로 역할을 하지만 마치 자기가 아킬레스인 양 시 속의 인물을 흉내내고 있다. 또 시인이 아킬레스를 흉내내고 있지 않다 해도 그의 시는 아킬레스에 관한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시 속의 인물을 흉내내고 있다는 행위에서, 또 시는 시 속의 인물에 관한 것이라는 내용에서 시 역시 모방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시인의 모방을 회화나 조각과 같은 모방기술의 하나로 보지는 않는다. 시의 발생은 어디까지나 영감의 소산이고, 회화와 조각은 테크네의 일환으로서 모방기술의 소산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점에서 신적 영감으로서의 시와 인간적 제작으로서의 회화, 즉 시적 창조와 기술적 창조라는 서구 미학의 이원적 창조관이 출발하게 된다. 그렇다면 모방으로서의 회화·조각에 대한 플라톤의 평가는 어떠했을까? 플라톤은 회화를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을 위해 사람이 만든 꿈"이라고 규정한다. 이 규정은 이념계와 현상계를 엄격히 구분하고 있는 그의 이원론적 형이상학의 입장에서 내린 회화에 대한 비난을 함축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회화가 진정한 실재인 이념으로부터 두 단계나 떨어진 이중의 모방이고, 실재와 아무 관계가 없는 한낱 꿈 같은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도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방적이라고 규정한 시를 포함하여 모방기술로서 회화에 대해 플라톤이 〈국가〉 10권에서 행한 공격의 기본입장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플라톤은 영감된 시에 대해서는 인식론적 자격을, 모방된 회화·조각에 대해서는 존재론적 자격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전자인 시가 비합리적 과정의 소산이라면, 후자에 대해서는 그 제작과정이 합리적임을 주장하고 있는 점에서 그의 모방론은 그후 르네상스 및 그로부터 발전된 신고전주의 예술관으로 이어진다.



예술, 체제와 개념


플라톤의 설명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고대 그리스 시대에 시 부류의 표현적 예술과 회화 부류의 조형적 예술은 그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달리하고 있다. 따라서 2가지 부류의 활동을 하나로 묶는 개념이 없었다. 모방이 거론되는 경우에도 앞서 언급한 사실 때문에 모방은 양자를 실질적으로 종합하는 통일적인 개념으로 강조되기 힘들며, 동시에 거기에는 건축이 빠져 있다. 설령 건축이 포함되고 음악과 춤이 분리되는 과정을 고려할 때라도 모방은 근대 이후 서구인들이 예술이라고 부르고 있는 2가지 부류의 활동에만 국한된 개념은 아니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테크네의 일환으로서 특수한 부류로 모방기술을 논하고 있는 경우에는 예술 이외에도 궤변, 거울이나 마술의 사용, 나아가 동물 목소리 흉내내기와 같은 도저히 '아름답다'(fine)고 할 수 없는 그밖의 활동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면 모방 이외에 오늘날 예술이라고 하는 활동을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다른 개념은 없을까? 이 점에서 간혹 유용한 기술과 오락술의 구분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여기서 후자는 예술을 수용하는 점에서는 모방기술만도 못하다. 그러므로 시 부류의 활동과 회화 부류의 활동이 동류로 여겨져 근대적인 예술체계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여러 형태의 단계적 논의가 있어야 한다.


먼저 뮤즈에 의한 비합리적 창조로 이해되던 시가 규칙에 입각한 인간의 제작으로 전의되든가, 아니면 그 역이든가 하는 계기가 마련되어야 한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를 보편적 인간행위의 모방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시가 전자의 의미로 전의될 수 있는 이론적 기초를 마련했다. 그의 〈시학〉은 이러한 입장에서 시, 특히 비극적인 시가 제작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시가 준수해야 할 규칙을 논한 시의 입법서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한 시를 보편적인 인간행위의 모방으로 규정함으로써 시가 역사보다 더욱 철학적이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거부했던 인식적인 자격을 시에 부여하고 있고, 플라톤의 비난으로부터 시를 되살려놓고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에 대해 행했던 방식으로 플라톤의 비난으로부터 회화를 되살려놓고 있지는 않다. 즉 〈시학〉에 해당되는 화론을 남겨놓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앞으로 전개될 회화의 운명에 치명적이었다. 피타고라스주의자들에 의해 이론적 계기가 부여되기 시작한 음악과 함께 시는 정신적 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긍정적으로 이해되는 데 반해, 회화는 여전히 일체의 존재론적 의미를 찾아볼 수 없는 사이비 기술(kolakeia)로서 순전한 수공의 의미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즉 신체를 경멸하는 철학적 입장과 신체노동을 하지 않는 귀족정치의 체제 때문에 화가의 사회적 지위는 시인과 같은 것이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시를 인간행위의 모방이라고 규정했다고 해서 시와 음악이 곧 회화와 조각과 동류의 활동으로 간주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플라톤의 비난으로부터 회화나 조각이 구제되어야 했다. 우선 플라톤의 이원론적 형이상학이 일원론적인 것으로 변모해야 했는데 이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실체 개념이 회화를 구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는 있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철학의 입장에서 회화를 논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새로운 철학적 입장에서 회화에 대한 논의는 그리스 문화를 계승하려는 과정에서 수행된 키케로나 세네카의 조각에 대한 논의가 있은 뒤에야 대두했다. 위의 2가지 계기,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회화나 조각에 대한 재평가를 일자의 개념을 기초로 새로운 일원론적 형이상학 속에 종합해놓은 사람이 바로 플로티노스이다. 그는 정신적이고 가치적인 이념과 감각적인 미 사이의 연속성을 말하는 중에 예술만을 열거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근대인들이 예술이라고 하는 활동들을 열거하고 있다. 이것은 여러 예술을 처음으로 일정한 원리하에 체계적으로 종합하고 있으며, 이념과 예술 간에 긴밀한 등식이 성립될 수 있는 첫 계기를 마련해놓고 있다는 점에서 미학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헬레니즘 시대를 통한 이러한 접근은 불안정한 것이었으며, 회화나 조각에 대해서는 이내 고대적 사고로 회귀했다. 그러한 회귀는 곧 찾아오는 그리스도교의 교회철학과 결부되어 일어났다. 복음서의 정신과 금욕주의로 인해 예술은 고대 그리스 이래 오랫동안 점진적으로 획득해온 중요성을 잃게 되었다. 즉 그리스도교 정신은 감각을 매개로 하는 감각적인 미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미는 신과 그 창조물인 자연 속에서만 볼 수 있고 인간의 불완전한 작품 속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세에도 많은 미학적 저술을 통해 미학적 사상을 제기했다고 해도 그것은 미 그 자체에 관한 논의일 뿐 예술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는 중에 회화나 조각에 관한 고대의 모방 개념 역시 사라지게 되었다. 신성으로서의 미를 모방하는 일은 우상을 조장하는 일이 되며, 따라서 미에 관해서만은 아니지만 설령 정신성을 드러내기 위해 가시적·감각적인 예술이 요구될 때라면 모방 대신 상징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예술이라는 것은 고대의 전통을 이어 발전시킨 7가지 리버럴 아츠(liberal arts)와 7가지 머캐니컬 아츠(mechanical arts)의 체제 속에서나 겨우 그 언급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것도 전자에는 음악, 후자에는 건축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시는 문법이나 수사에 관련되어 언급되고 있으나 회화와 조각은 머캐니컬 아트에도 포함될 수 없을 만큼 그 중요성이 낮게 평가되고 있다. 이 경우의 중요성은 유용성을 말하는 것으로, 회화나 조각은 지극히 미미한 것으로 생각되어 캄포룽고의 라둘프나 생 빅토르 위고도 회화나 조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조각가와 화가는 고대처럼 물질적 재료를 가지고 신체노동을 하는 직조인이나 석수와 동일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술이라는 근대적 체제가 성립되기 위한 다음 단계의 논의는 회화나 조각이 시나 음악처럼 리버럴 아트의 자격을 획득하자는 데서 비롯되었다. 사실 1,000년의 한을 실현한 것은 르네상스 시기를 통해서였다.


르네상스 시기는 신의 은총으로서의 이성이 아니라 인간이 지닌 자연적인 힘으로서 이성의 능력을 자각하고 발견해가는 시대이기도 했다. 따라서 인간은 신의 말씀인 성서에 입각해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이성으로 세계를 파악하게 되었다. 근대의 과학적 발견과 발명을 위한 철학적 기초가 서서히 확립되는 중에 화가에게도 자기 앞에 펼쳐진 비옥한 자연과 그 풍경이 소재가 되었다. 그래서 까맣게 잊혀졌던 고대의 모방 개념이 다시 대두하기 시작했으며, 바로 이같은 문맥에서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고대의 모방론을 다시 부활시키고 있다. 우선 과학에서 정확한 관찰이 요구되듯 회화에서도 정확한 모방이 문제되었다. 이를 위해 르네상스인들은 고대의 문헌을 통해 모방에 관한 여러 가지 규칙들을 발견하고 연구했으며, 따라서 원근법·해부학·심리학·인상학 등의 규칙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바탕에서 추후 미술론(theory of art)으로 발전된 새로운 교과의 싹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회화는 미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논의가 발전되었다. 과학자가 자연을 관찰한 후 이성적으로 통찰할 때 그 배후로부터 보편적인 법칙, 곧 진리를 발견해내듯 화가도 이성을 가지고 자연을 통찰할 때 자연의 보편적인 모습인 미를 모방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러한 보편적인 자연을 곧 플라톤이 이념이라고 말한 것이라고 해석함으로써 초월적 의미로서의 전통적인 이념의 개념을 심리적인 것으로 바꿔놓고 있다. 이같은 과정을 통해 진과 미는 동일한 자연의 서로 다른 양상이고 과학자와 화가는 동일한 지적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확립되었다. 그리고 화가에 의해 모방되는 보편적 자연인 이념은 그에게도 이성적으로 파악되는 것이기에 이념은 일단 화가에 의해 구성되어 화가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어야만 한다고 믿었다. 이처럼 머리에 떠오른 생각을 르네상스 화가들은 디자인(disegno)이라고 불렀으며, 그러한 디자인을 갖고 모방작업을 한다는 점에서 회화나 조각은 물론 건축까지도 동일한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미술(Arti del disegno)의 체제가 처음 만들어지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범주적으로 달리 분류되었던 건축이 회화와 조각과 함께 미를 구현하는 동류의 활동으로 여겨졌다.


이제 미술은 이론적으로는 과학과 같은 지적 활동의 자격을 획득하게 되었으므로 그러한 이론적 기초 위에서 미술가의 사회적 지위를 승격시켜야 하는 문제가 남게 되었다. 미술가를 길드의 구성원으로부터 분리시켜 시인처럼 아카데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요구가 일어났고, 이에 따라 1563년 피렌체에 미술학원(Accademia del Disegno)이 세워졌다. 이론적으로 회화는 과학과 같은 정신활동이며 사회적인 입장에서 화가는 더이상 직인이 아니므로, 최종적으로 남은 문제는 미술도 시처럼 리버럴 아트의 일환임을 당당히 주장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실제적 목적을 위해 취해진 이론적 기도가 호라티우스의 시구에서 따온 "시는 그림과 같이"(Ut pictura poesis)의 이설이다. 왜냐하면 미술도 리버럴 아트의 일원임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르네상스를 통해 리버럴 아트 가운데 3과(triuium:문법·수사·논리학)를 확대한 인문과학(studia humanitatis)에 논리학을 대체한 시와 회화가 평행이라는 사고를 발전시켜 양자가 동등한 활동이라는 이론을 세우면 되기 때문이다. 시와 회화의 평행론에 관한 뒤 프레소니의 〈미술론 Ars graphica〉은 이러한 논의의 귀결인 셈이며, 그결과 회화는 최소한 논리적으로는 시와 같은 활동으로서 리버럴 아트의 일원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시의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긍정적 논의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기를 통해 발전된 시적 모방의 개념에는 엄격한 규칙과 함께 플라톤에 의해 논의된 바 있는 영감의 요소가 개입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 점에서 음악과 시는 다같이 보편적인 미를 모방하는 동등한 활동으로 이해되고 있다. 과학으로서의 회화에 대한 사고에 있어서도 영감의 요소가 개입되고 있다. 그러므로 자연의 비밀을 드러내주는 점에 있어서 회화와 과학은 다를 바 없으나 양자의 그러한 차이 때문에 구별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를 다같이 이성의 활동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점이 르네상스인들의 이성개념의 특징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성은 과학적 진리뿐 아니라 미와 선 같은 가치까지 파악하는 폭넓은 의미로 이해되고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J. 베이트는 선과 같은 최고의 가치를 파악하는 것이 르네상스적 이성개념의 특징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윤리적 이성이라 규정하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수학적 이성의 개념을 정립하는 문제가 그후 데카르트 철학의 기본과제가 되었다. 이제 "시는 그림과 같이"의 이설을 통해 시와 음악과 함께 회화를 필수로 한 미술 역시 리버럴 아트의 체제 속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이 5가지 리버럴 아트는 미를 모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18세기를 통해 '예술'(beaux-art)이라는 어법이 만들어졌다.


이상이 미학의 한 문제로서 예술이라는 말과 체제와 개념이 만들어진 역사적 과정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사실은 예술이라는 말과 체제는 근대적 사고의 소산이며 그 개념은 비록 심리적인 것으로 바뀌었지만 형이상학적인 이념·자연·미라는 점에서 여전히 고전적인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전적 개념에 기초한 미의 모방을 데카르트 철학의 엄격한 이성의 개념으로 옹호하고자 한 것이 바로 신고전주의 예술관이다. 그러나 신고전주의 예술관은 오래 지속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계속적인 과학의 발달은 예술을 이성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데 커다란 어려움을 갖게 했고, 따라서 진과 미는 동일한 것일 수 없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전통적인 리버럴 아트의 체제가 붕괴되기에 이르렀으며, 예술은 자신의 정당성을 과학과는 다른 데서 구해야 했다. 여기서 예술은 이성이 아니라 상상의 문제이며 미는 비례와 같은 규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환기시키는 즐거움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는 근대적 예술의 개념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경향은 경제적으로는 중산계급의 대두와 사회적으로는 개인주의적 성향에 편승하여 전통적인 고전적 경향을 점진적으로 대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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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  

타타르키비츠의 <미학사>(미술문화) 중에서



예술을 자연으로부터 구별하기 위해서는 자연에 대한 인식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동·식물을 질료와 형상으로 보고 만물이 변화의 현상 안에서 굴복하지 않고 견뎌낸다고 보았다.
이런 활동적인 원리가 변화의 생산물의 본질을 정의한다.
우리는 자연에 관한 그의 견해를 먼저 이해한 후 예술이 자연의 명백한 순환적 본성을 따르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불확실하고 혼돈된 감성을 따르는 것인지 알아보아야 한다.

자연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자연학』과 『천체에 대하여 On the Heavens』에 상세히 적혀 있는데 후자는 전자가 논의하다 남긴 대목에서 시작된다.
이 두 권의 책은 갈릴레오Galileo Galilei(1564-1642)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양과학을 지배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자연에 대해 보편적인 정의를 내렸는데 자연의 본성에 속하는 것들은 그 자체 운동과 정지의 원리들을 갖고 있는 것들이라고 했다.
그가 말한 자연은 그리스인이 ‘퓌시스 phusis(physis)’라고 부른 것에 관한 학문으로 퓌시스는 우리가 번역하는 자연의 의미와는 다르다.
이 말은 생성becoming의 개념으로 보아야 하는데 예를 들면 참나무 씨앗의 본성nature이 참나무가 되고, 뽕나무 씨앗의 본성이 뽕나무가 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이 본성의 뜻을 자연으로 번역해 사용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낟알의 성장뿐 아니라 낟알 자체도 자연에 포함시키면서 “자연이란 표현은 어떤 자연적 과정 및 그 과정의 산물 양자를 모두 지칭하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본성 혹은 자연은 사물이 나서 자라 최종 상태에 이르는 것이며, 이는 그 사물의 존재 목적의 본성 혹은 자연이 최종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자연에 목적이 있다는 말이다. 어떤 사물은 사물이 지닌 본질로 존재하고, 어떤 사물은 외적 원인에 의해 존재하는데 동·식물과 순수 질료(원소)는 그 성질로 말미암아 존재한다.
그에게 자연은 사물의 질료를 지칭하는 동시에 형상, 즉 사물의 본질, 자연을 이끄는 힘이다.
따라서 사물들은 동작 혹은 운동의 내면적 원리를 지니는데 그가 말하는 운동이란 오늘날 물리학에서 말하는 운동보다 넓은 의미로 물리적 운동에 특성의 변화와 크기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자연에 대해 이원적 개념을 갖고 있었는데 하나는 자연을 끊임없는 변화 중에 있는 것으로 보았고, 다른 하나는 변화하는 조건 하에서도 일정하게 지속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 같은 이원적 개념은 중세에까지 통용되었으며, 현재에도 이처럼 시각적으로 알 수 있는 자연과 정신적으로만 알 수 있는 자연에 대한 두 종류의 개념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다.

타타르키비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에 대한 이원적 개념 혹은 타타르키비츠의 말로 “그리스적 표현의 애매모호성”2)이 로마인들에게 그대로 전달될 수 있었던 이유를 12세기에 아베뢰즈Averroes(1126-98)가 퓌시스phusis를 나투라natura로 번역했기 때문인 것으로 꼽았다.

“그리하여 나투라는 가시적 사물들 전부summa rerum를,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물의 생성원리, 자연물을 산출해내는 힘을 의미했다. 중세 때는 그 애매모호성을 무해하게 만들기 위해 각각 다른 형용사를 붙여서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과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을 구별지음으로써 자연이란 표현의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보유했다.”3)

타타르키비츠는 자연에 대한 이원적 개념이 뱅상 드 보베Vincent de Beauvais(?-1264)의 『사면경 Speculum quadruplex』에서 확인된다면서 아퀴나스와 같은 스콜라 철학자들 및 에크하르트Johannes Eckhart(1260-1327?)와 같은 신비주의자들이 이런 개념을 받아들였고, 또한 브루노Giordano Bruno(1548-1600)와 스피노자Benedict (Baruch) Spinoza(1632-77) 등과 같은 몇몇 근대 철학자들도 이를 수용했다고 적었다.

신의 개념은 자연의 개념에서 비롯했는데 뱅상 드 보베는 『사면경』에서 “능산적 자연은 곧 자연물들의 지고한 규범 혹은 패턴인데 그것이 바로 신이다”라고 했다.
그는 능산적 자연을 조물주로 보았고 소산적 자연을 피조물로 보았다.
르네상스와 더불어 시작된 근대에는 자연을 창조에 한정했는데 신은 자연의 창조주이나 자연의 일부분이 아니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해석은 예술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예술론에 영향을 끼쳤는데 예술이 자연을 모방한다고 말할 때 자연물의 생성원리, 자연물을 산출해내는 힘으로서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과 가시적 사물들 전부를 가리키는 자연을 의미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플로티누스는 『엔네아데스』 5장 초에서 “예술은 한낱 가시적 사물을 모방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자연의 원천을 이루는 원리에까지 미친다”고 했다.
자연물의 생성원리, 자연물을 산출해내는 힘으로서의 자연, 즉 가시적 사물 전체를 생산해내었고 또 생산해내고 있는 힘으로서의 자연을 의미한다.
천 년 후 알베르티도 『회화론』에서 플로티누스가 말한 의미로서의 자연을 언급했다.
타타르키비츠는 자연에 대한 이원적 개념이 오늘날에까지도 수용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인상주의자들의 주제는 눈에 보이는 사물들 전부를 가리키는 자연이었던 반면 세잔의 주제는 플로티누스와 알베르티가 말한 자연이었다고 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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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이 18세기에 위기를 맞은 것은



미가 비례 및 조화로운 배열에 있다는 또는 미의 객관성, 합리성, 수적 특이성, 형이상학적 이론들의 창조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론이 무려 이천 년 이상 군림해 왔는데 이성과 경험의 마찰로 위기를 맞았다.
이런 위기는 사람들의 취미가 변한 데 그 원인이 있었으며, 후기 바로크와 낭만주의 예술 및 문학의 등장도 한몫을 했다.
타타르키비츠는 위기의 뿌리를 “철학과 예술 양쪽 모두, 즉 경험론 철학과 낭만주의 예술에서 찾을 수 있다.
동일한 경향이 여러 나라에서 전개되었으나 특히 영국의 심리학자들과 철학적 경향의 저널리스트들 그리고 독일의 철학자들과 낭만주의 이전 작가들에 집중되었다”5)고 보았다.

영국인은 경험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경험을 통해 미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부분들의 특별한 비례나 배열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낭만주의자들은 한층 더 나아가서, 미는 실제로 규칙성의 배제, 즉 활력, 생생함, 충만함뿐만 아니라 비례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감정의 표현에 있다”6)고 타타르키비츠는 주장했다.

미학이 18세기에 위기를 맞은 것은 두 부류의 비평가들에 의해서였다.
한편으로는 미를 이론화하는 일이 불가하다는 주장을 편 페트라르카F. Petrarch XII(1304-74)의 영향을 받은 라이프니츠 및 몽테스키와 같은 철학자들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인에 의한 객관주의적 개념에 반하는 미는 단지 주관적 인상일 뿐이라는 공격이었다.

라이프니츠는 감성적 지각이 감각적 쾌로 인도될 수 있고, 감각적 쾌는 ‘지적’ 쾌와 나란히 그 권리를 가진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진리는 이 감성적 지각에 따라서도 경험되고, 그러므로 해서 이로부터 ‘느껴진 진리’라는 미의 정의가 연역될 수 있다.
미가 사물에 내재해 있는 특성이 아니라 관람자의 정신에 있는 지각이라는 것이 라이프니츠 및 몽테스키와 같은 철학자들의 대체적 주장이었다.

허치슨Francis Hutcheson(1694-1746)은 말했다.

미라는 용어는 우리 안에서 일어난 관념이다. … 미는 어떤 정신의 지각을 나타낸다”고 했고, 흄은 “미는 사물들 자체에서는 아무 특성이 없다. 미란 사물들을 관조하는 정신 속에 존재하며, 각 정신은 서로 다른 미를 지각한다. … 미는 개념상 어떤 지각자와 관련이 있다.


이를 확대 해석하면 상이한 문화권에서는 상이한 미를 지각한다고 할 수 있는데 가령 산수화에 익숙한 한국인이 네덜란드 작가의 작품을 대할 때 네덜란드인이 지각하는 미의 개념으로 그 작품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산수화에서 익힌 미의 개념으로 그 작품을 바라보게 된다.
네덜란드 문화의 요소가 나타난 작품을 대하면서 어쩌면 혼동과 매혹을 느끼며 동시에 적개심을 느끼면서 당혹해 할 수 있고, 불가해한 요소로 인해 혐오감을 갖고 미적 판단을 내리기 어려울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는 미의 개념이 지각자에게 있다는 말이 그럴 듯해 보이지만 지각은 각기 문화에 따라 같지 않기 때문에 보편적인 의미의 지각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미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며, 관례의 문제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보편적인 언어로 정의되어지지 않는다.

한 마디로 정의되지 않는 미의 개념을 보편화하기 위해 고대로부터 이원론이 제기되었다.
이는 인간이 생각해내기 가장 쉬운 방법이다.
하지만 제3의 가능성, 즉 둘 다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는 미 자체와 목적을 위한 미로 이분했고, 플라톤은 실제미와 추상미로 이분했으며, 스토아학파는 물질미와 정신미로 이분했다.
“그 밖에도 이시도르Isidor of Seville(560-636경)가 구분한 영혼미decus와 육체미decor, 그로시테스트Robert Grosseteste(1175-1253)가 구분한 수적미in numero와 우아미in grazia, 비텔로Vitelo(13세기경)(및 알하젠Alhazen(965-1038))가 구분한 단순한 파악으로부터의 미ex comprebensione simplici와 익숙함에 근거하는 미consuetudo fecit pulchritudinem, 르네상스가 구분한 미bellezza와 우아grazia, 매너리스트의 적합미와 정묘, 바로크(부우르D. Bouhours(1628-1702))의 숭고와 풍미agrement 등이 있다.”7)

17세기 말로 가면 이런 이분법 혹은 그 이상의 구분이 더욱 활발해지는데 타타르키비츠는 “빼로Charles Perrault(1628-1703)는 임의적 미beaute arbitraire와 확실한 미beaute convaincante를 구분지었고, 이브 마리 앙드레Andre는 본질미와 자연미, 즉 장엄le grand과 우아le gracieux를 구분지었으며, 고전주의자 떼스뜰랭H. Testelin(1616-95)은 실용미, 편의미, 희귀미, 진기미를 구분할 것을 제의했다.
18세기에 이루어졌던 구분들 중에서는 우아미abnmutig, 괴려미prachtig, 격렬미feuerig에 대한 줄쩌Johann Georg Sulzer(1720-79)의 분석이나 미를 소박한 것과 감성적인 것으로 구분하고자 했던 실러의 제의가 언급될 수 있다.
괴테도 완전하게 만들려고는 하지 않았으나 미의 여러 종류 및 그와 관련된 가치들을 장황하게 나열한 적이 있었다”8)고 적었다.

독자들은 위에 열거한 미에 대한 이분법 혹은 그 이상의 구분에 어리둥절할 것이다.
누가 어떻게 구분했는지 일일이 기억할 필요는 없고 다만 한 가지 알아야 할 점은 미는 정의하려고 하면 할 수록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전 미학이 위기에 직면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쉽게 무너뜨리지 못하고 미의 다양한 해석으로 그 주위를 맴돌았을 뿐이다.
이런 시도가 18세기에 와서 결실을 맺었는데 숭고에 대한 감정을 인식한 것이다.
롱기누스Longinus(213-273)는 『숭고에 관하여 Peri hypsous』9)에서 연설에서의 숭고성은 망각할 수 없는 것, 저항할 수 없는 것으로 많은 성찰을 야기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숭고에 관하여』는 1674년 니콜라스 브왈로-데프레오에 의해 『숭고와 경이에 대한 소론 Traite du sublime et du merveilleux』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알려지기 시작했다.
브왈로는 숭고한 것들로 매력있고 즐거움을 주며 황홀하게 만드는 대단한 것, 찬탄할 만한 것, 놀랄 만한 것을 꼽았다.
중요한 점은 숭고와 대단한 것은 서로 혼합되어 미가 된다는 것이다.
숭고를 미의 한 변종으로 취급한 이들이 많았으나 애디슨J. Addison(1672-1719)을 비롯해 버크와 칸트 등 대다수에게는 숭고가 미에 대조되는 하나의 독특한 가치로 인식되었다.
18세기 일부 미학자들은 숭고를 아예 미보다 높은 위치에 두려고까지 했다.
숭고에 의해 미는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고전미학은 더 이상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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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대한 중세의 분류



고대의 예술 분류는 중세에 이론적·실천적으로 사용되면서 예술을 실천적 이성의 한 상태로 간주되었다.
아퀴나스는 예술을 “이성의 올바른 배열”로 정의했으며,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1266-1308경)는 “제작되어야 할 것에 대한 올바른 관념” 혹은 “참된 원리들에 근거한 제작능력”으로 정의했다.
중세에 예술은 고정된 규범과 길드의 규칙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후고Hugh of St. Victor(1096-1141)는 『학습론 Didascalicon』 2장에서 “예술은 규칙과 법규들로 되어 있는 하나의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적었다.
예술이라면 교양예술을 뜻하게 되었는데 일곱 개의 교양 과목은 논리학, 수사법, 문법, 산술, 기하, 천문학, 음악 등이었다.
이것들은 오늘날 예술이 아니라 학문이다.

중세에는 비교양 예술에 대한 관심도 컸으며, 이런 예술을 ‘기능술’로 불렀다.
기능술은 스콜라 철학자들에 의해 전통적인 일곱 개의 교양과목과 균형을 맞추어 일곱 가지로 구분되었다:
의복공급lanificium, 건축을 포함하여 주거지와 연장공급armatura, 농작술agricultura, 식품공급venatio, 항해술navigatio, 의술medicina, 오락제공theatrica. 이들 가운데 armatura와 theatrica, 즉 건축과 오락이 오늘날의 순수예술에 가깝다.

음악은 수학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교양예술로 간주되었지만 시는 일종의 철학이나 예언력, 기도문 혹은 고백문 같은 것이었으므로 전혀 예술로 취급되지 않았다.
회화와 조각은 분명히 법칙을 이용하는 기술들이었지만 교양예술로도 기능술로도 여겨지지 않았다.
그 이유를 타타르키비츠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회화와 조각은 유용할 때만 인정받는 기능술로 분류되었고 회화와 조각의 실제적 유용성은 대단치 않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는 염격한 의미에서 우리가 예술로 간주하는 것이 중세에는 예술로 언급조차 되지 않았었다는 그간의 커다란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고클레니우스R. Goclenius(1547-1628)가 1607년에 출간한 『철학사전 Lexicon Philosophicum』에 예술이 건축과 같은 ‘주요’ 예술과 회화와 같은 ‘부수적’ 예술로 나누어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예술에 대한 고전적 분류가 르네상스 시대에 그대로 통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15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는 르네상스 및 바로크 시대에 넓은 의미의 예술들 중 회화, 조각, 시, 음악 등과 같은 예술들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므로 분리시켜야 한다는 인식이 싹텄다.
다만 명확하게 표현되지 못했을 뿐이다.
순수 혹은 아름다운이라 칭하는 예술과 그 밖의 예술을 분류하는 데는 실로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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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르키비츠가 규정한 예술



시대에 따라서 미학자들에 따라서 미의 개념이 다르게 언급되는 데서 미의 개념이 정의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으로부터 비롯된 미의 관념은 1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유일한 예술론으로 매우 소중하게 받아들여졌다.
미가 더이상 유일하거나 가장 중요한 개념이 되지 못한 것은 에드문드 버크Edmund Burke에 의해서였다.

버크는 이전에 미의 개념에 포함되지 못했던 숭고sublimity의 개념을 1757년 미학적 논리에 등장시켜 숭고가 개념적으로 미에 배타적이면서 본질에 대조를 이룬다는 주장을 폈다.
그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미 개념을 부정하고 미를 숭고에 상응하는 또 다른 류의 경험으로 보았다.
칸트는 미에 대한 버크의 비판에 매혹되어 숭고를 예술의 중요한 개념으로 정립할 수 있었다.
버크와 칸트 두 사람의 혁명적 사고가 유럽인들로 하여금 미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두 사람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려고 한다.
숭고한 감정의 영역이 확장되자 예술의 정의에 대한 그리스인의 사고를 비판하며 새롭게 고찰하는 시도가 가능했으며 리오타르는 숭고한 감정을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색으로 지적했는데 그에 관해서도 나중에 언급하려고 한다.

예술은 정의될 수 없는 데도 불구하고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미학자들이 정의를 시도해왔다.
예술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미와 숭고의 본질이 무엇인지, 이것들에 대한 형식들은 어떠한지, 이것들과 관련된 매체와 재료들이 규정되어야 하는데 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예술에 대한 정의는 차치하고라도 미술사에 나타난 하나의 이즘ism에 대한 이해에서조차 견해를 달리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예술철학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미학자들이 미술에 대한 정의를 시도했으며 여전히 시도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가정으로라도 정의가 정립되지 않으면 예술에 관한 이론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성적 사고 체계는 정의가 아니라면 가정으로라도 전제가 있어야 그 다음을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타타르키비츠Wladyslaw Tatarkiewicz(1886-1980)가 『미학의 기본 개념사 A History of Six Ideas: An Essay in Aesthetics』에서 내린 정의를 예로 들어보자.
그는 “무수한 기능을 가진 모든 종류의 예술을 다 수렴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개방되어”1-1) 있는 정의를 만들고자 시도했다.

타타르키비츠는 정의했다.2)

예술은 사물을 재현하거나 형식을 구축하거나 경험을 표현하는 의식적 인간 행위지만 이런 재현, 구축, 혹은 표현의 산물이 기쁨이나 감동, 충격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한에 있어 그러하다.

이 정의를 그는 문법적으로 재배열한 후 미술품에 대한 정의로 제시했다.3)

미술품이란 기쁨이나 감동, 충격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사물을 재현하거나 형식을 구축하거나 경험을 표현한 것이다.

타타르키비츠는 기쁨delight, 감동emotion, 충격shock이란 말들을 미술과 미술품을 규정할 수 있는 순수한 현상적 의미로 사용했다.
그는 자신의 정의에 대한 비판을 미리 봉쇄하려는 저의로 이런 말들이 ‘아름다운’, ‘심미적인’ 등과 같은 미의 가치를 평가하는 용어들과는 거리가 멀고 일정한 가치에 대한 자연스러운 인간의 반응을 나타내는 사실적·심리학적 용어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정의는 “예술을 정의하는 데 반대하는 이들(특히 케닉)의 공격에도 면역상태”4)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나는 타타르키비츠의 정의에 다음과 같은 이의를 제기한다.
기쁨, 감동, 충격이 가치에 대한 자연스러운 인간의 반응이라는 지적에는 동의하지만 예술 혹은 미술품만이 이런 반응을 유도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예술만 의식적인 인간 행위가 아니라 거의 모든 인간의 행위가 의식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사물을 재현하거나 형식을 구축하거나 경험을 표현하는 것 또한 예술에만 한정된 건 아니라는 점이다.
예술 혹은 미술품이 아니더라도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기쁨, 감동, 충격으로, 달리 말해서 사실적, 심리적으로 반응하고 있으며 예술과 상관없이 의식적인 행위를 통해 우리는 끊임없이 다양한 경험과 형식을 얻어내고 있다.
자식을 낳고 기르는 데서, 화초를 심고 가꾸는 데서, 이웃에게서 선물로 받은 토실토실한 진도개를 위해 새집을 지어주는 데서 끊임없이 사물들을 재현하고 있다.
나는 예술은 정의되지 않는 가운데 이해되는 보편적 인간 행위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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