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이 18세기에 위기를 맞은 것은



미가 비례 및 조화로운 배열에 있다는 또는 미의 객관성, 합리성, 수적 특이성, 형이상학적 이론들의 창조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론이 무려 이천 년 이상 군림해 왔는데 이성과 경험의 마찰로 위기를 맞았다.
이런 위기는 사람들의 취미가 변한 데 그 원인이 있었으며, 후기 바로크와 낭만주의 예술 및 문학의 등장도 한몫을 했다.
타타르키비츠는 위기의 뿌리를 “철학과 예술 양쪽 모두, 즉 경험론 철학과 낭만주의 예술에서 찾을 수 있다.
동일한 경향이 여러 나라에서 전개되었으나 특히 영국의 심리학자들과 철학적 경향의 저널리스트들 그리고 독일의 철학자들과 낭만주의 이전 작가들에 집중되었다”5)고 보았다.

영국인은 경험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경험을 통해 미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부분들의 특별한 비례나 배열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낭만주의자들은 한층 더 나아가서, 미는 실제로 규칙성의 배제, 즉 활력, 생생함, 충만함뿐만 아니라 비례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감정의 표현에 있다”6)고 타타르키비츠는 주장했다.

미학이 18세기에 위기를 맞은 것은 두 부류의 비평가들에 의해서였다.
한편으로는 미를 이론화하는 일이 불가하다는 주장을 편 페트라르카F. Petrarch XII(1304-74)의 영향을 받은 라이프니츠 및 몽테스키와 같은 철학자들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인에 의한 객관주의적 개념에 반하는 미는 단지 주관적 인상일 뿐이라는 공격이었다.

라이프니츠는 감성적 지각이 감각적 쾌로 인도될 수 있고, 감각적 쾌는 ‘지적’ 쾌와 나란히 그 권리를 가진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진리는 이 감성적 지각에 따라서도 경험되고, 그러므로 해서 이로부터 ‘느껴진 진리’라는 미의 정의가 연역될 수 있다.
미가 사물에 내재해 있는 특성이 아니라 관람자의 정신에 있는 지각이라는 것이 라이프니츠 및 몽테스키와 같은 철학자들의 대체적 주장이었다.

허치슨Francis Hutcheson(1694-1746)은 말했다.

미라는 용어는 우리 안에서 일어난 관념이다. … 미는 어떤 정신의 지각을 나타낸다”고 했고, 흄은 “미는 사물들 자체에서는 아무 특성이 없다. 미란 사물들을 관조하는 정신 속에 존재하며, 각 정신은 서로 다른 미를 지각한다. … 미는 개념상 어떤 지각자와 관련이 있다.


이를 확대 해석하면 상이한 문화권에서는 상이한 미를 지각한다고 할 수 있는데 가령 산수화에 익숙한 한국인이 네덜란드 작가의 작품을 대할 때 네덜란드인이 지각하는 미의 개념으로 그 작품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산수화에서 익힌 미의 개념으로 그 작품을 바라보게 된다.
네덜란드 문화의 요소가 나타난 작품을 대하면서 어쩌면 혼동과 매혹을 느끼며 동시에 적개심을 느끼면서 당혹해 할 수 있고, 불가해한 요소로 인해 혐오감을 갖고 미적 판단을 내리기 어려울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는 미의 개념이 지각자에게 있다는 말이 그럴 듯해 보이지만 지각은 각기 문화에 따라 같지 않기 때문에 보편적인 의미의 지각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미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며, 관례의 문제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보편적인 언어로 정의되어지지 않는다.

한 마디로 정의되지 않는 미의 개념을 보편화하기 위해 고대로부터 이원론이 제기되었다.
이는 인간이 생각해내기 가장 쉬운 방법이다.
하지만 제3의 가능성, 즉 둘 다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는 미 자체와 목적을 위한 미로 이분했고, 플라톤은 실제미와 추상미로 이분했으며, 스토아학파는 물질미와 정신미로 이분했다.
“그 밖에도 이시도르Isidor of Seville(560-636경)가 구분한 영혼미decus와 육체미decor, 그로시테스트Robert Grosseteste(1175-1253)가 구분한 수적미in numero와 우아미in grazia, 비텔로Vitelo(13세기경)(및 알하젠Alhazen(965-1038))가 구분한 단순한 파악으로부터의 미ex comprebensione simplici와 익숙함에 근거하는 미consuetudo fecit pulchritudinem, 르네상스가 구분한 미bellezza와 우아grazia, 매너리스트의 적합미와 정묘, 바로크(부우르D. Bouhours(1628-1702))의 숭고와 풍미agrement 등이 있다.”7)

17세기 말로 가면 이런 이분법 혹은 그 이상의 구분이 더욱 활발해지는데 타타르키비츠는 “빼로Charles Perrault(1628-1703)는 임의적 미beaute arbitraire와 확실한 미beaute convaincante를 구분지었고, 이브 마리 앙드레Andre는 본질미와 자연미, 즉 장엄le grand과 우아le gracieux를 구분지었으며, 고전주의자 떼스뜰랭H. Testelin(1616-95)은 실용미, 편의미, 희귀미, 진기미를 구분할 것을 제의했다.
18세기에 이루어졌던 구분들 중에서는 우아미abnmutig, 괴려미prachtig, 격렬미feuerig에 대한 줄쩌Johann Georg Sulzer(1720-79)의 분석이나 미를 소박한 것과 감성적인 것으로 구분하고자 했던 실러의 제의가 언급될 수 있다.
괴테도 완전하게 만들려고는 하지 않았으나 미의 여러 종류 및 그와 관련된 가치들을 장황하게 나열한 적이 있었다”8)고 적었다.

독자들은 위에 열거한 미에 대한 이분법 혹은 그 이상의 구분에 어리둥절할 것이다.
누가 어떻게 구분했는지 일일이 기억할 필요는 없고 다만 한 가지 알아야 할 점은 미는 정의하려고 하면 할 수록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전 미학이 위기에 직면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쉽게 무너뜨리지 못하고 미의 다양한 해석으로 그 주위를 맴돌았을 뿐이다.
이런 시도가 18세기에 와서 결실을 맺었는데 숭고에 대한 감정을 인식한 것이다.
롱기누스Longinus(213-273)는 『숭고에 관하여 Peri hypsous』9)에서 연설에서의 숭고성은 망각할 수 없는 것, 저항할 수 없는 것으로 많은 성찰을 야기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숭고에 관하여』는 1674년 니콜라스 브왈로-데프레오에 의해 『숭고와 경이에 대한 소론 Traite du sublime et du merveilleux』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알려지기 시작했다.
브왈로는 숭고한 것들로 매력있고 즐거움을 주며 황홀하게 만드는 대단한 것, 찬탄할 만한 것, 놀랄 만한 것을 꼽았다.
중요한 점은 숭고와 대단한 것은 서로 혼합되어 미가 된다는 것이다.
숭고를 미의 한 변종으로 취급한 이들이 많았으나 애디슨J. Addison(1672-1719)을 비롯해 버크와 칸트 등 대다수에게는 숭고가 미에 대조되는 하나의 독특한 가치로 인식되었다.
18세기 일부 미학자들은 숭고를 아예 미보다 높은 위치에 두려고까지 했다.
숭고에 의해 미는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고전미학은 더 이상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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