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토에 대한 평가


중세의 대단원을 종식시키고 르네상스가 가능할 수 있도록 새로운 문을 활짝 연 예술가이다. 르네상스가 조토에 의해 일찍이 시작되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조토는 사실주의와 이상주의를 적절하게 혼용하여 실제와 환상의 간격을 좁혔다.
빛과 색의 보완관계를 나타내는 밝은 색과 보색의 사용은 르네상스와 바로크 예술가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어 절정에 이르게 했다.
조토가 창조한 환상주의는 서양미술의 두드러진 표현주의 형식이 되었으며 19세기 중반 모더니즘이 출현하기까지 지속되었다.
조토는 실제와 환상을 타협하여 고전주의 회화의 가치를 거의 천 년 만에 재활시킨 위대한 화가이다.
그의 그림을 1937년부터 플로렌스에 영구보존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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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공예Arts and Crafts운동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일어난 미술공예Arts and Crafts운동은 기계생산으로 인한 공산품의 질 저하에 대한 불만족으로 수작업의 공예품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데서 출발했다.

중세의 직인제도에 대한 향수가 내재된 이 운동의 사상은 건축가 오거스터스 웰비 노스모어 퓨진Augustus Welby Northmore Pugin(1812-52)에 의해 제기되었으며, 윌리엄 모리스에게 영향을 끼친 존 러스킨의 저작에 잘 나타나 있다.

가구, 은그릇, 직물, 스테인드글라스, 보석 등을 디자인하기도 한 퓨진은 영국 건축 전체의 운동으로까지 확산된 고딕복고 양식의 제창자였다.

그는 저서 <대비 Contrasts>(1836)에서 기독교의 중심을 이룬 중세 건축물을 칭찬하여 당대에 유행하던 르네상스 양식의 경박함과 대비시켰다.

퓨진은 찰스 배리 경Sir Charles Barry(1795-1860)과 함께 1836년에 영국의 국회의사당을 착공했으며 이는 고딕 부활에 있어 최대의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다.

이런 고딕에 대한 취향은 나폴레옹의 전쟁을 통해 국수주의의 감정이 고조되었고 영국뿐 아니라 독일과 프랑스 등지에서 고딕이 국민정신의 고유한 표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술가를 영감 받은 예언자로 본 러스킨은 미술의 위대함을 “신이 만든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미술의 성실함과 소박함을 회복하며 아카데미즘의 원류로 간주되는 라파엘로 시대 이전으로 돌아갈 것을 주창한 라파엘전파의 옹호자로 나섰다.

러스킨은 퓨진과 함께 고딕양식의 부활을 주창했지만, 장식에 있어서는 퓨진과 달리 고전적 전통을 거부했다.

그 이유는 예술과 건축은 신이 창조한 인간의 경이로움과 기쁨을 반영해야만 한다고 믿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영감을 받은 자연주의 형식이 요구되고, 고딕이야말로 적합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술을 노동자들의 일상생활과 연결하는 그의 사상을 모리스가 받아들였다.

러스킨은 저서 『베네치아의 돌』에서 “아름다운 미술품은 의도적이든 우연적이든 자연의 형태를 닮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스킨의 책에는 그가 미술가들에게 세밀하게 연구할 것을 요청한 바위와 잎의 곡선 형태들이 뒤엉킨 모습을 묘사한 도판이 많이 실려 있었다.

그의 사상을 행동으로 옮긴 사람이 모리스였다.

미술공예운동을 주도한 미술가들로는 아서 헤이게이트 맥머도, 월터 크레인, 찰스 로버트 애슈비, 오브리 빈센트 비어즐리를 비롯하여 글래고스 출신 건축가인 찰스 레니 매킨토시 및 프란시스 맥도널드와 마거리트 맥도널드 자매를 꼽을 수 있다.

잉글랜드의 건축가이며 디자이너 아서 헤이게이트 맥머도Arthur Heygate Mackmurdo(1851-1942)는 러스킨과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그와 함께 고건축물보호협회Society for the Protection of Ancient Buildings에 관여했다.

맥머도가 1882년에 세운 센추리 길드Century Guild는 다양한 기술을 보유한 장인들의 단체로 맥머도는 이 길드가 “공예의 모든 분야를 더 이상 장인의 영역이 아닌 미술가의 영역으로 만들고 건축물, 장식, 유리회화, 도자기, 목조각 그리고 금속을 그들의 정당한 자리인 회화와 조각의 옆자리로 되돌려놓은 것”이라고 천명했다.

센추리 길드는 아르누보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인식될 물결모양의 자연주의 장식을 실험했다.

맥머도는 1884년에 길드의 기관지로 공예전문지 <하비 호스(목마) Hobby Horse(Wooden Horse)>를 창간했다.

그는 등받이에 구멍을 뚫어 장식한 의자를 디자인해 유명해졌다.

이 장식은 나중에 아르누보로 규정되었다. 등받이를 장식한 비대칭의 덩굴식물은 1년 뒤 약간 변형되어 그의 저서 <렌즈 시티 교회 Wren's City Churches>의 표지에 다시 등장했다.

맥머도와 함께 미술공예운동의 전통에 속한 월터 크레인Walter Crane(1845-1915)은 미술공예전시협회Arts and Crafts Exhibition Society의 의장이었다.

그의 목표는 미술가를 수공업자로 만들고 수공업자를 미술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크레인은 미술의 진정한 근원과 토대는 수공업에 있다고 확신했다.

그의 이론서는 유럽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공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확산에 기여했다.

모리스와 함께 사회주의연맹Docial League의 회원이었던 크레인은 모리스의 추종자들과 마찬가지로 아르누보를 “기이한 장식의 질병”으로 간주하고 적대감을 보였다.

그러나 크레인은 1890년대 유럽 아르누보 디자인의 초기 중심지 중 하나인 브뤼셀에서 전시한 최초의 영국 미술가이자 디자이너였다.

그곳에서 그는 1891년에 아동도서 삽화를 선보였는데, 1889년에 처음 출판되어 이제는 잘 알려진 그의 <꽃의 축제 Flora's Feast>와 같은 삽화에서는 벨기에 대중이 선호한, 자연주의 주제에 토대를 둔 운동감이 보였다.

문학적, 신화적 주제를 즐겨 그린 크레인은 아동도서에는 컬러그림이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 최초의 사람이기도 했다.

아르누보를 경멸했음에도 불구하고 크레인은 1900년 당시로서는 아르누보 미학에 대해 가장 설득력 있게 설명한 『선과 형태 Line and Form』라는 책자를 출간하기도 했다.

이는 미술공예운동의 전통 속에서 영국 디자이너들이 아르누보로 인식될 만한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가 된다.

러스킨과 모리스의 사상에 감명을 받아 1888년에 수공예 길드를 설립하여 영국 미술공예운동에 앞장을 선 찰스 로버트 애슈비Charles Robert Ashbee(1863-1942)는 1887년과 1904년 런던의 이스트엔드에 수공업 학교School of Handicraft와 공예 학교School of Arts and Crafts를 각각 설립하기도 했다.

애슈비는 정규 교육을 받은 건축가로 모리스와 마찬가지로 건축과 장식미술이 모든 예술의 기본 토대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가 설립한 수공업 길드와 두 개의 공예학교는 비자본주의적 강령을 따랐으며, 그곳들에서 제작된 생산품을 가지고 단체 토론을 벌이곤 했다.

모리스 양식을 좇은 가구 외에 정교하게 조각되고 마무리된 은공예품이 이 공방의 특별 상품이었다.

애슈비가 1890년대 중반부터 제작한 사각형 가구는 국제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영국 디자이너의 작품이다.

그가 1898년경에 디자인한 필기용 캐비닛은 아르누보 양식에 대한 그의 관심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 작품이다.

이것은 1899년 런던에서 열린 미술공예전시협회전과 1900년 빈에서 열린 제8회 분리파 전시회에 출품되어 빈의 한 가정에 판매되었다.

짙은 마호가니 외장에 구식의 구슬다리가 달린 이 캐비닛은 영국 고유의 가구 제작전통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당대의 유행이 반영된 부분은 서립의 손잡이를 이루는 정교한 투각 잎 무늬 장식판과 상단 문에 부착된 열쇠구멍 덮개와 띠 장식이다.

상단 문을 열면 본격적인 아르누보 양식이 드러난다. 여섯 개의 호랑가시나무 문에는 디자인된 튤립이 상감으로 장식되었으며, 은제 투각 자물쇠는 디자인된 잎 무늬로 장식되었다.

애슈비와 아르누보의 관계는 그가 근대적인 제작방식을 거부한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애슈비는 1902년에 뮌헨미술아카데미의 명예회원에 위촉되었다.

같은 해에 그는 런던의 학교와 길드를 글로스터셔의 치핑 캠프든 마을로 옮겼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공예뿐 아니라 농업까지 새롭게 활성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애슈비와 그의 제자들은 잉글랜드와 파리, 빈, 뒤셀도르프, 뮌헨의 전시회에 출품했다.

애슈비는 결국 현대문명은 기계작업 없이는 생각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

그는 1911년에 현대문명은 기계에 있으며, 이를 인정하지 않는 한 미술교육을 장려하거나 재정적으로 보조하는 시스템은 합리적일 수 없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주제에서, 예를 들면 아일랜드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 평론가인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1854-1900)가 1892년에 프랑스어로 쓴 기괴한 미와 환상의 시극 <살로메 Salome>를 위한 삽화나, 런던 태생의 시인이며 평론가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1688-1744)의 시 <머리카락을 훔친 자 The Rape of the Lock>(1712)에 나오는 퇴폐적인 18세기 풍경을 묘사한 후기 드로잉에는 아르누보의 모든 요소가 나타났다.

와일드의 아버지는 유명한 안과의사이며 고고학자였고 어머니는 시인이었다.

와일드가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어로 하는 탐미주의를 주창한 것은 옥스퍼드 대학에 재학 중일 때였다.

1895년에 동성연애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2년 동안 레딩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참회록 <옥중기 De Profundis>(1897)는 그 소산이다.

직물도매상의 아들로 태어나 열두 살 때 앓은 병으로 평생 불구의 몸이 된 포프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독학으로 고전을 익혔고 타고난 재능으로 스무 살 때 이미 시집 <목가집 Pastorals>을 발표했다.

<머리카락을 훔친 자>는 포프가 스물네 살 때 쓴 것이다.

1893년 2월 오랜 학교 친구인 스콧슨-클라크G.F. Scotson-Clarke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브리 빈센트 비어즐리Aubrey Vincent Beardsley(1872-98)는 완전히 새로운 드로잉과 구성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양식을 “일본을 암시하지만 완전히 일본적이지 않은”이라는 표현을 하여 적어도 자신이 일본화의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했다.

브라이턴의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초등교육을 마친 뒤 런던에서 독학으로 화화를 배우고 음악과 문학에 관심을 기울인 비어즐리는 번-존스의 권유로 판화를 배우기 위해 야학에 다니며 라파엘전파의 영향을 받았다.

1892년 파리에서 프레스코화의 영향을 받아 침묵하는 색조와 구도로 담백미를 풍기는 벽화를 주로 그린 퓌비 드 샤반Puvis de Chavannes(1824-98)을 만났고 툴루즈-로트레크와 일본의 무로마치시대부터 에도시대 말기(14-19세기)에 서민생활을 기조로 제작된 풍속화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아 섬세하고 장식적인 양식을 확립했다.

1893년 월간지 <스튜디오 Studio> 창간호에 특집으로 실린 <나는 너의 입술에 입 맞추었노라 J'ai baise ta bouche>로 명명된 비어즐리의 삽화는 공중에 떠 있는 악마 같은 살로메가 피를 흘리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들고 있다.

영국과 유럽에서 구독되던 <스튜디오>는 비어즐리에게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으며, 그로 인해 그의 이름은 아르누보 양식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그의 작품이 1894년에 미국인 작가 해런드와 함께 창간한 <옐로 북 The Yellow Book>에 실렸다.

<옐로 북>은 퇴폐적 표현에 대한 비난으로 1897년에 폐간되고 그는 새로 <사보이 The Savoy>를 창간하여 스물다섯 살로 요절할 때까지 제작을 계속했다.

그의 작품은 아르누보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던 국가에서 나타난 성숙된 아르누보 초기의 예가 되었다.

런던 리전트 스트리트Regent Street의 리버티상사Liberty Company가 날염한 직물은 또 다른 차원에서 미술공예운동을 대중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부유한 중산층 소비자를 겨냥해 가장 성공적인 소매점들 가운데 하나인 리버티상사는 아서 라젠비 리버티Arthur Lasenby Liberty(1843-1935)가 1875년에 첫 번째로 연 상점이다.

그는 스스로 ‘동인도 상인 East India Merchant’을 자처하며 동양에서 수입한 도자기, 카펫, 그 밖의 제품들을 팔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에 함부르크 출신의 화상 지크프리트 빙Siegfried Bing(1838-1905)도 파리에서 유사한 제품을 취급하고 있었다.

리버티상사는 영국 미술공예 제품, 특히 아치볼드 녹스Archibald Knox(1864-1933)와 같은 디자이너들의 웨일스 제품과 튜더 제품을 팔기도 하고 생산해냈으며, 또한 대륙의 아르누보를 런던의 구매자들에게 소개하고 리하르트 리메르슈미트Richard Riemerschmid(1868-1957)의 의자와 헝가리 상사인 졸네이의 도자기 같은 물품도 취급했다.

리메르슈미트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미술애호가의 방’을 위한 실내장식 계획을 전시했으며, 다음해에는 뮌헨에서 가장 유명한 세기말 건축물인 극장을 설계했다.

사세가 확장됨에 따라 리버티상사는 유명한 디자이너들의 작품들을 상업적으로 생산한 자사의 가구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아서 라젠비 리버티는 1890년 파리에 1931년까지도 남아 있던 오페라 가 38번지에 지점을 열었으며, 이 상사의 제품, 특히 직물과 벽지는 헬싱키부터 밀라노까지 유럽 전역으로 판매되었다.

리버티의 성공은 ‘예술가구’를 좀 더 적정한 가격으로 직접 제작한다는 회사의 정책이 중산층 시장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리버티상사가 취향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르누보 이해에 중요한데, 유럽 아르누보의 많은 주요 인물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리버티상사는 1899년에 유명한 자사 제품인 은과 보석류의 쿰릭Cymric(웨일스Welsh 사람들이 선호한) 제품과 뒤이어 1901년에는 튜더식 백랍제품Tudric Pewter range을 출시했다.

보석상자, 벨트, 버클 그리고 모자핀 등으로 이루어진 이 금속제품들은 켈트부활Celtic Revivial과 르네상스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독특한 아르누보 양식으로 제작되었다.

녹스가 디자인한 1900년의 쿰릭 보석상자는 단순한 형태에 당대의 섬세한 곡선이 가미되고 아르누보의 느낌이지만 여전히 미술공예운동에 뿌리를 둔 절제된 선적 모티프로 장식되어 있다.

자사의 화가와 디자이너를 밝히지 않는 리버티상사의 방침으로 누가 무엇을 설계했는지 알아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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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모리스의 레드하우스


모리스는 1859년에 제인과 결혼했다.
젊고 부유하고 재능 있는 모리스는 자신의 사회적 배경에서 볼 때 이단적이며 환영받을 수 없는 결혼을 했다.
그의 부모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모리스는 1861년에 아내와 함께 켄트의 벡슬리히스Bexleyheath에 땅을 한 구획 구입하여 자신들이 거주할 붉은 벽돌담으로 에워싸인 레드하우스The Red House를 건축가 필립 스픽맨 웨브Philip Speakman Webb(1831-1915)에게 의뢰했다.
캔터베리 대성당으로 가는 순례자 길에 면한 과수원에 둘러싸인 레드하우스는 담뿐만 붉은색이 아니라 붉은 벽돌 벽, 붉은 벽돌 기와지붕으로 된 말 그대로 붉은 집이었다.
현관에 들어서면 홀 정면에 떡갈나무 계단이 극적으로 등장하며 방문객을 맞이한다.
내부 왼편에 갤러리, 오른편에는 거실이 있다.
모리스의 서재와 침실이 있는 2층 응접실은 품위 있게 꾸며졌다.
모리스는 레드하우스로 이주한 뒤 실내장식에 2년을 소요했다.
이 집은 모리스와 제인의 신혼집이었을 뿐만 아니라 미술공예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모리스는 친구들과 가구를 만드는 협동 과정에서 1861년에 장식공예회사인 모리스 마셜 포크너 사Morris, Marshall, Faulkner & Co.를 레드하우스에서 설립했다.

한 번의 조직 개편 후 1875년부터 ‘모리스상회’로 불렸다.
모리스상회의 설립취지는 모든 시대와 모든 나라의 장식미술을 연구하고 유리창과 벽장식, 조각품, 가구, 금속공예의 설계와 생산이었다.
단순성과 유용성, 품질과 아름다움은 작업의 원칙이었다. 어떤 경우든 기계작업은 생산과정에서 제외되었는데, 모리스가 모든 기계작업을 생활조건으로서는 해로운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모리스의 토지에는 회사설립 취지서 등을 갖춘 전시실과 사무실들이 있었고, 이 모든 것들은 가구, 스테인드글라스, 금속제품, 보석, 벽지, 수놓은 태피스티리 제작의 모든 과정이 장인의 지속적인 관리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모리스는 노동자 대학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하는 장인들을 발견했으며 유스턴Euston에 있는 소년의 집 출신의 소년들을 고용했다.
많은 친구들이 디자인과 집무를 맡아서 도와주었다.
모리스는 쉬지 않고 일했다. 품질 좋고 가치 있는 수공예품은 생산단가가 너무 비쌌기 때문에 그의 고객은 주로 건축가들로, 이들은 진보적인 미술애호가이거나 영국 국교회 고교회파 교회를 설립하는 돈 많은 건축가들이었다.
부자들의 추잡한 사치를 위한 공예품을 생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모리스는 시장에 적합한 상품을 개발해야 했으므로 등나무를 세공해 제작한 가벼운 ‘서식스 의자 Sussex Chair’를 생산해냈고 이 의자는 모리스상회의 인기 있는 상품이 되었다.


모리스상회의 제품은 19세기 후반의 영국 산업디자인과 실내장식 디자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대중의 취향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모리스상회에서 제작된 제품들은 라파엘전파와 관련이 있는데, 종종 중세를 소재로 한 라파엘전파 회화의 소품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제품은 라파엘전파 회화에서 뽑아내서 삼차원의 존재물들로 제작한 것처럼 보였다.
가구, 타일, 태피스트리 등은 라파엘전파주의 디자인은 아닐지라도 그들에게서 영감을 얻은 것이며 거의 완벽하게 역사주의적이었다.
모리스는 오백 년 전의 세계에 속한 것을 새롭게 만들었다.
이는 이상화된 중세로 돌아가려는 빅토리아 시대 정신의 정점을 나타낸 예 가운데 하나이다.
모리스가 중세의 모티프에 의존하여 디자인한 가구, 스테인드글라스, 벽지, 직물 등에 나타난 양식화된 꽃과 유기적인 형태는 미술공예운동 전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디자인에서의 유용성과 미에 대한 생각은 그의 사회주의 원칙과 결부되어 그를 미술공예운동의 중심인물로 자리 잡게 했다.


모리스는 1862년에 벽지 디자인을 시작하여 1864년 첫 번째 그룹의 벽지를 생산했다.
수년 동안 이 디자인의 뒤를 이어 다른 디자인들이 나왔는데, 패턴들이 때때로 커튼이나 의자의 커버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직물에도 이용되었다.
그는 1877년에 베틀을 입수하여 천을 짜기 시작했으며, 그의 야심은 위대한 일러스트레이션 태피스트리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일러스트레이션이란 문학작품을 회화로 그린 것을 말한다.
이 태피스트리의 배경을 모리스가, 인물들을 번-존스가 맡았다.
로제티는 모리스상회가 설립될 때 주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디자인을 한두 개 했으나 상회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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켐스콧 출판사는 존속한 8년 동안의 기간에 53권의 책을 발간했다


모리스를 후원한 사람들이 주로 고딕부활을 추진하던 건축가들이었으므로 모리스상회가 스테인드글라스를 전문으로 제작한 건 당연했다.
로제티, 번-존스, 브라운 모두 창문을 디자인했다. 번-존스는 특히 이 일에 숙련되어 있었고, 1857년에 이미 1850년 토머스 스티븐스Thomas Stevens의해 설립된 브래드필드 대학Bradfield College을 위해 라파엘전파주의 창문을 디자인한 적이 있었다.
그 뒤에도 노동자 대학에서 스테인드글라스 디자인을 가르쳤으므로 모리스상회가 설립될 즈음에는 이 분야에서 경험 있는 장인이었다.
그는 모리스가 제작한 창문의 인물들을 책임졌으며, 그의 작품을 영국에 있는 많은 교회에서 볼 수 있다


모리스는 1871년에 로제티와 함께 공동으로 옥스퍼드에 있는 켐스콧 저택Kelmscott Manor을 빌렸다.
템즈 강가에 위치한 켐스콧 저택은 1892년에 인쇄와 책 디자인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서적애호가인 모리스가 설립한 켐스콧 출판사Kelmscott Press가 발간한 <미지로부터 온 소식 News from Nowhere>의 권두화로 소개되었다.
켐스콧 저택은 로제티가 공동의 거처를 떠난 1874년 이후부터 1896년까지 모리스의 저택으로 사용되었다.
1600년경 중세의 평면도를 바탕으로 건축되고 17세기 후반에 측면이 확장된 이곳을 모리스는 휴양소로 사용했다.
그루지아 양식의 이 저택은 중세양식으로 제작된 무거운 가구, 직물로 짠 커튼, 꽃무늬 벽지로 장식되었다.
마구간과 마차를 두는 헛간에는 카펫 제작소가 설치되었으며 벽걸이용 태피스트리도 이곳에서 생산되었다.
켐스콧 저택에 대한 애착이 유달랐던 그는 1878년에 런던의 해머스미스Hammersmith에 집을 산 뒤 ‘켐스콧 하우스’라고 불렀다.


켐스콧 출판사는 개인 인쇄소의 선구자가 되었다.
중세의 채색필사본을 참고로 하여 북 디자인과 출판기술을 혁신시키고자 한 모리스는 장식적인 글자체와 가장자리 장식, 활자서체를 디자인했으며 특히 중세의 고딕활자를 부활시켰다.
켐스콧 출판사의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는 중세 시문학자 제프리 초서의 작품집 <켐스콧 초서 The Kelmscott Chaucer>였다.
556페이지 분량의 이 책에는 번-존스가 그린 86점의 목판화와, 모리스가 가선장식(책 가장자리 장식), 표지, 장식글자를 위해 그린 600점이 넘는 디자인을 포함되었다.
제작하는 데 5년이 소요된 <켐스콧 초서>는 가장 비용이 많이 든 프로젝트였다.
<켐스콧 초서>는 모리스가 타계하기 몇 달 전인 1896년 10월 3일에 출간되었다.


모리스의 중세주의에는 낭만적 요소도 있었고, 이런 요소는 그와 공동으로 일했던 라파엘전파 미술가들에게 좀 더 현저한 특징으로 그들이 디자인 분야에서 한 작업도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1892년 켐스콧 출판사에서 다시 찍어낸 모리스의 사회주의 산문 <존 볼의 꿈 A Dream of John Ball>(1886-67)의 첫 페이지는 그가 지속해온 공동 작업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서 모리스는 본문과 레터링을 맡았고 번-존스는 그것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삽화를 담당했다.
<존 볼의 꿈>에서 근대의 화자는 자신이 1381년 농민혁명 시대에 켄트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농민혁명은 1351년에 의회가 농업노동자의 임금을 동결하는 노동자조례를 통과시킨 데 대한 불만으로 1381년 와트 타일러Wat Tyler가 잉글랜드 남부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반란의 주도자 와트 타일러가 살해됨으로써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농노제 폐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존 볼의 꿈>의 본문에는 농민들이 외치던 구호인 ‘아담이 땅을 파고 이브가 실을 잣던 시절에 누가 신사였는가?
When Adam delved and Eve span/ Who was then the gentleman?'가 적혀 있다.


켐스콧 출판사는 존속한 8년 동안의 기간에 53권의 책을 발간했다.
이 출판물 가운데 모리스의 첫 번째 저작인 <반짝이는 평야에 관한 이야기 The Story of the Glitting Plain>를 포함하여 그의 저작만 23권, 중세 작가들의 저작 22권 그리고 나머지는 동시대 서정시인들의 작품집이었다.


모리스는 근대문명에 대한 증오에 이끌려 정치활동에도 관여했다.
그는 1883년에 사회주의민주연맹에 가입하고 ‘사회주의자를 위한 노래’를 썼다.
1882년에 카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1818-83)의 <자본론 Das Kapital>(1867)을 읽고 자신의 신념이 그 책에서 증명된 것을 발견했다.
현재 <자본론>은 3권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마르크스가 자신의 손으로 간행한 것은 제1권 자본의 ‘생산과정’(1867)뿐이며 그가 타계한 뒤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1820-95)가 유고를 정리하여 1885년에 제2권 ‘자본의 유통과정’, 1894년에 제3권 ‘자본제적 생산의 총 과정’이 출간되었다.
<자본론>은 시민사회,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의도한 것이다.
모리스는 2년 동안 전국을 여행하며 보다 인간적인 미래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강연했다.
그는 급진주의적 성향 때문에 마침내 체포되었지만 예술가로서 그리고 문학가로서의 사회적 위치를 고려하여 곧 석방되었다.
그는 1890년대에도 정치적 활동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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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행의 원인은 다양하다

『아동 미술치료 Child Art Therapy』, 주디스 아론 루빈(2010, 출판사 知와 사랑) 중에서


『아동 미술치료』의 저자 주디스 아론 루빈은 아동 미술 활동이 어디에서 시작되며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이해하려면 주기적으로 변화무쌍한 정상 발달 과정의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성장해가면서 미술 능력 또한 발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퇴행의 징후를 보이기도 한다.

발달은 단순한 직선 움직임이 아니다.

아이들의 발달에는 ‘이보 전진, 일보 후퇴’라는 오래된 말이 딱 들어맞는다.

아이들의 미술 실력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보인다.

주디스 아론 루빈은 아동의 미술 발달 퇴행이 형태, 내용, 구성, 사고 과정의 네 가지 면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 중 어린 시절의 표현방식으로 되돌아가는 형태의 퇴행이 가장 흔하게 일어나며 알아차리기도 쉽다.

내용의 퇴행이란 발달 초기와 관련된 상징적 재료로 돌아가는 것이다.

내용의 퇴행은 비교적 뚜렷이 나타나는 편이지만, 때로는 상징적이거나 추상적인 표현 속에 의미를 감추고 있는 경우도 있다.

구성의 퇴행과 연관 있는 사고 과정의 퇴행은 정신병적인 상태나 몽상, 환상에 사로잡힌 상태를 특징으로 한다.

프로이트가 정의한 ‘일차 과정primary process’이 여기에 해당한다.

일차 과정이란 원하는 바나 욕구를 어떤 수고나 노력도 거치지 않고 곧장 얻고자 하는 마음을 일컫는다.

어떤 아이가 실제적인 시간이나 공간 개념에서 벗어난 초현실적이고 몽환적인 느낌의 그림을 그렸다면 사고 과정의 퇴행을 의심해보아야 한다.

이는 원시적이고 비논리적인 사고방식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만든 결과물만을 보고 미술 활동의 발달이나 퇴행을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물론 아이들이 만든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아이에게 공격적-파괴적 충동이 있음을 추측할 수 있는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충동은 자율성을 추구하는 건설적인 욕구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퇴행의 원인은 다양하며, 때로는 새로운 미술 도구를 사용하는 것 같은 외부 자극으로 인해 퇴행이 나타나기도 한다.

예컨대 주로 크레용을 가지고 미술 활동을 하던 아이에게 초크를 주면 경계선을 흐릿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쉽다.

아이들의 미술 활동은 가까이 있는 타인에게 큰 영향을 받기도 한다.

예를 들면 항상 사람의 형태를 깔끔하게 그리던 소년이 집단 미술치료에 함께 참여하는 옆자리 친구가 시작하고 나서야 자신도 미술 활동을 시작하는 것을 꼽을 수 있다.

미술 활동을 할 때 늘 신중한 태도를 보이던 소년이 다른 아이의 옆자리에 앉을 때만은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피로 같은 내부적인 요인도 퇴행을 유발할 수 있다.

아이들의 내부 요인 중 퇴행을 유발하는 가장 흔한 원인은 스트레스이다.

하지만 형태의 퇴행을 유발하는 가장 큰 요인은 때 묻지 않은 순진한 논리이다.

모순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아동 미술에서 나타나는 퇴행의 또 다른 주요 원인은 발달 혹은 성장이다.

낡은 도식을 버리고 새로운 도식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두서없고 어색하거나 서투른 표현이 나타나기도 한다.

아동 미술 활동에서 나타나는 무질서는 언뜻 보기에 흉할 수 있지만, 실은 그 아이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미술치료사는 때로 일부러 퇴행을 유도해야 할 수도 있다.

아이의 억압된 마음을 해제시켜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다.

억압 성향이 있는 아이에게는 환경 속에서 마음껏 퇴행해볼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억압에서 해방되어 일시적으로나마 날것 그대로의 공격성을 마음껏 표출해보는 경험은 정서적 승리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일시적 퇴행은 모든 창의적 활동을 할 때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단계이다.

특히 무의식과 전前의식에 도달하려면 일시적 퇴행을 꼭 경험해야 한다.

의식적 통제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놀이하듯 창조하는 행위는 퇴행이 아니라 용기 있는 진전이다.

심리학자 에른스트 크리스Ernst Kris(1900-57)가 말한 ‘자아를 위한 퇴보regression in the service of the ego’는 예술가들의 창조성에서 발견되는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용어이지만, 어린이들에게도 적용된다.

의도적으로 의식의 작용과 통제에서 벗어나 자신을 마음껏 표현하려는 아이는 ‘자아를 위한 퇴보’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퇴행이 자유와 해방의 징후인지, 아니면 단순히 무질서와 분열의 징후인지 판단하려면, 이후에 나타나는 아이의 행동과 아이가 만든 작품을 관찰해야 한다.

건강한 퇴행은 에너지를 방출시켜 이후의 성장과 발달을 촉진시킨다.

건강하지 못한 퇴행은 성장을 저해한다.

건강한 발달을 촉진하는 퇴행과 그렇지 못한 퇴행의 차이는 퇴행이 발생하는 동안과 그 이후를 관찰하면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즉 아이들의 작품에서 형태, 내용, 구성, 사고 과정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그런데 아이의 미술 활동이 퇴행하고 있는지 발달하고 있는지 신경 쓰면 쓸수록, 아이의 작품이 더욱 복잡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아이의 행동을 함께 관찰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퇴행은 내부적, 외부적 다양한 원인에 의해 발생할 수 있다.

재료나 사회적 맥락 같은 외부적 요인과 더불어 아동이 얼마나 경계심을 느끼고 있는지, 얼마나 피로한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얼마나 편안하게 느끼는지 같은 내부적 요인, 그리고 성장 그 자체 등이 퇴행을 유발할 수 있다.

퇴행은 아동이 스스로 통제하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아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퇴행이 선행하거나 뒤따라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아동 발달 전반과 관련된 일반적인 맥락과 더불어 미술 발달의 맥락을 모두 고려해 평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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