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행의 원인은 다양하다

『아동 미술치료 Child Art Therapy』, 주디스 아론 루빈(2010, 출판사 知와 사랑) 중에서


『아동 미술치료』의 저자 주디스 아론 루빈은 아동 미술 활동이 어디에서 시작되며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이해하려면 주기적으로 변화무쌍한 정상 발달 과정의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성장해가면서 미술 능력 또한 발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퇴행의 징후를 보이기도 한다.

발달은 단순한 직선 움직임이 아니다.

아이들의 발달에는 ‘이보 전진, 일보 후퇴’라는 오래된 말이 딱 들어맞는다.

아이들의 미술 실력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보인다.

주디스 아론 루빈은 아동의 미술 발달 퇴행이 형태, 내용, 구성, 사고 과정의 네 가지 면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 중 어린 시절의 표현방식으로 되돌아가는 형태의 퇴행이 가장 흔하게 일어나며 알아차리기도 쉽다.

내용의 퇴행이란 발달 초기와 관련된 상징적 재료로 돌아가는 것이다.

내용의 퇴행은 비교적 뚜렷이 나타나는 편이지만, 때로는 상징적이거나 추상적인 표현 속에 의미를 감추고 있는 경우도 있다.

구성의 퇴행과 연관 있는 사고 과정의 퇴행은 정신병적인 상태나 몽상, 환상에 사로잡힌 상태를 특징으로 한다.

프로이트가 정의한 ‘일차 과정primary process’이 여기에 해당한다.

일차 과정이란 원하는 바나 욕구를 어떤 수고나 노력도 거치지 않고 곧장 얻고자 하는 마음을 일컫는다.

어떤 아이가 실제적인 시간이나 공간 개념에서 벗어난 초현실적이고 몽환적인 느낌의 그림을 그렸다면 사고 과정의 퇴행을 의심해보아야 한다.

이는 원시적이고 비논리적인 사고방식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만든 결과물만을 보고 미술 활동의 발달이나 퇴행을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물론 아이들이 만든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아이에게 공격적-파괴적 충동이 있음을 추측할 수 있는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충동은 자율성을 추구하는 건설적인 욕구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퇴행의 원인은 다양하며, 때로는 새로운 미술 도구를 사용하는 것 같은 외부 자극으로 인해 퇴행이 나타나기도 한다.

예컨대 주로 크레용을 가지고 미술 활동을 하던 아이에게 초크를 주면 경계선을 흐릿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쉽다.

아이들의 미술 활동은 가까이 있는 타인에게 큰 영향을 받기도 한다.

예를 들면 항상 사람의 형태를 깔끔하게 그리던 소년이 집단 미술치료에 함께 참여하는 옆자리 친구가 시작하고 나서야 자신도 미술 활동을 시작하는 것을 꼽을 수 있다.

미술 활동을 할 때 늘 신중한 태도를 보이던 소년이 다른 아이의 옆자리에 앉을 때만은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피로 같은 내부적인 요인도 퇴행을 유발할 수 있다.

아이들의 내부 요인 중 퇴행을 유발하는 가장 흔한 원인은 스트레스이다.

하지만 형태의 퇴행을 유발하는 가장 큰 요인은 때 묻지 않은 순진한 논리이다.

모순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아동 미술에서 나타나는 퇴행의 또 다른 주요 원인은 발달 혹은 성장이다.

낡은 도식을 버리고 새로운 도식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두서없고 어색하거나 서투른 표현이 나타나기도 한다.

아동 미술 활동에서 나타나는 무질서는 언뜻 보기에 흉할 수 있지만, 실은 그 아이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미술치료사는 때로 일부러 퇴행을 유도해야 할 수도 있다.

아이의 억압된 마음을 해제시켜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다.

억압 성향이 있는 아이에게는 환경 속에서 마음껏 퇴행해볼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억압에서 해방되어 일시적으로나마 날것 그대로의 공격성을 마음껏 표출해보는 경험은 정서적 승리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일시적 퇴행은 모든 창의적 활동을 할 때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단계이다.

특히 무의식과 전前의식에 도달하려면 일시적 퇴행을 꼭 경험해야 한다.

의식적 통제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놀이하듯 창조하는 행위는 퇴행이 아니라 용기 있는 진전이다.

심리학자 에른스트 크리스Ernst Kris(1900-57)가 말한 ‘자아를 위한 퇴보regression in the service of the ego’는 예술가들의 창조성에서 발견되는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용어이지만, 어린이들에게도 적용된다.

의도적으로 의식의 작용과 통제에서 벗어나 자신을 마음껏 표현하려는 아이는 ‘자아를 위한 퇴보’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퇴행이 자유와 해방의 징후인지, 아니면 단순히 무질서와 분열의 징후인지 판단하려면, 이후에 나타나는 아이의 행동과 아이가 만든 작품을 관찰해야 한다.

건강한 퇴행은 에너지를 방출시켜 이후의 성장과 발달을 촉진시킨다.

건강하지 못한 퇴행은 성장을 저해한다.

건강한 발달을 촉진하는 퇴행과 그렇지 못한 퇴행의 차이는 퇴행이 발생하는 동안과 그 이후를 관찰하면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즉 아이들의 작품에서 형태, 내용, 구성, 사고 과정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그런데 아이의 미술 활동이 퇴행하고 있는지 발달하고 있는지 신경 쓰면 쓸수록, 아이의 작품이 더욱 복잡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아이의 행동을 함께 관찰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퇴행은 내부적, 외부적 다양한 원인에 의해 발생할 수 있다.

재료나 사회적 맥락 같은 외부적 요인과 더불어 아동이 얼마나 경계심을 느끼고 있는지, 얼마나 피로한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얼마나 편안하게 느끼는지 같은 내부적 요인, 그리고 성장 그 자체 등이 퇴행을 유발할 수 있다.

퇴행은 아동이 스스로 통제하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아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퇴행이 선행하거나 뒤따라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아동 발달 전반과 관련된 일반적인 맥락과 더불어 미술 발달의 맥락을 모두 고려해 평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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