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엔드리스 하우스>의 모형


작은 <엔드리스 하우스>의 모형은 양치식물의 잎사귀모양을 한 환상적인 배경에 의해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한층 더했다.
이 같은 비현실적인 이미지 때문에 <엔드리스 하우스>가 실현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건축물은 결코 건조될 수 없는 가공의 것이 아니었다.
구조적인 측면에서는 철근이 들어간 플라스틱이나 콘크리트를 틀에 부어 만드는 것을 생각했다.
이 같은 공법을 선택할 경우 틀만 제작한다면 양산도 가능하다.
각체의 두께는 기저부에서는 1피트지만, 위로 갈수록 하중이 작아지므로 상단부는 2.5인치가 된다.
또한 3-6피트 간격으로 사용되는 보강재는 안쪽으로 몇 인치 나와 있다.
보강재 사이에 단열재를 집어넣어 그 위에 실내벽 처리를 한다.
결과적으로 외각과 내각으로 2중의 각체구조를 지니게 된다.
이 같은 아이디어는 이미 1923년 <엔드리스 극장>안을 통해서 제안된 이중유리의 각체구조와 같다.
이중벽구조는 1928년 ‘뉴욕 5번가 백화점 프로젝트’5)에도 이용되었었다.
키슬러는 <엔드리스 하우스>의 시공에 보강재를 쓰지 않는 공법도 고려했다.
직경 0.5인치의 금속봉으로 철망을 만들고,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새장과 같은 구체 위에 두께 2.5인치가 되도록 콘크리트를 뿌려 바르는 방법이다.
이 같은 방법은 후에 <엔드리스 하우스> 최종안(1950-1959)의 모형제작이나 환경조각 갤럭시 시리즈에 이용되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이 같은 공법에 의한 구형건축은 그다지 희귀한 것이 아니다.
어쨌든 키슬러의 <엔드리스 하우스>는 구조적인 공법에 있어 실현 가능한 기술적 배경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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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빨의 집> 드로잉





앞 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엔드리스 하우스>는 1950년 쿠츠 화랑 전람회를 통해 발표된 것이다.
따라서 키슬러가 <엔드리스 하우스>안을 구체화한 것도 이 전람회를 통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1975년 뉴욕에서 필자가 키슬러의 미망인 릴리안 키슬러를 만났을 때, 그녀는 이미 발표된 연작 드로잉을 보여 주었다.6)
여기 소개하는 <이빨의 집>이 그 중 하나이다.
8장으로 된 드로잉은 마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처럼 아이디어의 발전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첫 번째 드로잉에서는 ‘Tooth house’라는 글씨가 커다란 어금니와 같은 형태의 안쪽에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이 안의 제목이다.
두 번째 드로잉에는 상하의 턱이 맞물려 있는 듯한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엔드리스’의 상징인 동시에 각체구조의 기본특성을 나타내준다.
비교적 단순한 3번째 드로잉은 이빨 하나가 굴려져 있는 듯이 보인다.
가운데의 둥근 부분에서 방사선상으로 뻗은 3개의 선이 이빨형태를 분할하는데, 분할된 3형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네 번째 그림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키슬러는 주택의 주요 기능을 크게 3가지로 나누어 생각한 것이다.
이 드로잉은 다음에 열거하는 각각의 기능에 대응하는 3개의 공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1. 생활 공간

2. 작업 공간

3. 개인 공간


하나의 쉘터 안에서 가족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공동생활을 위한 생활 공간과 공방 역할을 하는 작업 공간, 그리고 욕실과 침실이 있는 개인 공간이 필요하다.
<이빨의 집>은 이 같은 기능을 구비한 주택계획을 드로잉한 것인데, 네 번째 드로잉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전부 3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섯 번째 드로잉은 기복 있는 대지에 놓여 있는 <이빨의 집>을 그리고 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형태의 주택이 그려져 있는 여섯 번째 드로잉의 사각상자형 부분은 설비를 넣어두는 곳인지 입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다음 드로잉은 단면을 나타낸 것으로 빗물의 배수방법 등이 그려져 있다.
빗물은 집 안을 통해 밑으로 빠져 아래쪽의 연못으로 흘러 들어간다.
마지막 드로잉은 <이빨의 집>이 놓여진 상황을 주위풍경과 함께 그린 것이다.
배수된 빗물을 담아두는 연못이 그려져 있는 초현실적인 이미지는 초현실주의자 이브 탕기의 회화를 연상하게 한다.


이상에서 소개한 <이빨의 집> 드로잉은 대단히 짧은 시간에 그려진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빨의 집>의 개념이 1950년에 제작된 <엔드리스 하우스>의 원형이라고 보는 것도 여기에 소개한 일련의 드로잉 이미지와 3개의 기능으로 나뉘어진 공간구분 등이 같다는 점에 근거한 추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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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엔드리스 하우스>의 조명연출


<엔드리스 하우스>의 도면을 보면 거주공간에 대한 키슬러의 철학을 알 수 있다.
우선 주택의 출입구는 위쪽과 아래쪽에 각각 마련되어 있으며, 위쪽 입구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안쪽에는 다음과 같은 공간이 있다.


1. 공동생활 공간

2. 식당과 부엌

3. 어린이 놀이방 및 공방

4. 개인 휴식공간 및 침실


가족이 그룹으로 생활할 수 있는 활동공간이 가장 넓다.
식당과 부엌은 연속되어 있으면서도 공간적으로는 분리되어 있다.
일을 하기 위한 공간인 부엌과 공방이 같은 방향으로 연속되어 있다.
한편 소리의 문제를 고려한 결과 공방과 어린이를 위한 놀이방의 반대편에 방음 처리된 서재가 위치한다.
그 사이에 3개의 개인용 공간이 있는데, 이것은 단지 침실로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놀이방 역할을 하는 공간으로 설계되었다.
주택은 가족 간의 의사소통의 장이며, 생산적 공방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장이고, 지식을 축적하는 지적 활동의 장이며, 각자 개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휴식의 장이어야 한다.
이 같은 목적을 충족시키면서 가족 전체의 생활과 개인생활의 ‘연속성’을 고려한 결과 <엔드리스 하우스>가 탄생된 것이다.


키슬러가 주장하는 ‘연속성’이란 건축물의 구조적인 측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천장, 벽, 바닥에 의해 구분된 공간의 연속성은 물론, 그곳에서 영위되는 생활의 연속성도 포함한다.
만약 <엔드리스 하우스>가 실현된다면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연속성’을 정신적으로 체험하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키슬러는 예민한 상상력을 통해 ‘연속성’을 마치 실제로 체험한 듯이 지각하면서 <엔드리스 하우스>를 설계했던 것이다.


맨하탄에 마천루의 역사가 실증되기 시작한 시기를 살면서 그는 <엔드리스 하우스>를 인간이 만든 우주라고 믿었다.
기계시대의 주택들은 막혀진 방들로 구성되어 있다.
상자 하나가 다른 하나의 옆에, 또 다른 상자가 그 밑과 위에.
결국 그것들은 마천루와 같은 것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편 <엔드리스 하우스> 모형이 발표되자 당시 『인테리어』지의 편집장이던 아서 드렉슬러는 키슬러에게 <엔드리스 하우스>의 조명계획에 관한 원고를 의뢰했다.
「‘엔드리스 하우스’와 심리적 조명」이라고 이름 붙여진 글에서 키슬러는 조명에 관한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있다.


<엔드리스 하우스>는 실용적인 요구 이상의 것이 고려된 조명 시스템이 구비된 건축이다.
태고의 인류가 나뭇가지를 태워 자신들이 살던 동굴의 그늘진 구석을 밝힌 것은 어둠 속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조명기술이 발달하여 자연의 빛과 인공의 빛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제 사물을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실용적인 목적 이상의 것이 요구된다.
조명은 단지 실내공간을 밝게 해준다는 역할을 넘어서서 우리에게 자극적인 색채나 밝은 빛의 반짝거림을 제공해주기도 하고, 의식을 집중시켜주기 위해 명확하게 한정된 공간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것은 학습과 독서 등을 위해서도 필요하며, 천국에서와 같은 휴식을 위해 우리를 잠들게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기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일반적으로 주택에 적용되는 조명은 대개 일반조명과 스포트라이트에 한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모든 문제는 a. 설비, b. 조작, c. 관리 측면을 고려해서 구분되고 있다.
<엔드리스 하우스>는 일반적인 주택보다 조명을 경제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주택처럼 한정된 실내 공간에 가능한 한 많은 방을 만들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빛은 완만한 곡면 위에서 중단되는 일없이 넘쳐흐르고 상호 반사되면서 빛 자체가 증식되어 간다.


각체구조에 기반을 두고 연속적으로 흐르는 듯한 외형을 지닌 <엔드리스 하우스>의 형태는 단지 조각적 아이디어에서 유추된 것이 아니다.
달걀 형태를 모방한 것도 아니다.
이 타원형은 같은 지붕 아래에서 살아가는 2∼3세대가 집단으로 생활하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다이나미즘’을 고려한 결과 탄생한 것이다.
집단생활을 고려한다면 리빙룸과 같은 공간은 보통보다 2배에서 3배에 이르는 높이와 넓이가 필요하며, 침실과 같은 개인적인 공간은 8피트 평방미터 정도면 충분하다.


완만한 곡면을 지닌 각체 주택에서는 조명을 구석구석에 동일하게 비출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예를 들어 수직 및 수평, 그리고 대각선 등 다양한 방향으로 집중조명을 비추는 것이 가능하다.
흰색 니트로 된 카페트-눈에 자극을 주는 것보다는 부분적으로 빛을 흡수하는 것이 좋다-위에 천장에 달린 스포트라이트로부터 비추어진 빛이 반사되어 보다 넓은 영역으로 확산되어간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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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원의 조절방법은 사각형 창문에 적용되는 경우가 보통이다


주간의 빛에 대해서는 또 다른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엔드리스 하우스>에서는 빛을 제어하는 세 가지 기술적 수단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⑴ 필요한 범위를 잘라낼 수 있다.-일반적으로는 창을 열어두는 것에 해당한다-이것으로 외부의 빛이 실내에 침투한다.
우리는 그것을 크게도 하고 작게도 한다.
또한 동그랗게도 삼각형으로도 할 수 있다.

⑵ 빛이 들어오는 구멍이나 통로에 유리나 플라스틱, 또는 반투명의 직물 등을 이용한 확산막으로 빛을 차단시킬 수 있다.

⑶ 빛이 들어오는 구멍은 빛의 강도를 줄여 부드럽게 한다거나, 옆으로 치우치게 할 수 있는 덮개-차양, 지붕창, 덧문 등-을 이용해 감출 수 있다.3


이 같은 광원의 조절방법은 사각형 창문에 적용되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러나 키슬러는 창문이 꼭 사각형일 필요가 없으며, 수직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실내공간의 용도에 따라 각체구조의 일부를 잘라내면 되는 것이다.
키슬러의 제안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광선조절방법은 마치 무대조명이 무대공간에서 진행되는 극의 상황에 따라 변화되는 것과 같다.
극장건축가로 일한 바 있는 키슬러의 전력이 <엔드리스 하우스>의 조명계획에 반영된 것인데 여기서 보여준 빛의 제어방법에는 아주 독창적인 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광원 자체에 대해서는 소홀하기 쉽다.
물론 태양광선을 제어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러나 건축가의 손을 거치면 태양광선은 렌즈를 이용해 집중시킬 수도, 그 빛을 구부러진 거울을 통해 반사시켜 확산시킬 수도 있다.


키슬러는 이것을 ‘색채시계’라고 불렀다.


세 가지 색으로 된 프리즘과 같은 수정유리에 외부광선을 통과시켜 여명에서 석양에 이르기까지 천천히 실내공간의 조명을 변화시킬 수 있다.
광선은 우묵한 거울을 통해 실내공간에 이르게 된다.
집 안의 사람들은 자신의 주위에 펼쳐지는 빛의 색을 통해 시간을 짐작할 수 있다.
기계장치에 의해 움직이는 시계는 생활을 분별로 분열시키는 데 반해, 색채시계는 사람들에게 시간의 연속성을 지각하게 한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자연의 힘이 그들의 생활을 활기차게 해준다는 사실을 지각하게 된다.4


이상의 언급에서 우리는 인공 환경과 자연환경과의 상호관계에 주목한 ‘상호현실주의’의 논리가 개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키슬러는 여기서도 ‘상호현실주의’의 실천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을 한 것이다.


키슬러는 각 방의 채광과 조명방법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예를 들어 생활공간을 위한 커다란 조망창이나, 태양광이 직접 들어오는 어린이 방의 동그란 창, 그리고 침실을 위한 삼각형 개구부 등이 그것이다.
이 같은 채광방법은 공간의 기능적인 측면을 고려한 결과 유추된 것이다.
또한 건축가의 공학적 목적이나 미학적 형태에 의해 그 안에서의 생활이 제약받는 일이 없도록 배려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 밖에도 키슬러는 다음과 같은 조명수단을 제시하고 있다.


⑴ 여행하는 광선. 손수레에 실린 비교적 어두운 광원으로 필요에 따라 옮길 수 있는 것.

⑵ 유연한 빛.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빛의 강약을 조절할 수 있는 것.

⑶ 일렉트릭 아이. 살고 있는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밝게도 되고, 어둡게도 되고, 꺼져버리기도 하는 자동제어장치 시스템.


이상과 같은 3가지 조명수단도 연극에서 사용되는 조명을 응용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제안을 마치면서 키슬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들 전부는 실현 가능한 것으로 조명기술전문가에게 의뢰한다면 어느 집에도 설치할 수 있다.
실제로 내가 7년 전 ‘금세기 예술’화랑에서 이 같은 조명수단을 기획의 초기단계에 실시한 적이 있으나 거의 문제가 없었다.
이 조명계획은 <엔드리스 하우스>와 마찬가지로 실제로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키슬러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엔드리스 하우스>의 실현에 동조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엔드리스 하우스>에서 시도된 공간의 연속적인 구성을 실험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 왔다.
‘월드 하우스’화랑의 설계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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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월드 하우스’화랑의 공간연출


처음 만들어진 작은 <엔드리스 하우스> 모형은 1952년 뉴욕 근대미술관이 구매했다.
이후 얼마 동안 키슬러의 프로젝트는 시간의 흐름 속으로 사라져가는 듯했다.
1958년 뉴욕 근대미술관은 건축과 디자인 분야를 대상으로 하는 D. S.와 R. H. 고테스만 기금을 키슬러의 <엔드리스 하우스> 프로젝트에 지원했다.
내용을 보면 <엔드리스 하우스>의 시공도면과 기술적 연구, 그리고 모형제작이 포함되었다.
8년 만에 다시 한 번 <엔드리스 하우스> 연구를 착수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1960년에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발표된 <엔드리스 하우스> 최종안이 그것이다.


1957년 키슬러는 컬럼비아 대학의 ‘디자인 상호관련연구소’에서 지도한 제자 아망 바토스와 함께 건축사무소를 설립하여 1962년까지 약 6년에 걸쳐 각종 건축설계에 관여했다.
‘월드 하우스’화랑도 그 중 하나이다.7)


이 중에서도 ‘월드 하우스’화랑은 연속적인 공간구성을 통해 ‘엔드리스’개념을 실제로 구체화한 예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엔드리스 하우스>는 길이 1피트의 작은 모형에 불과했으며, 페기 구겐하임의 ‘금세기 예술’ 화랑의 전시공간설계에서도 독창적인 공간을 연출했지만 건축구조에 이르기까지 설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월드 하우스’화랑의 경우도 건축물 자체는 설계하지 않았으나, 화랑공간의 구조를 디자인 대상으로 한 ‘엔드리스’의 구체적인 실현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월드 하우스’화랑 설계에 앞서 키슬러는 당시의 잡지에 발표한 에세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제기했다.


생각해보면 오늘날의 예술가에게 최고의 친구는 부와 명성을 얻어주는 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좋은 화랑이란 다양한 ‘아티펙트-이제부터라도 이 용어를 일반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수익성 좋은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에세이는 결코 예술이 생산되고, 진열되고, 거래가 이루어지는 이른바 사회경제적 상황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몇 개의 장으로 나누어 화랑 공간의 디자인에 임하는 건축가의 역할을 기술한 에세이이다.
다시 말하면 건축가가 자신의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 것인가에 대해서 적은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공’이란 화상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회화나 조각작품을 보다 좋은 조건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을 성공시킨다면 좋은 건축가라는 평판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건축가는 스스로의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이 된다.
따라서 건축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즉 건축가는 예술품 판매계의 공범자이며, 음흉한 명령에 충실히 임하여 자신의 지위를 지켜야 한다.


이같이 난해한 상황에서 건축가가 취해야하는 무난하면서도 최선의 선택은 무엇인가?
결국 건축가는 화상이 그림을 팔고 화가의 생활이 유지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는 소극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그 같은 행위가 예술을 프로모션 하는 행위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모든 디자이너에게 예술과 건축의 장식물로서, 상류사회의 장식물로서, 끊임없이 경쟁을 계속하는 광고의 장식물로서의 역할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소박하면서도 매혹적인 것이다.
도덕적인 의문은 여기서는 고려대상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경쟁 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술과 상업주의에 관한 도덕적인 의문은 건축가에게 이미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이 문제는 이미 오래 전에 결정된 바 있다.
이미 끝난 사실을 다시 한 번 거론하는 것은 건축가의 전략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게다가 건축가는 실제로 회화나 조각을 전시하기 위한 형태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느끼지 않는다.
그 책임은 화상이나 작가에게 위임되는 것이다.5


키슬러의 이 격렬한 에세이는 미술시장뿐만 아니라, 미술계에 영합하는 건축가의 책임회피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이 에세이가 쓰여진 후 2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상황은 무엇 하나 변한 것이 없다.
미술관은 건축가의 작품이고 나머지는 큐레이터의 몫이다.
계속해서 키슬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건축가의 작업이 ‘순수한 비지니스’라고 한다면 그들은 ‘순수한 예술’에 대해서 어떠한 도덕적 책임도 질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 경우의 건축가는 단지 기능주의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건축가는 기술적으로 가능한 한 필요 이상의 조명이 설치된 벽면을 준비하고, 사용 가능한 경비의 전부를 투자해 의자나 벤치를 설치하고, 몇몇 식물을 장식하고, 마지막으로 부드러운 카펫을 깐다.
다시 말하면 건축가는 화상이나 예술가가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건축가의 ‘과욕’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 만다.
화상은 돈을 절약하고자 할 것이며-그렇게 절약한 돈으로 다른 일을 계획한다-, 예술가는 예술가대로 이 같은 ‘과욕’에 의해 자신들의 작품이 왜소해 보이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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