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월드 하우스’화랑의 공간연출


처음 만들어진 작은 <엔드리스 하우스> 모형은 1952년 뉴욕 근대미술관이 구매했다.
이후 얼마 동안 키슬러의 프로젝트는 시간의 흐름 속으로 사라져가는 듯했다.
1958년 뉴욕 근대미술관은 건축과 디자인 분야를 대상으로 하는 D. S.와 R. H. 고테스만 기금을 키슬러의 <엔드리스 하우스> 프로젝트에 지원했다.
내용을 보면 <엔드리스 하우스>의 시공도면과 기술적 연구, 그리고 모형제작이 포함되었다.
8년 만에 다시 한 번 <엔드리스 하우스> 연구를 착수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1960년에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발표된 <엔드리스 하우스> 최종안이 그것이다.


1957년 키슬러는 컬럼비아 대학의 ‘디자인 상호관련연구소’에서 지도한 제자 아망 바토스와 함께 건축사무소를 설립하여 1962년까지 약 6년에 걸쳐 각종 건축설계에 관여했다.
‘월드 하우스’화랑도 그 중 하나이다.7)


이 중에서도 ‘월드 하우스’화랑은 연속적인 공간구성을 통해 ‘엔드리스’개념을 실제로 구체화한 예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엔드리스 하우스>는 길이 1피트의 작은 모형에 불과했으며, 페기 구겐하임의 ‘금세기 예술’ 화랑의 전시공간설계에서도 독창적인 공간을 연출했지만 건축구조에 이르기까지 설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월드 하우스’화랑의 경우도 건축물 자체는 설계하지 않았으나, 화랑공간의 구조를 디자인 대상으로 한 ‘엔드리스’의 구체적인 실현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월드 하우스’화랑 설계에 앞서 키슬러는 당시의 잡지에 발표한 에세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제기했다.


생각해보면 오늘날의 예술가에게 최고의 친구는 부와 명성을 얻어주는 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좋은 화랑이란 다양한 ‘아티펙트-이제부터라도 이 용어를 일반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수익성 좋은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에세이는 결코 예술이 생산되고, 진열되고, 거래가 이루어지는 이른바 사회경제적 상황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몇 개의 장으로 나누어 화랑 공간의 디자인에 임하는 건축가의 역할을 기술한 에세이이다.
다시 말하면 건축가가 자신의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 것인가에 대해서 적은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공’이란 화상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회화나 조각작품을 보다 좋은 조건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을 성공시킨다면 좋은 건축가라는 평판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건축가는 스스로의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이 된다.
따라서 건축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즉 건축가는 예술품 판매계의 공범자이며, 음흉한 명령에 충실히 임하여 자신의 지위를 지켜야 한다.


이같이 난해한 상황에서 건축가가 취해야하는 무난하면서도 최선의 선택은 무엇인가?
결국 건축가는 화상이 그림을 팔고 화가의 생활이 유지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는 소극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그 같은 행위가 예술을 프로모션 하는 행위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모든 디자이너에게 예술과 건축의 장식물로서, 상류사회의 장식물로서, 끊임없이 경쟁을 계속하는 광고의 장식물로서의 역할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소박하면서도 매혹적인 것이다.
도덕적인 의문은 여기서는 고려대상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경쟁 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술과 상업주의에 관한 도덕적인 의문은 건축가에게 이미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이 문제는 이미 오래 전에 결정된 바 있다.
이미 끝난 사실을 다시 한 번 거론하는 것은 건축가의 전략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게다가 건축가는 실제로 회화나 조각을 전시하기 위한 형태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느끼지 않는다.
그 책임은 화상이나 작가에게 위임되는 것이다.5


키슬러의 이 격렬한 에세이는 미술시장뿐만 아니라, 미술계에 영합하는 건축가의 책임회피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이 에세이가 쓰여진 후 2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상황은 무엇 하나 변한 것이 없다.
미술관은 건축가의 작품이고 나머지는 큐레이터의 몫이다.
계속해서 키슬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건축가의 작업이 ‘순수한 비지니스’라고 한다면 그들은 ‘순수한 예술’에 대해서 어떠한 도덕적 책임도 질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 경우의 건축가는 단지 기능주의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건축가는 기술적으로 가능한 한 필요 이상의 조명이 설치된 벽면을 준비하고, 사용 가능한 경비의 전부를 투자해 의자나 벤치를 설치하고, 몇몇 식물을 장식하고, 마지막으로 부드러운 카펫을 깐다.
다시 말하면 건축가는 화상이나 예술가가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건축가의 ‘과욕’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 만다.
화상은 돈을 절약하고자 할 것이며-그렇게 절약한 돈으로 다른 일을 계획한다-, 예술가는 예술가대로 이 같은 ‘과욕’에 의해 자신들의 작품이 왜소해 보이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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