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의 인생을 생생하게 묘사한 마네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예술가가 자신의 시대에 관련된 것들에 솔직하지 못하다면 그는 잘못된 작품을 생산하게 될 것이다.


현대 화가는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구별한다고 본 시인 보들레르가 한 말입니다. 보들레르가 작가로 데뷔하면서 처음 출간한 작품은 『1845년의 살롱』이었습니다. 미술 비평에 대한 대담성으로 인해 이 책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는 외젠 들라크루아를 높이 평가했고, 그의 평가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보들레르는 1846년에도 두 번째 살롱 평론을 발표했으며, 낭만주의의 변호사 그리고 비평가라는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의 첫 시집이며 그를 유명하게 만든 「악의 꽃」이 출간된 건 1857년이었습니다. 그는 1859-60년에 쓴 글을 모아 『현대 인생의 화가』란 제목으로 1863년에 출간했습니다. 마네는 보들레르의 평론에 공감했으며 화가란 이미지에 대한 해석자 그 이상이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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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소파에 앉아 있는 보들레르의 애인 La Maitresse de Baudelaire Couchee>, 1862-63, 유화, 90-113cm.

마네는 형처럼 따른 보들레르를 종종 방문했으며, 그의 애인을 캔버스에 담았습니다. 잔느 뒤발Jeanne Duval이란 이름의 이 여인은 낭트에서 온 매춘부의 딸로 흑백 혼혈인데 보들레르가 1842년부터 교제했습니다. 보들레르의 어머니는 잔느를 모든 방법으로 아들을 고문하는 ‘검은 비너스Black Venus’이며 기회가 생길 때마다 아들에게서 돈을 뜯어내는 여인으로 묘사했습니다. 1844년에 아버지의 유산을 절반 탕진한 보들레르는 정기적으로 어머니를 찾아가 작가로 성공할 수 있도록 돈을 요구했습니다. 보들레르는 책과 미술작품, 골동품을 사들이는 댄디로 통했습니다. 잔느가 1859년에 중풍 발작을 일으키고 반신불수가 되자 보들레느는 그녀를 보살피기 위해 그녀와 동거했습니다. 이 시기에 보들레르는 에드가 앨런 포Edgar Allan Poe(1809-49)의 유일한 장편소설로 상상 속의 남극을 무대로 한 환상과 공포의 향연 『아서 고든 핌의 모험 The Narrative of Arthur Gordon Pym』을 번역하고, 작가론 『피에르 쥘 테오필 고티에 Pierre Jules Théophile Gautier』와 『리처드 바그너와 탄호이저 Richard Wagner and Tannhauser』라는 평론을 쓰는 등 작문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이 보들레르는 매독이 재발하고 빚에 쪼들려 자살 충동을 느껴 칼로 자신을 상처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브뤼셀로 1864년에 가서 책을 출간하고 강연을 하려고 했지만 출판계가 그에게 냉담했습니다.

보들레르는 잔느를 가리켜서 “수수께끼 같은 눈을 하고, 정복적이며, 의지가 강하고 ... 무관심한 악의가 섞인 고양이와 같은 풍모”의 여인이지만, 그렇게 때문에 “아름다움을 형성하는 사랑스러운 풍모”를 지닌 여인이라고 했습니다. 보들레르는 「악의 꽃」을 쓸 때 잔느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었습니다.

이 그림은 원근법이 과장되었으며, 멀리서 바라보는 잔느의 모습이지만 흰 드레스가 차지하는 면이 너무 크고 드레스 사이로 빠져나온 다리가 유난히 작으며 오른손을 오히려 큽니다. 한 번의 포즈로 그린 것이라서 미숙한 부분이 많습니다.



마네는 열한 살 연상의 보들레르의 시를 애독했을 뿐 아니라 그와 우정을 나눴습니다. <압생트 마시는 사람>은 보들레르의 시 「넝마주이들의 포도주 The Ragpickers' Wine」에 나오는 포도주와 대마초에 대한 예찬과 상통하며 집시들의 데카당스Décadence(퇴폐주의)에 대한 마네의 예찬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마네는 보들레르가 말한 ‘현대 인생의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보들레르가 1864년 브뤼셀로 떠나기 전까지 두 사람은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습니다. 보들레르는 마네에게 돈을 꾸기도 하고 그의 화실을 자주 방문했습니다. 1866년 보들레르가 중풍에 걸려 파리로 돌아와 1년도 채 안 되어 사망할 때까지 두 사람의 우정은 지속되었습니다.


1859년 살롱에서 <압생트 마시는 사람>이 낙선한 뒤 친구들과 함께 마네의 화실을 방문한 프루스트와 보들레르가 현대 회화에 관해 토론했습니다. 보들레르가 “결론적으로 작가는 솔직해야 한다”고 하자 마네가 “그건 제가 늘 한 말이 아닙니까? 제가 <압생트 마시는 사람>에서 솔직하지 않았단 말인가요?”라고 응했습니다. 보들레르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자 마네는 “형도 저를 인정하지 않는군요.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저를 인정하지 않는 셈이지요”라고 투덜거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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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튈르리 공원의 음악회 La Musique aux Tuileries>, 1862, 유화, 76.2-118.1cm.

튈르리 공원에서 벌어진 음악회 장면으로 당시 사교계의 풍경이자 프랑스 부르주아 인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작품입니다. 오노레 도미에의 판화나 다른 예술가들의 삽화에서도 파리의 다양한 인생이 나타난 적이 있지만, 사람들만을 테마로 야외생활을 기념비적으로 그린 것은 마네가 처음입니다.

마네는 친구들의 모습을 종종 작품에 삽입시켰는데, 이 작품에도 알아볼 수 있는 마네의 친구들이 있습니다. 왼쪽 끝에 잘려진 인물이 마네이고, 그 옆에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사람은 화가 알베르 드 발레로아, 두 사람 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조각가이자 화가 자차리 아스트뤽입니다. 튈르리 공원에 마네와 함께 온 적이 있는 보들레르는 큰 나무 바로 앞 왼쪽, 아스트뤽의 오른편에 있습니다. 보들레르와 함께 있는 사람은 테오필 고티에이며, 그의 뒤 왼쪽에 앞을 향해 바라보는 얼굴은 화가 앙리 팡탱-라투르입니다. 왼쪽 앞에 앉아 있는 두 여인 가운데 배일을 쓴 여인은 오펜바흐 부인이며, 그 옆에 있는 사람이 사령관 이폴리테 레조슨의 아내입니다. 화면 오른쪽 중앙에서 손을 뒤로 하고 왼편을 향하고 있는 사람은 마네의 동생 외젠입니다. 외젠의 등 뒤로 보이는 안경 쓴 사람이 작곡가 오펜바흐로 마네와 자주 동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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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튈르리 공원의 음악회>의 부분


보들레르와의 잦은 만남에서 마네는 자연히 시인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보들레르는 현대의 인생이 예술의 테마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튈르리 공원의 음악회 La Musique aux Tuileries>는 그런 테마의 회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19세기 파리 시민들의 즐거운 한때를 묘사한 최초의 작품으로 미술사에 기록되었고, 현대인들의 영웅주의 삶을 찬양 내지는 고무시키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마네는 이 작품을 화실에서 그렸지만 마치 정원에서 직접 그린 것처럼 나타났습니다. 프루스트는 1897년 잡지 『블랑슈 Revue Blanche』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마네는 거의 매일 2시에서 4시 사이에 튈르리 공원으로 가서 아름드리나무 아래서 뛰노는 아이들과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스케치했다. 보들레르가 늘 그의 곁에 있었다. … 마네는 캔버스 앞에 팔레트를 끼고 화실에서처럼 조용히 그림을 그렸다.”


프루스트는 마네가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야외에 나가 그리기를 좋아한 것처럼 묘사했지만, 사실 그는 우아한 복장을 한 사람들을 부분적으로 스케치한 것을 가지고 화실에서 적절한 장면으로 구성하여 실재 장면처럼 나타냈습니다.


마네의 아버지 오귀스트는 1862년 9월 15일에 세상을 떠나면서 아들들에게 많은 유산을 남겼습니다. 1863년, 그가 남긴 제네빌리에의 땅 200에이커 가운데 15에이커만 팔았는데 6만 프랑이나 되었습니다. 마네는 고급 양복을 입고 고급 카페에서 술을 마시며 풍요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그를 경제적·도덕적으로 자유롭게 해주었으며 이제 수잔과 결혼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결혼식을 위해 네덜란드로 떠나기 몇 시간 전에 보들레르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결혼식은 1863년 9월 17일에 거행되었고 마네의 어머니와 두 남동생이 참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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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란 무엇일까?


(생명의 기원을 밝히는 일은 곧 우주의 기원을 밝히는 일입니다. 이런 주제의 글을 몇 꼭지 올렸습니다. 이쯤해서 우리는 『신을 보여주는 21세기 과학』(도서출판 知와 사랑)의 저자 레오킴Leo Kim이 말하는 좀 더 구체적인 생명의 의미 그리고 프랑스의 분자생물학자로 『우연과 필연 Le hasard et la nécessité』(도서출판 궁리, 2010)의 저자 자크 모노Jacques Monod(1910-76)의 생명체를 규정하는 충분조건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생명공학자이며 암 치료 분야에서 활동하는 레오킴의 제안을 알아보고 다음에 자크 모노의 제안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후 다시 호킹과 칼 세이건의 우주론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다양한 의견들을 통해 우리는 합리적인 이해를 구할 수 있습니다.

레오킴은 직업상 누구보다도 백 가지도 넘는 암의 질병으로부터 죽어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가 궁금해 하는 건 생명의 본질이 무엇이며, 죽는다는 것, 즉 생명을 잃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생명을 잃는다는 것이 그 본질을 영원히 상실하는 것인지, 아니면 본질은 사라지지 않고 다시 환원되어 또 다른 생명으로 태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 과학적 논리를 폅니다. 그는 논리 끝에 임사체험near death experience에 관한 이야기로 실제적인 우리의 경험을 말합니다. 우리가 죽어볼 수 없는 노릇이므로 거의 죽음의 문턱에 갔다 온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황당한 이야기들도 있지만 종합하여 분류하면 일괄된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한 내용의 글은 나중에 올리겠습니다. 영화로 말하면 뒷부분을 앞서 이야기하면 앞의 스토리가 맥이 풀리니까 말이지요.

중간 중간에 4차원뿐 아니라 다차원의 우주에 대한 글도 올리려고 합니다. 한 사람의 주장만으로 주제를 풀어나가는 건 합리적이지 못하므로 여러 과학자들의 의견을 두루 소개하려고 합니다. 블로거들은 다양한 의견을 통해 주제에 대한 관심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다양한 의견이 있다는 건 우리의 과학이 아직은 우리가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문제는 미래의 과학자들이 풀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최선의 노력으로 문제에 대한 접근방식을 논할 수 있을 뿐입니다.)


생명이란 무엇일까? 죽은 유기체organic body나 무생물inanimate object과는 반대로, 성장하고 재생하며 신진대사metabolism, 즉 진행 중인 화학적 반응을 하는 유기체라는 것이 하나의 정의입니다. 퍽 간단해보일지는 몰라도 여기에는 우리가 살아 있다고 여기는 일부 요소들이 무의식적으로 배제되어 있습니다. 수년 동안 동면중인 씨앗seed은 살아 있는 걸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살아나게 되는 그 순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씨앗이 이미 살아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 그렇게 만든 걸까? 화학적 반응, 즉 생명의 표시는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


그리고 영양소를 소모시키는 소위 세포벽이 두꺼운 그람양성gram-positive 박테리아bacteria는 어떤가? 그것들은 계속해서 살 수 없다는 것을 느끼면 자신의 생물학적 에너지를 생식세포들에 쏟아 붓습니다. 거친 환경에서 그람양성 박테리아는 생식세포를 창조한 뒤 존재를 멈춥니다. 박테리아 생식세포는 살아 있는 걸까? 씨앗과 마찬가지로 생식세포는 화학적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 가운데 수십 년 동안 발육정지 상태로 있을 수 있습니다. 영양분과 적절한 환경조건, 습기를 공급하는 환경이 되면 그것들은 갑자기 활발하게 활동하는 박테리아가 됩니다. 이런 박테리아들은 유전적으로 생식세포를 생산하는 박테리아와 꼭 닮았습니다. 생식세포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활동하는 박테리아가 되도록 생명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


생명에 관한 이 모든 의문은 죽음이란 무엇일까? 하는 궁극적 의문으로 이어집니다. 죽음 직전과 직후의 차이는 무엇일까? 죽음과 질병을 연구하는 데서 생명에 관한 가치 있는 정보가 나옵니다.


『신을 보여주는 21세기 과학』(도서출판 知와 사랑)의 저자 레오킴Leo Kim은 과학자로서 개인적인 경험들을 기반으로 암과 질병을 죽음과 연결시킵니다. 동물의 생명은 적절한 세포 증식이나 중지에 의한 정확한 양의 세포 성장과 분열에서 비롯된다면서 그는 우리의 경우 하나의 세포에서 태아, 어린이, 성인으로 성장한 뒤 성장이 멈춘다고 말합니다. 병균이 모든 형태의 생명을 감염시키고 죽음으로 내몰기 때문에 박테리아와 모든 생명에게 감염체에 대항하는 방어체를 갖는 것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뼈 사이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부드러운 조직인 골수bone marrow에서 이루어지는 백혈구leukocyte 생산은 감염과 질병에 대한 인간의 수많은 방어체 가운데 하나입니다. 백혈구가 질병과 싸우는 항체를 생산하고, 항체들은 박테리아를 감싸고 삼켜버려 감염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백혈병leukemia의 경우는 백혈구가 비정상이 되고 지나치게 많이 생산되는 것입니다. 비정상적으로 많은 백혈구가 몸의 자원들을 탈취해 죽음으로 내모는 것입니다. 백혈병과 모든 암은 비정상적인 세포와 통제되지 않은 세포 확산에서 비롯됩니다. 1980년대의 전형적인 암 치료는 세포를 죽이는 일종의 독물을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골수이식과 다른 암 치료들에 사용되는 방사선도 세포에 치명적인 영향을 줍니다. 암 세포가 정상 세포보다 빠르게 성장하기 때문에 환자를 죽이기 전에 암을 죽이는 것이 의사의 목표입니다. 후보약품은 그것이 유발시킬 수 있는 독성 때문에 우선 임상실험에서 안전 테스트를 받아야 합니다.


말기 암 환자만이 많은 암 임상실험들에 참여할 수 있으며 환자들은 필히 위험을 감수한다는 서류에 서명을 해야 합니다.


암 환자들은 종종 통증으로 괴로워하며 몸이 쇠해져서 다양한 건강 문제를 겪게 됩니다. 레오킴은 자신이 만난 환자들의 고통으로 의약품과 암에 관한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소재하는 그의 회사는 생명공학을 선도하며 항암제를 개발하고 있으며, 그는 신약의 임상실험을 관찰하기 위해 많은 암센터들을 방문합니다. 백 개 이상의 질병들이 암으로 분류됩니다. 생명공학으로부터 놀라운 신약 개발의 소식이 다양한 일간지의 헤드라인을 장식하지만 하나의 신약, 혹은 하나의 특정한 방식이 백 개 이상의 질병들에 마법의 약으로 작용할 수는 없습니다.


레오킴은 죽음의 미스터리와 씨름하기 전 생명에 관해 더 이해하기 위해서 별의 성분이 어떻게 생명이 되었을까? 하는 데 관심을 돌립니다. 무수히 많은 우주들이 있다면 몇몇 우주에만 생명체가 살 수 있을까? 행방불명인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가 생명에 관여했을까? 하는 등등에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생명의 기원을 밝히는 일은 곧 우주의 기원을 밝히는 것입니다. 저는 우주를 생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빅뱅이 우리의 우주universe에서 일어난 유일한 사건인지, 아니면 다중우주multiverse라는 큰 나무 가지의 끝에 있는 우리 우주의 꽃봉오리가 개화하듯 수많은 우주의 한 곳에서 일어난 흔한 사건들 가운데 하나인지, 둘 중 어느 것이더라도 우리의 우주가 팽창하고 있는 것이 망원경으로 확인된 이상 우주는 생물처럼 성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생명을 논할 때 단지 심장과 맥박이 뛰고 호흡을 하는 것으로 한정하기보다는 무엇이 성장의 원동력인가 하는 것을 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곧 화학적 반응입니다. 물질의 본질을 밝히는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을까? 하는 문제는 우리의 물질의 기원이 무엇이냐 하고 묻는 것입니다. 물질의 본질인 우주의 유픽셀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고, 또 어떻게 더욱 복잡한 실체로 성장했는지 최근의 과학이 아직 풀지 못하고 있지만, 유픽셀이 원자와 분자로 변형되었다는 가정은 초기 지구가 어떻게든 해서 오늘의 물질을 이루는 모든 화학물질을 가지게 되었다는 걸 이해하는 실마리가 됩니다. 문제는 이런 화학물질들이 어떻게 반응하여 생명을 형성하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단세포 박테리아는 그것의 생명과정이 기호화된 유전구조 속에 수백 개의 복합 단백질과 수백만 정보조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을 이루는 단 하나의 단백질이 만들어질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합니다.


과학자들은 초기 지구의 시뮬레이션simulation에서 단순한 화학성분들을 이런 복합분자로 전환시키는 데 전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20세기의 유명한 영국의 천체물리학자이며 수학자 프레드 호일 경Sir Fred Hoyle(1915-2001)은 단세포 생명체의 출현 가능성을 폐품처리장에서 토네이도 소용돌이로 보잉 747을 조립할 확률에 비유했습니다. 폐품처리장에 분해된 채 너부러진 보잉 747을 태풍의 소용돌이가 수많은 부품들을 조립해서 다시금 완전한 보잉 747로 만들어내는 것만큼 초기 지구에서 단세포 생명체의 출현하기란 어렵다는 걸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생명이 탄생했으므로 그 놀라운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미래의 과학자들이 설명해야 합니다.



우주 창조와 마찬가지로 생명 창조 역시 과학자와 종교인의 관심의 대상이지 갈등의 원천은 아닙니다. 널리 받아들여진 과학 이론으로 우주 창조가 설명되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과 달리, 생명 창조에 대해서는 지배적인 과학 이론이 없는 실정입니다. 어느 것도 증거가 충분치 않으므로 어떤 제안도 이론으로조차 불리지 못합니다.


‘믿음faith’이란 말은 보통 영성spirituality과 종교에 한정됩니다. 아는 것knowing은 지식knowledge입니다. 믿음은 의견opinion입니다. 생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나 견고한 이론조차 없으므로 생명 창조에 관한 과학적 견해 또한 일종의 믿음 혹은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경우 과학과 영성 그리고 종교 모두 믿음 혹은 의견에 의지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래의 과학자들이 우리로 하여금 알게knowing 해줄 것입니다. 지식으로 전달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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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프랑스인의 스페인 취향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misulmun49)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네의 <발렌시아의 롤라 Lola de Valence>, 1862, 유화, 123-92cm.

이 시기에 유명한 <악의 꽃 Les Fleurs du Mal>을 발표한 샤를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1821년 4월 9일-1867년 8월 31일)는 마네에게 이 작품의 제목을 <악의 꽃>으로 하면 어떻겠느냐며 말했습니다.


벗이여, 발렌시아의 롤라에게는 장밋빛이나 검은 보석과도 같은 상상하기 힘든 매력이 두드러져 보이네. 서가 사이에서 무대로 전해지는 소음에 싸여 기분 좋게 포즈를 취한 롤라, 그녀의 야성적인 표정과 흑백 그리고 붉은색의 어울림은 우리에게 선열한 인상을 풍기네.


1857년 6월 25일에 발표된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는 모두 100편의 시가 실렸습니다. <악의 꽃>이 풍기문란하다는 서평에 자극을 받은 내무부 공안국이 이 시집을 고발했고, 보들레르와 출판사는 공중도덕 훼손죄로 기소되었습니다. 보들레르와 출판사는 벌금형을 받았으며 시 6편은 삭제 명령을 받았습니다. <악의 꽃>에 대해 법적 구속이 없어진 건 1949년이었습니다. 프랑스 대법원이 <악의 꽃>에 대한 유죄선고를 파기하고 그와 작품에 법적 명예를 회복시켜주었습니다. 그 날 8월 31일은 82년 전에 타계한 그의 제삿날이었습니다. <악의 꽃>은 현대 시의 시조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국 문화를 좋아한 프랑스인은 스페인 문화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많은 화가들이 스페인 문화를 회화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복잡한 무늬와 화려한 색의 스페인 의상은 그들의 기질을 적절하게 나타냈으며 프랑스인은 스페인인의 열정적 춤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1862년 여름 캄프루비 Camprubi 댄스단의 파리 공연에서 롤라 멜레아가 선보인 춤은 파리 시민들을 매혹시켰습니다. 마네는 그녀를 모델로 그린 <발렌시아의 롤라 Lola de Valence>를 이듬해 마르티느 화랑에서 소개했습니다.


보들레르는 마네에게 <발렌시아의 롤라>를 칭찬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벗이여, 내가 이해하는 자네 그림의 모든 아름다움 속에서 욕망의 흔들림을 읽었네. 하지만 지금 <발렌시아의 롤라>에서 본 검고 붉은 보석의 욕망은 얼마나 매혹적으로 반짝이는지.


마네의 <스페인 발레 Le Ballet Espagnol>, 1862, 유화, 60.9-90.5cm.

호형호제하는 시인 보들레의 권유로 마네는 이 공연을 간람한 후 매우 만족해했습니다. 중앙의 무용수가 유명한 돈 마리아노인데, 그는 일주일에 사흘 공연을 하지 않을 때 멤버들과 함께 마네를 위해 포즈를 취해주었습니다.


그해 마네는 파리에 온 스페인 투우사들을 화실로 초대하여 실재 모델을 보고 그리면서 스페인인의 특징을 표현했다. 또한 스페인 연예인들을 모델로 그리기도 했으며 <스페인 발레 Le Ballet Espagnol>가 그 중 하나입니다.



마네의 <스페인 가수: 기타리스트 Le Chanteur Espagnol: Le Guitarero>, 1860, 유화, 147.3-114.3cn.

1861년 살롱에 입선해 처음으로 호평을 받은 작품입니다. 기타리스트가 코믹한 배우처럼 묘사되었지만 붓놀림이 대담하며 사실주의 색채가 강렬합니다. 그가 탐구해온 대가들의 회화적 장점이 두루 나타난 작품으로 배경을 어둡게 하고 조명의 효과를 극적으로 살린 작품입니다. 색과 색의 대비가 인물의 강렬한 인상으로 관람자의 기억에 남게 합니다.


<발렌시아의 롤라>와 <스페인 가수: 기타리스트 Le Chanteur Espagnol: Le Guitarero> 등 사실주의 그림들을 보들레르와 시인이며 소설가로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창하며 예술의 공리성을 배격한 데오필 고티에Theophile Gautier(1811-72)가 매우 좋아했습니다. 고티에는 한때 화가를 꿈꾸었던 사람입니다. 고티에는 회화나 조각의 조형미를 문학작품에 도입하여 형식을 존중하는 유미적 작풍을 수립함으로써 훗날 고답파Ecole parnassienne 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고답파는 낭만파 시인들의 감상주의와 모호한 언어 사용에 반발하여 신중함과 객관성, 완벽한 기교와 정밀한 묘사를 강조했습니다. 고답파가 이끈 시운동은 운율과 시 형식에서의 새로운 실험과 소네트의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스페인 가수>를 보고 고티에가 적었습니다.


"보라! 오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웃기는 기타리스트가 여기에 있다. 벨라스케스는 그에게 친근한 눈짓으로 인사할 것이고 고야는 담뱃불을 빌리러 그에게 다가갈 것이다. 이 자연스럽고도 매력적인 인물은 마네의 회화솜씨를 돋보이게 한다. 물감을 입힌 형태 속에 과감한 붓놀림과 너무나도 사실적인 색감이 있다."


마네는 목판화와 석판화를 포함해 판화 전반에 관심이 많았으며 1862년 5월에 결성된 에칭작가협회에 창립멤버로 참여했습니다. 보들레르는 『화가와 에칭작가』에서 전통목판화를 에칭화로 한 단계 발전시킨 공로를 마네에게 돌렸습니다. 시인은 1862년에 열린 에칭전시 평론에서 마네에 관해 적었습니다.


다음 전시회에서 우리는 스페인 취향을 물씬 풍기는 마네의 작품을 보게 될 것이며, 스페인 화가들의 천재성이 프랑스로 옮겨져 왔다는 사실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포착할 것이다. 마네와 르그로는 현대의 리얼리티(이 자체가 이미 바람직한 징후이다)와 생동감이 있고 풍부하고 섬세하면서도 과감한 상상력을 한 그릇에 담아낸 훌륭한 화가들이다. 상상력이 결여된 화가의 재능은 주인 없이 행동하는 하인에 지나지 않는다.


르그로Regros(1837-1911)는 프랑스 태생의 영국 화가, 동판화가, 조각가로 괴이한 주제의 판화를 제작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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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인에게는 인간이 정한 법칙과 자연법칙이 구분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과학적 생각을 피력했지만, 입증을 목표로 말한 것이 아니라서 타당한 과학은 아닙니다. 기원전 5세기 만물은 불사불멸하며, 무한자에서 생기고 이로 돌아간다는 말로 유명한 밀레토스 학파의 한 사람인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기원전 610?-546)는 만물이 제일 실체primary substance에서 발생하고 “죄를 저질러 벌금을 내거나 형벌을 받지 않는다면” 다시 제일 실체로 돌아간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렇듯 고대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인간이 정한 법칙과 자연법칙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불이 조화로운 우주의 기본적인 자연적 원리라고 주장한 이오니아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os(기원전 535?-475?)는 태양이 지금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정의의 여신이 태양을 쫓아가서 처벌할 것이기 때문에 태양은 지금처럼 행동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불을 만물을 통일하는 근본물질로 본 그는 세계질서가 “일정한 정도로 타오르고 일정한 정도로 꺼지는 영원히 사는 불”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은 같은 강에 발을 담그지만 흐르는 물은 늘 다르다”는 유명한 말도 했습니다. 훗날 플라톤은 우리의 감각에 어떻게 나타나든 상관없이 만물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헤라클레이토스의 이 원리를 채택했습니다.


기원전 3세기경에 발생한 스토아Stoa 학파는 인간의 법칙과 물리법칙을 구분했지만, 그들이 보편적이라고 생각한 인간의 행동 규범들을 자연법칙으로 분류했습니다. 인간의 행동 규범이란 신을 존중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 등을 말합니다. 스토아Stoa란 전방을 기둥으로, 후방을 벽으로 둘러싼 고대 그리스 여러 도시에 있어서의 일종의 공공건축을 의미합니다. 이 학파의 창시자 제논Zenon(기원전 495?-430?)이 아테네의 한 주량stoa에서 강의한 데서 연유하여 이 말이 학파 전체를 나타내는 명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스토아 학파는 고정된 사상체계가 아니라,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그 사상에 상당한 차이가 있고 내용이 다양한 것이 특징입니다. 제논을 가리켜 아리스토텔레스는 변증법의 발명자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역설이 유명했음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전통은 여러 세기 동안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13세기 중세의 기독교의 대표적인 스콜라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1224/25-1274)는 그 전통을 취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이용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죽은 물체들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에 의해서 종착점에 도달하는 것이 분명하다. ... 그러므로 자연의 모든 것 각각을 그것의 종착점에 도달하도록 이끄는 지적이고 인격적인 존재가 있다.

토마스 학파의 이버지인 아퀴나스는 교회학자 33명 중 하나이며, 로마 가톨릭에서는 그를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로 여깁니다.


심지어 16세기에도 독일의 위대한 천문학자 요한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1571-1630)는 감각을 가진 행성들이 그들의 정신mind에 의해서 파악한 운동법칙들을 의식적으로 따른다고 믿었습니다. 물체를 의인화하는 습관은 고대로부터 16세기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점성술사라는 독특한 경력도 가진 케플러는 광학 연구 분야의 초석을 닦았으며, 굴절망원경을 개조하여 성능을 향상시켰고, 동시대 인물인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망원경을 이용한 발견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데 공헌했습니다.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1942-)은 저서 『위대한 설계 The Grand Design』(2010)에서 자연법칙들을 의도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고대인들의 관심의 초점이 자연의 작동 방식에 있지 않고 작동 이유에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호킹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런 접근법의 취해 과학의 주요 토대가 관찰이라는 생각을 배격한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였다고 말합니다. 이는 정확한 측정과 수학적 계산이 고대인에게는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계산에 편리한 십진법은 기원후 700년경에야 인도인들이 산술을 강력한 도구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을 때 만들어졌습니다. 덧셈과 뺄셈을 나타내는 기호가 15세기에야 등장한 걸 안다면 고대인이 정확한 측정과 수학적 계산을 할 수 없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호킹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측정과 계산을 예측을 산출할 수 있는 물리학의 발전에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그는 그 자신이 보기에 지적인 매력이 있는 원리들을 물리학의 토대로 삼았다고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스로 보기에 매력적이지 않은 사실들을 억제했고, 사건들이 일어나는 이유에 관심을 집중하면서 사건 그 자체를 정확하고 상세하게 기술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적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이론은 무거운 물체가 일정한 속도로 낙하하며, 그 속도는 그것의 무게에 비례한다는 것입니다. 낙하하는 물체의 속도가 증가하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새로운 원리를 발명했는데, 물체가 자신의 자연적인 정지 위치에 다가갈수록 더 기뻐하며 전진하고 가속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물체를 의인화했습니다. 그의 이론은 예측적인 가치가 거의 없지만, 과학에 대한 그의 접근법은 2천 년 동안 서양 사상을 지배했습니다.


그리스인의 뒤를 이은 기독교인은 우주가 냉담한 자연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생각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가 특별하지 않다는 생각도 거부했습니다. 기독교인은 신이 인간을 특별히 사랑해서 아침마다 해에게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거라” 하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해가 뜨고 진다고 믿었습니다. 물체를 의인화하면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호킹은 중세는 단일하고 정합적인 철학 체계가 없던 시기였지만, 우주가 신이 만든 인형의 집이고 종교는 자연 현상에 대한 탐구보다 훨씬 더 값어치가 있다는 것이 당시의 통념이었음을 지적합니다.


실제로 1277년 파리의 탕피에 주교는 교황 요한 21세의 지시로 저주받아야 할 오류 혹은 이단적 주장 219개 목록을 공표했는데, 그중에 자연이 법칙들을 따른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신의 전능함과 상충하므로 저주받아야 마땅하다고 한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교황 요한 21세는 몇 달 뒤 중력법칙에 의해 죽었는데, 그의 처소의 지붕이 무너져 그를 덮친 바람에 죽은 것입니다.


근대적 자연법칙의 개념이 생긴 건 17세기였습니다. 케플러는 자연법칙을 근대 과학적 의미로 이해한 최초의 과학자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만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물활론animism의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물체를 의인화하는 습관을 버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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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화가들에 대한 일본 판화의 영향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19세기 중반의 프랑스 미술은 외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일본 미술의 영향이 두드러졌습니다. 1853년 다시 개항된 코모도르 마퇴유 항구를 통해 일본의 미술작품과 가제도구들이 유럽으로 들어왔으며 일본 미술은 한동안 유럽 전역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일본 화가들의 그림을 프린트한 사본들이 1860년에 개업한 포트 오세안에서 매매되었고, 1890년에는 일본 미술작품들이 국립미술학교에서 소개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독일 함부르크 태생의 지그프리트 뱅Siegfried Bing(1838-1905)이 쓴 『일본 예술가들 Le Japan Artistique』이 출판되었으며 마네와 모네도 뱅의 책을 읽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유럽 예술가들은 일본의 회화·조각·판화를 연구하면서 동양의 독특한 요소들을 그들의 작품에 응용했습니다. 일본 대가들의 판화에 나타난 광택 있는 평면과 힘 있는 색, 과감하게 단순화된 외곽선과 가파르면서 날카롭게 각진 형태, 평면적인 디자인, 대담한 칼자국 등은 유럽의 예술가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고, 특히 우키요에 화가, 판화가 기타가와 우타마로(1753-1806), 가쓰시카 호쿠사이(1760-1849), 안도 히로시게(1797-1858)의 다색 목판화는 그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우키요에는 17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에도 시대에 성립된 풍속화로 사람들의 일상생활이나 풍경, 풍물 등을 그린 것을 말합니다. ‘우키요浮世(부세)’란 말의 뜻은 ‘떠다니는 세상의 그림’, 즉 현세의 이모저모를 그린 그림이란 뜻입니다. 현재 도쿄에 해당하는 에도, 그리고 오사카, 교토 등지 이곳저곳에 퍼져있던 현대풍의 새로운 문화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똑같은 발음의 다른 말 우키요는 ‘근심어린 세상’이란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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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거리의 가수 La Chanteuse des rues>, 1862, 유화, 171-106cm.

이 작품은 카페에서 노래 부르는 무명 여가수의 그림으로 살롱에 받아들여졌습니다. 마네는 화실 근처 프티트폴로뉴 동네를 거닐다가 여가수가 카페 밖으로 할 발 내딛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작품에서의 모델은 <풀밭에서의 오찬 (일광욕) Le Dejeuner sur l'herbe (Le Bain)>에서 누드로 모습을 드러낸 빅토린 뫼랑입니다. 그녀는 마네의 작품에서 다양한 역할을 했으며, 여기서는 가난한 여가수의 모습으로 포즈를 취했습니다. 빅토린은 기타를 든 손으로 땅에까지 닿는 긴 드레스를 살짝 들어 올렸고 버찌를 입가에 대고 수줍은 표정을 지었는데, 입가의 붉은 버찌가 왼손에 들고 있는 노란 종이, 갈색, 회색, 초록색의 드레스와 대조가 됩니다. 마네는 배경을 어둡게 하여 빅토린의 환한 얼굴이 뚜렷이 나타나게 했으며, 이러한 점은 마네 회화에 나타나는 독특한 요소로서 그가 의도적으로 구성한 연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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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빅토린 뫼랑의 초상>, 1862, 유화, 43-43cm.

빅토린은 1861년 12월부터 1863년 1월까지 마네의 스승 쿠튀르의 모델로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마네가 그녀를 만난 건 1862년이었으며, 1860년대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합니다. 빅토린은 186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가 한동안 그곳에서 살다가 돌아와 1870년대 초 다시 마네의 모델이 됩니다. 그녀는 스스로 회화를 공부해 화가가 되었는데, 1876년에는 자화상으로 살롱에 입선합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해 마네는 살롱에 낙선하는 고배를 마십니다. 1879년에는 그녀와 마네의 작품 모두 살롱에 입선하여 두 사람의 작품이 같은 전시실에서 전시되었습니다. 마네가 타계한 후 빅토린이 1883년 8월 마네의 미망인 수잔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당시 그녀가 마네의 모델로서 활동한 일부를 알 수 있습니다.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께서는 그분의 많은 작품에 제가 포즈를 취했고, 특히 그분의 걸작 <올랭피아>를 위해서도 포즈를 취한 걸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분은 절 돌보아주셨고, 종종 말씀하시기를 작품이 팔리면 감사의 표시로 돈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전 그대 어렸으며,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저는 미국으로 갔습니다. 제가 돌아왔을 때 그분은 많은 작품을 포르(마네의 작품을 수집한 바리톤 가수)에게 팔았고, 제게 그 돈의 일부는 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말씀을 감사하게 받아들였지만 돈은 사양하면서 제가 더 이상 모델 노릇을 하지 못하게 되면 그때 약속하신 말씀을 상기시켜 드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모델을 하지 못하게 되었군요.

모델이 보너스를 사양한 건 특이한 일로 그녀의 자존심이 강했고, 마네와의 관계가 단순한 고용 이상의 서로 존중하는 관계였음을 시사합니다. 마네가 1862년 빅토린을 모델로 그린 세 점과 풀밭에서의 오찬>, <올랭피아>에서 그리고 그 후의 작품들에서 빅토린의 재능과 그녀를 통한 마네의 상상력이 빼어났음을 봅니다. 흥미로운 건 마네가 아내 수잔을 모델로 그린 열 점 가운데 유명한 작품이 없었던 반면 빅토린을 모델로 한 작품 열한 점은 모두 유명해졌다는 것입니다. 모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마네의 대표작 중 하나인 <거리의 가수 La Chanteuse des rues>에서 일본 판화의 영향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종 모양으로 둥글게 한 드레스를 평편하게 이차원적으로 채색하고 가장자리를 밝은 색으로 칠해 여인의 모습이 어두운 배경으로부터 두드러지게 보이게 한 효과는 일본 판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소입니다.


그 외에도 당시 화가들의 그림에서 나타난 과감한 생략과 사선구도 등은 일본 판화에서 받은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이용한 것들입니다. 특히 클로드 모네는 대각선 구도의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그네가 그린 풍경화와 해양화에서 나타난 파도가 치솟는 형태 등은 히로시게와 호쿠사이 판화의 특징적인 요소들입니다. 유럽의 화가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그림에 일본 판화의 요소들을 응용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판화를 그림의 배경으로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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