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의 인생을 생생하게 묘사한 마네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예술가가 자신의 시대에 관련된 것들에 솔직하지 못하다면 그는 잘못된 작품을 생산하게 될 것이다.”
현대 화가는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구별한다고 본 시인 보들레르가 한 말입니다. 보들레르가 작가로 데뷔하면서 처음 출간한 작품은 『1845년의 살롱』이었습니다. 미술 비평에 대한 대담성으로 인해 이 책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는 외젠 들라크루아를 높이 평가했고, 그의 평가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보들레르는 1846년에도 두 번째 살롱 평론을 발표했으며, 낭만주의의 변호사 그리고 비평가라는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의 첫 시집이며 그를 유명하게 만든 「악의 꽃」이 출간된 건 1857년이었습니다. 그는 1859-60년에 쓴 글을 모아 『현대 인생의 화가』란 제목으로 1863년에 출간했습니다. 마네는 보들레르의 평론에 공감했으며 화가란 이미지에 대한 해석자 그 이상이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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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소파에 앉아 있는 보들레르의 애인 La Maitresse de Baudelaire Couchee>, 1862-63, 유화, 90-113cm.
마네는 형처럼 따른 보들레르를 종종 방문했으며, 그의 애인을 캔버스에 담았습니다. 잔느 뒤발Jeanne Duval이란 이름의 이 여인은 낭트에서 온 매춘부의 딸로 흑백 혼혈인데 보들레르가 1842년부터 교제했습니다. 보들레르의 어머니는 잔느를 모든 방법으로 아들을 고문하는 ‘검은 비너스Black Venus’이며 기회가 생길 때마다 아들에게서 돈을 뜯어내는 여인으로 묘사했습니다. 1844년에 아버지의 유산을 절반 탕진한 보들레르는 정기적으로 어머니를 찾아가 작가로 성공할 수 있도록 돈을 요구했습니다. 보들레르는 책과 미술작품, 골동품을 사들이는 댄디로 통했습니다. 잔느가 1859년에 중풍 발작을 일으키고 반신불수가 되자 보들레느는 그녀를 보살피기 위해 그녀와 동거했습니다. 이 시기에 보들레르는 에드가 앨런 포Edgar Allan Poe(1809-49)의 유일한 장편소설로 상상 속의 남극을 무대로 한 환상과 공포의 향연 『아서 고든 핌의 모험 The Narrative of Arthur Gordon Pym』을 번역하고, 작가론 『피에르 쥘 테오필 고티에 Pierre Jules Théophile Gautier』와 『리처드 바그너와 탄호이저 Richard Wagner and Tannhauser』라는 평론을 쓰는 등 작문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이 보들레르는 매독이 재발하고 빚에 쪼들려 자살 충동을 느껴 칼로 자신을 상처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브뤼셀로 1864년에 가서 책을 출간하고 강연을 하려고 했지만 출판계가 그에게 냉담했습니다.
보들레르는 잔느를 가리켜서 “수수께끼 같은 눈을 하고, 정복적이며, 의지가 강하고 ... 무관심한 악의가 섞인 고양이와 같은 풍모”의 여인이지만, 그렇게 때문에 “아름다움을 형성하는 사랑스러운 풍모”를 지닌 여인이라고 했습니다. 보들레르는 「악의 꽃」을 쓸 때 잔느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었습니다.
이 그림은 원근법이 과장되었으며, 멀리서 바라보는 잔느의 모습이지만 흰 드레스가 차지하는 면이 너무 크고 드레스 사이로 빠져나온 다리가 유난히 작으며 오른손을 오히려 큽니다. 한 번의 포즈로 그린 것이라서 미숙한 부분이 많습니다.
마네는 열한 살 연상의 보들레르의 시를 애독했을 뿐 아니라 그와 우정을 나눴습니다. <압생트 마시는 사람>은 보들레르의 시 「넝마주이들의 포도주 The Ragpickers' Wine」에 나오는 포도주와 대마초에 대한 예찬과 상통하며 집시들의 데카당스Décadence(퇴폐주의)에 대한 마네의 예찬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마네는 보들레르가 말한 ‘현대 인생의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보들레르가 1864년 브뤼셀로 떠나기 전까지 두 사람은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습니다. 보들레르는 마네에게 돈을 꾸기도 하고 그의 화실을 자주 방문했습니다. 1866년 보들레르가 중풍에 걸려 파리로 돌아와 1년도 채 안 되어 사망할 때까지 두 사람의 우정은 지속되었습니다.
1859년 살롱에서 <압생트 마시는 사람>이 낙선한 뒤 친구들과 함께 마네의 화실을 방문한 프루스트와 보들레르가 현대 회화에 관해 토론했습니다. 보들레르가 “결론적으로 작가는 솔직해야 한다”고 하자 마네가 “그건 제가 늘 한 말이 아닙니까? 제가 <압생트 마시는 사람>에서 솔직하지 않았단 말인가요?”라고 응했습니다. 보들레르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자 마네는 “형도 저를 인정하지 않는군요.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저를 인정하지 않는 셈이지요”라고 투덜거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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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튈르리 공원의 음악회 La Musique aux Tuileries>, 1862, 유화, 76.2-118.1cm.
튈르리 공원에서 벌어진 음악회 장면으로 당시 사교계의 풍경이자 프랑스 부르주아 인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작품입니다. 오노레 도미에의 판화나 다른 예술가들의 삽화에서도 파리의 다양한 인생이 나타난 적이 있지만, 사람들만을 테마로 야외생활을 기념비적으로 그린 것은 마네가 처음입니다.
마네는 친구들의 모습을 종종 작품에 삽입시켰는데, 이 작품에도 알아볼 수 있는 마네의 친구들이 있습니다. 왼쪽 끝에 잘려진 인물이 마네이고, 그 옆에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사람은 화가 알베르 드 발레로아, 두 사람 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조각가이자 화가 자차리 아스트뤽입니다. 튈르리 공원에 마네와 함께 온 적이 있는 보들레르는 큰 나무 바로 앞 왼쪽, 아스트뤽의 오른편에 있습니다. 보들레르와 함께 있는 사람은 테오필 고티에이며, 그의 뒤 왼쪽에 앞을 향해 바라보는 얼굴은 화가 앙리 팡탱-라투르입니다. 왼쪽 앞에 앉아 있는 두 여인 가운데 배일을 쓴 여인은 오펜바흐 부인이며, 그 옆에 있는 사람이 사령관 이폴리테 레조슨의 아내입니다. 화면 오른쪽 중앙에서 손을 뒤로 하고 왼편을 향하고 있는 사람은 마네의 동생 외젠입니다. 외젠의 등 뒤로 보이는 안경 쓴 사람이 작곡가 오펜바흐로 마네와 자주 동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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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튈르리 공원의 음악회>의 부분
보들레르와의 잦은 만남에서 마네는 자연히 시인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보들레르는 현대의 인생이 예술의 테마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튈르리 공원의 음악회 La Musique aux Tuileries>는 그런 테마의 회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19세기 파리 시민들의 즐거운 한때를 묘사한 최초의 작품으로 미술사에 기록되었고, 현대인들의 영웅주의 삶을 찬양 내지는 고무시키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마네는 이 작품을 화실에서 그렸지만 마치 정원에서 직접 그린 것처럼 나타났습니다. 프루스트는 1897년 잡지 『블랑슈 Revue Blanche』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마네는 거의 매일 2시에서 4시 사이에 튈르리 공원으로 가서 아름드리나무 아래서 뛰노는 아이들과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스케치했다. 보들레르가 늘 그의 곁에 있었다. … 마네는 캔버스 앞에 팔레트를 끼고 화실에서처럼 조용히 그림을 그렸다.”
프루스트는 마네가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야외에 나가 그리기를 좋아한 것처럼 묘사했지만, 사실 그는 우아한 복장을 한 사람들을 부분적으로 스케치한 것을 가지고 화실에서 적절한 장면으로 구성하여 실재 장면처럼 나타냈습니다.
마네의 아버지 오귀스트는 1862년 9월 15일에 세상을 떠나면서 아들들에게 많은 유산을 남겼습니다. 1863년, 그가 남긴 제네빌리에의 땅 200에이커 가운데 15에이커만 팔았는데 6만 프랑이나 되었습니다. 마네는 고급 양복을 입고 고급 카페에서 술을 마시며 풍요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그를 경제적·도덕적으로 자유롭게 해주었으며 이제 수잔과 결혼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결혼식을 위해 네덜란드로 떠나기 몇 시간 전에 보들레르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결혼식은 1863년 9월 17일에 거행되었고 마네의 어머니와 두 남동생이 참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