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거들 가운데 왜 마네와 모네의 작품만 다루느냐는 불평을 하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불평이라기보다는 미술을 더욱 폭넓게 공부하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하여 중간 중간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에 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오늘날 한 대의 컴퓨터로 두 가지 이상의 작업을 동시에 처리하거나, 두 가지 이상의 프로그램들을 동시에 실행시키는 멀티태스킹multitasking이 유행입니다. 블로거들은 두 가지 이상을 소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따라서 미술을 두 가지 갈래로 나눠 진행시켜도 블로거들이 충분히 따라 오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이란 제목의 책을 쓴 바 있어 그 자료에 새로운 자료를 보태어 연재하겠습니다.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과학과 영혼을 추구한 두 거장: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Leonardo da Vinci(1452-1519) and Michelangelo Buonarroti(1475-1519)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는 동시대인이지만, 레오나르도가 미켈란젤로보다 23살이 많아 아버지뻘이었습니다. 집안이 좋은 미켈란젤로는 메디치가의 재력과 정치력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한 반면 레오나르도는 뒤에서 밀어주는 사람이 없어 이탈리아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마침내 말년에는 프랑스로 가 그곳에 뼈를 묻습니다. 그의 무덤이 존재하지 않아 그의 말년이 불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모두 르네상스가 낳은 천재들입니다. 더러 사람들은 하늘이 한 세기마다 천재를 내보낸다고 말하지만, 거의 6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두 사람에 버금가는 천재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간략하게 두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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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자화상>, 연대미상, 33.3-21.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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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nardo da Vinci(1452-1519)


레오나르도 다 빈치

자연을 관찰하는 데 있어 명료하고 분석적 시각을 가진 레오나르도는 화가의 범주를 넘어선 진정한 르네상스의 사람이었습니다.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1435-88)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레오나르도는 화가로서 명성을 떨쳤지만, 이후 밀라노 통치자의 군사 전문 공학가가 되어 비행기, 요새, 수로 등 과학을 응용한 여러 고안에 전념했습니다. 또한 식물, 새, 구름과 물의 효과를 연구했으며, 이론을 통해 회화의 위상을 높이며 미학에도 일가견을 보여주었습니다. 서른 구 이상의 시신을 해부하여 수백 점의 드로잉과 글을 남겼는데, 그의 인체해부도는 현재도 경탄할 정도로 정교합니다. 피렌체와 밀라노를 오가며 파란만장한 삶을 산 레오나르도는 이국의 땅 프랑스에서 타계하여 그곳에 묻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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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피노 델 콘테의 <미켈란젤로의 초상>, 1535년 즉 60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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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elangelo Buonarroti(1475-1519)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레오나르도와 더불어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미켈란젤로는 도메니코 기를란다요Fomenico Ghirlandaio(1449-94)에게 수학하고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1266?-1337)와 회화에서 원근법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린 최초의 화가이면서 요절한 마사초Massaccio(1401-28)의 작품을 드로잉하면서 그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메디치 정원의 고대 조각품에서 영감을 받은 그는 <로마 피에타>와 <다윗>을 제작함으로써 일찍이 최고 조각가의 반열에 올랐으며,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로 당대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가 되었습니다. 이후 율리우스 2세의 무덤을 비롯하여 다수의 조각품을 제작하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위시한 많은 건축물들에 자신의 재능을 아로새겼습니다. 동시대 사람들에게 ‘신과 같은 미켈란젤로’라 불린 그는 죽는 날까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정신에 내재한 형상을 구현하는 작업에 힘썼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지속된 르네상스는 중세의 종말을 알리고 근대로 나아가게 하는 완충기였습니다. 프랑스어 르네상스Renaissance는 이탈리아어의 rina scenza, rinascimento에서 비롯했습니다. 고대의 그리스 문화와 로마 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이를 부흥시킴으로써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려는 운동인 르네상스의 범위는 사상, 문학, 미술, 건축 등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곧 프랑스, 독일, 영국 등 북유럽 지역에 전파되어 각각 특색이 있는 문화를 형성했으며 근대 유럽문화 태동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르네상스에서 인문학의 발전으로 중세와의 단절이 무리 없이 이뤄졌고, 예술의 본질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인문학이 가능했던 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세 시인 두란테 델 알리기에리Durante degli Alighieri Dante(1265-1321, 두란테의 약칭이 단테),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1304-74),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1313-75)가 일찍이 고전에 대한 이해에 앞장서고 인간의 지식 전반에 걸친 성찰의 발판을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단테가 1307년부터 쓰기 시작하여 1321년에 완성한 장편 서사시 『신곡 La Divina Commedia』은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 3부로 이뤄졌는데, 단테 자신의 영혼의 성장과정을 나타낸 것입니다. 망명 이후 심각한 정치적 , 윤리적 , 종교적 문제로 고민했던 그가 자신의 양심과 영혼 속에서 그 해결방법을 찾아내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교황청에 있으며 연애시를 쓰기 시작한 페트라르카는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relius Augustinus(354-430)와의 대화형식으로 『나의 비밀』을 집필했으며, 서정시 「칸초니에레 Canzoniere」로 가장 대표적인 정형시인 소네트sonnet의 극치를 보여주었습니다. 보카치오가 쓴 100편의 단편소설을 묶은 것으로 ‘10일간의 이야기’로 알려진 『데카메론 Decameron』(1349-51)은 근대 소설의 선구자로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근대는 인문학의 발달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과학과 예술이 뒷받침되어야만 합니다. 미술에 있어 르네상스는 과학의 정신을 가진 레오나르도와 순수예술론을 가진 미켈란젤로의 등장으로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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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생명을 위한 화학적 자원들이 생겨나다


『신을 보여주는 21세기 과학』(도서출판 知와 사랑)의 저자 레오킴Leo Kim은 단순화합물이 우주에서 복합분자를 산출할 수 있다면 생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단서도 제공할 수 있을까? 우리가 올려다보는 어둡고 끝없는 하늘이 모든 것을 시작한 거대한 세균배양 접시petri dish가 될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분자 생산방법을 공동 발명했는데, 단순한 무기염을 촉매로 사용하여 메탄올을 복합유기화합물들로 변환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업과 수많은 다른 연구자들의 실험은 일산화탄소, 이산화탄소, 메탄올 같은 단순화합물들이 우주에서 더 큰 분자를 산출하는 반응을 할 수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과학자들은 운석에서 정교한 탄화수소들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이것들은 생명에 필요한 더욱 복잡한 분자를 위한 기초 성분을 제공하는 일종의 화합물이며, 아미노산 같은 이런 많은 화합물들은 십중팔구 충돌로 인해 생겨났을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혜성 같은 우주 물질에서 단서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연구를 통해 우주에서 날아온 복합분자의 종류들이 밝혀질 것입니다. 2005년 초에 우주탐사기가 샘플을 지구로 가져왔습니다. 최근 과학자들은 지구에 떨어진 암석의 유기성 부스러기에서 단서가 될 만한 자료를 면밀히 살피고 있습니다.

작은 물질이지만 중요한 단서가 되는 이른바 미소운석micrometeorite(혹은 우주의 먼지cosmic dust)은 지구상의 초기 물질의 원천이었습니다. 태양계가 형성될 때 이런 작은(5m 미만 크기) 운석들이 우주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미소운석은 자체의 열 차단제를 지녔고 지구 대기권으로 진입하면서 그 일부가 점차 소멸됩니다. 그것들은 점차 속도를 줄이며 먼지 크기의 입자로 대기로부터 떠내려갑니다. 차단제로 보호된 이런 미소운석에는 아미노산과 많은 복합유기화합물이 들어있습니다.

지구의 처음 수백만 년 동안 미소운석들이 매년 500톤에 이르는 유기화합물을 지구로 날랐습니다. 미소운석을 채취하는 사람들은 그린란드에서 남극대륙까지 여행하며 지구 대기권 밖의 이 독특한 물질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미소운석에는 금속원소가 들어있으며 촉매작용을 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이것들의 독특한 물리적 구조가 초기 지구에 많은 화학반응들을 촉진시킬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화학적 반응들이 일어나자 지구에서 생명을 위한 화학적 자원들이 생겨났습니다.

미소운석 입자에는 작은 구멍들이 있어 분자 스펀지처럼 작용합니다. 이런 스펀지들이 한때 지구에 있던 복합유기분자들을 흡수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오르세 출신으로 미소운석 전문가인 천체물리학자 미셸 모레트Michel Maurette는 이런 입자들이 생명을 위한 주요 성분을 나르고, 유기화합물을 흡수하며, 반응을 촉진시켜 살아 있는 생물들의 복잡한 원조물질precursor들을 산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주장합니다.

젊은 지구에는 분명 생명이 어떻게든 존재했습니다. 레오킴은 초기의 이 원시적 생명 형태가 아직도 존재할까? 지금 어딘가에 그것들이 잠복해 있고 보다 새로운 생명 형태로 진화도 할 수 있을까? 그것들이 아직도 지구상에 존재한다면 우리가 이런 생명의 초기 형태를 발견할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초기 지구의 대기권에는 산소가 없었습니다. 최초의 미생물들은 오래 전에 죽었거나, 돌연변이를 일으켰거나, 땅속이나 깊은 바닷속 같은 산소가 없는 드문 지역들로 갔을 것입니다. 실제로 지하 깊은 곳의 박테리아 생물량이 지구 표면의 박테리아 생물량과 같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레오킴은 그 잔재들이 아직도 존재한다면 생명의 시작에 관한 훌륭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레오킴은 연구자들은 우선 이런 잔재를 찾아야 한다면서, 지구의 깊숙한 곳과 같이 수십억 년 동안 산소가 차단된 환경으로 연구를 확장해나가야 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과학자들이 산소에 노출되지 않은 샘플들을 수집할 필요가 있다면서, 그것들을 성장하게 하는 화학물질과 환경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아무도 특이한 RNA를 가진 생물이나 최초의 생명을 암시하는 특이한 화학물질을 발견하지 못한 실정입니다.

과학자들은 생명이 화학물질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면서 또한 우주에서 왔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과학자들이 아직 특이하거나 단순한 단백질, RNA 혹은 DNA의 형태를 가진 생물을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우리는 최초의 생명이 죽었거나, 숨었거나, 혹은 오늘날 생물들에서 발견되는 복합분자를 이미 갖고 있었던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최초의 생명체가 오늘날의 복합분자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것들이 우주에서 왔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우주생물학exobiology(혹은 외계생물학)은 살아있는 생물들에 관한 증거를 우주에서 찾는 최근의 과학입니다.

생명이 지구에서 비롯되었는지 우주에서 씨가 뿌려진 것인지 하는 것은 중요할 문제입니다. 우리 태양의 나이는 약 45억 년입니다. 관측 가능한 우주가 약 140억 년 되었으므로 우리의 태양이 존재하기 전에 다른 태양계들이 생명을 잘 발달시켰을 수도 있습니다.

우주의 물질에 대한 탐구가 지구에서 생명이 어떻게 출발했는지를 밝혀줄 것입니다. 우리 태양계 안에 있는 행성들과 140개 이상의 위성 가운데 행성으로는 유일하게 화성과, 두 개의 위성 티탄과 유로파에만 지구상에 생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의문을 가진 과학자들이 관심을 갖는 특성이 있습니다. 토성의 위성 가운데 가장 큰 티탄Titan11은 우리의 태양계에서 유일하게 우리의 초기 행성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상당량의 가스 대기권을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상당한 크기의 물질입니다. 지구와 마찬가지로 티탄의 대기권에 있는 가장 일반적인 성분은 질소입니다. 유로파Europa는 목성의 2호 위성이며 목성의 네 번째로 큰 위성으로 얼음이나 물이 매우 적고 주로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티탄, 유로파, 그리고 그 외의 지구 대기권 밖의 물질들에서 발견된 유기화합물들은 초기 지구의 유기화합물들에 대한 보다 나은 자료를 제공할 것입니다. 그런 자료가 지구에서 생명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관한 단서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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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 마드리드에서 만난 스페인 화풍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파리 사람들은 스페인 회화에 매우 호감을 나타냈습니다. 프랑스의 문학과 회화,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는 스페인 문화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스페인의 대표적 문학 작품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Saavedra(1547-1616)의 『돈 키호테 Don Quixote』는 17세기 중반 프랑스어로 번역된 이래 모든 학생의 애독서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문학에 깊숙이 자리 잡은 작품으로 『돈 후안 Don Juan』도 꼽을 수 있는데 이것은 1630년 스페인의 극작가 티르소 드 몰리나Tirso de Mollina에 의해 처음으로 드라마로 각색되었습니다. 티르소 드 몰리나는 1601년에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방탕을 상징하는 가공의 인물 돈 후안은 원래 민간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로 티르소가 1630년에 쓴 비극 『세비야의 호색가 El burlador de Sevilla』에서 문학적 주인공으로 처음 선을 보였습니다. 17세기에 돈 후안 이야기는 이탈리아의 순회공연 배우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이들 중 몇몇은 이것을 팬터마임의 주제로 삼아 프랑스에서 공연했습니다.

알프레드 드 무세, 테오필 고티에, 외젠 들라크루아 모두 스페인 문화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의 작품은 대중적이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직접 스페인으로 가서 그곳 화풍을 익혔고 고티에도 1845년에 스페인을 다녀왔습니다. 파리에도 루브르 뮤지엄에 스페인 회화가 있었고 화가들이 그곳에서 벨라스케스를 포함하여 많은 스페인 화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그들의 화풍을 익혔습니다. 루브르는 새로운 스페인 회화를 물색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이 소장하던 스페인 회화가 파리에서는 꽤 인기가 있었습니다. 한 해 전 스페인을 방문한 자차리 아스트뤽은 마네에게 스페인에 가면 어디어디를 가봐야 한다고 자세히 설명해주었습니다.

마네는 1865년 8월 마드리드를 방문했는데 더울 때라서 여행하기에 적당하지 않았고 시설이 매우 불편하여 열흘을 지낸 후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음식물도 입에 맞지 않았고 또 콜레라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확산되고 있어 청결치 못한 곳에 오래 머물기가 겁이 났던 것입니다. 아스트뤽은 “에두아르! 에두아르! 어두운 구석이라고는 없는 아름다운 나라에서 음식물 때문에 서둘러 돌아오다니!”라며 탄식했습니다.

마네는 자신이 묵는 호텔 식당에서 테오도르 뒤레Théodore Duret(1838-1927)를 만났습니다. 마네가 마드리드에 도착하고 이틀 후 팡탱-라투르에게 보낸 편지에는 “내가 마드리드에 도착하던 날 미술에 관심이 많고 또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프랑스인을 만났네. 그래서 나는 혼자가 아니라네”라고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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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테오도르 뒤레의 초상 Portrait of Théodore Duret>, 1868, 유화, 43-35cm.

뒤레는 1867년에 1867년의 『프랑스 화가들 Les Peintres Francais en 1867』을 출간하면서 마네의 작품에 관한 평론을 썼습니다. 마네가 호의적인 평론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 작품을 주겠다고 하자 뒤레는 담례로 코냑 한 상자를 보내면서 잘 보이지 않도록 어두운 부분에 화가의 서명을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사란들이 이름을 보고 편견을 가지는 데 불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네는 이에 대한 반발로 오히려 뒤레의 지팡이가 가리키는 밝은 곳에

이름을 적어 넣었습니다.



뒤레는 당시 스물일곱 살로 가족의 코냑 사업을 이어받아 운영하던 사업가로 포르투칼과 스페인을 정기적으로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미술에 관심이 많은 그는 파리에 안주한 후 공화당 계열의 신문 발행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미술 평론가로 활동했습니다. 뒤레가 마네의 일대기를 썼으므로 우리는 마드리드 여행에 관해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뒤레는 “자연히 우리는 매일 프라도 뮤지엄으로 향하게 되었고 벨라스케스의 그림 앞에서 아주 많은 시간을 보냈다. … 우리는 투우경기를 몇 차례 관람했으며 … 톨레도로 가서 대성당과 엘 그레코의 그림을 관람했다”고 적었습니다.

뒤레의 말대로 마네는 마드리드에서 투우경기를 즐겼으며 스페인 바로크를 대표하는 17세기 유럽 회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한 벨라스케스Veláquez(1599-1660)의 작품을 관람하고 감동받았습니다. 마네는 마드리드에서 팡탱-라투르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습니다.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즐기는 기쁨을 자네와 함께 나누지 못해 유감이네. 실은 벨라스케스가 이 여행의 목적이나 다름없네. 마드리드의 뮤지엄을 차지하고 있는 나름대로 표현력이 훌륭하다고 하는 화가들은 손재주꾼일 뿐이란 생각이 들지만, 벨라스케스는 확실히 화가들 중의 화가일세. 그는 나를 놀라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해주네. 루브르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전신 초상화는 그의 작품이 아니라네. 공주 그림만 그의 것이네.



난 또 고야의 작품을 보았네. 그가 맹목적으로 베낀 스승 벨라스케스 이후 가장 주목되는 화가이며, 나름대로 재주가 많은 사람이니까. 뮤지엄에 소장된 벨라스케스식의 초상화 2점을 보았네. 물론 벨라스케스의 것만 못했지. 솔직히 말해서 여태까지 내가 본 고야의 작품은 만족스럽지 않네. …

마드리드는 보고 즐길 것들이 많다네. 프라도 뮤지엄과 매혹적인 산책길에는 만틸라를 두른 스페인풍의 여인들이 즐비하네. 길에서 만나는 독특한 옷차림들 … 투우사들 역시 야릇한 이 도시의 옷을 걸치고 있네.


마네는 아스트뤽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습니다.


가장 즐거웠던 기억은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본 것이며, 사실 이는 스페인까지 여행을 하게 된 유일한 이유이도 합니다. 그는 화가 중의 화가이며 내게는 전혀 놀랄 만하지 않았소. 회화에 대한 나의 이상이 그에게서 발견되었다는 점이 나를 전혀 놀라게 하지 않았으며, 그의 작품들을 보는 순간 희망과 자신감으로 들떴소. 난 리베라와 무릴로의 작품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소. 그들은 이류에 불과하니까. 벨라스케스 다음으로 내게 감동을 준 사람은 엘 그레코와 고야였소.”(1865.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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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투우 장면 Bull-Fighting Scene>, 1865-66, 유화, 90-11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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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스의 <빌렘 코이망스의 초상 Portait of Willem Coymans>, 1645, 유화, 77-6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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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경의를 표하는 토레로 Toreo Saluting>, 1866, 유화, 171-113cm.

스페인 여행 후에 마네가 그린 투우 시리즈 가운데 한 점입니다. 투우사 외엔 아무것도 없는 배경이 그해에 그린 <피리 부는 소년>과 유사합니다. 뒤레가 이 작품을 1870년에 1,200프랑에 구입했으며, 1894년에 10,500프랑에 팔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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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 Le Fifre>, 1866, 유화, 162-97cm.

배경을 어둡게 했으므로 피리 부는 소년의 모습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바지의 외곽선을 힘 있게 강조함으로써 소년의 다리가 더욱 튼튼하게 묘사되었습니다. 외곽선의 붓질은 일본화에서나 볼 수 있는 서예처럼 나타났습니다. 마네는 동양의 서예로부터 일격의 붓놀림으로 이러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손과 발을 제외하면 그림자가 없고, 청색, 백색, 적색의 미묘함이 두드러집니다. 마네가 한 번에 소년 기병을 그린 것 같지는 않고 아들 레옹으로 하여금 포즈를 취하게 해서 완성시킨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네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된 이 작품이 1866년 살롱에서 낙선하자 에밀 졸라가 이 작품을 옹호하고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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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스케스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 Christ on the Cross>, 1631-32, 유화, 248-169cm.



마네는 파리로 돌아와 시인 샤를 보들레르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벨라스케스가 화가들 가운데 최고의 화가라면서 그의 작품 마흔 점 가량 봤는데 모두 걸작이었다고 감탄했습니다. 마네는 마드리드에서 스케치한 투우장면을 파리에서 완성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가 1865년 10월에 그린 <투우 장면 Bull-Fighting Scene>을 포함하여 세 점 모두에서 벨라스케스의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검정색을 기본으로 여러 가지 색을 조화시키는 기교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말대로 “마드리드의 화가들과 17세기 홀랜드의 대가 할스를 생각”하며 고안한 방법이었습니다. 스페인 화풍에 대한 관심이 네덜란드의 화가 할스Frans Hals(1581?-1666)의 화풍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는데 그는 “어느 누구도 할스가 스페인에 속한다는 나의 신념을 꺾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놀랄 일도 아니다. 할스는 메헬렘(16세기 스페인의 지배를 받은 도시) 사람이니까”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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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비극배우 The Tragic Actor>, 1865, 유화, 185-11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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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스케스의 <바라돌리드의 파블리오스 Pablillos de Valladolid>, 1632년경, 유화, 209-123cm.


마네는 1865년 가을 <비극배우 The Tragic Actor>를 그렸는데 벨라스케스의 <바라돌리드의 파블리오스 Pablillos de Valladolid>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린 것으로 배경에 아무것도 삽입하지 않고 공허한 빈 여백을 남긴 채 모델을 그린 것입니다. 그는 이 그림과 6개월 후에 그린 <피리 부는 소년>을 1866년의 살롱에 출품했지만 모두 낙선했습니다. <피리 부는 소년>에는 벨라스케스의 영향뿐 아니라 일본 회화방법도 혼용되었습니다. 마네는 벨라스케스로부터 배경을 없애고 여백을 어두운 색으로 칠해 환상적 요소로 사용하는 기교를 익혔으며 일본 화가들로부터는 단순한 구성이 오히려 주제를 힘 있게 해준다는 점을 배웠습니다. <피리 부는 소년>은 벨라스케스의 모델처럼 공간에 홀로 존재하는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는 비잔틴의 성상과도 같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는 소년의 발뒤꿈치에 약간의 그림자를 그려 넣어 단지 빛의 방향과 깊이만을 관람자가 알게 했습니다. 회화의 양식이 주제보다 더욱 중요함을 시사했는데 이는 에밀 졸라가 마네의 작품에서 지적한 점이기도 합니다.

조국의 영광을 위해 전쟁터로 나갈 준비가 된 <피리 부는 소년>의 모델은 궁전을 지키는 소년 기병이었습니다. 기병대 대장 레조슨이 소년을 마네의 화실로 데리고 왔습니다. 소년의 모습이 <화실에서의 오찬>에 묘사된 레옹과 흡사한 데가 있는데 옆으로 벌어진 귀, 넓적한 코, 검은 눈이 그러합니다. <화실에서의 오찬>에 나타난 레옹의 눈은 별로 검지 않지만 <비누방울 부는 소년>에서의 레옹의 눈은 검습니다. 그가 소년을 모델로 그릴 때 청순함과 남자다움을 강조했음이 특기할 만합니다. 르누아르가 1883년에 마네의 방법으로 <피리 부는 소년>을 드로잉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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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의 <마네식으로 드로잉한 ‘피리 부는 소년’ Drawing After Manet's 'The Fifer'>, 1883


<피리 부는 소년>이 1866년 살롱에서 낙선하자 에밀 졸라는 『레벤느망 L’Evenement』에서 이 작품을 옹호하고 나섰습니다. 졸라는 일곱 편의 글을 기고했는데, 살롱의 심사위원 28명을 일일이 거명하면서 비난하고 이 글들을 나중에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당시 스물여섯 살의 졸라는 마네에 관해 적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올해의 낙선작 <피리 부는 소년>이다. 약간 붉은 빛이 감도는 회색 배경에 기병모와 붉은색 바지를 차려입은 작은 키의 모델이 두드러져 보인다. 소년은 우리를 향한 채 피리를 불고 있다. 나는 이 그림이 나를 위해 그려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마네의 재능이 정확하고 간결한 필치로 이 작품에서 실현되었다고 선언하는 듯하다. … 마네의 그림에는 꾸밈이 없다. 그는 부분에 개의치 않을 뿐만 아니라 인물에 불필요한 덧칠을 하지 않는다. … 그의 그림에는 단단하고 튼튼한 부분들이 완전히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졸라는 이듬해 마네의 예술을 다룬 『변론과 설명』을 간행했으며, 자신의 미학적 견해이기도 한 이 책에서 자연주의 예찬론을 폈습니다. 그는 마네의 장점으로 “정확성과 간결성”을 꼽았습니다.


그렇게 간결한 필치로 그와 같은 힘 있는 미적 효과를 내기란 쉽지 않다. 마네는 루브르에서 쿠르베와 동등하게 취급되어야 하며 강인한 기질을 타고난 모든 화가들의 전당에 나란히 봉헌되어야 한다.


마네의 작품이 루브르 뮤지엄에 영원히 소장되어야 한다는 졸라의 주장은 화가가 받을 수 있는 최대의 찬사임에 틀림없습니다. 마네에게 졸라야말로 자신을 위해 투쟁하는 우군 중의 우군이었습니다. 졸라는 마네의 작품 값이 50년 내에 15배, 20배 그 이상으로 오를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마네는 졸라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졸라 선생,

당신과 같이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옹호를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또 기쁜가를 알리기 위해서라도 만나 악수를 청하고 싶은데 어디를 가야 당신을 만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장려한 글인지요! 수없이 감사드립니다.

5월 4일자 『레벤느망』에 실린 당신의 글은 대단히 빼어나며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당신과 대화하기를 바라겠습니다. 어디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당신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바드 카페에 매일 가는데 5시 반에서 7시 사이면 좋겠습니다.

당신을 곧 만나기 바라며 나의 진정한 감사의 표시를 받아주기 바랍니다.

에두아르 마네”(1866. 5. 7)


8개월 후 졸라는 마네에 관한 글을 또 발표했는데 거의 6만자의 단어를 사용한 장문이었습니다. 그는 단 한번 마네의 화실을 방문했지만 화실에서 다음 해에 만국박람회에 출품할 신작을 포함해서 한쪽에 쌓아둔 많은 작품들을 보고 감동받아 쓴 것입니다. 졸라는 마네의 개성과 기교에 관해서만 언급한 게 아니라 그의 예술론까지도 상세하게 거론했습니다.

마네의 작품에 대한 졸라의 비평은 1860년대 프랑스 회화의 미학적 스캔들이었습니다. 전통 형식을 존중한 쿠르베의 사실주의 그림은 평온을 열망한 대중에게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는데, 마네는 전통 형식을 파괴하고 새로운 형식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마네의 작품에는 명암의 단계는 나타나 있지 않고 부드러운 맛이 없으며 색의 대비와 부서진 형태, 즉흥적인 붓질이 관람자에게 편안함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과거에 볼 수 없던 요소였습니다. 졸라가 이 점을 높이 평가했고, 1866년 살롱 평론에서 사실주의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실재를 기질에 종속시킨다고 선언한 나에게는 리얼리스트라는 말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 진실을 그린다면 나는 갈채를 보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개성과 생명을 그린다면 나는 한층 더 갈채를 보낼 것이다. …

대중은 한 폭의 그림에서 목이나 가슴을 조르는 주제를 보면서도 예술가에게는 눈물과 웃음밖에 요구하지 않는다. 내게 있어 예술작품이란 역으로 말해 개성이다. 예술가들에게 내가 요구하는 것은 감미로운 환상이나 무서운 악몽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보여 달라는 것이며, 강렬하고 각별한 정신 및 자연을 자기 손 안에 폭넓게 꼭 잡고 자신이 그곳에서 본 것을 우리 눈앞에 그대로 이식하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시인하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미술사학자 리오넬로 벤투리Lionello Venturi(1885-1961)는 『미술비평사 History of Art Criticism』(1964)에서 “에밀 졸라의 말은 미학적 판단이 아니라 예술의 사회적 인습에 대항하는 그리고 한 단계 더 강렬한 주관주의란 명칭으로 사실주의 자체에 대항하는 ‘간략한 고소장’이었다”고 적었습니다.

졸라는 마네에 관해 적었습니다.


마네의 재능은 단순성과 정확함으로 이루어져 있다. 필시 그의 동료들 가운데 몇 사람의 기묘한 성질에 당면한 그는 현실에 대해서 일대일로 심문하기로 결정하고, 모든 기존 과학이나 과거의 경험을 거부하고 예술을 그 시작에서, 즉 대상의 정확한 관찰로부터 끌어내려고 했을 것이다. 따라서 마네는 용감하게 정면으로 어떤 주제를 향해 대결하여 이 주제를 폭넓은 덩어리들로 격렬한 대립 속에서 보면서 그가 본 대로 개개의 대상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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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정원의 여인들 Femmes au Jardin>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1866년 모네는 빚쟁이들을 피해 파리 근교 빌 다브레이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아르망 고티에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을 느낍니다. 시골에 있기로 결정했습니다. 현재 작업에 몰두하고 있습니다.”(1866. 5. 22)

그는 커다란 그림을 야외에서 직접 그리기 위해 정원의 한 부분을 깊게 팠습니다. 캔버스를 지면 아래로 내려야 윗부분을 그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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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정원의 여인들 Femmes au Jardin>, 1866-67, 유화, 255-20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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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정원의 여인들 Femmes au Jardin>의 부분


모네는 다시 옹플뢰르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번에도 빚쟁이들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돈이 떨어지자 그는 바지유에게 편지를 보내 그가 사용했던 캔버스를 보내달라고 부탁해서 바지유가 실패한 캔버스를 긁어내어 다시 사용했습니다. 모네는 옹플뢰르 화실에서 <정원의 여인들 Femmes au Jardin>을 완성시켰습니다. 이것은 시간을 많이 요하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리다 만 이것을 옹플뢰르로 옮긴 후 그해 여름과 겨울 한동안 그곳에서 지냈습니다.



이 작품의 제작 동기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바지유가 자기 여동생들을 찍은 사진을 모네에게 보여주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행하는 의상들을 소개하는 잡지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정원에 있는 여인들은 모두 카미유를 변신시켜 구성한 것입니다. 모네는 카미유를 따로따로 그린 후 그것들을 하나로 구성하여 여러 여인이 함께 정원에 있는 것인 양 보이게 연출했습니다. <정원의 여인들>은 꿈의 장면 또는 환상의 장면으로 나타났는데, 꽃이 있고 아름다운 여인들이 있으며 햇빛이 한껏 쏟아지는 정원은 시인의 정원처럼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그해 봄과 여름 그는 꽃이 만개한 정원을 <정원 Flower Garden>이란 제목으로 그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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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정원 Flower Garden>



<정원의 여인들>을 그릴 때 쿠르베가 방문했는데 해가 지자 그리기를 중단하는 모네에게 왜 계속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쿠르베는 모네가 같은 시간에만 그리는 것을 기이하게 여겼는데 이런 점이 쿠르베와 모네의 본질적으로 다른 미학이었습니다. 모네는 대상 하나하나에 대한 사실주의 묘사를 중요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빛이 시시각각 대상에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빛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 결국 그로 하여금 인상주의 회화를 창조하게 한 것입니다.


<정원의 여인들>과 <풀밭에서의 오찬>은 빛에 대한 세심한 관찰에 의한 것들입니다. <정원의 여인들>에서 빛을 캔버스 대각선으로 구성하면서 카미유의 점박이 드레스를 관통하도록 했으며, 작은 과수 아래 앉아 있는 또 다른 카미유의 얼굴을 파라솔 때문에 빛에 가려진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는 길을 양분하여 빛이 닿는 곳은 장밋빛 핑크색으로 묘사하고 그늘진 곳은 붉은빛이 감도는 보라색으로 묘사했습니다. 왼쪽에 서 있는 두 사람을 자세히 보면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빛에 의해 의상에 다른 색조가 있음을 봅니다. 그는 나뭇잎을 빛과의 상관관계에 따라 어두운 푸른색과 금빛 푸른색으로 달리 묘사했습니다. 그가 과거에 그린 그림들과는 달리 이 그림에는 빛의 역할이 현저하게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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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아놀드 저택의 갤러리; 중앙에 모네의 <옹플뢰르의 항구 Le Port de Honfleur>가 걸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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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당시의 옹플뢰르의 바보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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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옹플뢰르의 바보유 가껻 de la Bavolle, Honfleur>, 1866, 유화, 55.9-6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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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옹플뢰르의 바보유 가껻 de la Bavolle, Honfleur>, 1866, 유화, 55.9-61cm.


모네는 <정원의 여인들>과 <옹플뢰르의 항구 Le Port de Honfleur>를 1867년 살롱에 출품했지만 모두 낙선했습니다. <옹플뢰르의 항구>는 고기잡이배들이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바다 풍경을 그린 것으로 그가 그린 옹플뢰르 동네의 장면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년이 지난 후 에밀 졸라가 <정원의 여인들>에 대한 기억을 상기하여 평했습니다.

밝은 색 여름 의상을 한 여인들이 정원 산책로를 거닐며 꽃을 꺾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여인들의 흰색 드레스 위로 곧장 내리꽂히는 햇살이 화사함을 더하여 준다. 나무 한 그루에서 뻗어 나온 옅은 그림자가 마치 널찍한 회색 모포인 양 오솔길과 여인들의 드레스에까지 침투해 있다. 이보다 더 기묘한 효과가 있을까?


1867년 1월 파리로 돌아온 모네는 비스콩티 가 20번지에서 르누아르와 함께 기거하고 있는 바지유의 화실에 합류했습니다. 르누아르도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였으므로 바지유의 신세를 지고 있었는데 모네까지 추가된 것입니다.


모네는 살롱에 낙선한 두 점을 개인전을 열어서라도 대중에게 보여주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 뜻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1855년 만국박람회 때 쿠르베가 자비로 지은 별관을 세놓았으므로 돈만 있다면 언제든지 그곳에서 개인전을 열 수 있지만, 이는 돈이 많은 화가에게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정원의 여인들>을 바지유가 2천 5백 프랑에 구입했습다. 그는 작품의 값으로 모네에게 매달 50프랑을 지불하기로 했습니다. 세 사람이 한 곳에 살게 되자 자연히 함께 작업하는 일이 잦았으므로 작품에서 유사한 점이나 동일한 주제들이 발견되었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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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유의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초상 Portrait of Auguste Renoir>, 1867, 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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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의 <왜가리를 그리고 있는 프레데리크 바지유 Frederic Bazille Peigmant Le Heron>, 1867, 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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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의 <봄의 꽃 Fleurs de Printemps>, 1864, 유화, 130-9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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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봄의 꽃 Fleurs de Printemps>, 1864, 유화, 116.8-9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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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유의 <꽃 습작 Etude de Fleurs>, 1866, 유화, 97.2-8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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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의 <화병의 꽃 Fleurs dans un Vase>, 1869, 유화, 64.9-54.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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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초록 드레스의 여인, 카미유>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모네의 <초록 드레스의 여인, 카미유 Camille, Woman in a Green Dress>, 1866, 유화, 231-151cm.

이 그림을 마네가 그렸다고 하면 더욱 그럴 듯합니다. 마네는 주로 인물화를 그렸고, 모네는 주로 풍경화를 그렸습니다. 모델을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 인위적인 구성을 사용한 마네와 달리 모네는 풍경 속의 인물을 그려 넣을 때에도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연출을 하더라도 주변 환경과 어울리는 포즈를 취하게 했는데, 이 작품에서만큼은 카미유의 포즈가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녀의 우아함을 나타내기 위해 뒤를 돌아서 약간 얼굴을 돌린 모습으로 구성했는데, 어두운 배경으로 그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풀밭에서의 오찬>을 미완성으로 남겨두고 모네는 1866년 살롱에 출품할 작품을 서둘러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초록 드레스의 여인, 카미유 Camille, Woman in a Green Dress>였습니다. 이 시기 모네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카미유는 1870년에 결혼한 그의 첫째 부인입니다. 조금 작은 화실을 얻으려던 바지유와 함께 푸르스탕베르 가의 화실에서 나온 모네는 카미유를 실제 크기로 그리면서 화려한 초록색 실크 드레스와 가장자리에 털이 달린 재킷을 입은 그녀의 미모를 전형적인 파리 여인의 모습으로 부각시키려고 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허구적·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는데, 이는 모네의 미학에는 어울리지 않는 점이었습니다. 살롱 출품 날짜에 임박했기 때문에 이 그림을 그리는 데 사흘밖에 여유가 없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초록 드레스의 여인, 카미유>를 보수주의 평론가와 진보주의 평론가 모두 반겼지만 논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초록 드레스의 묘사를 두고 모네가 미완성으로 그림을 마쳤다고 비평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작품을 제대로 완성했느냐 그렇지 못했느냐 하는 건 평론가들에게 습작etude과 회화tableau의 차이로 이해되었고, 선천적 재능을 가진 화가와 교육을 받은 화가의 차이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습작도 작품이지만 습작은 습작으로 소개되는 것이지 완성된 그림이라면 습작의 요소는 없어야 한다는 게 일부 평론가의 주장이었습니다.


모네는 이 작품을 1865년에 그린 <퐁텐블로 숲속에 있는 샤이의 길>과 함께 출품했고 두 작품 모두 받아들여졌습니다. 살롱에는 두 점만 출품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초록 드레스의 여인, 카미유>는 성공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작품을 좋아한 이유는 유행하는 삶의 일면, 배경을 어둡게 해서 진지한 인상을 주는 점, 뒤로 돌아서서 얼굴을 약간 관람자에게 향한 우아한 포즈 때문이었습니다. 한 딜러는 이 그림을 모사한 작품을 주문하기도 했습니다. 소설가로 유명해지기 전 젊은 저널리스트로 각광받기 시작한 에밀 졸라가 모네에 대해 적었습니다. “난 모네를 알지 못하지만 그가 오랜 친구로 느껴진다.


모네의 이름이 마네의 이름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지적한 평론가도 있었습니다. 어느 카툰리스트는 ‘모네냐 마네냐 - 모네다! Monet or Manet? - Monet!’란 제목의 그림에 “그러나 마네가 있음으로 해서 모네가 가능했다. 브라보, 모네! 고맙다, 마네!”라고 적었습니다.


093

테오도르 루소의 <아프레몽의 떡갈나무 Groupe de Chenes, Apremont>, 1850-52, 유화, 63.5-99.5cm.



이 시기에 모네는 테오도르 루소와 쿠르베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었는데 루소는 “화면을 구성할 때 우리 내면에 있는 것들을 가능한 한 많이 눈에 보이는 것들과 접목시키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방법은 모네에게도 적용되었다. 다음과 같은 쿠르베의 말은 루소의 미학과 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자연에는 아름다움이 내재한다. … 아름다움이 발견되면 그것은 곧 예술에 속하거나 혹은 그것을 인식하는 예술가에게 속한다. 아름다움이 실제로 인식되거나 볼 수 있게 될 때 이는 자연히 예술적 표현으로 나타나게 된다.


087

마네의 <여인과 앵무새 La Femme au Perroquet>, 1866, 유화, 185-128.6cm.

이 작품에서 앵무새와 오렌지는 단순히 첨가된 것들이 아닙니다. 장미색을 주된 색으로 화면을 크게 차지하고 있는 여인의 의상과 앵무새의 파란색 그리고 오렌지색의 조화를 두드러지게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1868년 살롱에서 악평을 받았습니다. 고티에는 “화면에 구성도 드라마도 시도 없는데다 기교 또한 결여되었으며, 모델이 매우 추하게 묘사되었다”고 평했습니다.


089

귀스타브 쿠르베의 <아델라 구에레로 La Signora Adela Guerrero>, 1851, 유화, 158-158cm.


088

제임스 휘슬러의 <흰색의 심포니 No. 2 Symphonie en Blanc No. 2>, 1864, 유화, 76.5-51.1cm.


090

에드가 드가의 <테레사 드가의 초상 Portrait de Therese De Gas>, 1863, 유화, 89-67cm.


092

르누아르의 <여름 En Ete; Etude>, 1868, 유화, 85-59cm.


091

프레데리크 바지유의 <마을의 외관 La Vue 여 Village>, 1868, 유화, 130-89cm.


인물화figure painting는 당대 화가들의 선호하는 장르였습니다. 인물화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여기에는 전신상뿐 아니라, 상반신이나 두부를 그린 것도 포함됩니다. 인물화의 역사는 오래되었는데, 이집트, 그리스, 로마 및 기독교 미술은 모두 인물이 주제였습니다. 표현의 목적과 내용에 따라 자화상을 포함한 초상화, 신화화, 종교화, 역사화, 풍속화, 누드화, 기록화, 풍자화, 전쟁화 등으로 분류합니다. 부자들이 자신이나 가족의 인물화를 주문하는 경우가 많아 화가들이 이런 장르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인물화 자체가 한 인간의 개성을 나타내기에 가장 이상적이라서 대부분 화가들은 인물화를 그렸습니다. 모네의 경우는 주로 모델의 우아함을 표현했습니다. 인물화를 통해 우리는 각각의 화가의 화풍은 물론 어디에 초점을 맞추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네의 인물화에서는 우아함보다는 개성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입니다. 휘슬러의 거울에 비친 여인의 이중초상이 나타난 인물화도 특기할 만합니다. 귀스타브 쿠르베, 에드가 드가, 프레데리크 바지유, 르누아르의 여성인물화를 비교하는 것도 그들의 미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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