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국박람회와 마네의 개인전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1860년대 파리는 예술의 수도로서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으며 만국박람회가 1855년에 이어 1867년에 다시 개최되면서 그러한 면이 더욱 부각되었습니다. 4월 1일에 개막한 박람회는 최근 과학기술의 발달을 보여주는 전시물뿐 아니라 미술작품도 함께 소개했습니다.

마네와 모네 그리고 르누아르는 만국박람회의 역사적 장면들을 기념비적으로 여러 점 그렸는데, 현재 역사적 자료들로 보존되어 있는 이것들을 보면 당시 박람회의 장면과 사람들의 의상 그리고 건물들의 생김새를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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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1867년의 만국박람회 L'Exposition Universelle de 1867>, 1867, 유화, 108-196.5cm.

오른쪽 위에 보이는 커다란 풍선은 사진작가 나다르의 기구입니다. 그는 이 기구를 타고 올라가 박람회의 풍경을 찍었습니다. 나다르는 1856년 이 기구를 타고 파리의 상공을 날라 역사상 처음으로 항공사진을 촬영하기도 했습니다. 마네는 박람회장을 멀리서 바라본 장면으로 그려 역사적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오른편 개를 끌고 가는 소년은 마네의 아들 레옹입니다.



마네가 <1867년의 만국박람회 L'Exposition Universelle de 1867>를 그린 것은 6월과 8월 사이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린 파리 장면이지만 이 그림에 서명하지 않은 채 사람들에게 공개하지 않고 팔지도 않았으며 평생 화실에 보관했습니다. 마네가 사망한 후 수잔이 이 그림을 팔 때 그녀가 그림에 마네의 이름을 서명했습니다.

보자르의 미술관은 당대의 유명 화가들을 초청했는데 아카데미파로는 제롬, 메소니에, 루소, 카바넬 등이 선정되었고 코로와 밀레도 포함되었습니다. 마네가 제외되고 이상의 화가들이 초청받은 건 박람회가 프랑스의 미래의 미술을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 과거의 미술을 보여주려는 것으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이번에도 살롱 입선작들을 박람회에 소개했는데, 그해 살롱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신 예술가들 중에는 마네와 모네를 비롯하여 르누아르, 피사로, 세잔이 끼어있어 바티뇰의 화가들에게는 여간 실망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마네는 살롱에 여러 번 낙선했음에도 불구하고 “살롱이야말로 예술가들에게 실제 싸움터이다. 예술가는 인정받기 위해서 마땅히 국전에 출품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왔습니다. 많은 진보주의 예술가들이 국전 심사위원들의 심사기준에 불만을 갖고 살롱을 배척하려고 했지만 마네는 심사위원들의 아카데미즘 경향이 못마땅하더라도 살롱을 통해 사람들에게 폭넓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전통 회화를 인정하고 다른 한편으로 화가는 최근의 인생을 그림에 포함시켜야 한다면서 고전주의 회화에 현대인의 감각이 합성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도미에, 할스, 스페인과 베니스의 대가들, 근래의 사진과 판화, 일본 목판화 등을 연구하면서 그들의 유용한 회화적 요소들을 현대인들의 감각에 맞도록 조절하여 자신의 그림에 응용해왔습니다.

쿠르베는 이번 박람회에 출품한 네 점이 모두 받아들여졌지만 1855년에 그랬던 것처럼 따로 별관에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그는 알마 다리 근처에 5만 프랑을 들여 개인전을 열고 박람회를 관람하기 위해 오는 외국인들에게 자신이 갖고 있는 작품 모두를 보여주기 원했습니다. 그는 무려 135점을 소개했으며, 여태까지 6백 점 이상을 제작하여 왕성한 창작의욕을 나타냈습니다.

마네도 알마 다리 근처 몽태뉴 애비뉴와 알마 애비뉴가 만나는 코너에 자비로 작은 별관을 마련하고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쿠르베의 별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도 비싼 임대료를 지불하고 자신이 엄선한 50점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개인전을 준비하기 위해 어머니로부터 18,300프랑(오늘날의 돈으로 환산하면 약 5만 달러에 해당하는 큰 돈)을 빌렸습니다. 마네의 어머니가 쓴 편지에는 아들이 이 개인전으로 해서 유산을 탕진할까봐 노심초사하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마네의 어머니는 남편이 1862년에 세상을 떠난 이후 지난 4년 동안 총수입이 79,485프랑이므로 이를 4년으로 나누면 일 년에 19,871프랑이 되므로 18,300프랑이라면 거의 일 년의 수입을 탕진하는 것이 되지 않느냐는 계산이었습니다. 개인전은 경제적으로 커다란 모험이었습니다. 쿠르베는 거의 세 배에 가까운 돈을 들였지만 그의 인지도는 매우 높아 그에게는 모험이랄 수 없었습니다.

다른 화가들도 개인전을 열고 싶었겠지만 비용 때문에 그럴 수 없었습니다. 쿠르베와 마네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마네는 개인전을 위해 꼼꼼하게 준비해온 것 같았습니다. 에밀 졸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 같은 사람의 도움 덕분에 나는 과감하게 이런 모험을 하게 되었소. 나는 성공을 믿소”라고 적었습니다. 그는 만국박람회 카탈로그에 광고도 내고 자신에 관해 쓴 졸라의 소책자를 6백 부나 발행했습니다. 개인전은 5월 24일에 열렸습니다. 마네는 지난 10년 동안 그린 작품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만 골랐습니다. 유화 50점 외에도 모사한 3점이 있었는데, 틴토레토의 <자화상>, 벨라스케스의 <작은 기사들>, 티치아노의 <하얀 토끼의 마돈나>였으며, 에칭 3점도 있었는데, <짚시들>, <필립 4세의 초상>, <작은 기사들>이었습니다. 대중의 반응은 1863년이나 1865년에 비할 바가 못 되었습니다. 프루스트의 말로는 “사람들이 걸작 앞에서 웃었다”고 했습니다. 평론가들의 반응도 썩 좋았던 건 아니지만 평론가 샹플뢰리의 주목을 받은 것이 성과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만족스러웠던 점은 오랜 시간을 두고 그린 작품들이 한 곳에 모였다는 것이다. 첫 작품부터 마지막 작품까지. 난 확연한 흐름을 읽을 수가 있었다.

마네는 카탈로그 서문에 간단한 선언문을 작성하여 실으면서 자신을 삼인칭으로 지칭했습니다. 변론 형식의 글에는 그가 살롱의 심사에 너무 많은 불이익을 받아 더 이상 공식적 인정 따위에는 괘념치 않는 화가로 표현되었습니다.

1861년부터 마네는 전시를 했거나 하려고 했다. 하지만 금년부터는 대중에게 직접 평가를 받기로 결정했다. … 오늘날의 화가들은 ‘와서 나의 완벽한 작품을 봐 달라’고 하는 대신에 ‘나의 솔직한 작품을 당신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단지 화가 자신의 느낌을 나타낼 때조차. … 이 작품들이 반항적인 이미지(요즘 사람들의 말로는 선정적인 것이겠지만)를 띠는 이유는 화가가 솔직하기 때문이다. 화가는 오직 자신의 인상을 전하는 데만 관심을 둘 뿐이다.

그때만 해도 대중은 예술가의 지성을 의심하지 않았으며 작품에 나타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도 그대로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처럼 문화가 비대해지면서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의 구별이 어려워지고 예술가가 솔직하고 성실하게 예술을 행위하기보다는 기만과 무책임한 행위를 일삼으며 알기 어려운 수수께끼로 사람들을 속이며 자극하는 데 비하면, 당대에는 마네의 말처럼 “나의 솔직한 작품을 당신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말에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마네가 카탈로그 서문에 기술한 내용은 지성인의 고백이며 예술가의 진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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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탱-라투르의 <에두아르 마네의 초상 Portrait d'Edouard Manet>, 1867, 유화, 117.5-90cm.


마네는 살롱에 낙선했지만 팡탱-라투르가 <에두아르 마네의 초상 Portrait d'Edouard Manet>을 그려 소개했으므로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은 추문에 시달려온 화가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팡탱-라투르는 마네를 모델로 여러 점 그렸습니다. 그 그림을 보고 쓴 무명 평론가의 글에서 당시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잘 차려 입은 이 다정한 신사는 경마장의 기수를 닮았다. 이 사람이 바로 검은 고양이의 작가이다. 그의 명성을 들은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렸으며, 더벅머리에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는 그림쟁이를 떠올렸다. …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점잖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선 화가를 보면서 그 속에 감춰진 재능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개인전은 10월까지 계속되었지만 한여름에 이미 마네는 개인전의 성과가 그리 크지 않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언론에서 별로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언론은 만국박람회장의 작품들을 보도하느라 마네의 작품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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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공화국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14세기 말 이탈리아의 최강국은 베네치아 공화국Venetian Republic이었습니다. 지중해 패권을 둘러싸고 제노바와 격렬한 대립을 계속한 베네치아 공화국은 14세기 중엽에 숙적 제노바를 격파하고 유럽 제1의 해상세력을 구축했습니다. 공화국은 총독Doge에 의해서 통치되었으나, 대상인으로 이루어진 도시귀족의 세력이 강대했습니다. 이탈리아 도시들 가운데서 비교적 정치가 안정되고 후기르네상스에 있어 문화의 일대 중심지가 됩니다.


일찍이 11세기 초에 베네치아 상선은 아드리아해,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하며 이 도시를 유럽의 상업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동방으로부터 융단, 향료, 노예 등이 매일 항구에 유입되었고, 그것들을 내린 배에 양모제품, 직물들이 실려 나갔습니다. 선주의 지혜, 선장의 담력, 외교관의 수완이 조화를 이루어 지중해 동부에 돌출한 삼각형의 반도인 발칸 반도Balkan Pen.와 소아시아의 시장은 베네치아의 수중에 들어갔고 각지에 무역진흥공관이 세워졌습니다.


15세기에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반도에서도 가장 번영하고 화려한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상인 귀족들의 꿈과 같은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대운하의 연안에 연립되어 독특한 매력을 풍기고 화사한 나선형의 둥근 기둥, 섬세하고 우아한 발코니, 나란히 줄지은 아름다운 창문들, 창문에 드리워진 레이스의 경쾌함, 세밀한 금속세공이 환상적 화려함을 나타내주었습니다. 이 속에는 비잔틴과 고딕, 극도로 세련된 두 양식이 완벽하게 융화되고 있었습니다. 내부의 화려함도 외관에 손색이 없었습니다. 실내에는 화려한 가구들이 놓여 있었으며, 벽은 밝고 경쾌한 색의 모자이크로 장식되었고, 태피스트리, 둥근 천장에는 프레스코, 벽에 걸린 그림들의 액자는 금으로 도금되어 빛에 의해 강렬한 색을 발했습니다. 대부분 베네치아의 저명한 예술가들 솜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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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1430?-1516)의 <풀밭의 성모>, 1500-05년경, 67-86cm.

조반니 벨리니는 베네치아 화파 최성기의 화가로 색채가 풍부한 정서적인 메시나의 화풍을 구사했으며, 풍경과 인물에 뛰어났습니다.



베네치아는 15세기 최대 미술전당들 중 하나였습니다. 이런 명성을 쌓는 데 가장 공헌을 한 이들은 벨레니 가의 작업장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작업장의 창시자인 화가 야코포 벨리니Jacopo Bellini(1400-70/71)는 두 아들, 젠틸레와 조반니와 함께 작업장을 운영했는데, 베네치아 화파의 시조인 그는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1431?-1506)의 장인이기도 했습니다. 만테냐는 파도바 화파의 화가이며 조각가 도나텔로의 영향을 받아 견고한 조형적 성격의 작품을 그렸으며 북 이탈리아 화파의 르네상스 양식을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의 문하에서 회화를 수학하면서 피렌체에서 작업한 적이 있는 야코포 벨리니는 각지를 편력하며 수업을 연마한 후 베네치아에 돌아와 공방을 차리고 아들들을 화가로 키웠습니다. 두 아들은 아버지와 더불어 당대에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되었습니다.


베네치아의 인문주의는 피렌체만큼 일찍 발전하지는 못했고, 또한 피렌체만큼 학교와 아카데미가 많지 않았지만 열의에 있어서는 결코 뒤지지 않았으며, 15세기에는 문화와 예술에서 더욱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책을 소장하지 않은 귀족이 없었고, 어느 관저든 앞을 다투어 문인과 시인에게 문을 활짝 열어놓았습니다. 귀부인들은 신학자와 철학자들을 초대해 강의를 들었고, 학교는 서민자제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했습니다. 활판인쇄의 발전에 따라 문화보급의 폭이 넓어지고 일반 독자들이 고금의 명저들을 구하기가 한결 수월해졌습니다. 15세기 후반의 베네치아는 인쇄출판의 최대 중심지가 되었고, 출판물은 인쇄의 선명도, 지질의 우수함, 아름다운 활자체로 호평을 받았습니다.


15세기 말 베네치아에서 12,835권의 서적이 간행되었는데, 대부분이 알드 마누티오의 손에 의해서 출판되었습니다. 1449년에 태어난 이 천재 인쇄출판업자는 로마에서 성장하고 라틴 문학에 정통했습니다. 그는 로마를 떠나 페라라에 살면서 그리스 고전의 번역에 치중했고 플라톤, 키케로에 관해 강연함으로써 박식함을 피력하고 교육에 열을 올려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스 고전의 염가판을 출판해 많은 사람들이 애독하는 것이 마누티오의 꿈이었으나 값만 싸다고 해서 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원전의 여러 사본에 대한 비교연구가 매우 큰 작업이었고 판매시장도 개척해야 했습니다. 그가 베네치아로 이주한 건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는 베네치아의 고전학자에게 원전에 대한 비판과 주석을 청탁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사업은 성공했고 사후 아들에게 유업으로 계승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활판인쇄가 신속하고 광범하게 위력을 발휘한 도시는 메디치 치하의 피렌체뿐이었습니다. 15세기 유럽에서 문화와 예술 분야에서 피렌체와 대항할 수 있는 도시는 베네치아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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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정의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명을 정의하는 것은 무엇일까? 화학물질 주머니, 즉 박테리아 생식세포가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생명을 밝힐 때 어떤 일이 발생할까? 이런 과정은 우리가 죽음과 내세의 가능성을 생각할 때 중요해집니다. 우리가 죽을 때 사라지는 건 정확하게 무엇일까?

과학자들은 생명을 어떻게 생각할까? 노벨상 수상자이며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공동 발견한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1916-2004)은 생명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크릭은 1962년에 노벨 생리 의학상을 수상했습니다.


1. 자기명령과 자기복제에 필요한 모든 장치를 복제하는 능력

2. 비교적 실수 없는 유전 정보 복제

3. 유전자와 유전자의 단백질 생산이 밀접하게 근접하는가?

4. 에너지 공급


그러므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과는 전혀 다를지는 몰라도 생명이란 자기복제를 하는 것으로 정의됩니다. 생명은 중요한 화학반응을 촉진시킬 수 있는 단백질이나 다른 화학물질들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생명은 또한 어떤 형태의 유전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은 변화하지 않고 반응속도를 변화시키는 물질인 촉매catalysis는 자체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고 화학반응을 가속시키는 물질입니다. 생명에 필요한 많은 화학반응에 촉매가 필요한 까닭은 생명체 속에 있는 물질들이 안정된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촉매가 없으면 살아 있는 생물을 지탱하는 많은 화학반응들은 매우 뜨거운 열과 상당한 압력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생명체에 촉매 역할을 하는 물질이 있으면 이런 화학반응은 실내온도[섭씨 20도 정도]나 그보다 좀 낮은 온도, 그리고 정상적인 대기 조건에서 발생합니다.

수소와 산소로 채워진 기구氣球, 이 폭발성 혼합물은 하루 정도에 걸쳐 서서히 누출될 것입니다. 생명의 촉매 가운데 많은 것들이 독특한 단백질입니다. 그러나 최초의 생명에는 단백질이 아닌 촉매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크릭에 의하면 생명의 필요 요소는 생명에 필요한 특정 분자들뿐만이 아닙니다.

생명에 어떤 복합분자가 필수적일까? 우리는 살아 있는 생물의 기능과 복제에 필요한 필수 분자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기 지구에는 산소가 없었으며,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환경이 매우 열악했으므로 우리는 최초 생명의 형태를 밝힐 수가 없습니다. 어떤 화학물질들이 이용되었는지 알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최초의 생명을 이해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최초의 생명이 과연 어떠한 화학성분들로부터 유래되었는지 조사하고 있습니다. 유력한 과학 가설들은 지구에서 발견된 모든 화학물질, 우주에서 온 화학물질 그리고 우주에서 생성된 생물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한 묶음의 화학물질들을 모은 세포주머니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 무엇이 필요할까? 크릭에 의하면 단백질, RNA 혹은 DNA 같은 화학적 지시가 필요하며, 지시를 복제하거나 모사하고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는 화학물질이 필요합니다. 젊은 행성에는 수많은 에너지원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주머니 속에서 에너지 산출을 위해 반응할 수 있었던 다양한 화학물질뿐만 아니라 햇빛이 있습니다. 문제는 정보의 원천을 결정하고, 어떤 촉매가 지시를 복사할 수 있으며 에너지 생산반응을 일으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임의의 단백질 화학합성에서 최초의 생명이 나올 수 있었을까? 단백질에는 단백질의 기초 성분을 만드는 스무 가지의 아미노산이 있으므로 RNA나 DNA보다 더 복잡합니다. 거의 무한한 결합이 가능하지만 그 많은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수만이 살아 있는 유기체에게 유용합니다.

단백질의 기초 성분인 아미노산을 실험실에서 만들 수 있기는 하지만, 운석과 혜성에서도 발견됩니다. 그것들이 어떻게 결합해서 생명에 필수인 단백질로 되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프레드 호일 경이 말했듯이 기회는 매우 적습니다. 한 번의 기회가 발생하더라도 단 하나의 단백질이 될 뿐입니다. 생명에는 수백, 수천 개의 단백질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지구상에 생명이 나타난 건 행성의 형성 이후 비교적 얼마 되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러면 생명의 기원에서 단백질이 주된 요인이 아니었다면 다른 가능성이란 무엇이었을까?

일부 과학자들은 생명을 유발시키는 초기의 보다 단순한 형태의 RNA가 있었다고 믿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교수 앤드루 H. 놀Andrew H. Knoll(1951-)은 하나의 단순한 RNA 분자는 아미노산과 단순화된 핵산에서 만들어지지 않았겠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단순화된 RNA가 초기 지구의 상태에서 쉽사리 생성될 수 있었는지 하는 것과, 그런 분자들이 스스로 복제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최근 RNA의 보다 단순한 형태 가운데 하나가 보다 기다란 분자로 자가조립되는 예를 발견했지만, 그것이 RNA 정보 원천이 되기에는 아직도 매우 미미합니다. 그러나 근래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RNA 같은 화합물들이 어떻게 생성되고 생명의 기초가 될 수 있었는지 보여줍니다.

솔크 연구소Salk Institute의 과학자 레슬리 오겔Leslie Orgel(1927-2007)은 “화학자와 분자생물학자들이 합동 연구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으므로 그 간격이 좁아질 것”이라며 낙관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운석과 혜성을 포함하여 우주에서 온 물체에 대한 연구에서도 생명의 시작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생명에 필요한 화학물질들이 지구상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우주에서 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물질들은 화학물질이 최초의 생명 주머니를 만드는 데 어떻게 기여했을까?

지구의 초기에 운석과 혜성들이 바다가 생기게 하고, 상당한 복합유기화합물들을 제공했습니다. 아미노산을 포함하여 복합유기화합물은 두 가지 형태 중 하나입니다. 운석에서 발견된 L타입은 생명체계에서 발견되는 형태입니다. 1969년 지구를 강타한 머치슨Murchison 운석에서는 수많은 복합유기화합물은 물론 70개 이상의 아미노산이 발견되었습니다. 몇몇 아미노산들은 출중한 L타입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지구상의 생명에서는 보통 발견되지 않는 수많은 다른 아미노산들도 이 운석에서 발견되었습니다.

1970년에 시작되어 20년 이상 지속된 이 연구를 통해 분자의 근원이 지구 대기권 밖이라는 사실이 다양한 영역에서 수많은 연구자들의 증거로 입증되었습니다. 애리조나 주립대학의 생화학자 존 크로닌John Cronin은 머치슨 운석은 결정적인 분자들이 어디서 왔는지를 연구하는 데 “새로운 차원”을 보탠 것이라고 말합니다.

단순화합물이 우주에서 복합분자를 산출할 수 있다면, 생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단서도 제공할 수 있을까? 우리가 올려다보는 어둡고 끝없는 하늘이 모든 것을 시작한 거대한 페트리 접시Petri dish가 될 수 있을까?

과학자들은 운석에서 정교한 탄화수소들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이것들은 생명에 필요한 더욱 복잡한 분자를 위한 기초 성분을 제공하는 일종의 화합물이며, 아미노산과 같은 이런 많은 화합물들은 십중팔구 충돌로 인해 생겨났을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혜성 같은 우주 물질에서 단서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연구를 통해 우주에서 날아온 복합분자의 종류들이 밝혀질 것입니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운석과 혜성의 성분을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서 샘플을 채취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을까? 2005년 초에 우주탐사기가 샘플들을 지구로 가져왔습니다. 최근 과학자들은 젊은 지구에 떨어진 암석의 유기성 부스러기에서 단서가 될 만한 자료를 면밀히 살피고 있습니다.

이른바 미소운석micrometeorite은 지구상의 초기 물질의 원천이었습니다. 태양계가 형성될 때 5m 미만 크기의 작은 운석들이 우주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미소운석은 자체의 ‘열 차단제’를 지녔고 지구 대기권으로 진입하면서 그 일부가 점차 소멸됩니다. 그것들은 점차 속도를 줄이며 먼지 크기의 입자로 대기로부터 떠내려갔습니다. 차단제로 보호된 이런 미소운석에는 아미노산과 많은 복합유기화합물이 들어있습니다.

지구의 처음 수백만 년 동안 미소운석들이 매년 500톤에 이르는 유기화합물을 지구로 날랐습니다. 미소운석을 채취하는 사람들은 그린란드에서 남극대륙까지 여행하며 지구 대기권 밖의 이 독특한 물질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미소운석에는 금속원소가 들어 있으며, 촉매작용을 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이것들의 독특한 물리적 구조가 초기 지구에 많은 화학반응들을 촉진시킬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화학적 반응들이 일어나자 우리의 지구에서는 생명을 위한 새로운 화학적 자원들이 생겨났습니다.

미소운석 입자에는 작은 구멍들이 있어 분자 스펀지처럼 작용합니다. 이런 스펀지들이 한때 지구에 있던 복합유기분자들을 흡수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오르세 출신으로 미소운석 전문가인 천체물리학자 미셸 모레트Michel Maurette는 이런 입자들이 생명을 위한 주요 성분을 나르고, 유기화합물을 흡수하며, 반응을 촉진시켜 살아 있는 생물들의 복잡한 원조물질precursor들을 산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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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개성의 마네의 모델 베르테 모리소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마네의 <휴식 Repose (Berthe Morisot)>, 1869-70, 유화, 148-111cm.

베르테는 마네의 화실을 방문하면 늘 자주색 소파에 앉았는데, 어느 날 비스듬히 기대앉은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이 그림에 나타난 베르테의 포즈를 보면 마네의 주문에 의해서 포즈를 취한 것이라기보다는 스스로 그러한 포즈를 취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베르테는 왼발을 뒤로 하고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며 양팔을 날개처럼 벌리고 아주 편한 자세를 취했는데, 이런 자세를 다른 화가들의 그림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현대인답게 그녀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에게 편한 자세를 취했으므로 모더니즘이 시작되었음을 시위라도 하는 듯이 보입니다.



아내 수잔을 빼고는 마네의 그림에 나타난 여인들은 모두 날씬했습니다. 마네는 베르테를 모델로 여러 점 그렸으며 <발코니>에 이어 1869-70년에 그린 두 번째 그림은 <휴식 Repose (Berthe Morisot)>이란 제목을 붙였습니다.



121-1

마네의 <에바 곤잘레스의 초상 Portrait d'Eva Gonzales>, 1869-70, 유화, 191-133cm.

에바는 1863년 이후 프랑스 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한 소설가 엠마누엘 곤잘레스의 딸입니다. 이 초상화는 1870년 3월 12일 살롱 출품 마감 날 직전에 완성되었습니다. 마네는 후에 이 초상화를 에바에게 주었습니다.


121-2

에바 곤잘레스의 <소년 군인 Enfant de Troupe>, 1870, 유화, 130-97.5cm.


이 그림을 그릴 때 마네는 <에바 곤잘레스의 초상 Portrait d'Eva Gonzales>도 그렸습니다. 베르테의 말에 의하면 마네가 <에바 곤잘레스의 초상>을 그릴 때 무려 40여 차례나 포즈를 취하게 했지만, 잘 그려지지 않아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마네는 1869년 2월 처음으로 에바를 제자로 받아들여 가르쳤으며, 그녀는 인물화를 주로 그리는 화가가 되었습니다.


베르테는 에바와는 달리 마네의 심중을 헤아려 스스로 포즈를 취하곤 했으므로 편안한 마음으로 작업하게 해주는 모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마네에게서 회화를 배우지는 않았는데 어느 정도 회화에 자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가 되어 배울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베르테는 마네와 마찬가지로 상류층 집안 출신으로 1841년 1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고 성장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프랑스 중심의 행정구역 세르의 장관이었거나 고위공직자로 알려졌습니다. 그녀는 셋째 딸로 3살 많은 언니 이브와 2살 많은 에드마가 있습니다. 어머니 코넬리는 매우 지성적이며 위트가 넘쳤는데 베르테는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세 자매는 1858년에 드로잉 레슨을 받았는데 피아노 레슨처럼 일주일에 한 시간 정도 받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에 열두 시간이나 받는 맹훈련이었습니다.


베르테는 1860년 에드마와 함께 카미유 코로에게 수학했는데 이때 코로는 예순네 살이었습니다. 코로는 자매에게 자신의 느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코로는 풍경화가로 유명했으며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풍경을 그린 그림들만을 출품해왔는데, 1869년 살롱에는 인물화 <방해받은 독서>를 예외적으로 출품했습니다. 베르테 자매가 코로로부터 회화를 수학한 기간은 6년이나 되었습니다. 코로는 자매에게 야외에 나가서 스케치하도록 가르쳤으며 또 자신의 작품들을 모사하게도 했습니다. 모사에 있어서는 에드마가 베르테보다 뛰어났지만, 에드마는 아마추어 화가로 남았고 모사보다는 창작 의욕을 가진 베르테는 유명한 화가가 되었습니다. 베르테는 자기가 모사한 코로의 작품을 모두 없애고 한 점만 남겨두었는데, 마네가 그러했듯이 창작 의욕이 넘치는 그녀도 모사를 통한 코로의 영향에서 스스로 벗어났습니다.


<휴식>에 나타난 베르테의 얼굴에서 강렬한 개성을 보이며, 그녀 스스로 자신만만한 화가임을 시위하려는 듯합니다. 마네의 모델들이 단순히 그의 작품 속의 대상으로 포즈를 취한 데 비해 베르테는 마네의 예술에 자신을 반영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 것과 다른 모델들이 각 작품에서 변신했다면 베르테는 늘 개성이 강한 그녀 본래 모습이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합니다. <발코니>에서 그녀는 세 사람 가운데 가장 뚜렷하게 자신의 모습을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실제의 모습이었습니다. 베르테는 르누아르와 마네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마네에게 충고를 한 적도 있는데 자연을 신선한 눈으로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녀가 코로에게서 배운 점이기도 합니다.


<휴식>은 1873년의 살롱을 통해 소개되었는데, 훌륭한 가문의 규수가 거만한 자세를 취한 것이 알려지는 것을 꺼렸는지 살롱 카탈로그에는 이 작품에 관한 언급이 없습니다. <발코니>에서 그녀는 이목구비가 분명하게 나타났지만, 여기에서는 얼굴이 부드럽게 보입니다. 마네가 색을 느슨하게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122

마네의 <베르테 모리소 Berthe Morisot>, 1872, 유화, 55-38cm.

검정색 의상에 모자를 쓴 배르테의 얼굴을 색으로 이등분하면서 마네는 밝고 어두운 색을 병렬했는데, 조명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베르테의 개성이 잘 나타난 이 초상화는 마네의 순수한 미학을 대변할 만합니다. 긴급하게 사용한 붓질이 베르테의 표정을 재빨리 포착했습니다. 피부색과 눈동자의 검정색 대비는 배경의 상아색과 모자, 스카프, 의상의 검정색과 증폭되는 대비를 이루면서 우아한 조화를 이룹니다. 색을 평편하게 사용한 방법은 일본화의 영향이었고, 검정색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건 스페인 회화의 영향입니다.


120-1 마네의 <부채를 든 베르테 모리소 Berthe Morisot a L'Eventail>, 1872, 유화, 50-45cm.

마네는 1872년 7-9월 사이에 이 작품을 포함하여 베르테의 초상화를 네 점 그렸습니다. 그해 5월 살롱에 출품할 만한 작품이 없어 서운해 하던 마네는 일종의 슬럼프에 빠졌던 듯합니다. 그래서 영감이 떠오르는 대로 자유롭고 즉흥적으로 그리는 그림을 시도했습니다. 이때 새로 장만한 화실로 종종 방문하는 베르테를 즉흥적으로 그렸습니다.


120-2

마네의 <베르테 모리소 Berthe Morisot>, 1874, 수채화, 20.9-16.8cm.




마네는 1872년에 베르테의 초상을 <베르테 모리소 Berthe Morisot>란 제목으로 다시 그렸습니다. 그녀가 마드리드를 여행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습니다. 관람자를 향해 똑바로 바라보는 베르테의 얼굴에서 우리는 그녀가 어떤 내면적인 즐거움에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네는 베르테의 개성적 매력과 지성, 화가로서의 재능, 덜 다듬어진 아름다움 등을 유감없이 묘사해냈습니다.

폴 발레리가 이 작품을 극찬했습니다.


나는 1872년에 그린 베르테 모리소의 초상을 마네 예술의 정수라고 생각한다. … 무엇보다도 나는 검정색의 완전한 어둠에 주목하고자 한다. 상을 당했을 때 쓰는 모자와 턱끈의 검정색은 마네만이 해낼 수 있는 효과로 날 사로잡는다. … 검정색의 힘과 단순한 배경, 장밋빛이 감도는 백색의 깨끗한 피부, 가히 ‘현대적’이며 ‘신선한’ 모자의 독특한 실루엣. 즉 인물의 외양을 감싸는 모자와 끈, 리본의 형태 … 어딘가를 응시하는 시선과 그윽한 눈빛의 커다란 눈망울을 지닌 이 모델은 일종의 ‘부재의 존재’를 웅변한다.


이 시기에 마네의 동생 외젠과 베르테 사이에 혼삿말이 오갔는데, 베르테는 외젠을 가리켜 사분의 삼은 미친놈이라고 말했지만 그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베르테는 1874년 12월 마네 가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마네가 그녀를 모델로 그린 그림은 모두 11점인데 자신이 5점을 보관하고 2점을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베르테는 마네가 죽은 후 1점을 구입하여 3점을 갖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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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품을 통해 아동의 심리상태를 파악해야 한다


 

 

모호하고 애매하게 표현되는 감정이나 생각을 파악하려면 단일 미술작품의 주제보다는 여러 작품에서 일관적으로 발견되는 형태나 전체적인 작업 과정을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키는 그림을 그릴 때마다 외곽선을 넘지 않고 채색하는 데 무척 신경 썼습니다.

이런 행동은 자신의 충동을 조절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반영된 것입니다.

미키는 아무 문제없어 보이는 그림을 그리면서도, 입으로는 분노와 처벌의 내용이 담긴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또한 미키 내면의 충동 조절에 대한 걱정을 보여줍니다.


다른 예로 막스라는 아이는 손가락 그림 두 점을 완성한 후 그 위를 물감으로 덮어버렸습니다.

이는 합리화와 지성화를 통해 감정과 충동을 덮어버리는 태도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또 도니라는 아이는 나무토막으로 도시 모형을 만들면서 점점 의자를 치료사 쪽으로 끌어와 앉았습니다.

모형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치료사도 함께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람에 치료사도 함께 탁자에 앉아 모형을 만들던 상황이었습니다.

도니는 처음에 각자 따로 건물을 만들자고 했지만, 다 완성한 후에는 둘을 합쳐놓았습니다.

완성된 작품만을 보았을 때는 도니의 심리 상태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작업 과정에서 보여준 행동을 보면 의존하고 싶은 바람과 친밀감을 느끼고 싶은 욕구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아동 미술치료』의 저자 주디스 아론 루빈은 미술작품의 내용을 통해 아동의 심리 상태를 파악하려면 다음 네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1. 해당 작품을 만드는 동안 발생한 언어적, 비언어적 의사소통.

그 내용은 재료나 주제와 연관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2. 겉으로 드러난 표면적인 주제와의 연관성.

3. 작품을 만드는 동안, 혹은 작품 완성 이후 이야기한 내용, 제목, 투사된 이미지 등.

4. 형태의 왜곡, 과장, 생략, 혹은 상징 선택 등에 함축된 내용.


주디스 아론 루빈은 자신의 경험상 프로이트가 제안한 심리학의 전제 중 하나인 ‘정신 결정론 psychic determinism’이 유효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정신 결정론이란 무의식이 존재하며, 인간의 모든 심리 현상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과 무의식적인 동기에서 비롯된다는 가설입니다.

아이가 미술 활동을 하는 동안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아이의 심리 상태와 연관된다는 가정은 아이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특정한 미술 활동을 하기 직전이나 직후에 내뱉은 말, 취한 행동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과연 보편적인 상징이 존재하느냐의 문제에 대해서 주디스 아론 루빈은 그러한 연합이 어느 정도 유효한 것이 사실로 보인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보편적 상징이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돌아봐도, 태양은 아버지를, 집은 어머니를 상징하는 경우가 놀라울 정도로 많았다고 술회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아이에게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상징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도 분명 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상관관계는 가설을 세우기 위한 용도로만 적용해야 합니다.

예컨대, 대부분 쭉 뻗은 선은 남근을, 그릇 모양 형태가 여성성을 상징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특정 상징의 특유한 의미는 해당 아동의 전반적인 태도, 언어 사용, 몸짓 등을 고려해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아이의 행동을 충분히 관심 있게 지켜보고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이기만 한다면, 치료사는 미술작품에 담긴 상징적 의미를 수월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치료사 자신의 상황이나 심리 상태를 투사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일반적인 주제들은 보편적인 인간적 문제나 발달 과업과 연관되기 때문에 그 숫자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 대부분은 분노나 애정에 대한 욕구와 관련 있습니다.


분노는 물어뜯거나,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처럼 구강과 관련된 형태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토미가 점토로 괴물 머리를 만든 후, 그 괴물이 앞길을 가로막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모두 잡아먹었다고 말한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또한 분노는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항문기적 특성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맥의 경우 손가락 그림물감으로 화산을 그린 후 용암과 불꽃이 마구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쑤셔 넣거나 찌르는 등의 남근을 상징하는 형태 또한 분노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랜스가 점토용 칼을 가지고 적을 베는 시늉을 한 것은 분노의 표현이었습니다.


또 권위 있는 대상에 맞서는 식의 표현을 통해 자율성을 추구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에반은 남자와 여자가 있는 그림을 그린 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여자가 집 주인이라고? 내 집에서는 내가 대장이야!


대개 미술에서 그러한 분노는 직접적으로 표현되기보다는 잠재적인 힘이나 권력을 암시하는 식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미키는 그림에 총알을 그려 넣은 후, 언제든 그 총알을 사용할 수 있다고만 말했을 뿐, 총알이 실제로 발사되었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성별과 관련해서, 아이들은 구강과 관련된 표현을 통해 신체적 보호 또는 양육을 나타내는 경향이 높습니다.

예컨대 신디는 점토로 사람 모양을 만든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여자는 우리 엄마 같아요. 크고 둥글고 따뜻해요. 나를 행복하게 해줘요.


이와 상반되게 거절, 유기 등의 주제를 표현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페기는 점토로 강아지를 만든 후, 그 강아지가 못된 고모에게 쫓겨났다고 말했습니다.

미술작품을 통해 자신의 신체 부위에서 만족을 추구하는 전성기기pregenital stage 욕구를 표현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이러한 욕구는 대개 두 대상을 결합시키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예컨대 도니가 나무토막으로 만든 건물 두 개를 나란히 옆에 놓은 후 서로 뽀뽀하고 껴안는 것처럼 흉내 냈던 행동이 전성기기의 욕구를 나타냈습니다.

또한 미술작품을 통해 호기심을 주로 표현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미키는 자신이 그린 후크 선장의 배 창문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말로 호기심을 표현했습니다.


그 밖에 자주 표현되는 주제로는 경쟁관계를 들 수 있습니다.

경쟁의 대상은 대개 더 나이가 많고 강한 적으로 묘사됩니다.

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암시합니다.

예컨대 존은 머스탱 자동차를 한 대 그린 후 그 차가 자동차 경주에서 이겼다고 말했습니다.

또 어떤 아이들은 자신들이 해를 입은 내용이 담긴 미술작품을 만듭니다.

그러한 내용의 미술작품은 분노나 성적 충동 때문에 자신이 벌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나타냅니다.

예컨대 에바는 한쪽 다리가 없는 사슴을 그렸고, 존은 적군과의 전투에서 격추당한 비행기를 그렸습니다.


아이들은 때로 자신들의 성적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나 갈등을 미술작품에 표현합니다.

예컨대 샐리는 자신이 그린 배 안의 노잡이가 남자아이라고 했다가 다시 여자아이라고 오락가락하면 말했습니다.

초크로 그린 그 그림 속 일문의 성별은 불분명해 보였습니다.

이따금 미술작품에 로맨틱한 성적 바람이 표현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헤더는 점토 덩어리 두 개를 만든 후, 두 사람이 결혼해 바로 아기를 낳는 상황극을 연출했습니다.


여러 미술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는 그 아이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보아도 됩니다.

예컨대 존은 신체적 상해와 관련된 그림, 점토 모형을 연달아 만들었습니다.

또 도니는 나무토막으로 만든 건물 두 개를 접착제로 붙이고 난 후에는 “포옹하고 있는 두 사람”을 그림으로써 누군가와 함께하고픈 바람을 표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상징에 둘 이상의 의미가 담긴 경우도 간혹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다양한 수준의 복합적 의미를 한 가지 상징에 응축해 담을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컨대 멜라니가 그린 독수리는 관심과 보살핌을 받고 싶은 심리적 욕구와, 내면에 억눌려있던 분노와 공격성을 동시에 보여주었습니다.

피트는 자신이 만든 뱀 모양의 추상적인 작품에 대해 설명하면서, 뱀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고 싶다고도 하고 또 뱀이 되어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들을 모두 물어버리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두 설명은 각기 다른 내용이기는 했지만 모두 분노를 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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