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국박람회와 마네의 개인전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1860년대 파리는 예술의 수도로서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으며 만국박람회가 1855년에 이어 1867년에 다시 개최되면서 그러한 면이 더욱 부각되었습니다. 4월 1일에 개막한 박람회는 최근 과학기술의 발달을 보여주는 전시물뿐 아니라 미술작품도 함께 소개했습니다.
마네와 모네 그리고 르누아르는 만국박람회의 역사적 장면들을 기념비적으로 여러 점 그렸는데, 현재 역사적 자료들로 보존되어 있는 이것들을 보면 당시 박람회의 장면과 사람들의 의상 그리고 건물들의 생김새를 알 수 있습니다.
150
마네의 <1867년의 만국박람회 L'Exposition Universelle de 1867>, 1867, 유화, 108-196.5cm.
오른쪽 위에 보이는 커다란 풍선은 사진작가 나다르의 기구입니다. 그는 이 기구를 타고 올라가 박람회의 풍경을 찍었습니다. 나다르는 1856년 이 기구를 타고 파리의 상공을 날라 역사상 처음으로 항공사진을 촬영하기도 했습니다. 마네는 박람회장을 멀리서 바라본 장면으로 그려 역사적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오른편 개를 끌고 가는 소년은 마네의 아들 레옹입니다.
마네가 <1867년의 만국박람회 L'Exposition Universelle de 1867>를 그린 것은 6월과 8월 사이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린 파리 장면이지만 이 그림에 서명하지 않은 채 사람들에게 공개하지 않고 팔지도 않았으며 평생 화실에 보관했습니다. 마네가 사망한 후 수잔이 이 그림을 팔 때 그녀가 그림에 마네의 이름을 서명했습니다.
보자르의 미술관은 당대의 유명 화가들을 초청했는데 아카데미파로는 제롬, 메소니에, 루소, 카바넬 등이 선정되었고 코로와 밀레도 포함되었습니다. 마네가 제외되고 이상의 화가들이 초청받은 건 박람회가 프랑스의 미래의 미술을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 과거의 미술을 보여주려는 것으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이번에도 살롱 입선작들을 박람회에 소개했는데, 그해 살롱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신 예술가들 중에는 마네와 모네를 비롯하여 르누아르, 피사로, 세잔이 끼어있어 바티뇰의 화가들에게는 여간 실망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마네는 살롱에 여러 번 낙선했음에도 불구하고 “살롱이야말로 예술가들에게 실제 싸움터이다. 예술가는 인정받기 위해서 마땅히 국전에 출품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왔습니다. 많은 진보주의 예술가들이 국전 심사위원들의 심사기준에 불만을 갖고 살롱을 배척하려고 했지만 마네는 심사위원들의 아카데미즘 경향이 못마땅하더라도 살롱을 통해 사람들에게 폭넓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전통 회화를 인정하고 다른 한편으로 화가는 최근의 인생을 그림에 포함시켜야 한다면서 고전주의 회화에 현대인의 감각이 합성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도미에, 할스, 스페인과 베니스의 대가들, 근래의 사진과 판화, 일본 목판화 등을 연구하면서 그들의 유용한 회화적 요소들을 현대인들의 감각에 맞도록 조절하여 자신의 그림에 응용해왔습니다.
쿠르베는 이번 박람회에 출품한 네 점이 모두 받아들여졌지만 1855년에 그랬던 것처럼 따로 별관에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그는 알마 다리 근처에 5만 프랑을 들여 개인전을 열고 박람회를 관람하기 위해 오는 외국인들에게 자신이 갖고 있는 작품 모두를 보여주기 원했습니다. 그는 무려 135점을 소개했으며, 여태까지 6백 점 이상을 제작하여 왕성한 창작의욕을 나타냈습니다.
마네도 알마 다리 근처 몽태뉴 애비뉴와 알마 애비뉴가 만나는 코너에 자비로 작은 별관을 마련하고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쿠르베의 별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도 비싼 임대료를 지불하고 자신이 엄선한 50점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개인전을 준비하기 위해 어머니로부터 18,300프랑(오늘날의 돈으로 환산하면 약 5만 달러에 해당하는 큰 돈)을 빌렸습니다. 마네의 어머니가 쓴 편지에는 아들이 이 개인전으로 해서 유산을 탕진할까봐 노심초사하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마네의 어머니는 남편이 1862년에 세상을 떠난 이후 지난 4년 동안 총수입이 79,485프랑이므로 이를 4년으로 나누면 일 년에 19,871프랑이 되므로 18,300프랑이라면 거의 일 년의 수입을 탕진하는 것이 되지 않느냐는 계산이었습니다. 개인전은 경제적으로 커다란 모험이었습니다. 쿠르베는 거의 세 배에 가까운 돈을 들였지만 그의 인지도는 매우 높아 그에게는 모험이랄 수 없었습니다.
다른 화가들도 개인전을 열고 싶었겠지만 비용 때문에 그럴 수 없었습니다. 쿠르베와 마네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마네는 개인전을 위해 꼼꼼하게 준비해온 것 같았습니다. 에밀 졸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 같은 사람의 도움 덕분에 나는 과감하게 이런 모험을 하게 되었소. 나는 성공을 믿소”라고 적었습니다. 그는 만국박람회 카탈로그에 광고도 내고 자신에 관해 쓴 졸라의 소책자를 6백 부나 발행했습니다. 개인전은 5월 24일에 열렸습니다. 마네는 지난 10년 동안 그린 작품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만 골랐습니다. 유화 50점 외에도 모사한 3점이 있었는데, 틴토레토의 <자화상>, 벨라스케스의 <작은 기사들>, 티치아노의 <하얀 토끼의 마돈나>였으며, 에칭 3점도 있었는데, <짚시들>, <필립 4세의 초상>, <작은 기사들>이었습니다. 대중의 반응은 1863년이나 1865년에 비할 바가 못 되었습니다. 프루스트의 말로는 “사람들이 걸작 앞에서 웃었다”고 했습니다. 평론가들의 반응도 썩 좋았던 건 아니지만 평론가 샹플뢰리의 주목을 받은 것이 성과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만족스러웠던 점은 오랜 시간을 두고 그린 작품들이 한 곳에 모였다는 것이다. 첫 작품부터 마지막 작품까지. 난 확연한 흐름을 읽을 수가 있었다.”
마네는 카탈로그 서문에 간단한 선언문을 작성하여 실으면서 자신을 삼인칭으로 지칭했습니다. 변론 형식의 글에는 그가 살롱의 심사에 너무 많은 불이익을 받아 더 이상 공식적 인정 따위에는 괘념치 않는 화가로 표현되었습니다.
“1861년부터 마네는 전시를 했거나 하려고 했다. 하지만 금년부터는 대중에게 직접 평가를 받기로 결정했다. … 오늘날의 화가들은 ‘와서 나의 완벽한 작품을 봐 달라’고 하는 대신에 ‘나의 솔직한 작품을 당신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단지 화가 자신의 느낌을 나타낼 때조차. … 이 작품들이 반항적인 이미지(요즘 사람들의 말로는 선정적인 것이겠지만)를 띠는 이유는 화가가 솔직하기 때문이다. 화가는 오직 자신의 인상을 전하는 데만 관심을 둘 뿐이다.”
그때만 해도 대중은 예술가의 지성을 의심하지 않았으며 작품에 나타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도 그대로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처럼 문화가 비대해지면서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의 구별이 어려워지고 예술가가 솔직하고 성실하게 예술을 행위하기보다는 기만과 무책임한 행위를 일삼으며 알기 어려운 수수께끼로 사람들을 속이며 자극하는 데 비하면, 당대에는 마네의 말처럼 “나의 솔직한 작품을 당신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말에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마네가 카탈로그 서문에 기술한 내용은 지성인의 고백이며 예술가의 진심이었습니다.
149
팡탱-라투르의 <에두아르 마네의 초상 Portrait d'Edouard Manet>, 1867, 유화, 117.5-90cm.
마네는 살롱에 낙선했지만 팡탱-라투르가 <에두아르 마네의 초상 Portrait d'Edouard Manet>을 그려 소개했으므로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은 추문에 시달려온 화가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팡탱-라투르는 마네를 모델로 여러 점 그렸습니다. 그 그림을 보고 쓴 무명 평론가의 글에서 당시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잘 차려 입은 이 다정한 신사는 경마장의 기수를 닮았다. 이 사람이 바로 검은 고양이의 작가이다. 그의 명성을 들은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렸으며, 더벅머리에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는 그림쟁이를 떠올렸다. …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점잖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선 화가를 보면서 그 속에 감춰진 재능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개인전은 10월까지 계속되었지만 한여름에 이미 마네는 개인전의 성과가 그리 크지 않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언론에서 별로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언론은 만국박람회장의 작품들을 보도하느라 마네의 작품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