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의 <아르장퇴유 Argenteuil>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마네는 1874년에 <베네치아의 대운하>를 그리면서 ‘물의 라파엘로’란 별명을 가진 모네와 경쟁을 벌이게 되지만, 이미 사람들이 경멸의 뜻으로 인상주의라고 칭한 모네의 화풍을 실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10-3

마네의 <아르장퇴유 Argenteuil>, 1874, 유화, 149-131cm.

1874년 여름 마네가 아르장퇴유로 모네를 방문했을 때 그린 것들 중 하나입니다. 모네가 센 강변의 풍경화에 몰두하는 데 자극을 받은 마네도 빛의 효과를 나타내는 강변의 풍경을 그렸습니다. 마네는 이듬해에 이 작품을 살롱에 출품했는데, 사람들은 강물을 너무 푸르게 그리고 우너근법을 무시했다고 비난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디고색의 겅물이 벽처럼 평편하고 ... 아르장퇴유가 펄프와도 같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마네를 옹호한 평론가들은 수면의 강렬한 푸름은 잘못된 색이 아니라 여름의 빛으로 조화시킨 것이며, 또 아르장퇴유의 현대 생활상을 묘사하기 위해 정직하게 시도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네의 <아르장퇴유>에서 모네의 화풍이 좀 더 분명히 나타납니다. 절반은 야외에서 그린 이 작품은 1875년 살롱에 소개되었습니다. 그는 이 작품만 출품했습니다. 작품에는 뱃사람이 여인 가까이 다가앉아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수작을 부리는 것 같으며, 여인은 사내에게 관심을 주지 않은 채 건성으로 사내의 말을 듣고 있습니다. 마네의 작품에서 여인들은 상대방을 의식하지 않고 무심한 표정으로 포즈를 취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이런 장면은 물론 마네의 연출에 의한 것입니다. 마네는 두 모델을 바짝 관람자 앞으로 당기고 배경에는 원근감을 느낄 수 있는 요소들을 넉넉하게 구성했지만, 강물을 지나치게 파란색으로 칠했기 때문에 원근감이 많이 감소되고 말았습니다. <아르장퇴유>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자연주의 화풍을 확인시켜주었으며, 이 점이 새로운 화법으로 바람직함을 시위했습니다. 『르 주르날 아뮈장 Le Journal Amusant』에는 만화와 함께 이런 글이 실렸습니다.


“저런, 저것이 무엇이람?”

“그건 마네와 그의 아내지.”

“그들이 무엇을 하는 거죠?”

“배 위에 앉아 있는 것 같군요.”

“하지만 파란 벽은 무엇이랍니까?”

“그건 센 강입니다.”

“정말이에요?”

“음,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더군요.”


<아르장퇴유>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살롱이 폐막하던 날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마네의 배에 탄 한 쌍은 이곳을 떠나는 것이 섭섭할 이유가 없을 거야. 거의 두 달 동안 사람들이 그들의 면전에서 킬킬거렸으니까.


210-4

마네의 <보트놀이 Boating>, 1874, 유화, 96-130cm.

이 작품 또한 마네가 1874년 여름 모네를 방문했을 대에 그린 것입니다. 이 작품은 아르장퇴유에서 그린 다른 그림들과 달리 붓질을 가늘게 하지 않고 색채도 영롱하게 하기보다는 바깥 공기의 신선함을 색조로 나타내려고 했음을 봅니다. 파란색과 흰색을 주로 사용하면서 노란색과 검정색으로 강조해 아르장퇴유의 뜨거운 공기보다는 서늘함을 나타내려고 한 듯합니다. 구성에 있어서는 배의 뒷부분만 남기고 대담하게 절단했으며, 흰옷의 남자와 오른쪽의 돛 일부 그리고 배에 기대어 앉은 여인으로 균형을 잡았습니다.


마네는 1874년 여름 자신의 별장 근처 센 강에 보트를 띄우고 남녀 한 쌍을 모델로 <보트놀이>를 그렸습니다. 강렬한 물빛의 효과는 모네의 영향이며, 수평선을 생략한 과감한 인물 구성은 일본 판화의 영향입니다. 자크 에밀 블랑슈는 모델이 모파상의 절친한 친구 바롱 바르비에라고 했습니다. 모자를 쓴 여인은 카미유인 것 같은데, 마네가 그해 그린 <아르장퇴유의 센 강둑>에서의 카미유가 이 여인과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마네는 두 모델을 그림 앞쪽에 구성했으므로 배의 일부만 보일 뿐이며, 마네의 눈 위치가 모델의 머리 위였으므로 관람자는 배의 내부를 볼 수 있습니다. 눈의 위치가 높기 때문에 수평선은 보이지 않고 강물만 모델들의 배경이 되어 커다란 여백으로 나타났으며, 파란색의 강물이 관람자의 눈을 시원하게 해주며, 강물 외에는 어느 것도 배경에 없으므로 원근감보다는 이차원적인 면이 강조되었습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화풍이 여기서 부분적으로 나타났는데, 마네는 카미유의 드레스를 짧은 붓놀림으로 칠했고, 이런 기교는 회화적 이유에서였으며, 빛의 역할을 관찰하여 그렇게 칠한 건 아니었습니다. 이 작품은 뒤늦게 1879년 살롱에 소개되었습니다.


210-5

르누아르의 <모네의 초상 Portrait of Monet>, 1875, 유화, 85-60.5cm.


마네의 <보트 스튜디오에서 그림 그리는 클로드 모네>, <아르장퇴유의 센 강둑>, <아르장퇴유>, <보트놀이>는 인상주의의 황금기에 모네와의 친분을 말해주는 작품들입니다. 르누아르도 아르장퇴유에서 모네와 함께 작업하면서 <모네의 초상>을 그렸습니다.


211

모네의 <나무 다리 Le Pont de Bois>, 유화, 54-73cm.


214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철로 다리 Le Pont du Chemin de Fer, Argenteuil>, 1873, 유화, 58.2-97.2cm.


철로가 생기면서 아르장퇴유의 쾌적한 환경도 개방되었습니다. 모네는 철로와 다리에 관심이 많았으며, 1872년에는 <나무다리>를 그렸습니다. 그는 <아르장퇴유의 철로 다리>란 제목으로 그리면서 못생긴 철로다리를 평범하게 구성하면서 고전주의 방법으로 검정이나 어두운 브라운색을 피하고 변조된 색들을 사용해 빛과 색의 새로운 세계를 소개하려고 했습니다. 그의 작품에서 낭만주의 화법이 발견되었고, 쿠르베와 마네가 사용한 짧은 붓놀림이 발견됩니다. 붓놀림이 짧아진다는 건 그만큼 대상을 묘사하는 데 빛에 대한 관찰이 작용함을 시사합니다. 들라크루아로부터 시작된 빛의 신비한 역할에 대한 관심이 모네의 그림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인상주의 화법은 회화가 시각적 사실주의의 최고 수준임을 고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클로드 모네

 

작품을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전시회를 둘러싸고 잔뜩 긴장된 생활을 한 모네는 전시회가 끝나자 아르장퇴유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습니다. 친구들이 아르장퇴유로 와서 모네의 가족과 함께 지내곤 했습니다.


209

마네의 <정원에서의 모네 가족 The Monet Family in Their Garden>, 1874, 유화

구도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인 이 그림에는 정원을 손질하는 모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210

르누아르의 <모네 부인과 아들 Madame Monet and Her Son>, 1874, 유화, 50.4-68cm.


210-1

마네의 <보트 스튜디오에서 그림을 그리는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Painting on His Studio Boat>, 1874, 유화, 80-98cm.


마네는 친구의 단란한 생활의 일면을 <정원에서의 모네 가족>이란 그림으로 남겼다. 르누아르가 그린 <모네 부인과 아들>에는 모네가 없고 카미유와 장만이 보입니다.


210-2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유람선들 Bateaux de Plaisance a Argenteuil>, 1875, 유화, 54-65cm.


모네는 보트에 이젤을 고정시키고 센 강을 오르내리면서 강의 풍경들을 그리곤 했는데, 1874년 어느 날 마네가 이런 모습을 <보트 스튜디오에서 그림 그리는 클로드 모네>란 제목으로 그렸습니다. 모네 자신도 몇 차례 묘사한 적이 있는 이 보트 스튜디오는 센 강에서 작업할 때 사용하려고 1873년에 개조한 것입니다. 마네는 모네가 카미유를 보트에 태우고 작업에 여념 없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배경에 아르장퇴유 둑이 보이며, 마네는 이 둑 너머에 별장이 있었기 때문에 아르장퇴유에 종종 와서 모네와 함께 작업하곤 했습니다. 마네의 그림 속에서 모네가 그리고 있는 건 1875년에 완성한 <아르장퇴유의 유람선들>인 것 같습니다.

마네가 평소 친동생처럼 여기는 모네의 작업 장면을 그린 이 그림은 마네가 처음으로 야외에서 그린 그림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모네는 훗날 마네와의 우정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이 화실(보트를 말한다)에서 나는 50보 또는 60보 거리에 떨어져 있는 센 강 장면들을 그렸다. 내 그림이 많이 팔려 모처럼 돈이 생기자 나는 보트를 사서 이젤을 고정시키고 화실을 만들었다. 내가 마네와 함께 보트에서 보낸 시간은 아주 즐겁게 회상된다. 보트에서 마네가 나의 초상화를 그렸다. 나 또한 그와 그의 아내의 초상화를 그렸다. 우리는 매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209-2

모네의 <붉은 보트 Red Boats>, 1875, 유화


아르장퇴유는 요트를 즐기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요트의 중심지로서 가장 큰 요트 클럽의 본부가 있고, 1876년의 만국박람회 때는 이곳에서 요트경기가 개최되었습니다. 자연히 파리의 중산층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오기 시작했습니다. 요트는 모네가 선호하는 주제였고, 카미유가 장과 함께 요트경기를 관람하는 장면을 그린 적도 있었습니다. 아르장퇴유에는 돈을 받고 배를 빌려주는 곳도 있어 모네는 보트를 타고 센 강을 오르내리면서 정박한 요트들을 그리기도 했으며, 멀리 떠다니는 배들을 배경으로 센 강의 다양한 장면들을 그렸습니다.

자연과 현대 인생이 한데 어우러진 곳이 아르장퇴유였다고 할 수 있으며, 모네의 그림에서 그러한 점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배경의 철로라든가 농촌에서 볼 수 없는 현대식 집들이 그러합니다. 1871년 홀란드에서 일본 판화를 취향대로 수집한 모네는 일본 화가들의 구성을 자신의 그림에 응용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복지정책에 반대하는 자유지상주의자들libertarians


『포브스 Forbes』는 가을마다 미국의 400대 부자 명단을 발표합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가 1위를 차지했는데, 2008년 『포브스』가 추정한 그의 순자산은 570억 달러였습니다. 명단에는 이 밖에도 투자자 위런 버핏(2위, 500억 달러), 윌마트 소유주, 구글 창업자와 아마존닷컴 창업자, 다양한 석유 사업 관계자, 헤지펀드 운용자, 미디어 거물, 부동산 재벌, 텔레비전 토크쇼 사회자 오프라 윈프리(155위, 27억 달러), 뉴욕 양키즈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마지막 순위, 13억 달러)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미국의 상위 1%가 부자가 미국 전체 부의 1/3을 소유하는데, 이는 하위 90%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부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습니다. 그리고 상위 10% 가정이 미국 전체 소득의 42%, 전체 부의 71%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경제 불평등은 다른 어느 민주국가보다 미국에서 훨씬 두드러집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불평등은 부당하므로 부자에게 세금을 부과해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강요나 사기가 없었다면, 그리고 시장경제에서 자유로운 선택으로 부를 얻었다면 전혀 부당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부의 재분배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흔히 ‘자유지상주의자libertarian’라고 부릅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규제 없는 시장을 옹호하면서 정부 규제에 반대하는데, 그 명분은 경제 효율성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입니다. 그들의 핵심 주장은 우리들 개인에게는 자유라는 기본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권리도 똑같이 존중한다면, 우리 소유물은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다.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자유지상주의자들이 반대하는 세 가지 언급합니다.


1. 온정주의: 사람들을 다치지 않게 보호한다는 법에 반대한다. 국가는 개인의 신체나 목숨과 관련해 이래라 저래라 할 권한이 없다.

2. 도덕법: 법이라는 강압적인 힘을 이용해 미덕을 권장하거나 다수의 도덕적 신념을 표현하는 행위에 반대한다. 성인들의 합의로 이뤄지는 매춘을 법으로 금하는 것은 옳지 않다. 게이나 레즈비언에게서 성 상대자를 고를 권리를 법으로 박탈하는 것은 옳지 않다.

3. 소득과 부의 재분배: 과세를 이용한 부의 재분배를 비롯해 누가 누구를 도와야 한다는 일체의 법 규정에 반대한다. 자유지상주의자들에게 과세는 강압 행위이며, 심지어 절도로도 볼 수 있다. 국가는 부유한 납세자에게 가난한 사람을 위한 사회 프로그램을 지원하라고 강요할 권리가 없으며, 그것은 자비로운 도둑이 부자의 돈을 훔쳐 집 없는 사람들에게 나눠줄 권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샌델은 어떤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자유지상주의 철학을 지지하는지는 꼬집어 말하기 어렵다면서, 자유방임 경제정책을 지지하는 보수주의자들도 학교 내에서의 기도, 낙태, 성인물 규제 같은 문화적 문제에서는 자유지상주의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복지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 다수가 게이의 권리, 출산 결정권, 언론의 자유, 정교분리 같은 문제에서는 자유지상주의들과 견해가 같음을 지적합니다.

샌델은 1980년대에 자유지상주의 사상은 친 시장, 작은 정부를 지향했던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의 정책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났지만, 지적 신념으로서의 자유지상주의는 그보다 앞서 복지정책에 반대하며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자유헌정론』(1960)에서, 경제 평등을 성취하려는 시도는 하나같이 강압적이고, 자유 사회를 파과하게 마련이라고 주장했으며, 미국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자본주의와 자유』(1962)에서, 국가가 할 일이라고 널리 인식된 행위 가운데 상당수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법 행위라고 주장했습니다. 사회보장제도와 정부가 국민의 의무로 규정해 운영하는 퇴직 프로그램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프리드먼은 최저임금제도에도 반대하면서, 고용주가 얼마나 적은 임금을 지급하든 노동자가 받아들인다면, 정부가 나서서 반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용차별금지법도 정부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입니다. 고용주가 인종이나 종교 등의 이유로 차별한다 해도 국가는 그것을 막을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프리드먼의 견해로는 “그런 법 제정은 개인들의 자발적인 계약의 자유를 간섭하는 행위”입니다.

로버트 노직은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1974)에서 자유지상주의 원칙을 철학적으로 옹호하고 분배 정의라는 익숙한 개념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는 개인의 권리가 “워낙 강력하고 광범위해서, 국가가 할 일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게 어떤 일인지 의문이다”라는 주장으로 논지를 폈습니다. 그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직 계약을 집행하고, 사람들을 무력과 절도 그리고 사기에서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최소국가만이 정당화될 수 있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어떤 일도 강요받지 말아야 하는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게 되고, 그런 국가는 정당화될 수 없다.

노직에 따르면, 경제 불평등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포브스 400대 부자가 수십, 수백 억 달러를 소유한 반면 다른 사람들은 무일푼이라는 사실만으로는 그런 현실이 정의롭다거나 정의롭지 못하다고 결론 내릴 수 없습니다. 노직은 유형화된 정의론을 거부하고, 자유시장에서 사람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이론을 옹호합니다. 그는 분배 정의가 구현되려면 두 가지 필수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면서 하나는 초기 소유물에 구현된 정의이고, 또 하나는 소유물 이전에 구현된 정의입니다. 첫 번째 조건은 돈을 벌 때 사용한 자원이 애초에 합법적인 소유물이었는가를 묻는 것이고, 두 번째 조건은 시장에서 자유로운 교환으로 혹은 다른 사람이 자발적으로 건네준 선물로 돈을 벌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부당하게 얻은 것으로 경제활동을 시작하지 않는 한 자유시장에서의 분배는 그 결과가 평등하든 불평등하든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인상주의의 탄생: 모네의 <인상, 일출>



작품을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모네의 <인상, 일출>, 1872, 유화, 48-63cm.

분명하지 않은 빛의 효과를 포착하려는 모네의 노력이 짧은 붓질로 마타난 이 작품이 1874년 제1회 인상주의전을 통해 소개된 후 인상주의의 전형적인 화풍으로 알려졌습니다. 모두 165점이 소개되었고, 모네가 출품한 유화는 다섯 점에 불과해 이것이 걸출한 작품으로 인정받은 건 아니었습니다. 르아브르 집 창에서 바라본 풍경을 그린 이 그림에 대해 모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카탈로그에 실릴 제목을 물어왔다. 이 그림을 르아브르의 풍경이라고 정직하게 말할 수 없어서 인상이라고 했다.” <인상, 일출>은 이렇게 생겨난 제목입니다. 시각적 인상을 강조하기 위해 전통적인 묘사방법을 버린 건 그 시대에 혁명적인 화풍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른 아침 안개 속에 떠오르는 태양의 모습은 모네의 눈에 매우 강렬하고 환상적이었을 겁니다. 이른 아침이지만, 노를 저어 물결을 출렁이며 배가 지나갑니다. 런던과 암스테르담에서 짗에 대한 효과를 더욱 익힌 모네는 이대를 기점으로 다양한 빛의 운동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204

모네의 <일출, 바다풍경 Soleil Levant, Marine>, 1873, 유화, 49-60cm.


아르장퇴유에서 보낸 3년은 모네가 경제적·미학적으로 성공한 즐거운 시기였습니다. 1873년에는 자신이 즐겨 찾는 노르망디로 가서 에트레타, 생타드레스, 르아브르 등지의 풍경들을 캔버스에 담았습니다. <인상, 일출>은 제작연도가 1872년으로 적혀 있지만, 이 시기에 그린 것입니다. 그는 1869년과 1870년의 살롱에 낙선한 후로는 더 이상 출품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피사로와 시슬레도 마찬가지로 살롱을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르누아르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출품했지만, 성과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1867년에 모네와 바지유를 비롯한 몇몇 화가들이 그룹전을 구상했다가 경제적 이유로 무산되었는데, 이제 그 안이 다시 제기되었습니다. 카페 게르부아에 모이는 화가들은 그룹전에 찬성했지만 살롱을 고집하는 마네가 반대했다고 합니다. 피사로, 드가, 르누아르가 그룹전에 큰 관심을 나타냈으며, 이들 모임에서 모네가 리더 역할을 한 것 같았습니다. 모임에는 카이유보트, 부댕, 세잔도 있었습니다. 모네를 중심으로 모인 모임의 회원은 서른 명이었습니다. 더러 예술가들 중에는 그룹전이 또 다른 형태의 낙선전이 되지 않을까 우려한 사람도 있었지만, 파리의 미술시장에 작품을 좀 더 팔아보려는 속셈에서 동의했습니다.

1873년 살롱이 열린 후 5월 어느 날 모네는 화가들이 모여서 독자적으로 전시회를 열고 “새로운 회화”를 보여줄 것임을 언론에 공언했습니다. 모네가 중재자가 되어 협회 설립정관을 몇 차례에 걸쳐 뜯어고친 후 1874년 1월 17일 마침내 화가, 조각가, 판화가들의 협회가 탄생했습니다. 이들은 ‘무명협동협회 Societe Anonyme Cooperative’라고 명칭을 정하고 그룹전을 열기로 했습니다. 제1회 인상주의전으로 미술사에 남게 된 이 전시는 1874년 카퓌신 불바드 35번지, 사진작가 펠렉스 루트나숑 나다르Felix Tournachon Nadar(1820-1910)의 2층 화실에서 개최했습니다. 오직 살롱을 통해서만 발표하기를 원한 마네는 베르테에게도 그룹전에 참여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그녀는 드가의 권유를 받아들여 협회에 가입했습니다.

모네가 “온정이 있는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 펠렉스 루트나숑 나다르는 기자, 소설가, 만화를 주로 그린 화가로, 또 기구 조종사와 사진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인쇄업자 집안에서 태어난 나다르는 1858년에 기구를 타고 프티-비세트르 상공을 비행하며 최초의 공중사진을 찍는 데 성공했습니다. 3년 후에는 파리의 지하묘지에 들어가 전기를 사용한 최초의 지하촬영에 성공했습니다. 그는 인상사진을 잘 찍기로 소문났으며, 그가 찍은 인상사진들 가운데 샤를 보들레르, 빅토르 위고, 클레망소, 쥘 베른느 등의 사진이 있습니다. 나다르는 여가가 생기면 그림을 그렸고, 화랑과 뮤지엄에 출품해 보았지만, 그때마다 배척당했습니다. 작가, 화가, 조각가, 음악가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한 그는 자신의 작업실을 무명협동협회 전시장으로 기꺼이 제공했습니다. 그가 자신도 화가라고 주장하자 에드가 드가는 “웃기지 마세요. 가짜 예술가, 가짜 화가, 가짜 사진작가님!” 하며 놀렸습니다.


204-1

베르테 모리소의 <로리엥의 항구 The Harbour at Lorient>, 1869, 유화, 44-73cm.


카탈로그에는 65점의 작품이 실렸으며 출품 작가는 부댕, 펠렉스 브라크몽, 세잔, 드가, 아르망 기요맹, 에두아르 레핀, 베르테, 피사로, 르누아르, 시슬레, 카이유보트 등이었습니다. 모네는 유화 5점과 파스텔 7점을 출품했는데, 파스텔을 7점이나 전시한 건 유화에 비해 가격이 싸서 팔기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1868년에 그린 <오찬>과 <인상, 일출>, <카퓌신 불바드>, 카미유와 장을 그린 <아르장퇴유의 양귀비 들판>도 이때 소개되었습니다.


206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양귀비 들판 Poppy Field at Argenteuil>, 1873, 유화


205

모네의 <카퓌신 불바드 Boulevard des Capucines>, 1873, 유화


<카퓌신 불바드>는 모네가 1873년 나다르의 2층 화실에서 창을 통해 내려다본 풍경을 그린 것입니다. 당시 파리는 현대화가 가속화되고 있었고, 거리에는 도로포장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카퓌신 불바드도 막 포장을 마쳤고, 사람들이 새로 포장한 도로에 나와 자축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모네는 빛에 의해 가물거리는 대기와 사람들의 움직임을 생동감 있게 묘사했는데, 초점을 맞추지 않고 찍은 사진처럼 사람들의 모습이 굵은 점으로 나타났습니다. 색을 영상 자체처럼 빛에 의해 반사되고, 부서지며, 굴절되는 것으로 사용했으며, 공간색을 희석시키지 않고 형태와 공간을 환기시키는 다양한 색질을 파란색과 보라색으로 표현했습니다. 그 결과 색들은 고도한 광선의 투사각처럼 나타났습니다. 그림은 부분적으로 추상의 이미지를 나타냈으며, 이러한 화법은 말년에 그릴 수련을 통해 거의 완전추상의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추상이란 사물을 덜 묘사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사물에 대한 불분명한 모네의 묘사는 논리적으로 추상으로 향하는 걸 의미했습니다.

전시는 4월 15일부터 5월 15일까지 한 달 동안, 관람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인데, 오후 8시부터 10시까지 두 시간 연장하기도 했습니다. 입장료는 1프랑이었으며, 카탈로그는 50센티메에 팔았습니다. 첫날부터 비교적 사람들의 방문이 잦았는데 그들은 그림 앞에 서서 킬킬거리며 웃는 것이 예사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시장을 둘러 본 후 화가들이 권총에 물감 튜브를 장전해 캔버스를 향해 발포한 후 뻔뻔스럽게도 서명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모네가 “새로운 회화”를 보여주겠다고 선언했으므로 평론가들이 이 전시회에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 반항적인 전시회를 즉각적이고도 맹렬하게 비난하면서 협회의 리더 모네를 주요 공격대상으로 삼았습니다. 4월 25일자 『르 샤리바리』에는 평론가 루이 르루아의 글이 실렸는데 제목이 ‘인상주의자들의 전시회 The Exhibbtion of the Impressionists’였습니다. 르루아가 인상주의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면서부터 인상주의라는 말이 그들의 전람회를 통해 하나의 사조로 미술사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르루아에 의해서 인상주의라는 말은 곧 영국과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르루아는 모네의 <인상, 일출>을 두고 “얼마나 자유로운가. 얼마나 쉽게 그렸는가”라고 경멸조로 적었습니다.

르루아는 전시회 첫날 요셉 뱅상과 함께 전시장에 왔는데 뱅상은 98번이 붙은 그림 앞에 서서는 “그가 여기 있었군! 여기에!”라고 소리쳤는데, 모네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는 평소 모네의 그림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카탈로그에는 <인상, 일출>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모네가 르아브르에서 안개로 흐려진 대기를 뚫고 떠오르는 태양, 어둠 속의 강에 비친 햇빛과 물의 운동을 묘사한 것이었습니다.


208

르누아르의 <댄서 Dancer>, 1874, 유화ㅑ, 142.5-94.5cm.


뱅상은 르누아르의 <댄서> 앞에 서서 말했습니다.

얼마나 유감스러운가! 이 화가는 색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더욱 낫게 그리지 못하다니! 댄서의 다리는 솜처럼 생겼다.

르루아의 경멸조의 사설 외에도 에밀 카르동도 『라 프레스』(1874. 4. 29)에 비판의 글을 실었습니다. 『오피니옹 나쇼날』(1874. 4. 22)에 논평을 게재한 아르망 셀베스트르는 다소 관대한 태도를 취하면서 모네와 피사로, 시슬레가 보여준 “대상을 보는 시선”에 관심을 나타냈지만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이러한 시선이 모색하고자 하는 점은 단지 인상의 효과뿐이다. 결국 제대로 된 표현은 선 묘사에 숙련된 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에드가 드가는 열 점을 출품했습니다. 폴 망츠는 이를 의아해하며, “우리는 드가 선생이 왜 스스로를 인상주의 화가들 속에 포함시키려고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분은 뚜렷한 개성을 가진 분이며 자칭 혁신주의자라고 부르는 그룹에서 따로 떨어져 있었는데”라고 했습니다. 드가가 전시회에 참여한 이유는 단 하나 대중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무명협동협회 사람들은 어떤 이념을 함께 신봉한 사람들이 아니라 각자가 개성이 있는 회화세계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공통목적은 파리화단에 이름을 알리고 작품을 팔아서 돈을 벌려는 것이었습니다.

화가들은 그림 값을 비교적 낮게 책정했지만, 언론의 경멸과 비난으로 경제적으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인상, 일출>은 훗날 파리의 마르모탕 뮤지엄에 소장되었는데, 전문도둑이 침입하여 훔쳐갔습니다. 언론은 도둑이 일본인에게 수백만 달러를 받고 그 그림을 팔았을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이 작품은 현재 모네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무명협동협회는 12월에 해산되었다가 2년 뒤 1876년에 다시 부활되어 제2회 인상주의 전시회를 개최했으며, 1886년까지 모두 여덟 차례에 걸쳐 개최했습니다. 여덟 차례의 전시회에 모두 참여한 건 카미유 피사로 한 사람뿐입니다. 전시회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한 이유는 드가가 주최한 제8회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조르주 쇠라의 점묘주의 그림이 각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모네 아르장퇴유에 정착하다
 

작품을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모네는 1871년 말 파리로 돌아왔으며, 프러시아 군대가 파리를 포위하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먹을 것이 부족해 굶주리는 가운데 겨울을 나야 했습니다. 보불전쟁은 나폴레옹의 대단한 실패작으로 결국 황제의 실정이 온 프랑스 국민에게 가난을 안겨주었습니다. 더구나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워 나라 전체가 얼어붙은 느낌이었습니다. 프랑스의 경제는 말이 아니었으며, 시슬레 아버지의 사업은 파산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부유한 아마추어 화가였던 시슬레는 이제 가난한 직업 화가로 나설 수밖에 없었고, 그림을 헐값에라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시슬레는 1878년에 30점의 그림을 한 점에 백 프랑에 판 적도 있었습니다.

모네는 파리의 호텔에 한동안 묵다가 아르장퇴유에 집을 세 얻었습니다. 아르장퇴유는 센 강가의 작은 동네로 파리에서 8km 가량 떨어진 곳입니다. 1871년 12월 21일 피사로에게 “우리는 지금 이사 때문에 정신이 없습니다”라고 쓴 편지에는 주소와 함께 ‘아르장퇴유, 생드니 항 구빈원 근처 오브리 저택’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저택의 집세는 한 해 천 프랑으로 비싼 편이었습니다. 이 집을 마네가 모네에게 권했던 것 같은데, 마네는 이 고장에 관해 잘 알고 있었으며 강 건너에 별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192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강변로 The Riverside Walk at Argenteuil>, 1872, 유화, 50.5-65cm.


193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내만 The Basin at Argenteuil>, 1872, 유화


193-1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요트 레이스 Regatta at Argenteuil>, 1872년경, 유화


194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가을 Autumn at Argenteuil>, 1873, 유화, 56-75cm.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모네 또한 이곳에서 많은 그림을 그려 1870년대를 ‘아르장퇴유의 시대’라고 부를 만합니다. 태양의 변화와 이에 다른 물의 반영이 순수한 색의 빛과 어우러져 모네의 분할된 붓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모네는 보트를 타고 센 강을 오르내리며 풍경 가까이에서 빛에 의한 물의 반영을 영롱하게 묘사했습니다. 그는 아르장퇴유의 가을을 묘사하면서 하늘과 물 사이에서 밝게 빛나는 집들을 화면에 담았습니다.


아르장퇴유는 1850년대부터 발전되기 시작하여 파리로부터 철로가 연결되었고 도심으로 가는 데 15분이면 충분했습니다. 요트 레이스로 유명한 아르장퇴유에서는 국제 요트 레이스가 벌어지곤 했으며, 파리 시민에게 보트놀이 명소로 알려졌지만 공장들이 모여 있는 산업지역이기도 했습니다. 모네가 그린 <아르장퇴유의 강변로>에 이 고장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는데, 보트와 별장이 보이고 또한 공장의 굴뚝도 보입니다. 야외에서 그린 <아르장퇴유의 내만>, <아르장퇴유의 요트 레이스>, <아르장퇴유의 가을>에서 보듯 모네는 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아르장퇴유의 요트 레이스>는 친구 화가들을 경악케 했는데, 완성된 그림이라기보다는 물감으로 스케치하듯 대충 그린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에는 대상을 분명하게 해줄 외곽선도 형태에 대한 묘사도 없습니다. 요트에 탄 사람의 모습은 단번의 붓질일 뿐입니다.


195

모네의 <정원에서 장과 보모와 함께 한 카미유 Camille au Jardin, avec Jean et sa Bonne>, 1873, 유화, 59-79.5cm.


196

모네의 <정원 벤치에 앉아 있는 모네 부인 Le Banc (Madame Monet on a Garden Bench)>, 1873, 유화, 60-80cm.


198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양귀비 들판 Poppy Field, Argenteuil>, 1874, 유화


198-1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양귀비 들판>의 부분


200

모네의 <파라솔을 든 여인, 모네 부인 카미유와 아들 La Promenade. La Femme a l'Ombrelle>, 1875, 유화, 100-81cm.


199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정원에서 파라솔을 든 여인 La Femme a l'Ombrelle au Jardin d'Argenteuil>, 1875, 유화, 75-100cm.


201-1

르누아르의 <꽃을 따는 여인 Woman Gathering Flowers>, 1872년경, 유화, 65.5-54.4cm.


201-4

르누아르의 <독서하는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Reading>, 1872, 유화, 61-50cm.


201-3

르누아르의 <정원에서 작업하는 모네 Mpnet Working in His Garden>, 1873, 유화, 50-62cm.


201-2

르누아르의 <정원에서의 파라솔을 든 여인 Woman with a Parasol in the Garden>, 1873, 유화, 54-65cm.


모네는 집에 있는 날이면 정원에서 카미유와 장을 모델로 풍경 속의 인물 표현법을 연구했습니다. <오찬>, <정원에서 장과 보모와 함께 한 카미유>, <정원 벤치에 앉아 있는 모네 부인>, <아르장퇴유의 양귀비 들판>, <파라솔을 든 여인, 모네 부인 카미유와 아들>, <아르장퇴유의 정원에서 파라솔을 든 여인> 등에서 모네 가정의 화목한 한때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오찬>은 1876년에 개최된 제2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장식화>란 제목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르누아르도 꽃밭을 배경으로 인물을 그렸으며, 모네의 그림과 유사한 터치를 볼 수 있습니다. 르누아르는 모네가 정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장면과 카미유와 장을 모델로 그리기도 했습니다.

1872년 모네는 작품의 질과 값에서 커다란 결실을 맺고 있었습니다. 그 해에 50점 이상 그렸으며, 이는 전에 없던 대량생산이었습니다. 38점이 아르장퇴유에서 그린 것들로 그곳을 그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가늠케 합니다. 그는 르아브르와 루앙으로 가서 그리기도 했는데, 루앙에는 형 레옹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장부 기록에 의하면 1점은 형 레옹에게, 또 1점은 마네에게 주었으며, 5점은 딜러 루이 라투세란에게 팔았고, 뒤랑-뤼엘에게는 12,100프랑에 29점을 팔았습니다. 그해 모네의 수입이 2만 4천 프랑이었으므로 뒤랑-뤼엘의 비중이 절반에 이릅니다. 이듬해 그의 그림 값이 두 배로 껑충 뛰었습니다. 주요 구매자인 뒤랑-뤼엘이 정기적으로 구입했으며, 은행가 형제 알베르와 앙리 에크 그리고 마드리드에서 마네를 만났던 테오도르 뒤레가 그의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밖에도 아르장퇴유의 의사 조르주 드 벨리오와 오페라 가수 장 밥티스트 포르 그리고 귀스타브 카이유보트가 구입했습니다.

카이유보트는 재능 있는 화가로 아르장퇴유에 와서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1873년 스물네 살의 카이유보트는 법대를 그만두고 아카데미 보자르에 입학하여 레옹 보나로부터 회화를 수학했습니다. 많은 유산을 상속받은 그는 그림 그리기를 즐기면서 모네의 그림을 수집해 모네의 가까운 친구가 되었습니다. 모네는 작품이 잘 팔리자 더 비싼 가격으로 흥정하려고 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