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샌델의 결과보다는 동기를 중시한 이마누엘 칸트
권리가 공리에 좌우되지 않는다면, 권리의 도덕적 근거는 무엇일까?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개인이 타인의 행복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답으로 제시합니다. 자기소유라는 기본권을 침해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나의 삶, 나의 노동, 나라는 인간은 나에게, 오로지 나에게만 속하며, 사회가 그것을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습니다. 자기소유라는 개념에는 자유지상주의자만이 찬성할 수 있는 것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낙오자를 보호할 안전장치가 없는 자유시장, 불평등을 해소하고 공동선을 장려할 거의 모든 수단을 배제하는 최소국가, 합의를 완벽한 행위로 칭송하여 합의한 식인행위나 노예 매매처럼 스스로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행위마저 인정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소유권과 제한된 정부를 지지한 존 로크John Locke(1632-1704)도 무한정 자기소유 권리를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우리 삶과 자유는 우리 마음대로 처분해도 좋다는 생각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주장하는 로크의 이론은 하느님을 끌어들이는 탓에, 종교적 단정에서 벗어나 권리의 도덕적 근거를 찾으려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문제가 됩니다.
의무와 권리에 대한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1724-1804)의 주장은 우리가 존중받아야 하는 존엄성을 지닌 이성적 존재라는 생각에 기초합니다. 칸트는 1724년에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80여 년 뒤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그다지 부유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마구를 만드는 사람이었고, 부모님 모두 개신교 경건주의자들이어서, 종교적 내면의 수행과 선행을 강조했습니다.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열여섯 살 때 입학했으며, 성적도 우수했습니다. 한때 가정교사를 하다가 서른한 살에 처음 강단에 섰습니다. 기본급 없이 수강 신청한 학생 수에 따라 보수를 받는 강사였습니다. 그는 인기가 좋은 데다 부지런해서 일주일에 강의를 스무 개나 소화했는데, 형이상학, 논리학, 윤리학, 법학, 지리학, 인류학 등 주제도 다양했습니다.
그의 나이 57세 때인 1781년에 첫 번째 주요 저서 『순수이성 비판』이 출간되었다. 데이비드 흄과 존 로크의 경험론에 도전한 책입니다. 그리고 그는 4년 뒤에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를 출간했는데, 도덕철학에 관한 여러 저서들 가운데 첫 번째 책입니다.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1748-1832)의 『도덕과 입법의 원리』(1780)가 출간된 지 5년 뒤에 나온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에서 칸트는 공리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도덕이란 행복 극대화를 비롯한 어떤 목적과도 무관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도덕은 인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는 미국 독립혁명(1776) 직후에, 그리고 프랑스 혁명(1789) 직전에 나왔습니다. 두 혁명의 정신적, 도덕적 파장과 더불어 이 책은 18세가 혁명가들이 인권이라 부른 것과 오늘날 우리가 보편 인권이라 부르는 개념에 막강한 토대를 제공합니다.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는 중대한 질문을 다룹니다. 도덕의 최고 원칙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하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자유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칸트의 답은 이후 도덕정치철학에 줄곧 나타났습니다. 그의 철학은 도덕과 정치에 관한 우리의 사고방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칸트는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현대의 보편 인권 개념을 예고한 것입니다.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 도입부에서 그는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을 구별해 소개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공리주의 시각으로, 이에 따르면 정의의 개념을 규정하고 무엇이 옳은 일인가를 결정하려면 사회 전체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정의를 자유와 연관시키는 시각으로, 자유지상주의자들이 관련 예시를 제시합니다. 이들은 소득과 부의 공정한 분배란 규제 없는 시장에서 재화와 용역의 자유로운 교환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의 주장에 다르면, 시장을 규제하는 행위는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침해하기에 부당합니다. 세 번째는 정의란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받는 것, 즉 재화를 분배해 미덕을 포상하고 장려하는 것이라는 시각입니다. 미덕을 기초로 삼는 사람은 정의를 좋은 삶에 관한 고찰과 연관 짓습니다.
칸트는 첫 번째 시작, 즉 행복의 극대화와 세 번째 시각, 즉 미덕의 장려를 거부합니다. 둘 중 어느 것도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정의와 도덕을 자유와 연관시키는 두 번째 시각을 열렬히 옹호했습니다. 칸트는 우리가 흔히 시장의 자유나 소비자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자유에는 애초에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욕구를 충족하는 행위가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칸트는 공리주의를 거부했습니다. 공리주의는 권리를 따질 때에도 최대행복에 기여하는지 두드려보는 탓에 권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우연히 생기는 욕구에서 도덕 원칙을 끌어내려 함으로써 도덕을 생각하는 방식부터 그르친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쾌락을 준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수가 특정 법을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법을 정당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칸트의 주장에 따르면, 도덕은 사람들이 특정한 시기에 드러내는 흥미, 바람, 욕구, 기호 같은 경험적 요소에만 좌우될 수 없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와 『왜 도덕인가? Why Morality』의 저자 마이클 샌델은 이런 요소들은 가변적이고 우연적이라서 보편 인권 같은 보편적 도덕 원칙이 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도덕 원칙을 기호나 욕구를 바탕으로, 심지어 행복을 바라는 욕구를 바탕으로 생각한다면 도덕의 진실을 오해하게 된다고 지적합니다. 공리주의가 말하는 행복 원칙은 “도덕성 확립에 어떤 식으로든 전혀 기여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그를 선하게 만드는 것과는 사뭇 다른 일이며, 이익 추구에 신중하거나 약삭빠르게 만드는 것은 덕이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과는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샌델은 도덕을 사람들의 흥미와 기호를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도덕의 위엄이 땅에 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법을 가르치지 못하고, “계산에만 밝은 사람이 되게 할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우리의 바람과 욕구가 자격미달이라면, 무엇이 도덕의 기초가 될까? 칸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순수 실천 이성’을 연습해 도덕의 최고원칙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성으로 어떻게 도덕법에 도달할 수 있는지 살펴보려면,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능력과 자유롭게 행동하는 능력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칸트는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우리가 자신을 소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자율적 존재이며, 자유롭게 행동하고 선택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늘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자율적으로 선택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우리가 이성적으로 자유롭게 행동할 능력이 있고, 이는 모든 인간의 공통점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칸트는 이성적 능력이 우리 능력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정합니다. 우리는 쾌락과 고통을 느낄 능력도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이성적 동물일 뿐 아니라 지각력 있는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지각력’이란 감각과 느낌에 반응하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벤담도 옳지만 절반만 옳을 뿐입니다. 그러나 쾌락과 고통이 “우리의 통치권자”라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칸트는 이성이야말로, 적어도 때로는,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성이 우리의 의지를 통치할 때 우리는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욕망에 내몰리지 않습니다.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은 자유롭게 행동하는 능력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 두 가지 능력이 합쳐져 우리는 특별한 존재,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존재가 된다. 이 능력으로 우리는 단지 식욕만을 느끼는 동물에서 벗어난다.”
칸트의 도덕철학을 이해하려면 그가 말하는 자유를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유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칸트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에게 자유는 좀 더 엄격하고 까다로운 개념이었습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다른 동물처럼 쾌락이나 고통 회피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식욕과 욕구의 노예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샌델은 우리가 어떤 맛으로 주문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선택의 자유를 행사하는 듯하지만, 이는 어떤 맛이 내 기호에 가장 잘 맞는지 파악하는 행위이며, 여기서 내 기호는 애초에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칸트는 기호를 충족하는 행위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이때 우리가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이미 결정된 내용에 따라 행동할 뿐이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어떤 맛을 먹고 싶다는 욕구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갖고 있는 욕구일 뿐입니다.
칸트에 따르면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것은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건 천성이나 사회적 관습에 따라서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행동은 주어진 목적에 걸맞은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만이 할 수 있고 대부분의 동물이 할 수 없는 선택인 것입니다.
타율적으로 행동하는 건 우리 밖에 주어진 목적을 위해 행동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때 우리는 추구하는 목적의 주체가 도구가 됩니다. 칸트가 말하는 자율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자율적으로, 즉 자신에게 부여한 법칙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행동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는 뜻입니다.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능력 덕에 인간의 삶은 특별한 존엄성을 지닙니다. 칸트의 생각에,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인간을 목적으로 취급한다는 뜻입니다. 공리주의처럼 인간을 전체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칸트에 따르면, 어떤 행동의 도덕적 가치는 그 결과가 아니라 동기에 있습니다. 중요한 건 동기이며, 그것은 특정한 종류라야 합니다. 중요한 건 옳은 일을 하는 것이며, 그 이유는 옳기 때문이라야지 이면에 숨은 동기 때문이어서는 안 됩니다. “선한 의지가 선한 까닭은 그것이 어떤 효과나 결과를 낳아서가 아니다”라고 칸트는 말합니다. “비록 ... 이 의지가 원래 의도를 널리 퍼뜨릴 힘이 매우 부족하다 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성과를 얻을 수 없다 해도 ... 그것은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를 지닌 보석처럼 빛날 것이다.” 어떤 행동이 도덕적으로 선하려면 “도덕법에 순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도덕법 그 자체에 기여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행동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동기는 의무인데, 칸트가 말하는 의무 동기란 올바른 이유로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칸트에게 동정심에서 나온 선행은 “아무리 옳고, 아무리 다정해도” 도덕적 가치가 떨어집니다. 칸트는 동정심에서 우러난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타인을 도울 때, 쾌락을 느끼는 선행 동기와 의무 동기를 구별합니다. 그리고 의무 동기만이 그 행동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한다고 주장합니다. 이타주의자의 동정은 “칭찬과 격려를 받을 자격이 있지만, 존중받을 수는 없다.” 그는 선행의 동기가 그 행동이 옳기 때문이라야지 쾌락을 주기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도덕이 의무감에서 행동하는 것이라면, 의무의 필수조건을 밝히는 일이 남았습니다. 칸트에게 이를 파악하는 것은 곧 도덕의 최고원칙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칸트가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에서 추구한 목표도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샌델은 칸트가 세 가지 중요한 개념인 도덕, 자유, 이성을 어떻게 연관 짓는지 살펴본다면, 그의 대답에서 쉽게 다가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칸트는 이 개념들을 대조 혹은 이원론으로 설명합니다. 즉 의무 대 끌림, 자율 대 타율, 정언定言명령 대 가언假言명령입니다.
칸트에 따르면, 나의 의지가 자율적으로 결정될 때만이, 그러니까 나의 의지가 내가 내게 부여한 법칙에 지배될 대만이 나는 자유롭습니다. 우리는 흔히 자유를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내 욕구를 방해받지 않고 추구할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칸트는 이런 생각에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합니다. 애초에 그런 욕구를 직접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 욕구를 추구한다고 해서 어떻게 자유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 칸트는 자율과 타율을 대조하면서 이 문제를 제기합니다.
나의 의지가 타율적으로 결정된다는 말은 내 외부에서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이때 어려운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자유가 내 욕구와 끌림을 따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외부 영향으로 결정되는 욕구나 끌림에서 나오지 않던가? 샌델은 그 답이 명확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칸트가 관찰하기로는 “자연의 모든 것은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그는 모든 행동이 특정 법칙에 지배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이성입니다. 우리는 감각이 전달하는 쾌락과 고통에 지배되는 감각적 존재일 뿐 아니라, 이성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성이 우리의 의지를 결정한다면, 그 의지는 자연이나 끌림의 명령에 구애받지 않는 선택의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칸트는 이성이 항상 의지를 지배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면, 이성이 나의 의지를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인간에게 이성적 능력이 있다고 말한 철학자는 칸트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성에 대한 그의 생각은 자유와 도덕에 대한 생각만큼이나 까다롭습니다. 공리주의자를 포함한 경험론자에게 이성은 전적으로 도구의 개념입니다. 이성은 특정한 목적, 즉 이성이 제공하지 않는 목적을 추구하는 방법을 찾게 해줍니다.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1588-1679)는 이성을 “욕구를 찾는 정찰병”이라고 불렀으며,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1711-76)은 “열정의 노예”라고 불렀습니다.
샌델은 공리주의자들이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보았지만, 이때의 이성은 도구로서의 이성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이성의 역할을 어떤 목적이 추구할 가치가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생긴 욕구를 충족하여 공리를 극대화할 방법을 찾는 것이라고 봅니다.
칸트에게 이성은 한낱 열정의 노예가 아닙니다. 칸트는 모든 이성이 그러하다면 우리는 본능에 따를 때 더 잘 살 거라고 말합니다. 그는 도덕과 관련된 실천 이성을 도구로 여기지 않고 “어떤 경험적 목적에도 상관없이 선험적으로 정해지는 순수 실천 이성”으로 여겼습니다.
이성이 어떻게 이를 해낼 수 있을까? 칸트는 이성이 의지에 명령하는 두 가지 방법을 구별합니다. 하나는 잘 알려진 가언명령입니다. 가언假言명령은 이성을 도구로 활용합니다. ‘X를 원하면 Y를 하라’는 식인데, 말하자면 ‘사업가로서 좋은 명성을 얻고 싶다면 고객을 정직하게 대하라’는 명령입니다.
칸트는 언제나 조건이 따라붙는 가언명령을 조건 없는 명령인 정언定言명령과 대조합니다. “어떤 행동이 다른 것의 수단으로만 바람직하다면, 이때의 명령은 가언명령이다. 어떤 행동이 그 자체로 바람직하다면, 따라서 이성에 부합하는 의지에 꼭 필요하다면, 이때의 명령은 정언명령이다.” 칸트가 말하는 정언은 조건이 없다는 뜻입니다. 정언의무나 정언권리는 특정한 상황에 구애받지 않는 의무나 권리를 뜻한다.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령은 다른 어떤 목적에도 기대지 않고, 말 그대로 정언적으로 명령합니다. “그 명령은 행동이나 예상되는 결과와 무관하며, 명령의 형태 그리고 명령이 도출된 원칙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행동에서 본질적으로 선한 부분은 그 결과와 관계없이 애초의 정신 자세에 달렸다.” 칸트는 오직 정언명령만이 도덕적인 명령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무엇이 정언명령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할까? 칸트는 “그 자체로 절대적이며 다른 어떤 동기도 포함하지 않은 채 명령을 내리는 실천 법칙”을 이해하면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보편적 법칙의 첫 번째 공식은, “행동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이는 보편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준칙이라야 한다.” 그가 말하는 ‘행동준칙’은 내 행동에 근거가 되는 규칙이나 원칙을 뜻합니다. 내 행동준칙이 보편화할 수 있는 준칙인지 판단하고 앞으로도 그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은 가능한 결과를 예측한다는 뜻이 아니라, 내 행동준칙이 정언명령에 맞는지 판단해본다는 뜻입니다. 보편화하는 것은 강도 높은 도덕적 요구에 초점을 맞춰, 내가 하려는 행동이 다른 사람의 이익과 처지보다 내 이익과 처지를 앞세우지 않는지 점검하게 합니다.
정언명령의 도덕적 효력은 칸트의 두 번째 공식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인간을 목적으로 대한다는 공식입니다. 그는 그 어떤 이익이나 목적도 도덕법의 기초로 삼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도덕법은 사람, 즉 그 자체가 목적인 사람에게만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존재만으로도 절대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그 안에는, 그리고 오로지 그것 안에만 정언명령의 토대가 존재할 것이다.”
무엇이 그 자체가 목적이면서 존재만으로도 절대적 가치를 지닐까? 센델은 칸트의 답이 인간이라고 말합니니다. “인간은, 그리고 일반적으로 모든 이성적 존재는, 이런저런 의지에 따라 임의로 사용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으로 존재한다.” 칸트는 인간과 물건의 근본 차이가 바로 이 점이라고 일깨웁니다. 사람은 이성적 존재입니다. 사람은 상대적 가치를 지닐 수도 있지만,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가치를 지닙니다. 즉 이성적 존재에는 존엄성이 있습니다. 칸트는 이 추론으로 정언명령의 두 번째 공식을 내놓습니다. “나 자신이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인간을 절대 단순한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언제나 한결같이 목적으로 다루도록 행동하라.” 인간은 목적이라는 공식입니다.
칸트에게 자살은 타살과 마찬가지로 정언명령을 위반합니다. 고통스런 상황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목숨을 끊는다면, 나를 고통 완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가 말했듯이 인간은 “단지 수단으로 이용되는 물건”이 아닙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인간성을 처분할 권리는 다른 사람은 물론 내게도 없습니다. 칸트 생각에, 자살이 잘못인 이유는 타살이 잘못인 이유와 같습니다. 사람을 물건 취급하면서 그 자체를 목적으로 존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둘 다 마찬가지입니다. 칸트에게 자기 존중과 타인 존중은 같은 원칙에서 나옵니다. 존중 의무는 이성을 지닌 존재, 인간성을 지닌 존재인 인간에 대한 의무입니다. 이는 그가 어떤 사람인가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존중은 인간에 대한 다양한 애착과는 다릅니다. 사랑, 공감, 연대감, 동료의식은 타인 중에서도 특정한 타인에게 더 끌리는 도덕 감정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그런 감정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칸트의 존중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존중이며, 우리 모두에게 비차별적으로 존재하는 이성적 능력에 대한 존중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존중하지 않는 것도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용납되지 않습니다.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건 도덕법을 생각해, 의무감에 따라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도덕법은 정언명령인 인간 자체를 목적으로 여겨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이뤄집니다. 정언명령에 다른 행동만이 자유로운 행동입니다. 가언명령에 따른 행동은 외부에 주어진 이익이나 목적을 의식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칸트에게 자유롭게 행동하기, 즉 자율적으로 행동하기란 도덕적으로 행동하기, 즉 정언명령에 따라 행동하기와 같은 하나의 개념입니다.
칸트는 도덕과 자유에 대한 이런 사고방식으로 공리주의를 철저히 비난합니다. 특정한 이익이나 욕구, 말하자면 행복이나 공리 따위를 도덕의 기초로 삼으려는 노력은 실패하기 마련입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결코 의무가 아니며, 특정한 이익을 위해 행동할 필요성이기 때문이다.” 이익을 기초로 한 원칙은 “언제나 조건적이며, 도덕법이 될 수 없다.”
정언명령이 의지의 산물이라면, 사람마다 정언명령이 서로 다를 수 있으므로 모든 사람이 같은 도덕법을 선택하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느냐는 물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칸트에 의하면, 순수 실천 이성을 발휘할 때만이 우리가 특정한 이해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순수 실천 이성을 발휘한다면 누구나 같은 결론에, 유일한 그리고 보편적인 정언명령에 이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유의지와 도덕법에 다른 의지는 똑같은 하나이다.”
우리가 인간의 행위와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법칙을 바라볼 때 취할 수 있는 관점을 칸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이성적 존재는 ...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그리고 자신의 모든 행동을 ... 지배하는 법칙을 알 수 있는 두 가지 관점을 갖는다. 첫째, 감각적 세계에 속해 있는 한, 자신이 자연법칙(타율)에 지배된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둘째, 지적 세계에 속해 있는 한, 자연법칙과는 독립되어 경험이 아닌 오직 이성을 토대로 한 법에 지배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칸트는 지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나를 자유로운 인간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감각 세계의 여러 원인이 초래한 결과에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가 바로 자유로운 상태(이성적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적 존재라면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이때 나의 의지는 항상 어떤 이익이나 욕구에 구애받습니다. 선택은 하나같이 어떤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타율적 선택에 그칠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는 이런저런 충동이나 끌림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칸트의 도덕철학을 탐구하는 방법 중 하나는 그가 몇 가지 구체적 질문에 도덕철학을 어떻게 적용했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성도덕에 관한 그의 견해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입니다. 그는 부부 사이의 성관계를 제외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성적 행위에 반대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자신을 소유할 수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서로 동의한 경우라도 자유로운 성관계(혼외정사)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것이 두 사람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둘을 대상화하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성관계가 두 사람에게 만족을 준다 해도 “두 사람은 상대의 인간성을 욕보인다. 이들은 인간성을 욕정과 끌림의 충족하는 도구로 이용한다.” 자유지상주의의 자기소유 개념과는 정반대로, 칸트는 우리는 자신을 소유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우리에게 사람을 단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가 있다 보니, 우리 몸과 우리 자신을 다루는 방식이 제한됩니다. “인간은 자신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 인간은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재산이 아니다.”
칸트는 거짓말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그는 거짓말을 부도덕한 행위의 으뜸으로 꼽습니다. 친구가 당신 집에 숨어 있고, 살인자가 문 앞에 와서 그 친구를 찾는다고 가정할 경우 살인자에게 거짓말을 한다면 옳은 행위가 아니겠는가? 칸트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진실을 말해야 할 의무는 결과에 상관없이 항상 유효합니다.
칸트와 동시대 사람인 프랑스 철학자 뱅자맹 콩스탕Benjamin Constant(1767-1830)은 이 비타협적인 입장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진실을 말해야 할 의무는 진실을 알 자격이 있는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며, 살인자 같은 사람은 당연히 여기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칸트가 살인자에게 거짓말을 하는 행위가 잘못인 이유는 진실 원칙을 위반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살인자를 도와 사악한 짓을 저지르게 한다면 그것은 꽤나 무거운 불이익입니다. 그러나 칸트에게 도덕은 결과가 아닌 원칙의 문제입니다. 거짓은 종류를 막론하고 “진실이라는 원천을 오염시킨다. ... 따라서 진실하기(정직하기)는 신성하고 조건 없이 적용되는 이성의 법칙이며, 그 어떤 편의상의 예외도 인정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