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문하에 들어간 미켈란젤로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카프레세의 미켈란젤로가 태어난 집
미켈란젤로 부오나르로티Michelangelo Buonarroti는 1475년 3월 6일 월요일 해뜨기 네 시간 전 토스카니 사람들의 마을 카프레세Caprese로 불리운 아레조Arezzo 근처 작은 언덕이 있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레조에서 북쪽으로 48km 가량 떨어진 작은 마을 아레조의 현재 공식 명칭은 카프레세 미켈란젤로입니다. 미켈란젤로를 기리기 위해 마을 명칭 뒤에 그의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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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치아카의 <여행자들의 숙박소>, 1530년경, 패널에 유채, 85-71.5cm.
당시 피렌체의 거리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태어날 무렵 아버지 로도비코Ludovico di Leonardo Buonarroti Simoni는 피렌체의 공무원으로 작은 도시 카프레세의 시장podesta이었습니다. 그는 신앙심이 깊고 선량하지만 구식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로도비코는 6개월의 시장 직을 마친 후 가족을 데리고 피렌체로 돌아와서 시가 내려다보이는 산타 크로체 근처 작은 마을 세티냐노에서 중소 규모의 농장을 경영했습니다. 부오나로니 가는 부유했으므로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와 시외에 위치한 두 저택에서 성장했습니다. 어머니 프란체스카Francesca Neri di Miniato del Sera는 아들 셋을 더 낳고, 미켈란젤로가 여섯 살 때인 1481년에 타계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둘째 아들이었고, 첫째 아들 레오나르도는 도미니크회 수사가 되었는데, 가족에게 큰 실망을 안겨준 것 같았습니다. 세째 아들은 부오나르로토Buonarroto로 불과 두 달 동안이었지만 시의원이 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피렌체로 돌아온 후 아무 일도 안 하다가 미켈란젤로가 열 살 때인 1485년에 재혼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어려서부터 돌 깍기를 좋아했지만 아버지는 그가 조각가가 되는 데 반대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예술가란 직업은 부유층에서 볼 때 미천하게 취급되었으며, 아버지는 그가 피렌체의 은행가이면서 상인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조각에 집념을 갖고 있음을 알고는 피렌체의 유명한 프레스코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jo(1449-94)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해주는 것이 아들의 장래를 위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미켈란젤로가 열세 살 때 그로부터 수학하게 했습니다. 로도비코는 미켈란젤로가 기를란다요 문하에서 3년 동안 수학할 것을 약속하는 계약서에 서명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1488년 4월 1일부터 그가 말한 "기본 미술 the prime art"인 조각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기를란다요는 크고 매우 훌륭한 작업장을 갖고 있었고, 미켈란젤로는 그로부터 드로잉과 템페라 그리고 프레스코를 그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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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성 피나의 장례식>의 부분, 1473-75, 프레스코도메니코 기를란다요는 발도비네티와 베로키오로부터 수학했습니다. 어려서 금 세공가 아버지로부터 금 세공을 배웠으며, 그의 이름은 금과 은으로 화관을 만든 데서 유래했습니다. 바사리에 의하면 “기를란다요는 상점 앞을 지나가는 사람을 언뜻 보고서도 그를 아주 닮게 그릴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산타 피나 예배당에 <성 피나의 장례식>을 그렸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스물네 살이었으며, 1480년 피렌체 오냐상티 성당과 수도원 식당에 네 점의 프레스코를 그린 후 대가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의 작품들 가운데 <최후의 만찬>은 레오나르도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기를란다요의 양식은 딱딱하며 단조롭습니다. 그와 동시대 화가 보티첼리에 비해 유행에 뒤진 그림을 그렸지만, 그는 장인적 기교에 뛰어나고 사업에 능통해 피렌체에 훌륭한 작업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동생들인 베네데토와 다비드가 조수로 그를 도왔습니다. 교황 식스투스 4세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가서 시스티나 예배당에 <물고기를 잡는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는 그리스도>를 그리면서 배경의 산과 바다, 그리고 하늘을 아름답게 묘사했습니다. 고대의 도시 로마에 머무른 동안에는 오래된 아크, 목용탕, 기둥, 수도교aqueduct, 원형경기장 등을 드로잉하는 훈련을 했으며, 언뜻 보고도 재현할 수 있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그는 자와 컴퍼스가 없이도 대상을 정확한 비례로 그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업장을 모든 예술가에게 열어놓고 누구든지 와서 일하게 했으며, 크고 작은 작업을 가리지 않고 주문을 받아 조수들과 함께 작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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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그리스도의 세례 Baptism of Christ>>, 1486-90, 프레스코, 산타 마리아 노벨라 토르나부오니 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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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성모의 알현 Presentation of the Virgin>, 1486-90, 프레스코, 산타 마리아 노벨라 토르나부오니 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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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성모의 알현 Presentation of the Virgin> 가운데 미켈란젤로가 그린 부분
당시 화가의 문하에 들어간다는 것은 스승으로부터 배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의뢰받은 작업에 참여하여 부분적 일을 맡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켈란젤로가 기를란다요의 작업에 부분적으로 기여한 것으로 두 점을 꼽을 수 있는데, 1486~90년에 프레스코화로 제작된 <그리스도의 세례 Baptism of Christ>에서 세례자 요한 옆에 무릎을 꿇은 채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과 <성모의 알현 Presentation of the Virgin>에서의 누드로 앉아 있는 남자와 그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으로 추정됩니다.기를란다요의 작품에는 과도한 감정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는 회화적 이야기를 가볍게 여겼는데, 산타 마리아 노벨라의 성가대석에 그린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의 생애의 경우 그림은 이야기적이더라도 성서를 모르는 사람은 그 내용을 알 수 없습니다. 그는 묘사하는 화가였지 이야기꾼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대상 자체가 관람자에게 즐거움을 주기 바랐고 생생하게 살아 있는 얼굴의 표정으로 그림이 생기 있게 했습니다. 당시 피렌체에서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매우 열렬하게 입체감과 해부, 색채기술, 대기의 원근법 등을 탐구했지만, 그는 일반적 수준 그 이상이 못되었습니다. 그는 회화에서 실험을 하거나 새로운 것을 발견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시대의 평균적 특성을 갖춘 그는 그것을 이용해 새로운 기념비적인 효과를 창출하려고 한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세부적 관찰이 섬세하고 전체를 파악하는 점에서 위대했습니다. 그는 탁월한 도안가이자 위대한 화가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훗날 아는 체 하기를 좋아하는 기를란다요로부터 배운 것이 별로 없었다고 투덜거렸지만, 그의 작품 <도니 톤도 Doni Tondo>(1504)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1508)에서 기를란다요의 영향이 두드러져 그가 스승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존하는 초기 드로잉을 보면 그가 과거 피렌체 대가들 조토Giotto(1266년경~1337)와 마사초Masaccio(1401~28)의 작품을 연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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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토의 <사도 요한의 승천>, 1335년경, 프레스코, 산타 크로체 페루자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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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조토 양식으로 그린 두 인물>, 1490년경, 32-19.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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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마사초의 ‘사그리 델 카르미네’ 모사>, 1490년경, 31-18.5cm.
그가 1490년경 14살 혹은 그 이전에 그린 드로잉 두 남자의 모습은 조토가 1335년경에 그린 <사도 요한의 승천 Ascension of John Evangelist>의 왼쪽 두 사람을 모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