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인기 있는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 패널에 유채, 77-53cm.


<모나리자>는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정부의 배려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1963년 2월 7일부터 3월 4일까지 이 작품이 소개되었을 때, 한 달도 채 안 되는 기간에 무려 백만 명 이상 관람했습니다.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가 1503~06년에 그린 것으로 1512년 시뇨리의 일원이 된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 성모 엘리사베타의 초상입니다. 조콘도는 실크 교역으로 부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는 1495년 몬나 리자Monna Lisa라는 과부 리자 디 게라르디니를 아내로 맞았습니다. 그녀는 아이를 하나 낳았지만, 1499년에 죽었는데 이것이 그녀의 미소 이면에 담겨진 의미가 된 것 같습니다. 레오나르도는 1503~06년 동안 여러 차례 몬나 리자로 하여금 자신의 작업장으로 와서 포즈를 취하게 했는데, 자신의 예술의 비밀과 뉘앙스를 여인의 초상화를 통해 표현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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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의 부분


레오나르도는 몬나 리자를 부드러운 명암으로 조명하면서 배경에 나무, 물, 산, 바다를 그려 넣었습니다. 그녀는 새틴을 단 벨벳 의상을 입었고, 레오나르도는 특유의 기교로 의상의 우미한 주름을 세밀하게 묘사했습니다. 그녀의 눈빛은 성숙해보이지 않고 입술 가장자리는 잔잔한 바람처럼 스치는 미소로 인해 약간 위로 올라갔는데, 무엇 때문에 미소를 짓고 있는지 관람자들을 궁금하게 만듭니다. 뵐플린은 『르네상스 미술』에서 모나리자의 미소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것은 물 위를 스치는 바람결처럼 얼굴의 부드러운 표면 위를 스쳐가는 움직임이다. 빛과 그림자가 벌이는 유희와 귀를 기울여도 잘 들리지 않는 속삭이는 대화이다.

뵐플린은 이런 개념과 표현이 16세기에 생겨난 것에 회의를 표하면서 미소가 16세기에는 유행하지 않았음을 지적했습니다. 그는 눈두덩의 부풀어 오른 부분이 바로 높은 앞이마로 이어졌음을 지적하면서, 몬나 리자에게 눈썹이 없는 것은 당시에는 넓은 이마를 아름답다고 여겼기 때문에 <모나리자>의 눈썹과 이마 윗부분의 머리가 밀려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뵐플린은 몬나 리자의 취향이 철저히 15세기적임을 강조하지만, 바로 직후 유행이 달라졌음을 지적했습니다. 마드리드에 있는 <모나리자> 복제판에 그려진 눈썹을 예로 들며 이마는 도로 내려왔고, 얼굴을 강력하게 분할해주는 눈썹이 있는 것이 훨씬 아름답게 여겨지게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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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의 부분


레오나르도는 과거 화가들과는 달리 흉상이 아닌 반신상으로 그렸습니다. 약간 옆으로 앉은 모델의 상반신을 반쯤 틀어 얼굴이 거의 정면을 바라보게 묘사했습니다. 왼팔은 안락의자 팔걸이에 올려 있고 오른팔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뻗어 나오면서 오른손이 왼손 위에 살며시 포개졌습니다. 편안한 동작이 모델의 성격이 차분함을 말해줍니다. 그는 입체감을 회화의 혼이라고 했으며, 이 작품에서 그런 점을 볼 수 있습니다.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표면이 아주 섬세하게 튀어나오고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조콘도는 방문자들에게 아내의 웃는 모습을 벽에 걸어놓고 보여줄 수 없어 구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나리자>는 한동안 레오나르도가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이 초상화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으나 <라 조콘다>로 알려졌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프랑스 왕 프란체스코 1세가 4천 크라운을 주고 구입하여 자신의 퐁텐블루 궁전에 걸었습니다. 이후 이 초상화는 프랑스어로 <라 조콘드>로 불리었고 영어로는 <모나리자>로 알려졌습니다.

모나리자에 관한 이야기는 바사리가 『미술가 열전』에 남긴 기록을 통해 전해집니다. 하지만 그가 『미술가 열전』을 쓸 때 이 작품은 프랑스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생전에 이 작품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이에 관한 바사리의 기록에 신빙성을 두지 않습니다. 작품의 주인공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그중 로렌초의 막내아들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좋아한 여인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레오나르도가 타계하기 몇 달 전 아라공의 추기경이 그림의 여인을 피렌체에서 보았다면서 줄리아노의 여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의 이름은 파시피카 브란다노가 됩니다. 그 밖에도 이 여인에 관한 설이 분분해서 이제는 누가 과연 실제 인물인지 밝히기란 불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그림의 주인공은 남자이며 레오나르도의 자화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작품은 여전히 <모나리자>로 불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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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누드 모나리자>


바사리는 이 그림을 주문한 사람이 구입하지 않은 이유를 4년 동안 그렸지만 미완성이었기 때문이라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루브르에 있는 이 작품을 보고 미완성이라고 판단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바사리의 말대로 당시 그것이 미완성이었다면 레오나르도는 이것을 프랑스로 갖고 가서 완성했을 것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줄리아노가 레오나르도에게 <누드 모나리자>를 주문했다고 말합니다.

레오나르도의 작품들이 대부분 수난을 겪었듯이 <모나리자>도 수세기 동안 수난을 겪었습니다. 패널 양쪽 7cm가량이 잘려나갔으며, 그 위에 덧칠되었고 얼굴 부분에는 연한 황록색 유약이 칠해졌습니다. 하지만 <모나리자>는 서양 사람들의 가장 사랑받는 작품이 되었고, 많은 예술가들이 이를 모티프로 갖가지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레오나르도에게 존경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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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라우셴버그의 <리자 몽롱상태 #1>, 1985

그림을 문장에 비유하자면, 라우셴버그는 <모나리자>를 주제로 새로운 어휘, 새로운 문장을 구성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이미지를 통해 그가 추구한 건 새로운 문장으로서의 회화의 가능성입니다. 라우셴버그의 작품은 차세대 화가들에게 풍부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모나리자>는 그에 의해 지워지고 그 이미지가 거구로 구성한 동일한 이미지와 오버랩되어 새로운 회화의 언어로 변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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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라우셴버그의 <무제>, 1980

라우셴버그는 <모나리자>를 의자 등 받침대로 사용함으로써 전통미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예술론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배격되었습니다. 이렇게 배격 받은 데서 <모나리자>가 르네상스를 대표할 뿐 아니라 서양미술의 상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나리자>를 부정해야만 새로운 미술이 가능했던 걸로 봐서 얼마나 오랫동안 이 작품이 규범으로 존재해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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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의 <L.H.O.O.Q.>, 1964, 1919년에 처음 제작한 것을 재생.

뒤샹은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 엽서로 프린트한 것을 사서 연필로 염소수염을 그려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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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의 <모나리자>, 1963, 실크스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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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스퍼 존스의 <인물 7>, 1969

숫자와 모나리자는 관련이 없습니다. 무관한 이미지의 병렬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일 뿐입니다. 새로운 시각예술의 자유와 폭을 확장하기 위해 모두가 익히 아는 모나리자가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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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아르네손의 <콜로마 목욕을 하는 조지와 모나>, 1976

실재했던 모나리자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목욕을 즐겼을 것입니다. 아르네손은 그녀를 우상화하는 것에 반대하기 위해 그녀를 대중적인 인물로 격하시켰습니다. 이는 팝아트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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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 이야기: 세 자매


세 딸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세 딸 모두 미인이었으나, 결점이 하나씩 있었는데, 큰딸은 게을렀고, 둘째는 물건을 훔치는 도벽이 있었으며, 막내는 남의 험담을 즐겨 했습니다. 하루는 세 아들을 둔 사람이 그를 찾아와 세 딸을 자기 집으로 시집보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자기 딸들에게 결점이 있다고 고백하자, 그 사람은 그런 정도의 결점은 자기가 책임을 지고 고쳐나갈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세 자매는 세 아들에게 각각 시집을 갔습니다.

세 며느리를 맞이한 시아버지는 게으른 며느리에게는 많은 몸종들을 딸려 일을 하게 했고, 도벽이 있는 며느리에게는 창고의 열쇠를 모두 주며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지 가지라”고 했습니다. 남의 험담을 즐겨 하는 며느리에게는 매일 아침마다 “오늘은 남을 헐뜯어 말할 것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하루는 친정아버지가 시집간 딸들이 궁금하여 딸네 집에 갔습니다. 큰딸은 마음대로 게으름을 피울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둘째는 갖고 싶은 걸 언제라도 가질 수 있어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막내는 시아버지가 자신에게 남자관계를 따지곤 하는 일이 몹시 괴롭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두 딸의 말은 사실로 여겼지만, 막내의 말만은 곧이듣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막내가 자신의 시아버지까지도 헐뜯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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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휘어지게 만드는 힘


아이작 뉴턴Sir Isaac Newton(1643-1727)은 청교도혁명이 일어난 해인 1642년 1월 4일 영국의 일컴셔Lincolnshire의 울즈소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작은 규모의 지주였으며 뉴턴이 태어나기 전에 죽었습니다. 어머니는 뉴턴이 세 살 때 대지주인 바나바 스미스와 결혼했습니다. 뉴턴은 1661년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1561-1626)과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1596-1650)에 관심이 많아 그들의 저작에 주석을 달았으며, 기하학과 원자론, 화학 등 다양한 학문을 접했습니다. 또한 연금술의 근본사상이었던 헤르메티시즘Hermeticism(신비주의)을 접했으며 이는 뉴턴이 평생 연금술alchemy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뉴턴은 1684년 핼리 혜성Halley's Comet으로 유명한 영국의 천문학자, 수학자 에드먼드 핼리Edmond Halley(1656~1742)와 행성운동에 관해 토론할 정도로 천문학에 식견이 있었습니다. 뉴턴이 핼리의 출판비용 지원으로 1687년 7월 5일 출판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는 유명한 만류인력universal gravitation(모든 두 물체 사이에는 그것들의 질량에 근원을 두고 두 물체를 잇는 직선을 따라서 서로 끌어당기는 힘)의 법칙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뉴턴의 운동법칙을 통해 고전역학을 완성한 근대과학의 명저로 꼽힙니다. 또 독일의 철학자, 수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폰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von Leibniz(1646~1716)와 함께 미적분학calculus의 창설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뉴턴이 시간과 공간을 “운동법칙에 따라 우주의 모든 사건이 일어나는 방대한 무대”로 본 데에 반해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이 자연현상에 매우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이상한 방식으로 휘어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트램폴린trampauline 위에 놓인 볼링공을 예로 들면 볼링공이 놓인 자리는 움푹 들어가고, 이때 구슬을 볼링공을 향해 굴리면 구슬은 볼링공 주변을 공전하게 됩니다. 뉴턴의 관점에서 보면 구슬이 적절한 거리를 두고 볼링공 주변을 공전하는 것은 볼링공이 구슬에게 힘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아인슈타인의 관점에서 보면 힘의 개념을 도입할 이유가 없는데, 구슬의 궤적이 휘어지는 것은 단지 볼링공에 의해 침대 표면이 휘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에서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당기는 힘은 작용하지 않습니다. 구슬을 지구로 볼링공을 태양으로 대치시키면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도는 것은 태양의 중력 때문이 아니라 태양이 지구 근처의 공간을 왜곡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런 논리를 바탕으로 아인슈타인은 중력이 우주전역에 즉각적으로 전달되는 인력이 아니라 질량에 의해 공간이 휘어지면서 나타나는 결과로 보았습니다. 양탄자 한쪽 끝을 세차게 흔들면 파동이 표면을 타고 특정속도로 전달되는 것처럼 중력도 파동을 창출하여 공간을 타고 빛의 속도로 전달된다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설명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중력을 시공간의 휘어짐으로 해석함으로써 상대성이론과 중력을 조화롭게 연결시킬 수 있었습니다. 중력이 물체를 잡아당기는 것(인력引力, attractive force)이 아니라 휘어진 공간이 물체를 밀어내는 것(척력斥力, repulsive force)입니다.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중력은 우주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는 독립적인 힘이 아니라 시공간이 휘어지면서 나타나는 부수적인 효과에 불과합니다. 그의 방정식으로 질량과 에너지의 분포상태에 따라 시공간이 휘어지는 정도를 계산할 수 있습니다. 고용한 연못에 돌을 던지면 수면파가 생성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갑니다. 돌멩이가 클수록 물결은 더욱 격렬하게 일어납니다. 이와 같이 별의 덩치(질량)가 클수록 시공간은 더욱 심하게 휘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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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 리들리, 창조는 재조합하는 것이다


매트 리들리Matt Ridley(1958-)는 진화심리, 생명과학, 인류학, 사회학 등 과학기술과 인문사회 전 분야를 두루 섭렵하며 진화와 유전학, 사회를 주제로 도발적인 책들을 저술한 세계적인 과학저술가입니다. 대표작으로 성과 진화 이론을 집대성한 『붉은 여왕The Red Queen』, 뉴욕타임스가 2000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한 『게놈Genome』, 유전과 환경의 오래된 논쟁에 마침표를 찍으며 미국 학술원 과학도서상을 수상한 『본성과 양육Nature via Nurture』 등이 있습니다.

매트 리들리는 영국 뉴캐슬에서 태어났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동물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www.rationaloptimist.com/home

매트 리들리는 32,000년 전 프랑스 쇼베 동굴에 코뿔소를 그린 사람을 우리가 오늘 만날 수 있다면, 그가 심리적으로 지금의 우리와 똑같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32,000년 전 인류는 약 300만 명이었고 지금은 거의 70억 명으로 늘었지만, 인간의 삶에는 변화하지 않은 것이 대단히 많다고 말합니다. 변한 건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문화입니다. 그는 인류가 폭발적인 진화적 변이를 겪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변이를 일으키는 것은 고풍스럽고 훌륭한 다윈주의적 자연선택이지만, 선택이 이뤄지는 것이 유전자들이 아니라 아이디어들 사이에서라고 말합니다. 아이디어의 거주지는 인간의 뇌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1976년에 문화적 모방의 단위를 뜻하는 밈meme이란 단어를 만들어냈습니다. 문화의 진화란 문화에 복제와 돌연변이, 경쟁과 자연선택, 변이의 축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매트 리들리는 생물학적 진화를 누적시키는 것이 바로 섹스라고 말합니다. 각기 다른 개체의 유전자들이 한데 합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개체에서 일어난 돌연변이가 다른 개체에서 일어난 돌연변이와 힘을 합칠 수 있게 됩니다. 미생물들이 20억-30억 년 전에 유전자 교환을 시작하고 동물들이 섹스를 통해 같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눈을 만드는 모든 유전자가 한 동물의 몸에 모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눈은 자연선택에 의해 누적적으로 한 단계씩 생겨난 것입니다. 다리나 신경이나 뇌를 만드는 유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각각의 돌연변이는 해당 혈통에만 고립된 채 시너지효과synergy effect를 발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시너지효과란 전체의 효과에 도움을 주는 각 기능이 공동으로 작용하여 발휘하는 기대 이상의 효과를 말합니다. 돌연변이가 해당 혈통에만 고립된 예로 어느 물고기는 발생 단계의 폐를 진화시키고 다른 물고기는 사지를 진화시키는 중이지만, 어느 물고기도 뭍으로 올라가지는 못하는 상황을 말할 수 있습니다.

매트 리들리는 진화가 섹스 없이도 일어날 수 있지만, 그 속도는 엄청 더딜 것이라고 말합니다. 문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화가 단순히 다른 사람들의 습성을 배우는 것만으로 이뤄진다면 그것은 곧 정체될 것입니다. 누적적인 성격을 갖기 위해서는 아이디어들이 서로 만나 짝을 지을 필요가 있습니다. 프랑스의 분자생물학자 프랑수아 자코브Francois Jacob(1920-)는 “창조하는 것은 재조합하는 것”이라고 적절하게 말했습니다.

매트 리들리는 교환이 문화의 진화에 미치는 영향이 섹스가 생물의 진화에 미치는 영향과 같다고 말합니다. 일부 猿人(원인)이 식량이나 도구를 다른 사람들과 교환한 결과, 각자 더 잘살 수 있게 되었고 서로가 자신들의 분야를 전문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문화가 혁신을 촉진했습니다. 세계 전역의 사람들이 분업을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전문화하고 교환할 수 있으며, 우리가 더욱 부유해지는 것입니다. 매트 리들리는 저서 『이성적 낙관주의자The Rational Optimist』에서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성적 낙관주의를 가짐으로써 인류의 복지를 증진하고 인류가 살아가는 세계를 개선시킬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전대미문의 경제적 비관주의가 판을 칩니다. 세계의 은행 체제는 붕괴 직전이고, 빚으로 빚어진 거대한 경제 거품이 붕괴했으며, 세계 무역은 위축되었고, 생산량이 줄어들면서 세계 전역에서 실업이 급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영국의 역사가이자 정치가 토머스 배빙턴 매콜리Thomas Babington Macaulay(1800-59)는 말했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오직 좋아진 것밖에 없는 지금 미래를 내다볼 때는 오직 나빠지기만 할 것으로 예상해야 한다니, 도대체 무슨 그런 신념이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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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왕성한 창작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1500년부터 1508년까지 8년 동안은 미켈란젤로의 창작이 왕성했던 시기이며, 이때를 ‘성기 르네상스 High Renaissance’라 합니다. 그는 피렌체에서 열여덟 차례에 걸쳐 작품 의뢰를 받았는데, 청동으로 제작하는 것에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웅장한 무덤을 장식하는 일, 피콜로미니의 의뢰로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을 장식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 시기에 대리석 조각 아홉 점을 제작했는데, <다윗> 외에도 <브뤼허 성모>, <성 마태오>, 두 점의 톤도, 피콜로미니 제단을 위한 네 점의 작은 인물상을 제작했고, 청동으로 단도를 든 사람과 프랑스와의 외교 수단으로 기증한 <다윗>(두 작품 모두 현존하지 않음), 그리고 볼로냐 시의회를 위해 앉아 있는 교황 율리우스를 제작했습니다. 그가 제작한 율리우스는 1511년 교황에 항거하는 폭동 때 사라졌습니다. 당시 그는 <도니 톤도>와 프레스코 <카시나 전투>를 위한 드로잉을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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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의 <율리우스 2세의 초상>, 1511-12년경, 패널에 유채, 108-80.7cm.


율리우스 2세Julius II(1443-1513)는 교황 식스투스 4세의 조카로 27살에 추기경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손으로 교회의 세속 권력 신장을 추구하여 교회의 위용을 과시하려고 했으며, 예술가들을 보호 육성했습니다. 율리우스 재위 중의 로마는 조형미술 분야에서 피렌체를 능가하는 예술가들의 메카가 되었습니다.

율리우스 2세가 즉위했을 때 교황령 체사레 베르지아가 찬탈되었습니다. 그는 이를 정복하기 위한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성직과 면죄부를 팔았고, 프랑스를 끌어들여 교황-프랑스 동맹군을 편성했습니다. 또한 교회의 영적 지도자라기보다는 무인으로서 스스로 종군하여 병사들과 더불어 고생하면서 작전을 지휘했으며, 축성을 감독하며 자신의 명령을 어기는 자를 강력히 처벌했습니다. 그는 항복권고에 반대하는 도시의 지배자들을 피문하고 시민들에게는 반란을 일으키도록 호소하면서 승리를 거듭하여 볼로냐에 입성했습니다. 그는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미켈란젤로에게 명하여 자기 동상을 성 베드로 대성당 앞에 세우게 하고 로마로 개선했습니다. 강적이었던 베네치아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동맹군이 절실했고, 1508년 12월 10일 독일 황제 막스밀리안, 프랑스 왕 루이 12세, 스페인 왕 페르난도, 교황 율리우스의 동맹이 결성되었습니다. 베네치아 공화국 원로들은 교황의 동맹 결성을 보고받고 파엔트라, 리미니 두 도시를 반환하겠다고 통고했습니다. 그러나 교황은 이를 거절하고 출병했으며, 전선은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베네치아 군대는 각지에서 동맹군을 요격했지만, 결국 패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베네토 주에 결집하여 강력하게 저항했고, 이에 동맹군은 무산되었습니다.

이 전쟁을 통해 이탈리아에 프랑스 세력이 강화된 건 명백했습니다. 교황은 프랑스가 자신의 영토를 침공해올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반프랑스 동맹을 획책했습니다. 율리우스는 프랑스와의 맹약을 지킨 페라라 공화국을 침공하여 두 주 후 함락시켰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군대가 공격해왔고, 프랑스군의 보호를 받던 페라라 시민들은 그들의 진입을 환영했습니다.

교황은 1511년 10월 스페인, 베네치아 두 나라를 끌어들여 반프랑스 신성동맹을 정식으로 발족시켰습니다. 영국도 교황의 신성동맹에 가입했습니다. 프랑스 왕은 피사에서 공의회를 열고 계속해서 밀라노에서도 열었으며, 분리파 추기경단은 교황의 폐위를 선언했고, 프랑스군은 로마냐로 진격했습니다. 율리우스는 이에 대항하여 1512년 5월 2일 라테라노 궁정에서 공의회를 개최했으며, 보름 후 독일, 스위스도 교황편이 되어 신성동맹에 가담했습니다. 연속 공세에 몰린 프랑스군은 밀라노, 볼로냐, 라벤나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교황은 이 승리를 감수할 겨를도 없이 병으로 스러졌습니다. 1513년 2월 4일 아침 교황은 의전관을 불러 장례에 대한 지시를 내렸습니다. 2월 20일 그는 죽음에 임박했음을 알고 임종의 준비를 하고 침대 머리맡에 추기경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죄와 교회 운영에 대한 과오를 참회했습니다. 이것이 율리우스 2세의 최후이자 생애에 걸쳐 단 한 번의 겸손한 태도였습니다.

미켈란젤로 후원자들의 신분은 다양했는데, 두 명의 교황, 피렌체 지도자 곤팔로니에레 디 지우스티지아와 피에트로 소데리니, 피렌체의 저명한 네 가문 스트로치 가, 도니 가, 피티 가, 타데이 가, 피렌체 대성당, 플랑드르의 거상, 프랑스 추기경, 재무장관 등이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작품 의뢰를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에 미완성으로 남긴 것들도 있고, 아예 시작조차 하지 못한 것들도 있습니다. 작품을 모두 제작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의뢰를 수용한 것은 책임감이 없었기 때문이기보다는 의뢰 작품마다 새로운 도전으로 생각하여 모든 도전을 받아들이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일대기를 전해준 콘디비에 의하면 미켈란젤로는 터키의 술탄 왕가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의 보스포로스 교량을 놓는 일을 의뢰받고 이를 받아들일 것인지 고심했다고 합니다. 이는 그의 명성이 터키에까지 자자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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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세기 대리석 채석장과 운반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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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성 마태오>, 1505-06년경, 대리석, 높이 271cm.

몸통은 정면, 얼굴은 옆을 향하고 있고, 왼쪽 다리가 굽은 채 얼굴과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머리와 오른팔, 그리고 오른쪽 다리가 스케치 상태로 남아있습니다. 이것은 <라오콘>의 격정적인 정서를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표현방식은 미켈란젤로가 고유의 ‘격렬하게 뒤틀린 육체로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전환해감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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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성 마태오>의 부분

돌을 매우 거칠게 스케치했지만, 머리 부분(좌)에서도 미켈란젤로의 몸짓에 대한 표현을 읽을 수 있습니다. 회화에서 마태오는 일반적으로 복음서를 쓰고 있는 모습이지만, 미켈란젤로는 왼손에 성서 혹은 석판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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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성 마태오>의 부분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오른손은 미완성이며, 깃펜을 들고 있어 그가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신성에 힘입어 복음서를 썼음을 시사합니다.


1503년 피렌체 대성당의 아르테 델라 라나는 열두 사도들의 모습을 실제 사람보다 크게 새겨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이는 미켈란젤로의 창의력과 신앙의 깊이를 테스트하는 도전과 다름없었습니다. 열두 사도들을 각기 개성 있게 묘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이런 중요한 일을 그에게 맡긴다는 것은 피렌체 대성당이 그를 신뢰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는 1년에 한 점씩 제작하기로 약속하고 카라라 채석장으로 가서 직접 대리석을 골랐으며, 적어도 다섯 차례에 걸쳐 피렌체로 운반했습니다. 하지만 이 계약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카시나 전투>의 제작 때문에 이 작업이 지연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상하지만 계약이 파기된 이후인 1506년경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성 마태오>를 먼저 제작하기로 했지만, 그것마저 미완성으로 남겼습니다.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무덤을 건립하는 일을 위임받아 로마로 가야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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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라자로와 두 인물에 대한 습작>, 1516-17년경, 25.1-18.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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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의 <라자로를 살림>, 1517-19, 패널에서 캔버스에 유채로 옮김, 381-289.6cm.


성서에서 라자로가 자신을 감싼 천을 풀고 부활했듯이 마태오도 자신을 죄고 묶어둔 돌의 억압에서 벗어나 벌떡 일어나기 직전의 모습입니다. 미켈란젤로의 돌조각은 억제된 동작의 표현으로 돌 속에 내재되어 있는 형상을 자유롭게 만드는 작업의 결과로 보입니다. 억제된 동작을 인물의 의지 탓으로 돌립니다. 창조주가 인간을 흙으로 빚어 정신을 불어넣어 생기를 돌게 만들었듯이 미켈란젤로도 돌에 정신을 불어넣어 생기 있고 자유로운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비록 미완성이지만 <성 마태오>를 통해 그의 신앙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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