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10세의 출현


당시 프랑스는 영토를 확장하는 정책에 착수하고 바티칸, 스페인과 캄브라와 조약을 맺었습니다. 터키는 전과 같이 변명하면서 조약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왕은 조약을 통해 쉽게 베네치아 영토의 일부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오판했습니다. 프랑스군은 무턱대고 이탈리아를 강타하며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기병과 포병을 보내기 전 항복하기를 바랐습니다. 이에 율리우스 2세는 무력과 더불어 파문이라는 무기로 무장했습니다. 또한 프랑스의 투쟁 대상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외압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독일과 스페인도 포함되었습니다. 율리우스의 신성동맹은 프랑스를 내몰았고, 프랑스와 결탁했던 피렌체를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이에 피렌체 시의회는 율리우스의 요구를 받아들여 메디치 가문을 권좌에 복귀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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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의 <교황 레오 10세, 추기경 줄리오 데 메디치와 루이지 데 로시>, 1518-19, 패널에 유채, 154-119cm.


1513년은 정치적 변화에 있어서 특별히 기록될 만한 해였습니다. 프랑스군이 롬바르디아를 떠났고 율리우스 2세가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교황에 오른 레오 10세Pope Leo X(1475-1521)는 로렌초 데 메디치의 둘째아들 조반니 데 메디치입니다. 레오는 메디치 가를 다시 부흥시키고 바티칸의 영향력을 높였으며, 20년 만에 피렌체의 힘을 강화시켰습니다. 피렌체 공화국의 몰락과 함께 지도자 피에트로 소데리니는 추방당했습니다. 스위스군은 루도비코의 아들 막스밀리안 스포르차와 함께 프랑스를 공격하고 프랑스군은 알프스를 넘어 퇴군했습니다.

레오는 일곱 살에 성직에 들어가 추기경이 되었으나 교양과 향락에 넘치는 메디치 가의 환경에서 성장했으므로 세련되고 우아한 취미와 불신앙이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고전과 그리스어를 배우고 부친 로렌초의 집에 드나드는 석학들과 교류하면서 문학, 역사, 미술, 과학, 수학, 천문학 등 당시 지식의 모든 분야에 눈이 열렸습니다. 1511년 율리우스 2세를 대신해서 로마냐로 갔다가 프랑스군에 잡혀 밀라노로 송치되었습니다. 포로가 된 그는 간수에게 뇌물을 주고 탈주하여 피렌체를 공격 중인 교황-스페인 연합군에 가담했습니다.

레오는 재위 7년 동안 막대한 돈을 쏟아 부어 최고 예술가들에게 작품을 제작하게 하고, 사본들과 사치스러운 공예품들을 수집하며 학자와 문인들을 양성했습니다. 레오는 두 개의 연구소를 합병해 로마 대학을 설립하고 88명의 교수를 임명했습니다. 성서를 히브리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는 사업에 투자하는 한편 그리스 문화 연구를 위해 아카데미를 신설하고 많은 학자들을 그리스에서 초청했습니다. 또한 당시 최대 출판업자인 알드 마스티오를 후원하여 플라톤 대화편의 신판을 간행하게 했으며, 인문학자 바리노 가메루디에게 명하여 그리스어 사전을 편찬하게 했습니다. 그는 고대 작품의 발굴과 수복을 장려했습니다. 오래 전부터 로마에서는 건축자재를 얻기 위해 교황의 인가 하에 고대 건물들을 쉽게 헐었습니다. 레오는 이러한 야만적인 문화유산의 파괴에 종지부를 찍고 바티칸 궁전 일부를 개방하여 고대 건축의 발굴품들을 진열하고 라파엘로를 문화재보호 감독관에 임명했습니다. 그는 정치는 싫어했으나 문학과 미술에 관한 정치는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특히 외교수완이 빼어났습니다.

레오는 전쟁을 싫어했지만 이탈리아 반도에 패권을 새우려고 하는 프랑스와 스페인에 대해서는 일전도 불사하는 확고한 자세를 보였으며, 피렌체를 맹주로 삼아 밀라노, 피아첸트아, 발마, 모데나, 페라라, 우르비노 등 유력 공화국들을 규합하여 이탈리아 제국 연합을 구상했습니다. 또한 바티칸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1353개에 달하는 새로운 성직을 설치하여 경매에 붙였으며, 1517년에는 추기경 31명을 증원하는 한편 면죄부의 매출을 대폭 증가시켰으나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의 생활은 사치의 극에 달했으므로 로마시민들이 불평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한 익명의 글에는 “레오는 삼대의 교황 수입을 혼자 먹어치웠다. 선대 율리우스가 모아놓은 재물, 자기의 수입, 차기 교황 몫 세 사람 분을”이라고 써 있었습니다. 레오는 8년 동안 450만 두카트를 소비하여 교회를 파산 직전으로 몰아넣었습니다. 1521년 12월 2일 레오가 44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모든 시민은 안도의 숨을 쉬고 그의 죽음을 축하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바프리오의 프란체스코 멜치의 부친의 집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1513년 대부분을 그곳에서 지내면서 트레조 성을 요새화하는 일을 도왔던 것 같습니다. 근처에 있는 언덕에 가서 아다 계곡을 드로잉했으며, 자신을 후원한 사람들의 집을 확장해주거나 개축을 위해 디자인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자신이 추구한 해부학을 정리하면서 사체를 구할 수 없어 동물들을 해부하여 내용을 보충했습니다. 1513년 1월 9일자 기록에는 바프리오 타워의 응접실을 위한 건축 계획이 있고 도식적인 흉부에 에워싸인 횡경막, 소화기관, 호흡기관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는 9월에 멜치 가를 떠났습니다. 노트북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9월 24일 나는 프란체스코 멜치, 살라이, 로렌초(1505년 피렌체에서 제자가 된), 그리고 일 판포이아(하인인 듯하다)와 함께 밀라노를 떠나 로마로 갔다.” 이때 레오나르도의 나이 예순한 살이었습니다.

1513년 3월 11일 레오 10세가 교황에 즉위하자 레오나르도에게 로마로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교황 군대의 총사령관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와 가까운 사이인 레오나르도는 자연히 그의 형인 교황과도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일부 학자들은 <모나리자>를 주문한 사람으로 줄리아노를 꼽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바티칸을 방문했으며 그곳에서 바티칸을 위해 작업하는 옛 친구 가수 아탈란테 미그리오로티와 도나토 브라만테와 해후했습니다. 그는 일 소도마를 만났으며, 공학가 프라 조콘도와 줄리아노 다 상갈로를 만났고, 교황이 좋아하던 명성이 드높은 라파엘로도 만났습니다. 또한 루카 시뇨렐리와 당시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를 마치고 율리우스의 무덤 제작 계획을 갖고 있었던 미켈란젤로도 만났습니다.

로렌초가 “온갖 부덕한 일들이 발생하는 곳”이라고 말한 로마는 레오나르도에게도 행복을 선사하지 않았습니다. 긴 흰 수염을 한 그는 덕망 있는 선배들 중 한 사람으로 부각되었을 뿐 젊은 예술가들이 두드러지게 활약했습니다. 그때 라파엘로는 스탄차stanza(교황이 거처하던 방)에 그림 하나를 그릴 때마다 1만2천 두카트를 받았습니다. 당시 화가·시인·음악가들이 받은 대우에 비하면 레오나르도가 매달 받은 33두카트는 푸대접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밀라노에서 그는 프랑스인들의 격찬을 받았고 경쟁상대는 몇 명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늙은 그에게 주요 작업을 의뢰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노트북에 “메디치 가는 나를 유명하게 만들었고 또 나를 망쳤다”고 적었습니다. 이탈리아어로 의사가 메디코medico인데 그의 글은 의사를 호되게 비난하는 의미입니다. 전에도 노트북에 의사를 가리켜 “생명을 망치는 사람”이라고 적은 적이 있으며,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래야 의사를 피할 수 있으며 의사가 처방하는 약은 일종의 마력이다”라고 적었습니다.

이 시기 레오나르도의 건강은 나빴습니다. 류머티즘이나 오한 때문에 밤에는 밀라노에서 사용한 안에 털을 댄 저킨을 가져와 계속 사용해야 했습니다. 노트북에는 딴 사람의 글씨로 레오나르도를 위한 로마 소재 의사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습니다. 그의 병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삼 년 동안 건강이 나빴으며, 체사레 보르지아를 위한 일로 피렌체로 돌아갈 때 파란색 안경에 관해 언급한 것으로 미루어 시력도 나빴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이 나쁘고 시력이 감퇴되었다고 해서 그의 창의력마저 저하되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는 줄리아노를 위해 3년 동안 작업하면서 건축과 수리학에도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레오는 교황에 된 후 거대한 폰틴 습지에 수로를 건설하기를 희망했고, 기록에 의하면 1514년 교황은 이 어려운 일을 동생 줄리아노에게 위임했습니다. 도메니코 데 주베니부스는 레오나르도의 자문을 구한 후 이 계획에 관한 드로잉을 그렸고 멜치의 도움을 받아 그 지역에 대한 지도를 그렸습니다. 레오나르도는 1503년 피옴비노의 습지에 수로를 만들려고 한 경험이 있어 자문에 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황 레오와 레오나르도와의 관계에 관해서는 별로 전해지는 바가 없습니다. 폰틴 습지의 문제도 동일한 것으로 수로를 파서 습지의 물을 바다로 빼내는 일이었습니다. 주베니부스의 지도를 보면 수로를 어떻게 파려고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작업은 코모에서 온 수도승 조반니 스코티의 감독 하에 진행되었지만, 수년 후 중단되었고, 19세기 말에서야 완성되었습니다.

메디치 가와 피렌체는 직물산업을 매우 중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프를 제작하는 기계가 사용되었고, 레오나르도는 줄리아노에게 태양 에너지를 사용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이는 거대한 포물선 형태의 거울을 이용해서 태양열로 염색에 사용하는 큰 통의 물을 끓이는 것입니다. 레오나르도는 1490년대에 이미 오목거울을 만들 수 있는 기계에 관해 연구하면서 금속으로 판을 만들어 용접하고 연마하는 도구로 고안했습니다. 이번에는 아주 커다란 반사 망원경을 만들어 별들을 관측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줄리아노는 레오나르도에게 독일인 두 명을 제공했는데, 하나는 쇠를 다루는 마스터 조르조였고, 다른 한 사람은 거울을 만드는 마스터 조반니였습니다. 하지만 이 반사 망원경은 제작되지 못했습니다. 줄리아노가 매달 7두카트씩 지불했던 독일인들은 한 사람은 게을렀고 거만했으며 다른 한 사람은 먹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 나쁜 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에 레오나르도는 도저히 그들과 함께 작업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그는 이 두 사람이 자신의 발명을 훔칠까봐 염려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줄리아노와 피렌체의 새 집권자인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의 부름을 받아 파르마, 피아첸자, 밀라노, 피렌체 등지를 여행하느라 작업에 전념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레오나르도는 여러 마을의 구획과 건축 프로젝트에 관여했으며, 1514년 4월 11일에 타계한 브라만테의 뒤를 이어 치비타베키아의 항구를 완성했습니다. 그는 1515년에 피렌체의 산 로렌초 궁전의 외관 디자인과 비아 라르의 궁전을 포함한 메디치 가의 건물들을 재건하는 데도 응모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디자인한 것으로 확실시되는 것은 말 128필이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크기의 마구간으로 수년 전 밀라노에서 디자인했던 것을 활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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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자연재해>, 1517-18년경, 16.2-20.3cm.


한편 레오나르도는 건축 디자인 등 일반적인 장면에서 구체적인 장면으로 관심을 돌려 아주 지독한 장면들을 드로잉 했습니다. 흑연으로 열두 장의 대홍수 장면을 드로잉하면서 잉크와 수채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두세 페이지에 걸쳐서 몇 가지 끔찍한 장면들에 관해 적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무리를 지어 손에 무기를 들고 사자, 이리, 야수들로부터 은신처를 지키고 있다 … 오, 많은 사람들이 손으로 귀를 막고 비와 어둠을 가르는 천둥 섞인 무서운 바람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애쓴다! 더러 사람들은 눈을 감는 것으로도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어 손으로 다른 사람을 붙들고 신의 분노가 인류를 강타하는 무자비한 학살로부터 피하기를 원한다. … 그 밖의 사람들은 이성을 잃고 자살을 기도하며 그 같은 고통을 당하는 데 대해 절망한다.

레오나르도의 드로잉에는 동물들은 놀라서 서로를 짓밟아 죽이고, 새들은 날다 지쳐 사람들의 머리 위라도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하기를 바랍니다. 물은 더욱 범람하고, 사람들은 굶주림으로 서로를 약탈하고, 배들은 암초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고, 시체들이 해초처럼 여기저기 떠다닙니다. 산, 초목, 야수와 인간, 그 어느 것도 정신착란의 요소를 제어하지는 못합니다. 레오나르도가 대홍수의 참담한 상황을 묘사하게 된 건 멜치의 집에 거주하면서 바프리오의 아다 계곡의 놀라운 풍경을 그리다가 성서의 대홍수에 관련된 영감이 생겨 그리게 된 것입니다. 그는 성서를 과학적 논리로 해석하면서 급류의 맹위에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음을 지적했습니다. 노아의 방주조차 대홍수에 살아남지 못하고 인류가 모두 전멸하게 됨을 묘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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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변화는 우주적 성질이다


생명체는 대략 35억만 년 전에 시작되었으나 6억5천만 년 전쯤 다세포를 갖는 생명체가 나타났습니다. 감기에 걸렸을 때 발견되는 세균은 30억 년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6억만 년 전쯤 해파리 같은 동물이 나타났을 때는 서로 간에 소통이 일어나는 데 필요한 정도의 감각계통과 운동계통이 충분하게 발달되었습니다. 신경조직의 시초는 이때부터였다. 동물이 진화되어 가는 동안 신경계통 또한 진화되어 차츰차츰 뇌라는 형태의 최고 사령부로 발전되어 갔습니다.

우리의 뇌는 파충류, 원시 포유류 그리고 신생 포유류의 뇌 방향으로 발달해왔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살아가기 위해 대사활동을 함으로써 끊임없이 물질과 에너지를 주변과 주고받습니다. 결과적으로 해를 거듭할수록 우리 몸의 원자들은 새로운 것들로 바뀌어 나갑니다. 마실 물을 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에너지는 태양으로부터 와서 먹이사슬을 거쳐 우리에게 도달한 것으로, 결국 입가로 컵을 들어 올린 것은 햇살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 몸과 외계 사이의 벽은 사실 공고한 구분이 아니라 구멍 뚫린 철망과도 흡사합니다.

우리 마음과 외계의 구분은 페인트칠한 차선과도 같습니다. 언어와 문화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 마음에 스며들어 마음의 패턴을 형성합니다. 사람은 공감과 사랑에 의해 다른 사람들에게 자연스레 맞추어지게 되며, 우리의 마음도 다른 이들에 공명하여 움직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흐름은 쌍방향으로 이뤄져서 우리 역시 남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 마음속에서는 구분선을 거의 찾기 어렵습니다. 마음의 내용은 쉽게 다른 쪽으로 흐르고 변형됩니다. 감각은 생각, 느낌, 욕망, 행동이 되며 또 다른 감각을 낳습니다. 순식간에 이뤄지는 신경망 조립의 연쇄 속에서 의식적 연관의 다음 흐름을 낳는데, 대개 이런 과정은 1초 안에 이뤄집니다.

신경전달물질의 일종으로 기분, 수면 그리고 소화를 조절하는 세로토닌serotonin을 분비하는 뉴런 하나를 예로 들면, 이 작은 뉴런은 신경계의 일부일 뿐 아니라 그 자체로서도 작동을 위해 다양한 하부 시스템이 필요한 복잡한 시스템입니다. 뉴런은 신경계통의 가장 기본 구조물입니다. 뉴런의 주된 기능은 시냅스synapse라 부르는 아주 미세한 부위를 통해 뉴런 상호 간에 정보를 소통하는 일입니다. 많은 종류의 뉴런이 있지만 기본 구조는 대체로 유사합니다.

세포체는 다른 뉴런으로부터 신경전달물질을 수용하는 수지상돌기dendrites라 부르는 곳으로 신호를 보냅니다. 어떤 뉴런들은 전기적 신호를 통해 뉴런끼리 직접 소통하기도 합니다. 뉴런은 수천 분의 일 초 동안 흥분성 신호와 억제성 신호를 모두 취합하여 흥분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게 됩니다.

뉴런이 작동하면 축색 끝부분의 수초myelin에서는 다양한 분자들을 시냅스 간격으로 폭발적으로 쏟아내어 다른 뉴런과 상호작용하게 됩니다. 뉴런이 흥분하게 되면 하나의 전기화학적 파형이 축색axon을 따라 진행되어 나갑니다. 축색이란 뉴런들 쪽으로 신호를 내보내는 신경섬유의 연장부를 말합니다. 축색은 신호를 수용하는 뉴런들과 연결되는 시냅스의 신경전달물질을 방출하여 수용 뉴런들을 차례차례 흥분시키기도 하고 억제시키기도 합니다. 각 수초는 세로토닌으로 가득 찬 약 200여 개의 작은 주머니인 소낭을 가지고 있습니다. 뉴런이 작동할 때마다 다섯 개에서 열 개 정도의 소낭이 터져서 열립니다. 전형적인 뉴런은 초당 열 번 정도 작동하므로 각 수초에 존재하는 세로토닌 소낭은 몇 초면 텅 비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이 분주하고 작은 분자 기계는 새롭게 세로토닌을 만들거나, 분비된 뉴런을 재활용해야 합니다. 또한 이들은 소낭을 새로 만들어야 하며, 이를 세로토닌으로 채워서 수초 끝 부분으로 보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이 조화롭게 일어나기 위해서는 매우 다양한 과정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들은 쉽게 잘못될 수 있으며 세로토닌 대사는 우리 몽에 존재하는 무수하고 복잡한 시스템의 한 예에 불과합니다.

우리 몸의 모든 체계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동안에는, 종종 위협 신호는 일시적으로 멈춥니다. 그러나 외계는 항상 변화하므로 우리 심신과 관계의 평형이 끊임없이 교란됩니다. 분자적 바탕으로부터 인간관계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의 조절자는 원초적으로 불안정한 바탕 위에서 질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의식을 지탱하는 전전두엽은 초당 5-8회나 변화할 정도로 우리 신경계 역시 끊임없이 교란을 당합니다. 마음의 상태는 이토록 불안정한 신경계가 기저를 이룹니다. 모든 생각에는 신경망의 넘쳐나는 흐름이 일시적으로 개입하는데, 이는 시냅스 사이의 일시적인 조합을 통해 일어납니다. 이러한 조합은 이내 사라져서 다시 다른 생각이 일어날 수 있도록 비옥하니 무질서한 토양을 만듭니다.

『붓다 브레인Buddha's Brain』의 저자 릭 핸슨과 리처드 멘디우스는 만물은 변화하고, 그것이 외부 세계의 실재하는 우주적 성질이나 내적 경험의 실질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한 평형의 교란은 끝날 수 없다고 합니다. 생존을 위해 뇌는 동적인 시스템을 안정시키기 위해 투쟁하며, 다양한 세계 속에서 고정된 패턴을 찾기 위해 힘쓰고,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영구한 계획을 만들어 내려고 합니다. 그 결과 우리의 뇌는 바로 지금 지나간 순간을 쫓을 수밖에 없으며, 그 순간을 이해하고 조정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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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블의 법칙Hubble's law


미국으로 돌아온 에드윈 포웰 허블은 빌렌 드 지터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더욱 확실한 증거를 찾기 시작했으며, 24개의 은하들을 끈질기게 관측한 끝에 멀리 있는 은하일수록 더욱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결과는 아인슈타인의 방정식과도 일치했습니다. 은하의 이동속도를 거리로 나눈 값은 항상 일정하게 나타났는데, 훗날 이 상수가 허블상수Hubble's constant 혹은 H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허블상수는 우주의 팽창속도를 알려주는 지표로 지금도 천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상수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우주의 팽창속도를 알면, 즉 허블상수의 역수(1/H)를 계산하면 대략적인 우주의 나이를 알 수 있습니다. 허블이 처음 계산한 우주의 나이는 약 18억 년이었는데, 이 값은 후대 천문학자들을 오랫동안 괴롭혔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천문학자들은 안드로메다 변광성의 밝기 측정에 오차가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지난 70년 동안 허블상수의 정확한 값을 놓고 천문학자들이 벌인 논쟁은 ‘허블전쟁’으로 불릴 만큼 격렬했습니다. 현재는 WMAP 위성이 전송해온 허블상수의 값을 가장 정확한 값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1931년에 윌슨산천문대를 방문하여 허블과 역사적인 대면을 가졌습니다. 그 자리에서 아인슈타인은 우주가 팽창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자신이 도입한 우주상수가 일생에서 가장 큰 실수였음을 고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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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인체의 신비를 밝혀내다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505

레오나르도의 <사람 두개골에 관한 연구>, 19-14cm.


1510년 10월 21일 월요일 레오나르도와 공학가들은 밀라노 대성당 건축위원회로부터 성당 내 성가대석에 관한 자문을 받았습니다. 몇 달 후 레오나르도는 단단한 흰 돌에 관심이 생겼으며, 친구인 조각가 베네데토 브리오스코가 그 흰 돌에 대한 견본을 가져다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한동안 다양한 인위적인 물질을 생산하는 것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가공하지 않은 호박amber을 대체할 만한 물질에 관해 생각했습니다. 그는 합성수지에 관해 연구하면서 “나는 플래스틱 유리를 발명했다”고 적었습니다. 나이가 들었지만 과학에 대한 관심은 여전했으며, 말년의 실험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더욱 이루려고 했고, 자신의 비법을 비밀에 붙였습니다. 그는 단순한 기계적인 관심에서 벗어나 생의 본질에 관한 유기적 구조에 집중했습니다. 정기적으로 뼈와 해골 또는 가죽을 벗겨낸 인체를 통해 근육과 신경조직에 관해 연구했습니다. 피렌체에서 <안기아리 전투>를 위한 습작을 할 때 그의 작업장이 산타 마리아 노벨라 병원 내에 있었으므로 인체 해부하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늙은이와 아이의 사체해부를 노트북에 상세히 열거했습니다.

"백 살이나 된 늙은이가 죽기 몇 시간 전 자신은 육체적 고통을 느끼지는 않지만 쇠약함을 느낀다고 말하고 산타 마리아 노벨라 병원 침대에 앉아 통증도 거의 느끼지 않고 미동도 없이 조용히 죽었다. 그렇게 조용히 죽을 수 있는 연유를 알아내기 위해 노인의 시체를 해부했는데, 그 원인이 심장으로부터 뻗은 동맥을 통해 피가 몸 전체에 충분히 공급되지 않아서 쇠약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다음 해부는 두 살 된 아이였는데 이 경우 늙은이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있었음을 발견했다."


512

루카 시뇨렐리의 <어깨로 시신을 나르는 누드 남자>, 36.7-22.4cm.


기록을 통해 레오나르도가 의학 역사상 처음 동맥경화에 관한 기록을 남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인체에 대한 다양한 기록들을 살펴볼 수 있는데, 목을 매달아 죽은 시체의 경우 성기가 충혈되어 있었다고 적었으며, 이런 기록에 드로잉을 첨가했습니다. 노트북에는 “시체가 아주 가늘게 된 원인은 병인데, 이는 근육이 사라져 세포막의 상태에까지 이르렀다”는 구절이 있는데, 아마도 암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파비아 대학 해부학 교수로 젊고 영리한 의사 마르칸토니오 델라 토르레의 도움으로 인체에 관한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인체 외에도 동물에 관해서도 연구했는데 곰, 원숭이, 소, 개구리와 조류 등을 인체의 내부와 비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동물의 생명의 본질을 알고 싶어 했으며, 또한 인체의 각 부분이 어떤 상호관계를 유지하는지 알기 원했습니다. 그의 기록을 보면 인체에 관해 발견한 성과에 대해 매우 열광적으로 기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심장·폐·두뇌·간·장·목·얼굴을 해부 분석하면서 창조주의 교묘한 솜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매료되었습니다. “창조주는 불필요하거나 불완전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창조하지 않았다”고 적었고, “상이한 점을 발견하기 위해” 사체 여러 구가 필요했다고 적었습니다. 그는 피가 엉기고 창자, 몸속의 근육이 매우 얽혀 있어 최소한 세 차례에 걸친 해부가 필요했다면서 그렇게 한 후에야 “그 밖의 것들은 폐기하더라도 정맥과 동맥을 제대로 분별할 수 있었다”고 하고, 힘줄·근육·인대를 위한 해부, 뼈와 연골을 위한 해부가 필요했다고 적었습니다. 또한 여성의 인체해부를 통해 인간이 태어나게 되는 과정을 밝히고 싶어 한 그는 “자궁과 태아라는 대단한 신비를 숨긴 여인”을 속속들이 밝히기 위해 세 차례의 해부가 필요했다고 하고 “마치 네가 그것을 들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보듯이” 모든 특징을 세 가지 각기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모양으로 보여줘야 했다고 적었습니다. 그는 임신 7개월째인 태아를 그렸지만 임산부의 사체를 구하지 못했으므로 태생학에 관한 연구는 소의 자궁을 기초로 했으며, 피의 순환과 함께 요생식기의 기능과 자궁의 발전을 연구했습니다.


504

레오나르도의 <여인의 주요 장기와 동맥 구조>, 1500년경, 수채, 47.8-33.3cm.


레오나르도는 해부용 칼과 톱으로 인체의 내장을 분해한 후 각 장기들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흐르는 물에 씻거나, 석회수에 담근 후 주사기로 액체 왁스를 투입시켜 내부 모양을 재생하고 펜이나 연필로 보이는 그대로 그렸습니다. 이렇게 그린 인체묘사가 약 2백 점이나 됩니다. 과학적 가치가 높은 인체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많이 그린 예가 과거에 없었고, 이것들은 18세기 말까지 유일하게 가치 있는 자료로 인정받았습니다. 드로잉에 오류가 있기는 하지만, 그는 골상학, 근학, 심장학, 신경학을 발견했습니다. 인체 내부를 그대로 그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안다면, 그가 이룬 성과가 매우 값지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의 연구는 대단한 신비를 벗겨내는 작업이었습니다. 근육과 팔·다리 힘줄에 관해 연구하면서 “1510년 겨우내 이 모든 해부를 마쳤으면 한다”고 적었습니다. 마지막 해부학의 성과는 호흡 체계와 성대에 관한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이를 존재의 기원인 영혼에 관한 연구의 준비 작업으로 보았는지 모릅니다. 그는 지혜의 어머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경험의 축적을 통해 존재의 본질이 되는 영혼을 알고자 했는데 “자연은 무한한 원인들로 되어 있어 경험이 결코 자연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필요성의 중량, 즉 모든 것의 규칙과 한계에 압도되었습니다.


509

안드레아 솔라리오의 <수염 난 남자의 머리>, 37.4-27.3cm.


추기경 조르주 앙부아즈는 레오나르도에게 파리 근교의 가이롱에 있는 자신의 대저택을 새로 디자인해주기를 청했습니다. 교황 후보로 선출되지 못한 그는 밀라노의 총독 샤를 앙부아즈의 삼촌이었습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청을 거절했고 대신 제자들 중 가장 뛰어난 안드레아 솔라리오가 그 일을 맡았습니다.

이 시기 레오나르도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습니다. 루도비코가 타계했고, 보티첼리가 피렌체에서, 그리고 조르조네가 1510년에 타계했습니다. 그해 추기경 앙부아즈가 전염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3월 10일에는 샤를 앙부아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하는 말로는 그가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한 후 화병으로 죽었다고 하지만, 사실 말라리아에 걸려 죽은 것입니다. 당시 교황과 루이 2세는 전쟁 중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에게 해부학을 가르친 의대 교수 마르칸토니오 델라 토르레도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습니다. 밀라노에 새로 부임한 루이 12세의 조카인 총독 가스통 드 퐈는 1511년 부활절 날 라벤나에서 살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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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 이야기: 나무 열매


 

노인이 뜰에 묘목을 심고 있었습니다. 지나던 나그네가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영감님께서는 이 나무에 언제쯤 열매가 열릴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노인이 말했습니다.

70년쯤 지나면 열리지 않겠소?

그러자 나그네가 다시 물었습니다.

영감님께서 그때까지 사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그런 게 아니오. 내가 어렸을 적 우리 과수원에 열매가 많이 달려 있었소. 그것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아버님께서 날 위해 그 나무들을 심어주셨기 때문이었소. 나도 아버님과 똑같은 일을 지금 하고 있는 중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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