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10세의 출현


당시 프랑스는 영토를 확장하는 정책에 착수하고 바티칸, 스페인과 캄브라와 조약을 맺었습니다. 터키는 전과 같이 변명하면서 조약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왕은 조약을 통해 쉽게 베네치아 영토의 일부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오판했습니다. 프랑스군은 무턱대고 이탈리아를 강타하며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기병과 포병을 보내기 전 항복하기를 바랐습니다. 이에 율리우스 2세는 무력과 더불어 파문이라는 무기로 무장했습니다. 또한 프랑스의 투쟁 대상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외압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독일과 스페인도 포함되었습니다. 율리우스의 신성동맹은 프랑스를 내몰았고, 프랑스와 결탁했던 피렌체를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이에 피렌체 시의회는 율리우스의 요구를 받아들여 메디치 가문을 권좌에 복귀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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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의 <교황 레오 10세, 추기경 줄리오 데 메디치와 루이지 데 로시>, 1518-19, 패널에 유채, 154-119cm.


1513년은 정치적 변화에 있어서 특별히 기록될 만한 해였습니다. 프랑스군이 롬바르디아를 떠났고 율리우스 2세가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교황에 오른 레오 10세Pope Leo X(1475-1521)는 로렌초 데 메디치의 둘째아들 조반니 데 메디치입니다. 레오는 메디치 가를 다시 부흥시키고 바티칸의 영향력을 높였으며, 20년 만에 피렌체의 힘을 강화시켰습니다. 피렌체 공화국의 몰락과 함께 지도자 피에트로 소데리니는 추방당했습니다. 스위스군은 루도비코의 아들 막스밀리안 스포르차와 함께 프랑스를 공격하고 프랑스군은 알프스를 넘어 퇴군했습니다.

레오는 일곱 살에 성직에 들어가 추기경이 되었으나 교양과 향락에 넘치는 메디치 가의 환경에서 성장했으므로 세련되고 우아한 취미와 불신앙이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고전과 그리스어를 배우고 부친 로렌초의 집에 드나드는 석학들과 교류하면서 문학, 역사, 미술, 과학, 수학, 천문학 등 당시 지식의 모든 분야에 눈이 열렸습니다. 1511년 율리우스 2세를 대신해서 로마냐로 갔다가 프랑스군에 잡혀 밀라노로 송치되었습니다. 포로가 된 그는 간수에게 뇌물을 주고 탈주하여 피렌체를 공격 중인 교황-스페인 연합군에 가담했습니다.

레오는 재위 7년 동안 막대한 돈을 쏟아 부어 최고 예술가들에게 작품을 제작하게 하고, 사본들과 사치스러운 공예품들을 수집하며 학자와 문인들을 양성했습니다. 레오는 두 개의 연구소를 합병해 로마 대학을 설립하고 88명의 교수를 임명했습니다. 성서를 히브리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는 사업에 투자하는 한편 그리스 문화 연구를 위해 아카데미를 신설하고 많은 학자들을 그리스에서 초청했습니다. 또한 당시 최대 출판업자인 알드 마스티오를 후원하여 플라톤 대화편의 신판을 간행하게 했으며, 인문학자 바리노 가메루디에게 명하여 그리스어 사전을 편찬하게 했습니다. 그는 고대 작품의 발굴과 수복을 장려했습니다. 오래 전부터 로마에서는 건축자재를 얻기 위해 교황의 인가 하에 고대 건물들을 쉽게 헐었습니다. 레오는 이러한 야만적인 문화유산의 파괴에 종지부를 찍고 바티칸 궁전 일부를 개방하여 고대 건축의 발굴품들을 진열하고 라파엘로를 문화재보호 감독관에 임명했습니다. 그는 정치는 싫어했으나 문학과 미술에 관한 정치는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특히 외교수완이 빼어났습니다.

레오는 전쟁을 싫어했지만 이탈리아 반도에 패권을 새우려고 하는 프랑스와 스페인에 대해서는 일전도 불사하는 확고한 자세를 보였으며, 피렌체를 맹주로 삼아 밀라노, 피아첸트아, 발마, 모데나, 페라라, 우르비노 등 유력 공화국들을 규합하여 이탈리아 제국 연합을 구상했습니다. 또한 바티칸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1353개에 달하는 새로운 성직을 설치하여 경매에 붙였으며, 1517년에는 추기경 31명을 증원하는 한편 면죄부의 매출을 대폭 증가시켰으나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의 생활은 사치의 극에 달했으므로 로마시민들이 불평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한 익명의 글에는 “레오는 삼대의 교황 수입을 혼자 먹어치웠다. 선대 율리우스가 모아놓은 재물, 자기의 수입, 차기 교황 몫 세 사람 분을”이라고 써 있었습니다. 레오는 8년 동안 450만 두카트를 소비하여 교회를 파산 직전으로 몰아넣었습니다. 1521년 12월 2일 레오가 44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모든 시민은 안도의 숨을 쉬고 그의 죽음을 축하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바프리오의 프란체스코 멜치의 부친의 집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1513년 대부분을 그곳에서 지내면서 트레조 성을 요새화하는 일을 도왔던 것 같습니다. 근처에 있는 언덕에 가서 아다 계곡을 드로잉했으며, 자신을 후원한 사람들의 집을 확장해주거나 개축을 위해 디자인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자신이 추구한 해부학을 정리하면서 사체를 구할 수 없어 동물들을 해부하여 내용을 보충했습니다. 1513년 1월 9일자 기록에는 바프리오 타워의 응접실을 위한 건축 계획이 있고 도식적인 흉부에 에워싸인 횡경막, 소화기관, 호흡기관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는 9월에 멜치 가를 떠났습니다. 노트북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9월 24일 나는 프란체스코 멜치, 살라이, 로렌초(1505년 피렌체에서 제자가 된), 그리고 일 판포이아(하인인 듯하다)와 함께 밀라노를 떠나 로마로 갔다.” 이때 레오나르도의 나이 예순한 살이었습니다.

1513년 3월 11일 레오 10세가 교황에 즉위하자 레오나르도에게 로마로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교황 군대의 총사령관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와 가까운 사이인 레오나르도는 자연히 그의 형인 교황과도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일부 학자들은 <모나리자>를 주문한 사람으로 줄리아노를 꼽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바티칸을 방문했으며 그곳에서 바티칸을 위해 작업하는 옛 친구 가수 아탈란테 미그리오로티와 도나토 브라만테와 해후했습니다. 그는 일 소도마를 만났으며, 공학가 프라 조콘도와 줄리아노 다 상갈로를 만났고, 교황이 좋아하던 명성이 드높은 라파엘로도 만났습니다. 또한 루카 시뇨렐리와 당시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를 마치고 율리우스의 무덤 제작 계획을 갖고 있었던 미켈란젤로도 만났습니다.

로렌초가 “온갖 부덕한 일들이 발생하는 곳”이라고 말한 로마는 레오나르도에게도 행복을 선사하지 않았습니다. 긴 흰 수염을 한 그는 덕망 있는 선배들 중 한 사람으로 부각되었을 뿐 젊은 예술가들이 두드러지게 활약했습니다. 그때 라파엘로는 스탄차stanza(교황이 거처하던 방)에 그림 하나를 그릴 때마다 1만2천 두카트를 받았습니다. 당시 화가·시인·음악가들이 받은 대우에 비하면 레오나르도가 매달 받은 33두카트는 푸대접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밀라노에서 그는 프랑스인들의 격찬을 받았고 경쟁상대는 몇 명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늙은 그에게 주요 작업을 의뢰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노트북에 “메디치 가는 나를 유명하게 만들었고 또 나를 망쳤다”고 적었습니다. 이탈리아어로 의사가 메디코medico인데 그의 글은 의사를 호되게 비난하는 의미입니다. 전에도 노트북에 의사를 가리켜 “생명을 망치는 사람”이라고 적은 적이 있으며,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래야 의사를 피할 수 있으며 의사가 처방하는 약은 일종의 마력이다”라고 적었습니다.

이 시기 레오나르도의 건강은 나빴습니다. 류머티즘이나 오한 때문에 밤에는 밀라노에서 사용한 안에 털을 댄 저킨을 가져와 계속 사용해야 했습니다. 노트북에는 딴 사람의 글씨로 레오나르도를 위한 로마 소재 의사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습니다. 그의 병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삼 년 동안 건강이 나빴으며, 체사레 보르지아를 위한 일로 피렌체로 돌아갈 때 파란색 안경에 관해 언급한 것으로 미루어 시력도 나빴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이 나쁘고 시력이 감퇴되었다고 해서 그의 창의력마저 저하되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는 줄리아노를 위해 3년 동안 작업하면서 건축과 수리학에도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레오는 교황에 된 후 거대한 폰틴 습지에 수로를 건설하기를 희망했고, 기록에 의하면 1514년 교황은 이 어려운 일을 동생 줄리아노에게 위임했습니다. 도메니코 데 주베니부스는 레오나르도의 자문을 구한 후 이 계획에 관한 드로잉을 그렸고 멜치의 도움을 받아 그 지역에 대한 지도를 그렸습니다. 레오나르도는 1503년 피옴비노의 습지에 수로를 만들려고 한 경험이 있어 자문에 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황 레오와 레오나르도와의 관계에 관해서는 별로 전해지는 바가 없습니다. 폰틴 습지의 문제도 동일한 것으로 수로를 파서 습지의 물을 바다로 빼내는 일이었습니다. 주베니부스의 지도를 보면 수로를 어떻게 파려고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작업은 코모에서 온 수도승 조반니 스코티의 감독 하에 진행되었지만, 수년 후 중단되었고, 19세기 말에서야 완성되었습니다.

메디치 가와 피렌체는 직물산업을 매우 중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프를 제작하는 기계가 사용되었고, 레오나르도는 줄리아노에게 태양 에너지를 사용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이는 거대한 포물선 형태의 거울을 이용해서 태양열로 염색에 사용하는 큰 통의 물을 끓이는 것입니다. 레오나르도는 1490년대에 이미 오목거울을 만들 수 있는 기계에 관해 연구하면서 금속으로 판을 만들어 용접하고 연마하는 도구로 고안했습니다. 이번에는 아주 커다란 반사 망원경을 만들어 별들을 관측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줄리아노는 레오나르도에게 독일인 두 명을 제공했는데, 하나는 쇠를 다루는 마스터 조르조였고, 다른 한 사람은 거울을 만드는 마스터 조반니였습니다. 하지만 이 반사 망원경은 제작되지 못했습니다. 줄리아노가 매달 7두카트씩 지불했던 독일인들은 한 사람은 게을렀고 거만했으며 다른 한 사람은 먹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 나쁜 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에 레오나르도는 도저히 그들과 함께 작업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그는 이 두 사람이 자신의 발명을 훔칠까봐 염려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줄리아노와 피렌체의 새 집권자인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의 부름을 받아 파르마, 피아첸자, 밀라노, 피렌체 등지를 여행하느라 작업에 전념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레오나르도는 여러 마을의 구획과 건축 프로젝트에 관여했으며, 1514년 4월 11일에 타계한 브라만테의 뒤를 이어 치비타베키아의 항구를 완성했습니다. 그는 1515년에 피렌체의 산 로렌초 궁전의 외관 디자인과 비아 라르의 궁전을 포함한 메디치 가의 건물들을 재건하는 데도 응모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디자인한 것으로 확실시되는 것은 말 128필이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크기의 마구간으로 수년 전 밀라노에서 디자인했던 것을 활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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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자연재해>, 1517-18년경, 16.2-20.3cm.


한편 레오나르도는 건축 디자인 등 일반적인 장면에서 구체적인 장면으로 관심을 돌려 아주 지독한 장면들을 드로잉 했습니다. 흑연으로 열두 장의 대홍수 장면을 드로잉하면서 잉크와 수채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두세 페이지에 걸쳐서 몇 가지 끔찍한 장면들에 관해 적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무리를 지어 손에 무기를 들고 사자, 이리, 야수들로부터 은신처를 지키고 있다 … 오, 많은 사람들이 손으로 귀를 막고 비와 어둠을 가르는 천둥 섞인 무서운 바람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애쓴다! 더러 사람들은 눈을 감는 것으로도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어 손으로 다른 사람을 붙들고 신의 분노가 인류를 강타하는 무자비한 학살로부터 피하기를 원한다. … 그 밖의 사람들은 이성을 잃고 자살을 기도하며 그 같은 고통을 당하는 데 대해 절망한다.

레오나르도의 드로잉에는 동물들은 놀라서 서로를 짓밟아 죽이고, 새들은 날다 지쳐 사람들의 머리 위라도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하기를 바랍니다. 물은 더욱 범람하고, 사람들은 굶주림으로 서로를 약탈하고, 배들은 암초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고, 시체들이 해초처럼 여기저기 떠다닙니다. 산, 초목, 야수와 인간, 그 어느 것도 정신착란의 요소를 제어하지는 못합니다. 레오나르도가 대홍수의 참담한 상황을 묘사하게 된 건 멜치의 집에 거주하면서 바프리오의 아다 계곡의 놀라운 풍경을 그리다가 성서의 대홍수에 관련된 영감이 생겨 그리게 된 것입니다. 그는 성서를 과학적 논리로 해석하면서 급류의 맹위에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음을 지적했습니다. 노아의 방주조차 대홍수에 살아남지 못하고 인류가 모두 전멸하게 됨을 묘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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