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무드』 이야기: 인생의 세 친구


왕으로부터 소환장을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에겐 친구가 셋 있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그가 매우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고, 세상에 둘 도 없는 특별한 친구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친구 또한 그가 사랑하고 있었으나 첫 번째 친구만큼 소중하게 여기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 친구는 친구로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평소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던 친구였습니다.

왕의 소환장을 받은 그는 자기가 나쁜 짓을 저질러 왕으로부터 벌을 받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혼자 왕에게 나아가는 것이 두려워 그는 세 친구에게 차례로 함께 가자고 청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아무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싫다고 거절했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대궐 문 앞까지는 함께 가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곤란하다고 말했습니다. 세 번째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론 함께 가주고말고. 넌 아무 나쁜 짓도 저지르지 않았으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내가 왕에게 잘 말씀드려 줄게.

세 친구는 누구이며 왜 그렇게 대답할 걸까요? 첫 번째 친구는 재산을 말합니다. 아무리 재산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더라도 죽을 때에는 고스란히 남겨둔 채 혼자 떠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두 번째 친구는 친척을 말합니다. 무덤까지는 함께 따라 가주지만, 그를 무덤 속에 남겨둔 채 돌아가 버립니다. 세 번째 친구는 善行(선행)을 말합니다. 선행이란 평소에는 남의 눈길을 끌지 못하지만, 죽은 뒤까지도 그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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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율리우스 2세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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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노 부기아르디니(?)의 <터번을 쓴 미켈란젤로의 초상>, 패널에 유채, 49-36.4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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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노 부기아르디니의 <터번을 쓴 미켈란젤로의 초상>, 패널에 유채, 55.5-43.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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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첼로 베누스티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를 그릴 무렵의 미켈란젤로의 초상>, 1535년경


1512년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장식을 마친 미켈란젤로는 다시 조각에 전념했습니다. 1505년 그에게 무덤장식을 의뢰했던 율리우스가 1513년 2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율리우스는 두 추기경 로렌초 푸치와 식스투스 4세의 조카 레오나르도 로베레로 하여금 자신의 무덤이 제대로 완성되는지 지켜볼 것을 당부하면서 무덤에 사용할 돈 1만 두카트를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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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율리우스 2세의 무덤>, 1505-45, 빈콜리의 성 베드로 성당

위층 공간은 기존의 벽을 창의적으로 활용했지만 어수선하며 반월창 때문에 높이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평범한 대좌가 아래층을 필요한 높이까지 들어 올려 줍니다. 아래층에는 폰테시에베의 아름다운 부조가 1540년대에 사라진 장식문화를 보여주는 반면 위층은 매우 차분한 느낌을 줍니다. 벽기둥pilaster은 아래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모양이며, 이를 떠받치는 코니스는 앞으로 나아가면서 위쪽의 두 단을 분리합니다. 상당히 세련되고 지적인 디자인이지만, 아래층과의 부조화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상단의 인물은 라파엘로 다 몬텔루포와 그의 공방, 교황인물상은 토마소 보스콜리가 제작했습니다.


535사본

미켈란젤로의 <율리우스 2세 무덤을 위한 드로잉의 재구성 과정>, 1505


536사본

미켈란젤로의 <율리우스 2세 무덤을 위한 드로잉의 재구성 과정>, 1513


537사본

미켈란젤로의 <율리우스 2세 무덤을 위한 드로잉의 재구성 과정>, 1516


율리우스의 뒤를 이은 교황 레오 10세는 조각보다는 그림에 더 관심이 많았고, 그의 취향은 당시 율리우스를 위해 스탄차에 벽화를 그리고 있던 라파엘로의 그림이었습니다. 또한 레오는 미켈란젤로를 다루기 까다로운 인물로 생각했기 때문에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이 진행되는 데도 그에게 어떤 일감도 주지 않았습니다. 미켈란젤로는 계약을 맺은 이후 계속 작업을 연기해오던 율리우스의 무덤에 대해 1513년 5월 새로운 디자인으로 재계약을 맺었습니다. 원래 계획은 재건한 성 베드로 성당에 독자적인 구조의 무덤을 제작하기로 했지만 이를 무시하기로 했습니다. 대신 전통적인 방법인 벽무덤wall-tomb을 제작하고 조각의 수도 줄이기로 했습니다. 1513년부터 1516년 동안 그는 이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레오의 명으로 산 로렌초 성당 외관을 장식하고 메디치 예배당의 무덤을 의뢰받았기 때문에 이 작업은 또다시 연기되어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거대한 작업을 완성하지 못한 것을 자신의 명성에 흠이 되는 비극으로 여겼기 때문에 원래보다 훨씬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1545년 2월 무덤을 완성하고서야 계약에 대한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미켈란젤로는 최소한 여섯 개의 기념비적인 작업을 주문받았고, 최소한 네 차례에 걸쳐 계약을 맺었습니다. 또한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은 작품을 제작하는 데 서두르는 법이 없었으므로 많은 작품을 양산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율리우스의 무덤을 위해 제작한 세 점은 <모세>, <라헬>, <레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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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가모브Georgy Antonovich Gamov(1904~68)


천문학의 최고 대가는 에드윈 포웰 허블이었지만 그의 업적을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킨 사람은 러시아 태생의 미국 핵물리학자, 우주론학자 조지 가모브였습니다. 1904년 러시아의 오데사Odessa에서 태어난 가모브는 어린 시절에 교회에서 사용하는 성찬용 빵을 몰래 집으로 가져왔다가 삶의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훔쳐온 빵에 예수의 살점이 정말로 붙어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현미경까지 동원해 샅샅이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평범한 빵이었습니다. 가모브는 당시의 일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내 기억에 아마 그때부터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가모브는 레닌그라드 대학에 입학하여 우주가 팽창한다고 제안한 러시아의 수학자, 우주론학자 알렉산더 프리드만Alexander Friedmann(1888~1925)과 함께 얼마동안 연구했습니다. 1920년대에 가모브는 방사능붕괴가 일어나는 이유를 규명하여 러시아에서 첫 번째 성공을 거뒀습니다. 그 무렵 과학자들은 퀴리부인Marie Curie(남편은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이고 딸도 물리학자 이렌 졸리오 퀴리이다)의 연구 덕분에 우라늄원자가 알파선(헬륨원자의 핵)의 형태로 방사능을 방출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뉴턴 역학에 따르면 핵자들을 서로 단단하게 결합시키고 있는 핵력은 알파입자의 탈출을 방해하는 장애요인으로 작용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라늄은 방사능을 방출하는 걸까?

가모브는 1928년에 졸업한 뒤 독일 중부 라인 강변에 있는 괴팅겐Göttingen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방사능에 관한 양자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이 업적으로 그는 코펜하겐 이론물리연구소Copenhagen Institute of Theoretical Physics의 특별연구원이 되어 1928~29년에 이론핵물리에 관해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또한 원자핵물리에 물방울모형liquid drop model(1936년 닐스 보어Niels Bohr Henrik David(1885~1962)가 공식화한 원자핵모형으로 액체는 분자간의 상호작용이 기체와 고체의 중간 정도이고 표면장력surface tension(액체 표면이 늘어난 탄성막처럼 행동할 때 나타나는 성질)과 같은 효과를 가진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이를 원자핵에 적용시켜 원자핵 반응에 여러 특성을 설명)을 제시하여 핵융합과 분열에 관한 현대이론물리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항성fixed star 안에서의 열핵반응비율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가모브는 1932년에 아내와 함께 소력국적을 버리고 터키로 망명을 시도했다가 실패했습니다. 그 후 브뤼셀에서 개최된 물리학회에 참석한다는 명목으로 소련을 탈출하여 결국 망명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소련정부는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끝까지 그의 뒤를 추적했습니다. 그는 1934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워싱턴 DC에 있는 워싱턴 대학의 물리학과 교수가 되었고, 1936년에 그곳에서 헝가리 태생의 유대계 미국 물리학자 에드워드 텔러Edward Teller(1908~2003)와 함께 전자가 방출되는 핵붕괴과정인 β붕괴이론을 전개시켰습니다.

가모브는 어린이들을 위한 20여 권의 교양과학서적을 집필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현대물리학에 일대 혁명을 불러일으켰을 때도 이를 설명한 가모브의 책은 가장 쉽고 뛰어난 과학교양서로 전 세계 청소년소녀들에게 읽혔습니다. 가모브는 핵물리학과 우주론, 심지어 DNA(Deoxyribonucleic acid디옥시리보핵산)까지 연구하는 등 다방면에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 천재 중의 천재였습니다. 가모브는 1954년에 생화학 분야에도 관심을 두고 유전암호genetic code를 제안했습니다. 그 암호는 DNA의 기본성분인 3중 뉴클레오티드nucleotide(질소함유 유기염기, 5탄당, 인산 등이 결합하여 분자를 이루고 있는 유기화합물)의 발생순서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주장은 뒤이어 유전이론이 급속히 발전함에 따라 입증되었습니다.

가모브 그리고 콘던E.U. Condon, 거니R.W. Gurney는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원리 때문에 방사능붕괴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이를 가모-콘던-거니의 이론Theory of Gamov-Condon-Gurney이라고 합니다. 불확정성원리에 따르면 입자의 위치와 속도는 동시에 정확히 결정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방사능이 핵력에 의한 장애를 뚫고 밖으로 유출될 확률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물리학자들은 이 현상을 터널효과tunneling effect라 부릅니다. 오늘날 터널효과는 물리학의 핵심개념으로 각종 전자장비와 블랙홀 그리고 빅뱅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가모브는 터널효과를 설명하면서 벽과 창살로 둘러싸인 감옥에 갇힌 죄수를 예로 들었습니다. 죄수가 자신의 몸을 날려 담벼락에 계속해서 충격을 가한다면, 고전역학에서는 참으로 딱하고 한심한 죄수로 간주되겠지만, 양자의 세계에서는 이 미련한 행동으로 탈옥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즉 에너지는 작은 입자가 단단한 벽을 통과할 확률이 제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미시세계에서는 알파입자를 비롯한 소립자들이 엄청나게 큰 에너지로 벽을 두들기고 있기 때문에 이런 기적 같은 사건들이 수수로 발생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가모브가 이 업적으로 노벨상을 수상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모브는 1940년대에 신천지에 가까운 우주론으로 관심을 돌렸습니다. 가모브는 수십억 년 전에 빅뱅이 일어났음을 증명하는 화석을 찾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당시 학계의 분위기로 볼 때 이는 그다지 유망한 연구 분야가 아니었습니다. 그 무렵 우주론은 실험에 기초한 과학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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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죽음: 모두 나눠주고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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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는 1519년 4월 23일 67회 생일이 지난 며칠 후 증인 앞에서 유언을 작성했습니다. 루이 12세로부터 허가받은 성 크리스토포로에 있는 운하사용료 징수권과 루도비코로부터 받은 포도원의 절반을 충직한 하인 바티스타 데 빌라니스에게 유산으로 주었습니다. 살라이에게는 나머지 절반의 포도원과 자신이 살던 집을 유산으로 주었습니다. 하녀 마투린에게는 털이 달린 모직 외투와 현찰 2두카트를 남겼으며, 의붓 남동생들에게는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누오바에 예금되었던 돈을 남겼습니다. 자신의 유언집행자로 지목한 제자 멜치에게는 그 외의 재산을 남겼는데, 연금·개인 소장품·의상·책·기록, 그리고 초상화와 작품 제작에 사용하던 모든 기구들입니다. 살라이에게 남긴 유산은 비교적 적었는데, 살라이가 자신에 대한 배려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떠난 것으로 이해한 때문이거나 그에게는 이미 충분히 대우해주었기 때문에 유산을 많이 남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당시 살라이는 자신의 집을 건립할 정도로 재정적으로 넉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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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르 리촘메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임종>, 1827, 엔그레이빙

이 그림은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가 1818년에 그린 그림을 모사한 것입니다.


레오나르도는 유산에 대한 배분을 마지막 글로 남기고 1519년 5월 2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바사리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사망하기 전 몇 달 동안 앓았다고 합니다. 프랑수아가 그를 방문했고, 레오나르도는 겨우 몸을 추스러 침대에서 일어나 왕에게 자신의 병과 증세에 관해 설명했습니다. 그러다가 침묵과 함께 갑작스러운 경련을 일으키자 왕이 그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말로 위로하면서 고통을 덜어주려고 했습니다. 바사리는 그가 왕의 품에 안긴 채 영예로운 임종을 마쳤다고 적었습니다. 1850년 레옹 드 라보르드는 바사리의 기록에 의혹을 제기했는데, 프랑수아가 1519년 5월 3일 말을 타고 앙부아즈로부터 생 제르맹에 도착했으며, 이 거리는 이틀이나 걸리기 때문에 레오나르도의 임종에는 갈 수 없었다는 것으로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1856년에 아이메 샹폴리옹은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는 1519년 5월 3일의 왕의 행적에 관한 문서에 왕이 직접 서명한 것이 아니라 왕의 부재중 서기가 쓴 것임을 들어 바사리의 기록이 사실일 수 있음을 시사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유서에는 가톨릭으로 회귀했음이 언급되어 있고, 그는 자신의 영혼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복되신 성모 마리아, 성 미하엘, 그리고 천사와 천국의 모든 성인들에게 바친다고 적혀 있습니다. 유서의 첫 내용은 자신의 장례를 경건하게 치룰 것을 당부하는 것으로 앙부아즈의 산 플로렌탱 예배당에 매장할 것을 희망했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소원대로 이 예배당 신부들에 의해 성대하게 집전되었습니다. 자선금을 받은 60명의 가난한 남자들이 가는 초를 들고 장례식에 참여했고, 레오나르도를 위한 기도순서 때 열 개의 커다란 초에 불을 붙이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70개의 초는 나중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졌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는 기독교의 장점과 가톨릭 신자의 삶에 관해 면밀히 알게 된 후 수없이 울며 회개하고 과거의 죄를 뉘우쳤다.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없는 그는 친구와 하인들의 도움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성례전을 받아들였다.

바사리의 기록은 다분히 교훈적 의도로 쓰였기 때문에 그대로 믿기 어렵습니다. 과학적 사고를 가진 레오나르도는 상식적인 사고 그 이상을 믿지 않았으며, 사후의 세계가 있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음 자체를 ‘최고의 악 supreme evil’으로 믿었는데, 영혼이 몸을 떠나고 생이 마감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매장에 관해서 그리고 비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를 위한 비문을 쓴다면 30년 전 밀라노에서 그가 남긴 기록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됩니다.

하루를 잘 지내고 나면 달콤한 잠을 이룰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생을 잘 지내고 나면 복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레오나르도의 시신은 그의 희망대로 앙부아즈의 산 플로렌탱 예배당에 안장되었습니다. 매장증명서에는 같은 해 8월 12일에 매장식이 다시 거행된 것으로 적혀 있습니다. 1802년 황제 나폴레옹은 원로원 의원 한 명을 선임하여 앙부아즈의 기념물들에 대한 복구를 명령했는데, 당대의 약탈과 프랑스 혁명기의 만행으로 그곳이 황폐해졌기 때문입니다. 원로원 의원은 산 플로렌탱 예배당은 놀랄 정도로 파괴되어 보존 가치가 없어 보인다고 보고했습니다. 묘비들이 나동그라져 있었고, 무덤은 파헤쳐진 상태이며, 폐허가 된 터에서 아이들이 무덤 밖으로 파헤쳐져 나온 뼈를 갖고 놀 정도였습니다. 누구도 레오나르도의 무덤이 어느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이 갖고 놀던 뼈가 레오나르도의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1863년 시인 아르세느 우사에는 산 플로렌탱 예배당이 세워졌던 곳을 발굴해 하나의 완전한 골격을 발견했는데, 흥미롭게도 팔이 굽었고 해골이 한 손 위에 얹힌 상태였습니다. 시신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묘석 파편들이 있었고 불완전한 글이지만 ‘레오나르도스 빈치우스 EO DUS VINS(Leonardus Vincius)’라고 짐작할 수 있게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시인은 해골이 보통 것들에 비해 크다고 적으며, 지성인의 것으로 레오나르도의 것이란 심증을 가졌습니다. 이 뼈는 성 내의 산 위베르 예배당에 안치되었고 사람들은 이 뼈가 레오나르도의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지만 묘석의 파편은 현존하지 않습니다.

멜치는 레오나르도가 타계한 뒤 곧바로 이탈리아로 돌아가지 않고 1519년 8월 20일에도 스승이 머물던 앙부아즈에 남아 있었으며, 레오나르도가 프랑스로 가져온 그림들을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에게 바친 것 같습니다. 멜치는 1520년 혹은 그 이듬해 이탈리아로 귀국하면서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스승의 노트와 모든 드로잉, 사용했던 용품과 도구들을 갖고 왔습니다. 1523년 롬바르디아로 돌아온 멜치는 바프리오 저택의 방 하나에 스승의 노트를 전시하여 방문객들이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페라라 공작의 외교사절 알퐁소 베네데토는 공작에게 레오나르도가 기록한 “해부학에 관한 책과 그 밖의 많은 훌륭한 것들을 멜치가 소유하고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바사리, 로마조, 루이니 등은 멜치가 보관한 것들을 통해 레오나르도의 활약을 알 수 있었습니다. 멜치는 스승의 노트를 분류하고 두 명의 필기사를 고용해 일부만 필사하여 출간했습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의 미완성 기록은 어찌 된 일인지 이름을 알 수 없는 밀라노 예술가가 소유하다가 우르비노 공작의 손을 거쳐 최종적으로 바티칸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멜치는 1570년에 타계했는데, 그의 아들 오라지오는 레오나르도에 대한 존경심이 없어 아버지가 전시해놓은 노트를 다락방 커다란 상자 안에 집어넣었습니다. 오라지오의 가정교사 렐리오 가바르디는 열세 권의 분량에 달하는 레오나르도의 노트를 입수하여 토스카나 공작에게 바쳤지만, 산 바나바 수도원의 밀라노인 수도승은 노트를 회수하여 멜치 가문이 이를 보관하기를 희망했습니다. 하지만 멜치 가는 노트가 너무 많으므로 그 정도는 공작이 가져도 무방하다고 응답했습니다. 멜치 가문은 레오나르도 노트의 중요성을 모르고 제대로 보관하지 않아 결국 19세기 말까지 이 노트들은 거래의 대상이 되었으며, 여러 나라 여러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일부 손실된 상태로 현존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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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 이야기: 가장 안전한 재산


어느 배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배에 탄 승객들은 한결같이 부자들이었고, 그 속에 가난한 랍비가 끼어있었습니다. 부자 승객들은 서로를 비교해 가며 자신들이 가진 재산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랍비가 말했습니다.

전 제 자신이 누구 못지않게 큰 부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제 재산을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릴 수가 없어 유감입니다.

얼마 후, 해적들이 출현하여 배를 습격했습니다. 부자임을 자랑하던 그들은 금은보화를 비롯한 전 재산을 해적들에게 약탈당했습니다. 해적들이 물러가고, 배가 가까스로 항구에 닿았습니다. 랍비는 곧 항구 사람들로부터 높은 지식과 교양을 인정받게 되었으며, 학교에서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랍비와 함께 배를 타고 온 부자들은 모두 비참한 가난뱅이로 전락하여 어려운 생활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랍비에게 말했습니다.

랍비님 말씀이 옳았습니다. 지식을 소유한 사람은 재물보다 더 귀한 모든 걸 소유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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