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의 죽음: 모두 나눠주고 떠나다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1519년 4월 23일 67회 생일이 지난 며칠 후 증인 앞에서 유언을 작성했습니다. 루이 12세로부터 허가받은 성 크리스토포로에 있는 운하사용료 징수권과 루도비코로부터 받은 포도원의 절반을 충직한 하인 바티스타 데 빌라니스에게 유산으로 주었습니다. 살라이에게는 나머지 절반의 포도원과 자신이 살던 집을 유산으로 주었습니다. 하녀 마투린에게는 털이 달린 모직 외투와 현찰 2두카트를 남겼으며, 의붓 남동생들에게는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누오바에 예금되었던 돈을 남겼습니다. 자신의 유언집행자로 지목한 제자 멜치에게는 그 외의 재산을 남겼는데, 연금·개인 소장품·의상·책·기록, 그리고 초상화와 작품 제작에 사용하던 모든 기구들입니다. 살라이에게 남긴 유산은 비교적 적었는데, 살라이가 자신에 대한 배려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떠난 것으로 이해한 때문이거나 그에게는 이미 충분히 대우해주었기 때문에 유산을 많이 남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당시 살라이는 자신의 집을 건립할 정도로 재정적으로 넉넉했습니다.
524-1
테오도르 리촘메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임종>, 1827, 엔그레이빙
이 그림은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가 1818년에 그린 그림을 모사한 것입니다.
레오나르도는 유산에 대한 배분을 마지막 글로 남기고 1519년 5월 2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바사리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사망하기 전 몇 달 동안 앓았다고 합니다. 프랑수아가 그를 방문했고, 레오나르도는 겨우 몸을 추스러 침대에서 일어나 왕에게 자신의 병과 증세에 관해 설명했습니다. 그러다가 침묵과 함께 갑작스러운 경련을 일으키자 왕이 그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말로 위로하면서 고통을 덜어주려고 했습니다. 바사리는 그가 왕의 품에 안긴 채 영예로운 임종을 마쳤다고 적었습니다. 1850년 레옹 드 라보르드는 바사리의 기록에 의혹을 제기했는데, 프랑수아가 1519년 5월 3일 말을 타고 앙부아즈로부터 생 제르맹에 도착했으며, 이 거리는 이틀이나 걸리기 때문에 레오나르도의 임종에는 갈 수 없었다는 것으로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1856년에 아이메 샹폴리옹은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는 1519년 5월 3일의 왕의 행적에 관한 문서에 왕이 직접 서명한 것이 아니라 왕의 부재중 서기가 쓴 것임을 들어 바사리의 기록이 사실일 수 있음을 시사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유서에는 가톨릭으로 회귀했음이 언급되어 있고, 그는 자신의 영혼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복되신 성모 마리아, 성 미하엘, 그리고 천사와 천국의 모든 성인들에게 바친다고 적혀 있습니다. 유서의 첫 내용은 자신의 장례를 경건하게 치룰 것을 당부하는 것으로 앙부아즈의 산 플로렌탱 예배당에 매장할 것을 희망했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소원대로 이 예배당 신부들에 의해 성대하게 집전되었습니다. 자선금을 받은 60명의 가난한 남자들이 가는 초를 들고 장례식에 참여했고, 레오나르도를 위한 기도순서 때 열 개의 커다란 초에 불을 붙이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70개의 초는 나중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졌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는 기독교의 장점과 가톨릭 신자의 삶에 관해 면밀히 알게 된 후 수없이 울며 회개하고 과거의 죄를 뉘우쳤다.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없는 그는 친구와 하인들의 도움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성례전을 받아들였다.”
바사리의 기록은 다분히 교훈적 의도로 쓰였기 때문에 그대로 믿기 어렵습니다. 과학적 사고를 가진 레오나르도는 상식적인 사고 그 이상을 믿지 않았으며, 사후의 세계가 있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음 자체를 ‘최고의 악 supreme evil’으로 믿었는데, 영혼이 몸을 떠나고 생이 마감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매장에 관해서 그리고 비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를 위한 비문을 쓴다면 30년 전 밀라노에서 그가 남긴 기록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됩니다.
“하루를 잘 지내고 나면 달콤한 잠을 이룰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생을 잘 지내고 나면 복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레오나르도의 시신은 그의 희망대로 앙부아즈의 산 플로렌탱 예배당에 안장되었습니다. 매장증명서에는 같은 해 8월 12일에 매장식이 다시 거행된 것으로 적혀 있습니다. 1802년 황제 나폴레옹은 원로원 의원 한 명을 선임하여 앙부아즈의 기념물들에 대한 복구를 명령했는데, 당대의 약탈과 프랑스 혁명기의 만행으로 그곳이 황폐해졌기 때문입니다. 원로원 의원은 산 플로렌탱 예배당은 놀랄 정도로 파괴되어 보존 가치가 없어 보인다고 보고했습니다. 묘비들이 나동그라져 있었고, 무덤은 파헤쳐진 상태이며, 폐허가 된 터에서 아이들이 무덤 밖으로 파헤쳐져 나온 뼈를 갖고 놀 정도였습니다. 누구도 레오나르도의 무덤이 어느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이 갖고 놀던 뼈가 레오나르도의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1863년 시인 아르세느 우사에는 산 플로렌탱 예배당이 세워졌던 곳을 발굴해 하나의 완전한 골격을 발견했는데, 흥미롭게도 팔이 굽었고 해골이 한 손 위에 얹힌 상태였습니다. 시신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묘석 파편들이 있었고 불완전한 글이지만 ‘레오나르도스 빈치우스 EO DUS VINS(Leonardus Vincius)’라고 짐작할 수 있게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시인은 해골이 보통 것들에 비해 크다고 적으며, 지성인의 것으로 레오나르도의 것이란 심증을 가졌습니다. 이 뼈는 성 내의 산 위베르 예배당에 안치되었고 사람들은 이 뼈가 레오나르도의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지만 묘석의 파편은 현존하지 않습니다.
멜치는 레오나르도가 타계한 뒤 곧바로 이탈리아로 돌아가지 않고 1519년 8월 20일에도 스승이 머물던 앙부아즈에 남아 있었으며, 레오나르도가 프랑스로 가져온 그림들을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에게 바친 것 같습니다. 멜치는 1520년 혹은 그 이듬해 이탈리아로 귀국하면서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스승의 노트와 모든 드로잉, 사용했던 용품과 도구들을 갖고 왔습니다. 1523년 롬바르디아로 돌아온 멜치는 바프리오 저택의 방 하나에 스승의 노트를 전시하여 방문객들이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페라라 공작의 외교사절 알퐁소 베네데토는 공작에게 레오나르도가 기록한 “해부학에 관한 책과 그 밖의 많은 훌륭한 것들을 멜치가 소유하고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바사리, 로마조, 루이니 등은 멜치가 보관한 것들을 통해 레오나르도의 활약을 알 수 있었습니다. 멜치는 스승의 노트를 분류하고 두 명의 필기사를 고용해 일부만 필사하여 출간했습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의 미완성 기록은 어찌 된 일인지 이름을 알 수 없는 밀라노 예술가가 소유하다가 우르비노 공작의 손을 거쳐 최종적으로 바티칸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멜치는 1570년에 타계했는데, 그의 아들 오라지오는 레오나르도에 대한 존경심이 없어 아버지가 전시해놓은 노트를 다락방 커다란 상자 안에 집어넣었습니다. 오라지오의 가정교사 렐리오 가바르디는 열세 권의 분량에 달하는 레오나르도의 노트를 입수하여 토스카나 공작에게 바쳤지만, 산 바나바 수도원의 밀라노인 수도승은 노트를 회수하여 멜치 가문이 이를 보관하기를 희망했습니다. 하지만 멜치 가는 노트가 너무 많으므로 그 정도는 공작이 가져도 무방하다고 응답했습니다. 멜치 가문은 레오나르도 노트의 중요성을 모르고 제대로 보관하지 않아 결국 19세기 말까지 이 노트들은 거래의 대상이 되었으며, 여러 나라 여러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일부 손실된 상태로 현존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