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무드』 이야기: 기부금을 분배하는 방법


랍비. 신부, 목사 세 사람이 모금한 기부금을 어떻게 배분하는가에 관해 서로의 방법을 물었습니다. 기부금의 일부는 자선사업에 쓰이고, 일부는 랍비. 신부, 목사 세 사람의 생활비에 충당됩니다.

먼저 신부가 말했습니다.

전 땅에 둥근 원을 그려놓고 기부금을 모두 허공에 던집니다. 원 밖에 떨어진 돈은 자선사업에 사용하고 원 안에 떨어진 돈을 생활비로 저축합니다.

목사가 맞장구를 쳤습니다.

저도 비슷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전 땅에 긴 선을 하나 그어놓습니다. 기부금을 모두 허공에 던져서 왼쪽에 떨어지는 돈은 자선사업에 사용하고 오른쪽에 떨어지는 돈을 생활비로 저축합니다.

목사의 말에 신부가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두 사람이 랍비에게 그의 방법을 물었습니다. 랍비가 대답했습니다.

저 역시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기부금 모두를 허공을 향해 던집니다. 그렇게 하면 필요하신 돈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취하시고, 제게 주시는 딸에 떨어드리는 돈을 모두 생활비로 저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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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통해 배우는 삶의 지혜
서문: 미술에서 길을 찾다 2

 

 

 

 

이솝은 행운의 여신의 도움을 받은 한 남자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행운의 여신은 보통 누구에게나 행운을 가져다주지만, 행운을 붙잡고 못 붙잡고는 그 사람에게 달려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행운을 알아보지 못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 그 이상, 쓸데없이 참견하지 않는 것이, 행운의 여신의 기본 방식인데, 다만, 여신은 자비로운 성격이어서, 행운을 가지고 와서 몰래 옆에 두고만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제대로 행운을 거머쥘 수 있도록, 때론, 일부러 눈에 띄기 쉬운 곳에, 행운을 놓고 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어찌된 셈인지, 행운의 여신이 아무리 알기 쉬운 장소에 행운을 두어도, 그 행운의 존재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신도 바쁜 몸인지라 여간해서는 그렇게 몇 번씩 특정한 사람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일이 없지만, 그래도 이 남자의 경우는, 행운에 대한 주의력이 너무 없어서, 여신도 그만 화가 나서 몇 번이고 행운을 남자에게 가지고 가서 손을 뻗으면 금방 닿을 곳에 두었는데, 이 남자는 왠지, 자신만을 위해 준비된 그 행운을 일부러 요리조리 피하듯이 놓쳐버리고 맙니다. 그런데도 그는 입만 열면, 행운의 여신은 어째서 나만 빼놓고 다니느냐고 불평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한 행운의 여신은 그 귀한 행운을 남자가 손에 넣을 수 있도록, 이 남자의 삶 자체에, 아주 조금만 손을 대기로 했습니다. 물론 그건 여신의 영역을 넘어서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신은 이 남자를 보고 있으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가 무슨 일을 해도 잘 안 되는 건, 그가 불성실해서도, 그에게 장점이 없어서도, 바보여서도 아니라, 그저 행운을 찾는 방법, 붙드는 방법을 너무 모르기 때문이야. 그것을 조금만 알면, 이 남자의 인생은 절로 열릴 텐데.’

그래서 여신은, 도무지 주의력이 산만하여 주위를 잘 살펴보지 않고 남의 말도 귀담아 듣지 않는 이 남자에게, 아주 조금만,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습관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여신은, 성격이 조급하여, 머리에 뭐가 떠올랐다 하면 두 번 다시 생각하지 않고 이내 행동해버리는 이 남자에게, 아주 조금만, 그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 한순간만 생각해보는 습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말하는 이 남자에게, 아주 조금만, 정말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 자신에게 묻는 습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자칫하면 사물의 나쁜 면만 보고 걱정하는 남자에게, 아주 조금만, 모든 사물에 숨어있는 가능성을 보고, 그것을 향해 돌진하는 용기 같은 걸 주었습니다. 요컨대 이 남자가 사회와 사람 그리고 자기 자신을 대하는 방법에, 아주 조금 변화를 준 것입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이 남자의 행동에 그 나름대로 미덕이 갖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과 동시에. 적극성과 침착성, 그리고 좋은 의미에서의 계산 같은 것이 몸에 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되자, 저절로 행운을 찾는 방법도 알게 된 것인지 하는 일도 점점 잘 풀려나갔습니다. 조금씩 성공을 거두게 된 남자는, 과감하게 무역을 시작했습니다. 맨 처음, 아시아에서 들여온 후추가 비싼 값에 팔려 그 돈으로 밀가루를 사서 북국으로 가지고 갔더니, 마침 그 지방에 기근이 들어 밀가루도 비싼 값에 팔렸습니다. 그 돈으로 털실을 사니, 이번에는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 와서 독점한 털실이 비싼 가격으로 날개 돋친 듯이 팔렸습니다. 남자가 노리는 건 모조리 적중했고, 순풍에 돛단 듯이 무슨 일을 해도 잘 되자, 남자는 그 성공에, 행운의 여신이 깊이 관여하고 있는 줄 꿈에도 모르고, 모든 것이 자신의 지능지수에 의한 결과이며, 이제 장사 요령을 배운 자신에게는 무서운 것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생일대의 도박에 나선 결과, 폭풍으로 배가 난파하여 한순간에 모든 재산을 날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비로소 여신은, 중요한 지혜를 하나 더, 남자에게 주는 걸 깜빡 잊은 걸 깨달았지만, 이내, “뭐, 상관없어, 이번 일로 그것도 배웠을 테니까” 이렇게 중얼거린 뒤, 행운의 수레바퀴를 굴리며, 누군가에게 새로운 행운을 주기 위해 다시 출발했습니다.

지능검사를 통해 측정되는 소위 지능지수IQ는 지성적 지능을 말합니다. 지성적 지능은 다중지능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다중지능의 매우 중요한 능력이 내면적 지능으로 이는 수양을 통해 마음속에서 자라는 능력, 곧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내면적 지능은 감정으로 가는 통로로서 곧 감성적 지능입니다. 감성적 지능은 마음이 지닌 힘과 능력으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감정이입 능력과 그들을 배려하고 그들과 협동하고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해나갈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예의, 책임감, 주의력, 자제력 등이 감성적 지능에 속합니다. 감성적 지능을 측정하는 것이 감성지수EQ입니다.

감성지수EQ는 마음의 수양을 통해 행운을 알아보는 능력입니다. 지능지수IQ가 아무리 높아도 자신의 격정과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면, “자신에게는 무서운 것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게” 되어 “한순간에 모든 재산을 날리고” 만 이솝의 남자가 될 것입니다. 지능지수IQ는 지식의 습득을 통해 계발할 수 있지만, 감성지수EQ는 감정을 순화하고 논리와 이성을 뛰어넘어 대상을 직접적으로 인지하는 직관을 성립시키는 것입니다.

직관은 삶의 본질을 파악하게 해주는 지혜입니다. 직관을 ‘내면의 소리’ 혹은 ‘영혼의 소리’라고 하는데, 지혜를 주어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오류를 범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아와 직관을 혼동한 것입니다. 자아와 직관을 구별하기란 쉽지 않은데,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구별하는 데 더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들은 직관을 사고능력인 오성과 혼동합니다. 논리적 사고에 의존하는 자아가 우위를 점하면 삶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논리적 사고의 중요성은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치닫지 않게 해주고, 현실감을 잃지 않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직관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지나치게 논리적이 되면 삶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헤르만 헤세는 말했습니다. “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지혜를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지혜는 찾아낼 수 있고, 그것에 따라 살아가며, 그것을 힘으로 사용하고, 그것으로 기적을 행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입 밖에 내어 말하고 남에게 가르칠 수는 없다.” 지혜를 가르칠 수는 없지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지혜인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늘 관찰하고 반성하는 것, 용기와 확신으로 근심과 두려움을 제압하는 것, 자신의 분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 화, 흥분, 일중독, 스트레스를 멀리하는 것은 지혜입니다.

감정을 순화하고 직관을 성립시키는 훈련은 예술을 이해하는 가운데 가능합니다. 예술은 삶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인류의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본질은 지성적 지능으로는 파악되지 않지만, 예술을 통해 감정을 순화하는 가운데 직관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소개하는 예술가들의 삶과 그들의 작품을 통해 독자는 감성적 지능이 매우 높은 사람들의 다채로운 삶과 삶에 대한 그들의 수준 높은 표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부와 명성을 추구하기 위해 정치에 참여하여 정치적 선전 그림을 그린 예술가도 있으며, 자만심에 가득 차서 교활하고 비열해진 예술가도 있고,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하지 못하고 사회를 등진 예술가도 있으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정신분열을 일으킨 예술가도 있고, 절망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예술가도 있으며, 평생 여성을 두려워하여 독신으로 고독한 삶을 산 예술가도 있고,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여 감정이입 능력을 고양시킨 예술가도 있습니다. 그들의 작품에는 그들의 사고, 의도, 감정 그리고 모든 감각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작품을 제작할 때에 플로우경험을 맛보았습니다. 그들 삶의 다양성과 작품의 다양성에서 부분적으로 공감이 생긴다면 감성적 지능을 계발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삶의 본질을 파악하는 직관이 절로 생길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해서 독자는 미술의 아마추어amateur 혹은 딜레탕트dilettante가 되길 바랍니다. 아마추어는 라틴어의 아마레amare, 즉 ‘사랑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한 말로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와 유사하게 딜레탕트도 ‘~에서 즐거워하다’라는 라틴어 델렉따레delectare가 어원으로 특정 활동을 즐기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두 단어의 본래의 뜻은 성취보다는 경험에 좀 더 비중을 두는 것이었으며, 얼마나 많은 성취를 하는가보다는 어떤 일을 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주관적 보상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두 단어만큼 경험 자체의 소중함에 대한 우리의 태도 변화를 극명하게 나타내주는 건 없습니다.

춘추전국시대 송나라 사람 莊子(장자)가 말한 逍遙遊(소요유)에서 遊(유)는 유람하다wandering(or flowing)는 뜻입니다. 소요유는 자유롭게 이리저리 유람한다는 말입니다. 장자는 유가 올바른 삶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외적 보상에 연연해하지 않고 자발적이며, 완전한 헌신의 삶, 즉 완전한 자기 목적적인 경험을 의미합니다. 아마추어와 딜레탕트가 바로 이런 자기 목적적인 경험, 즉 플로우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능동적이지 않고 수동적일 때 대중적인 여가, 대중문화, 심지어 고급문화까지도 우리의 정신을 좀먹는 기생충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심리적 에너지만을 흡수할 뿐이며, 그 대가로 어떤 실재적인 힘도 제공해주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전보다 더욱 지치고 의기소침하게 만들어줄 뿐입니다.

경험의 질을 통제할 능력이 있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주의력을 조직해줄 만한 외적 요구 없이 혼자 있는 상황에서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가의 여부입니다. 여가를 혼자 있는 좋은 기회로 활용하여 독서를 하는 것은 매우 유익하며, 내면의 통합뿐 아니라 세상과도 더욱 일치되는 느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이 독자에게 화가들의 다양한 삶과 작품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켜 그들의 세상과 일치되는 느낌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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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짧은 인생을 산 자는 좀 더 용서받을 수 있는 희망이 있다”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633

미켈란젤로의 <부활을 위한 드로잉>, 1512, 36-22cm.


635

미켈란젤로의 <부활을 위한 드로잉>, 1525/30, 24-34.5cm.


636

루카 시뇨렐리의 <최후의 심판: 저주받은 자들>, 1500-04, 프레스코, 오르비예토 대성당


메디치 가의 두 번째 교황 클레멘트 7세가 사망하기 이틀 전 1534년 9월 23일 미켈란젤로는 로마로 갔습니다. 새로 선출된 교황 바오로 3세가 그를 바티칸의 공식 조각가, 화가, 그리고 건축가로 임명했기 때문입니다. 미켈란젤로는 1533년에 시스티나 예배당 제단 뒤의 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리기로 계약했고, 1536년 5월에 그것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계약 후 바로 작업이 시행되지 않은 건 기존의 프레스코의 회반죽을 제거하고 창문도 부수어 공간을 확보하는 문제와 바오로 3세의 즉위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미켈란젤로는 단테의 저서에서 영감을 받아 <최후의 심판>을 그리면서 부활의 시기에 자신도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의 시에서 죽음은 고딕의 냉혹한 수확자가 낫으로 건초를 자르듯 인간을 잘라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루를 더 산다는 것은 구원에서 더 멀어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짧은 인생을 산 자는 좀 더 용서받을 수 있는 희망이 있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최후의 심판>에서 자신을 성 바르톨로메오St. Bartholomew에 의해 성난 구세주의 발아래 지옥으로 던져지는 죄인의 모습으로 묘사하게 만들었고, 그의 시에서도 표현되었습니다.

나의 허물을 당신의 순결한 귀로 듣지 마소서

나를 향해 당신의 의로운 팔을 들지 마소서

주여, 최후의 순간에 당신의 관대한 팔을 나를 향해 내미소서.

미켈란젤로는 어려서부터 종교적 자극에 매우 민감했습니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운명은 미켈란젤로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는데, 사보나롤라는 피렌체에서 교회의 부패와 메디치 가의 전제에 반대해서 종교개혁과 신정체제를 시도하다 이단자로 몰려 화형당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한평생 세상사에 거리를 두고 지낸 건 바로 이런 경험 때문임이 틀림없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그의 신앙심은 더욱 깊어져 더 열광적, 비타협적, 독단적이 되었고, 결국에는 영혼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어, 그가 지녔던 르네상스의 이상을 축출하고 자신의 모든 창작활동의 의의와 가치에 대해서가지도 회의를 품게 만들었습니다.


639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1536-41, 프레스코, 시스티나 예배당


639-1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위한 첫 번재 드로잉>, 1534년경, 41.8-28.8cm.


<최후의 심판>은 분명히 미켈란젤로 자신의 영혼 구원을 위한 자신의 관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 작품은 더 이상 완성과 힘 그리고 젊음의 기년비가 아니라 곤혹과 절망의 표현이며, 갑자기 모든 걸 집어삼키려는 혼돈으로부터 구원을 갈구하는 심약한 영혼의 부르짖음입니다. 이 작품은 세상과의 관계가 편치 않아 안정감을 상실한, 세상과는 직접 대면할 수 없는 사람의 것입니다. 이때부터 그는 물리적 세계의 가시적 미를 직접적으로 표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그릴 때만 해도 물리적 세계에서 아름다운 인체라고 생각되는 형상을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에서는 그가 목적하는 바가 달라졌습니다. 이 작품에서 그의 누드는 두텁고 우아함이 결여되어 있으며, 무겁고 무기력해보이며, 더 이상 물질적인 미를 그 자체로 추구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물리적인 미를 관념을 전달하는 수단 혹은 정신 상태를 드러내 보이는 수단으로만 사용했습니다. 실제의 공간이나 원근법, 그리고 전형적인 비례조차 무시된 이 작품은 라파엘로의 작품을 좋아한 사람들이 보고 질겁할 만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1530년대와 1540년대 초에 쓴 시에는 미와 사랑에 관한 사고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물질적인 미는 일시적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사랑은 완전한 만족감을 주지 못하며, 정신에 대한 사랑보다 품위가 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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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통해 배우는 삶의 지혜

서문: 미술에서 길을 찾다

 

 

 

 

중, 장년기에 접어든 사람이 어느 날 “이것이 내가 꿈꾸어온 나의 인생의 전부란 말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아동기와 청소년기는 힘들고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고비를 하나씩 넘길 때마다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미래가 보장될 것이라고 믿었는데, 어느 날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실의에 빠지게 됩니다. 흰머리가 부쩍 늘고, 조금씩 불어나던 체중이 이젠 쉽게 줄어들 것 같지 않으며, 눈은 침침해지고, 몸 여기저기서 이상증세가 나타나는 걸 느낍니다. 거울이 말합니다. “자, 이제 네 역할은 끝났어. 무대에서 내려가 노후나 준비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직은 아냐, 아직 해야 할이 남았어, 정작 하고 싶은 일은 시작도 못 했는걸. 돈도 더 벌어야 하고 그 돈으로 과거를 보상을 받아야 해” 하고 강변하지만 목소리에 힘이 없습니다.

억울하다는 느낌이 현실을 직시하는 순간 절로 엄습해옵니다. 축복의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젊었을 때의 생각이 떨쳐지지 않습니다.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더 많은 돈, 권력, 지위, 물질의 소유를 통해 행복하기 위해 새로운 노력을 경주합니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행복을 위해 보신하든가, 헬스클럽에 가입하든가, 에어로빅이나 요가를 배우든가, 찜질방에 자주 갑니다. 여성의 경우 성형수술을 할 것입니다. 자신이 소외되었다고 생각되면 사회에 더욱 잘 적응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처세와 자기 계발에 관한 책을 사서 읽거나 그런 것들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에 가입합니다. 그러나 이런 해결책이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걸 곧 깨닫게 되는데, 사회에 잘 적응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기 위해 노력하다보면 정작 행복의 구성원들인 배우자와 가족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노력이 무용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교외에 전원주택을 장만하여 세상을 멀리하기 시작합니다. 조그만 정원을 가꾸면서 자위의 삶을 선택합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해외로 여행을 가고, 고급식당에 가서 맛난 음식을 즐기며, 음악회에 가고 미술품을 수집하는 등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취미생활을 합니다. 술과 도박 심지어 마약에 빠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상을 멀리한 채 무절제한 쾌락을 추구하고 값비싼 여가생활을 한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건 물론 아닙니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에서 매일 저녁 홀로 만찬을 즐기면서 금, 은그릇에 담긴 40종의 요리를 골라 먹었습니다. 한 끼 식사를 준비하는 데 무려 498명이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그와 비교하면 우리는 엄청나게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먹을거리를 장만하기 위해 가는 슈퍼마켓에는 루이 14세가 맛보지 못한 음식들로 즐비합니다. 전속요리사가 없어도 우리는 식당에 가서 이탈리아식, 중국식, 일본식, 프랑스식, 미국식, 인도식, 태국식, 페루식 등 골라 먹을 수 있습니다. 숙련된 요리사들이 우리를 위해 만찬을 준비할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전속재단사가 없지만 언제든지 맵시 있는 옷을 구입할 수 있고, 자가용 비행기가 없지만 저가 항공노선 표를 사면 숙련된 조종사가 루이 14세가 꿈도 꾸지 못했던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주며, 양초 심지를 조절해줄 하인은 없지만 전등 스위치만 켜면 곧바로 밝은 빛이 들어오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하인이 없지만 휴대전화가 있으며, TV 채널을 돌리기만 하면 우릴 위해 준비된 많은 소식을 접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는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지식이 넘쳐납니다.

한국인의 수명은 1955년에 비해 26년이 늘었고, 연간 소득이 열다섯 배로 늘었습니다. 부자는 더 부유해졌고, 가난한 사람들의 형편도 그보다 더 큰 비율로 좋아졌습니다. 과거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는 그들이 꿈도 꿀 수 없던 물질의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건 무슨 까닭일까?

19세기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스스로에게 지금 행복하냐고 묻는 순간 행복은 달아난다”고 했습니다. 행복은 생애 순간순간 충분히 몰입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밀은 “인간 사고방식에 근본적 개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삶의 질적 향상은 기대하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행복이 사고방식에 달린 문제라는 것입니다. 행복은 일상의 경험을 어떻게 취사선택하고 해석하는가 하는 태도에 달린 것입니다. 태도, 즉 애티튜드attitude는 라틴어 앱투스aptus에서 온 말로 ‘준비’, ‘적응’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행복에 준비, 적응하는 태도를 길러야 합니다.

중, 장년기에 접어든 사람들의 일상은 일주일에 40시간가량 직장에서 보내면서 시작되는데, 30시간 일하고, 나머지 10시간은 동료들과 잡담하거나 공상하며 일과 무관한 짓으로 소비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여가 20시간 가운데 TV를 시청하는 데 7시간, 신문과 잡지를 포함하여 독서에 3시간, 운동을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데 2시간, 가족과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 7시간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하루 평균 8시간 수면을 취하면, 깨어있는 일주일의 나머지 시간은 50시간 남짓인데, 식사, 운전, 쇼핑, 요리, 빨래, 물건정리, 사우나, 허공 쳐다보기 등으로 다 써버립니다.

우리 시대의 모순 가운데 하나는 여가가 충분한 데도 불구하고 그 시간을 행복한 시간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과거 사람들에 비해 우리에게는 행복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훨씬 많지만, 조상들보다 더 삶을 즐긴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이는 기회로는 충분하지 않고 기회를 이용하는 준비, 적응의 상태가 요구되는 걸 말해줍니다. 행복을 느끼는 충분한 몰입이 요구됩니다. 주의attention을 집중하여 몰입할 때 행복하다는 느낌이 생기는 것입니다.

태도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것이 심리적 무질서로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심리적 엔트로피psychic entropy라고 합니다. 심리적 엔트로피의 반대가 최적경험optimal experience으로 의식이 질서 있게 구성되고 주의를 목표를 위해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이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가는 느낌” 또는 “물 흐르는flow 것처럼 평안한 느낌”이라고 말한 데서 플로우경험flow experience이라고도 합니다. 플로우는 심리적 엔트로피의 정반대이므로 반대란 말을 앞에 붙여서 네겐트로피negentropy라고도 합니다. 플로우경험 혹은 최적경험을 한 사람은 심리적 에너지가 스스로 선택한 목표의 성공적 수행을 위해 대부분 사용되기 때문에 더욱 강하고 자신에 찬 자아를 형성하게 됩니다.

심리학에서는 플로우경험이 자아를 복합적으로 발전하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복합적이란 분화와 통합이란 두 가지 심리과정을 거쳤다는 말입니다. 분화는 자신이 유일하고 고유한 존재라는 생각으로 나아가려는 움직임, 또한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경향을 말합니다. 통합은 그 반대의 경우로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아이디어들과 합하려는 경향입니다. 복합적 자아는 두 가지 경향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자아를 말하며, 지나치게 이기적이거나 순응적이지 않을 때 자아가 복합적으로 발전합니다.

플로우경험은 사고, 의도, 감정 그리고 모든 감각이 하나의 목적에 집중되는 것으로 이런 경험을 하고 나면 내면의 통합뿐 아니라 세상과도 더욱 일치되는 느낌이 생깁니다. 이러한 경험이 중요한 이유는 행복하다는 느낌을 제공하고 자신감을 향상시키기 때문입니다. 행복이란 기대했던 것을 성취하거나 욕구를 충족했을 때 생기는 감정입니다. 기대하지 못했던, 혹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을 성취했을 때에도 행복한 감정이 생깁니다. 막상 일이 벌어지는 순간에는 느끼지 못하지만 나중에 회상할 때 그것이 행복이라고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변했다는 걸 깨닫게 되고, 복합적으로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육을 많이 받았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성 혹은 영혼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지능intelligence, 혹은 지성intellect을 우리는 추상적 사고, 이해, 기억, 그리고 창의력과 관련된 능력으로 규정합니다. 이러한 능력을 계발한 사람을 엘리트라고 합니다. 독일의 소설가 헤르만 헤세는 “우리는 놀라울 만큼 지성을 계발하고도 자기 영혼을 지배하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많은 엘리트들이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건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삶의 본질을 파악하는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고방식에 개혁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는 지능이나 지성을 계발해서 얻을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니므로 행운입니다.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 운이 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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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브루투스 흉상>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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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브루투스 흉상>, 1542년경, 대리석, 높이 7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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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브루투스 흉상>

찌푸린 표정과 직시하는 눈초리는 곱슬곱슬한 눈썹으로 앙양되었고, 깊숙이 들어간 눈과 꼭 다문 입이 근엄해 보입니다. 짧고 촘촘히 뭉친 머리카락은 매끈한 얼굴과 늘어진 망토와 대조를 이룹니다.


<브루투스 흉상>은 자노티가 리돌피 추기경을 대신하여 의뢰한 것으로 미켈란젤로의 유일한 흉상이며 역시 미완성입니다. 브루투스를 공화정의 상징으로 여긴 메디치 가는 미켈란젤로가 타계한 뒤 이 흉상을 입수하여 그 아래에 라틴어 문구를 새겨 넣었습니다.

조각가는 이 조상을 대리석으로 제작하는 동안 (브루투스의) 죄상을 떠올리고 제작을 중단했다.

이는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작품을 긍정적으로 해석한 드문 예입니다. 바사리는 미켈란젤로가 이것을 조수 티베리오 칼카니에게 주어 완성시켰다고 합니다.

1500년 전 압제자를 살해했던 브루투스는 토가처럼 생긴 망토를 걸쳤고, 오른쪽 어깨 위에 사람이 새겨진 브로치로 망토를 매듭을 지어 묶은 모습입니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날카롭게 바라보는 모습으로 두터운 목의 근육이 돋보입니다. 미켈란젤로는 머리카락, 얼굴, 망토를 각각 다르게 마무리했는데, 올을 짠 망토는 조각칼을 옆으로 해서 전체가 평행되게 함으로써 망토의 질감을 나타냈으며, 얼굴은 소묘하듯 다양한 방법으로 다듬었고, 머리카락은 대리석의 거친 면을 남겨두었습니다. 그는 단단한 돌을 환영적인 모습으로 완성했습니다. 돌을 거칠게 남겨놓은 것은 의도적인 기교에 의한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인은 흉상을 제작할 때 부드럽고 감각적인 느낌이 나게 했으며, 로마인은 제국주의적 분위기가 드러나도록 제작했는데, 미켈란젤로는 로마 공화국의 원칙을 준수한 브루투스를 자신의 고유한 공화당원의 이미지로 만들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흉상이 황제 카라칼라를 닮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미켈란젤로가 창작을 할 때 전통에 뿌리를 두었음을 알게 해줍니다. 그의 많은 작품을 보면 고대 작품들이 그에게 촉매작용이 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전통을 잇는 것이며 고유한 창작인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브루투스 흉상>은 고대 흉상들보다 더욱 고전적으로 보이며, 바로 이 점은 그가 고전의 장점을 결여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한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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