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는 신간: 그림을 통해 배우는 삶의 지혜

 

1. 정치와 미술: 프랑스 혁명과 프로파간다 회화



재정파탄과 혁명의 불길

 

이솝은 행운을 두고 다툰 두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행운에 대한 태도에 교훈을 줍니다.

어느 날, 행운의 여신이 마을을 지나갔습니다. 그녀가 하는 일은, 인간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일이어서, 그날도 누군가에게 행운을 주려고 돌아다니다가, 길에서 싸우는 두 남자를 보았습니다. 왜 싸우는가 싶어, 가까이 가서 들어보니, 놀랍게도 자기 때문에 싸우고 있었습니다. 한 남자는 행운의 여신을 앉아서 기다려서는 안 된다, 이쪽에서 찾아가 붙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남자는 행운의 여신은 제 발로 오는 것이지,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보게, 이 사람아” 하고 ‘찾아가야 한다는 남자’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꼴을 좀 보라구, 매일 뼈 빠지게 일하면서, 그것으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정도 아닌가? 세상에는 궁전 같은 집에서 예쁜 여자들 속에 파묻혀, 허구헌날 맛난 것만 먹고 놀면서 사는 자들도 있어. 그런 신분이 되고 싶으면, 이런 곳에서 무작정 기다리고 있어서는 소용이 없다구. 개도 돌아다니면 몽둥이든 뭐든 만난다고 하지 않던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일세.”

거기에 대해 ‘기다려야 한다는 남자’가 말했습니다.

“무슨 어리석은 소리를 하는 건가?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 행운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으면, 지방을 순회하는 연예인이나 행상들은, 금세 큰 부자나 왕자가 되게? 그렇지 않다는 증거로, 그들은 늘 똑같은 행색을 하고 언제까지나 여행을 계속하고 있지 않은가? 보게나, 속담에도 행운은 누워서 기다리라는 말이 있지 않나? 요컨대 행운이란 건 기다려야 하는 거라네. 게다가, 행운의 여신은,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여자는 여자야, 인간 여자와 마찬가지로, 쫓아다니면 쫓아다닐수록 달아나는 법이라구.”

“아니, 그렇지 않아. 행운의 여신은 양갓집 규수와 마찬가지로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까,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어떻게든 이쪽에서 계기를 만들어, 조금이라도 기회다 싶으면, 적극적으로 끌어당겨야 자신의 것이 되는 거야. 게다가 큰 운과 작은 운이 있으니, 기왕이면 큰 운을 붙잡아야 손해를 안보지, 안 그래? 그것 때문에라도, 무조건 멋진 행운의 여신을 찾아서 여행을 하는 수밖에 없어. 이렇게 작은 마을이나 기웃거리는 여신이라면, 어차피 대단한 여신도 아닐 거야.”

두 남자는 더욱 더 자신들의 주장을 고집하며 계속 싸우느라, 바로 옆에 행운의 여신이 와있는 것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두 남자의 언쟁은 결론이 나지 않은 채 한 남자는 운을 찾아 길을 떠나고, 또 한 남자는 운이 굴러들어 오기를 기다리기 위해 집에 틀어박혔습니다.

그런데 난처해진 건, 두 남자에게 무시당하고 그 자리에 홀로 남은 행운의 여신. “모처럼 행운을 가져왔는데 ...” 하고 중얼거리며, 하는 수 없이 옆 마을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프랑스 혁명기에 운을 찾아 길을 떠난 사람, 운이 굴러들어 오기만을 기다린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혁명은 오로지 인간이 성취해야 할 과제이므로 행운의 여신이 개입할 여지는 없었습니다. 왕정을 지지하는 세력과 공화정을 지지하는 세력의 다툼, 공화정을 지지하는 혁명세력 가운데서도 급진적으로 추진하려는 좌파와 다수의 의견을 수렴하면서 서서히 추진하려는 우파의 다툼이 치열해서 무수한 사람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초긴장상태였습니다.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지러운 시기에 정치에서 그리고 미술에서 막강한 권력을 쟁취한 두 남자가 있었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화단의 나폴레옹’으로 불린 자크-루이 다비드입니다. 이솝의 입장에서 보면 나폴레옹은 운이 굴러들어 오기를 기다린 사람이었고 다비드는 운을 찾아 나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행운의 여신은 두 사람 모두에게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미국 독립전쟁의 불똥이 대서양을 건너 프랑스에 떨어지면서 혁명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프랑스는 영국에 대적하여 1776~78년 조지 워싱턴이 이끈 식민지 군에 보급물자와 자금을 제공했습니다. 1778년 이후에는 육해군을 직접 지원하여 분열된 영국군의 틈을 활용하여 새러토가와 요크타운에서 영국군 전체에 패배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리하여 1783년 11월에 미국의 13개 주가 독립할 수 있었습니다. 1783년에 체결된 베르사유조약은 미합중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프랑스가 1763년에 상실한 세네갈의 해관들과 서인도 제도의 세인트-루시아와 토바고를 영국으로부터 되돌려 받게 해주었으나, 참전에 든 엄청난 지출로 부채가 더욱 늘어 정부의 위기를 자초했습니다. 빚더미에 올라앉은 정부는 재원을 늘여야만 했으므로 지주인 특권층에게 그들의 정당한 몫을 납부하게 하는 세제개혁을 단행해야 했지만, 개혁은 번번이 압력집단들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

프랑스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혼란에 빠졌고, 새로 부상한 중산계급과 귀족계급의 마찰로 국운을 가르는 긴장감마저 맴돌았습니다. 중산계급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했지만, 귀족계급이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더욱 혼란을 가중시킨 것이 가난에 허덕이는 다수 시민의 분노였습니다. 시민들은 귀족과 성직자들의 혹사에 분통을 터뜨리면서 귀족계급에 대해 증오를 나타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귀족과 성직자의 수가 50만 명 미만이었던 데 반해 시민의 수는 2천5백만 명이었으므로 시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습니다. 1788년의 흉년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빵 값의 앙등으로 굶주린 사람의 수가 한층 늘어난 것입니다. 민주주의 정체에 대한 이론과 신념 그리고 시민의 자유에 대한 보장을 요구하는 계몽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시민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었습니다.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시민이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이성적으로, 시대적으로 당연했습니다. 이런 취지의 글이 여기저기에서 발표되어 프랑스 전역으로 퍼지면서 폭넓은 공감대가 신속하게 형성되었고, 시민들의 분노가 혁명의 불길로 여기저기서 모락모락 피어올랐습니다.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군사력이 수세의 상황에 몰리자 물가의 폭등, 소요, 약탈이 연이어 발생했고, 1789년 4월 28일 파리의 교외지구에서 발생한 소요사태는 약 300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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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트 종교회의와 매너리즘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트렌트 종교회의는 예술에서의 형식주의와 감각주의 모두를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트렌트 종교회의는 도덕적 엄격주의와 반형식주의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 운동과는 달리 예술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주의가 지배하는 곳에서 문예는 소멸한다”고 했습니다. 루터가 문예를 얼마나 하찮게 보았는지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트렌트 종교회의의 입장은 루터주의에 비해 예술에 관해 매우 온건적이었습니다. 루터는 문학이 고작 신학의 시녀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며, 조형예술에서 칭찬할 만한 점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루터는 가톨릭교회의 우상숭배를 이교도의 주물숭배와 동등하게 취급했는데, 그가 말한 우상숭배에는 실재 종교와는 별로 관련 없는 르네상스의 종교화뿐만 아니라 미술을 통해 종교적 감정을 표현하는 자체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그림으로 장식하는 것 자체도 우상숭배로 보았습니다. 이에 반해 트렌트 종교회의는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한 반대 입장을 강조하기 위해서 예술에 적대적인 이단자들과는 달리 자신들은 예술에 우호적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중세와 르네상스의 가톨릭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했으며, 더 나아가 예술을 이단자의 교리를 공격하는 무기로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르네상스의 심미적 문화는 선전수단으로서의 예술의 가치를 더 없이 높이 올려놓았습니다. 트렌트 종교회의는 중세에서 깨닫지 못한 민중 교화의 효과적인 수단을 예술에서 발견했습니다.

트렌트 종교회의 입장의 기본이 되는 예술적 표현이 매너리즘인지 바로크인지에 대해서는 미술사학자들마다 견해가 분분합니다. 아놀드 하우저는 연대적으로 봐서 매너리즘이 반종교개혁에 더 가깝고, 트렌트 종교회의 기간의 정신주의적 태도도 감각적인 바로크보다는 매너리즘에서 좀 더 순수한 형태로 표현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반종교개혁 운동의 예술적 프로그램, 즉 대중에까지 예술을 통한 가톨릭의 전파가 이루어진 것은 바로크에 이르러서라고 했습니다. 하우저는 매너리즘이 종교회의의 시기에 가장 널리 보급되었고, 가장 활발했던 형식이기는 했지만 반종교개혁 운동의 예술적 임무, 즉 반종교개혁 운동이 제시하는 교회의 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적합한 방향은 아니었음을 지적했습니다.

종교회의의 시기에 가톨릭교회의 교리는 매너리즘 예술가들이 여태까지의 기독교적 문화와 조합적인 사회질서의 체계 속에서 누리던 사회적 위치를 대신할 만한 것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예술구조가 복잡해진 상황에서 예술과 예술가들을 일률적으로 규정하게 되면 오히려 자신들이 이용하고자 하는 예술수단의 효용성을 쉽게 파괴시키는 결과가 되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술가들의 경우 그들에게 깊은 기독교 신앙이 있다 하더라도 예술적 전통의 현세적이고도 이교적인 요소를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표현 수단이 지닌 상이한 요소들 사이의 내적 모순이 해결되지도 않았고, 또 해결될 수도 없는 성질의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갈등의 중압감을 견뎌낼 수 없었던 예술가들은 기교에 도취되거나 아니면 미켈란젤로와 같이 종교 속으로 도피했습니다.

매너리즘 시대의 예술가들은 중세의 수공업적 예술가들을 비롯해서 수공업적 단계에서 벗어나고 있던 르네상스 예술가들에게도 여러 면에서 근거가 된 모든 요소들, 즉 사회에서의 견고한 위치, 길드의 보호, 교회와의 명확한 관계, 대체적으로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던 전통과의 관계 등을 거의 상실했습니다. 개인주의 문화는 중세에서 이들에게 폐쇄되었던 무수한 가능성을 제공했지만, 동시에 자유라는 진공 속으로 밀어 넣음으로써 때로는 자신을 상실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만들었습니다. 16세기는 정신의 변혁기였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세계상을 재정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내적 충동에만 의존할 수 없어 자유와 강제의 틈바구니에서 방황했으며, 정신세계의 질서를 위협하는 혼돈에 노출되었습니다. 하우저는 이들에게서 처음으로 현대적 의미의 예술가, 즉 생에 굶주려 있으면서도 현실도피적이며, 역사적으로 구속되어 있으면서 겁 없이 반항하고, 노출증에 가깝도록 자신을 내세우는 주관주의와 더불어 최후의 비밀은 끝내 감추는 폐쇄성을 지니는 등 내적 분열로 신음하는 예술가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이때부터 예술가들 가운데 괴짜와 기인, 정신병자의 수가 늘어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650

파르미지아니노의 <성 캐터린의 신비로운 결혼>, 1530년경, 패널에 유채, 74.2-57cm.


651

야코포 다 폰토르모의 <이집트의 요셉>, 1515년경, 패널에 유채, 96,5-109.5cm.


652

로소 피오렌티의 <아드로의 딸을 보호하는 모세>, 1523년경, 패널에 유채, 60-117cm.


653

엘 그레코의 <라오콘>, 1610년경, 캔버스에 유채, 137-173cm.


파르마 태생 파르미지아니노Parmigianino(1503-40)는 생애 후반에 연금술에 심취했고, 우울증에 걸려 있었으며, 세간에서 보기에는 폐인의 모습이었습니다. 야코포 다 폰토르모Jacopo da Pontormo(1494-1557)는 유년시절부터 심한 우울증에 걸려 고생했으며, 나이가 들수록 대인기피증이 심해지고 폐쇄적이 되었습니다. 로소 피오렌티노깬내 Fiorentino(1494-1540)는 정신병자였고, 자살로써 생애를 마쳤으며, 엘 그레코El Greco(1541?-1614)는 대낮에도 방안에 커튼을 내리고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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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네트워크는 확대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친구와 가족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걸 잘 압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들이 기뻐하거나 슬퍼하거나 건강하고 아프며, 심지어 부유하거나 가난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들이 생각하고 느끼며 행동하고 말하는 모든 것이 직접 아는 사람들을 넘어 멀리까지 파져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선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친구와 가족은 수백 명 혹은 수천 명의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영향을 받는 통로가 됩니다. 우리는 소셜 네트워크의 일부로서 자신을 초월하여 훨씬 더 큰 전체의 일부가 됩니다. 즉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연결은 인간의 조건을 이해하는 방식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소셜 네트워크는 혼자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소셜 네트워크의 효과가 늘 긍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우울증, 비만, 성병, 금융공황, 폭력, 자살도 퍼져나갈 수 있습니다. 소셜 네트워크는 씨를 뿌리기만 하면 어떤 것이라도 확대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분적 이유는 소셜 네트워크의 창조성 때문입니다. 네트워크가 창조하는 건 어느 한 개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네트워크 내의 모든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모두가 네트워크에서 혜택을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을 건강하고 생산적으로 유지하도록 함께 협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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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종교개혁과 미술


 
사회학적 견지에서 보면 종교개혁은 교회의 부패에 대한 격분에서 출발했고, 이 운동을 촉발시킨 직접적인 원인은 성직자들의 탐욕, 면죄부와 교회관직을 미끼로 한 교회의 돈벌이였습니다. 16세기의 전반부, 즉 일련의 종교전쟁과 트렌트 종교회의, 그리고 비타협적인 반종교개혁 운동이 시작되기 이전의 유럽이라는 상황에서, 종교개혁은 단순히 신앙의 문제만이 아니라 도덕적인 책임의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외면할 수 없는 양심의 문제였습니다.

독일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이탈리아의 이상주의자와 지식인들을 자극하고 열광시켜 반물질주의, 믿음에 의해 의로워진다는 속죄론, 하나님과의 직접 교섭과 신도가 사제와 동등하다는 이념을 갖게 했습니다. 하지만 봉건적 특권을 유지하려는 성직자들의 투쟁에 적극 대응하던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달성되자 한 발 물러섰으며, 하층계급의 이익을 도모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이 손상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일체의 진보 운동에 완강히 저항했습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처음에 광범위한 사회적 기반 위에서 민중 운동으로 출발했지만, 지방의 중·소 규모의 영주나 시민계층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정치와 경제에만 관심이 있는 영주와 시민계급의 종교적 신조가 되고 새로운 교회 조직을 위한 편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 가장 실망한 계층은 종교개혁을 정신적 운동으로만 이해했던 이상주의자와 지식인들이었습니다.

종교생활의 내면화와 심화에 대한 열망이 가장 강한 곳은 로마였고, 동시에 독일에서 불어온 종교개혁 바람으로 교회 분열의 위험을 가장 잘 의식한 곳도 로마였습니다. 로마의 개혁 운동 지지자들은 교회의 부조리를 도려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계몽된 인문주의자들이었지만, 교황의 절대 권위와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했습니다. 1520년경 로마에서 경건한 신앙의 모범이 되고 종교개혁에 자극을 주기 위해 ‘하나님 사랑의 수도회’라는 단체가 결성되었습니다. 이 단체에는 로마의 성직자들 가운데서 가장 학식이 높고 명망 있던 추기경 야고보 사돌레토Jacopo Sadolet(1477-1547), 베로나Verona의 주교 기베르티Giberti(1495-1543), 티에네의 가예타누스Cajetanus(1495-1547)와 조반니 피에트로 카라파Giovanni Pietro Caraffa(1476-1559)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외세의 침입으로 이 단체의 구성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두 강대국인 프랑스와 스페인의 각축장이었습니다. 프랑스는 봉건주의로부터의 왕권의 해방과 백년전쟁의 성공적 종결의 결과로 강국이 되었으며, 스페인은 독일 및 네덜란드와의 통합이라는 우연의 산물로 카롤링거 왕조의 제2대 프랑크 국왕 카알 대제Karl Magnus(샤를마뉴Charlemagne, 742-814, 768-814 재위) 이래 막강한 힘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는 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1500-58)로 재위 중 151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알 5세Karl V(1500-58, 1519-56 재위)가 되어 1556년까지 재위했는데, 그가 상속받은 영토를 합쳐 정비한 국가 판도는 프랑크 왕국을 독일에 합병한 것과 같은 규모였습니다. 프랑스가 먼저 침입하여 나폴리, 밀라노, 피렌체를 점령했고, 1525년 카알 5세가 프랑스를 물리치고 이탈리아 전역을 장악했습니다. 그는 교황을 응징하기 위해 1만 2천의 용병을 이끌고 로마로 와서 교회와 수도원을 약탈하고 신부와 수도사들을 살상했으며, 수녀들을 능욕·학대했고, 성 베드로 대성당을 마구간으로, 바티칸 궁전을 병정들의 막사로 만들었습니다. 카알 5세의 침입으로 르네상스 문화 전체가 파괴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1530년에는 피렌체마저 스페인과 독일 연합군의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클레멘스 7세는 카알 5세와 볼로냐에서 동맹을 채결하고 이탈리아 반도에서 프랑스 세력을 축출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피렌체는 프랑스를 지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카알 5세는 교황과 합의하여 알렉산드로 메디치를 세습 군주로 앉힘으로써 공화국의 마지막 흔적마저 없애버렸습니다. 로마 약탈 이후 피렌체에서 일련의 혁명적 소요가 일어나 메디치 가의 추방으로까지 이끌고 간 상황은 황제와 결합하려는 교황의 결심을 촉진시켰습니다. 교황은 황제의 동맹자가 되었으며, 나폴리에는 스페인 부왕이, 밀라노에는 스페인 총독이 직접 주재했고, 그 밖에도 스페인은 피렌체의 메디치 가, 페라라의 에스테 가, 만토바의 곤자 가를 통해 이탈리아를 지배했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수도회’는 카알 5세의 로마 약탈로 흩어졌지만, 나중에 베네치아에서 사돌레토, 콘타리니, 폴레 등을 중심으로 활동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루터주의와 화해하고 종교개혁의 도덕적 내용, 특히 신앙속죄론을 살려 가톨릭교회에 활용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1541년 레겐스부르크 회의에서 콘타리니의 종교화해 협상이 결렬됨으로써 가톨릭 개혁 운동의 제1기가 종말을 고했습니다. 레겐스부르크 회의의 결렬은 가톨릭교회가 전투적인 공세를 취하게 만들었으며, 권위와 권력에 의한 가톨릭 재건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교황 바오로 3세는 관용적인 르네상스에서 비관용적인 반종교개혁 운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대표합니다. 1542년에는 종교재판 제도가 있었고, 이듬해에는 출판검열 제도가 실시되었으며, 1545년에는 트렌트 종교회의가 열렸습니다. 고위 성직자들 가운데서 인문주의자들은 박해를 받았고, 광신적 반르네상스 정신이 도처에서 고개를 들었습니다.

이탈리아 트렌트에서 비정기적으로 18년 동안 열린 트렌트 종교회의는 정치적 현실주의의 최대 수련장이 되었습니다. 이 회의는 교회 제도와 신앙의 기본 원칙을 현대생활의 여러 조건과 요구에 적응시키는 조치들을 냉철하고도 실무적인 태도로 채택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신도들이 가톨릭교회에서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전통 신앙과 이단 사이에 명확한 선을 그었습니다. 그들은 대립관계를 강조하고 신도들의 요구조건을 완화시키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으며, 이는 곧 통일된 기독교 세계의 종언을 의미했습니다.

개신교의 비판에 직면한 교회를 개혁하고 가톨릭 교리를 명시하며, 옹호하려했던 트렌트 종교회의가 종결되자 예술에 적용되었던 엄격주의가 현실주의적 정신에 입각하여 완화되었습니다. 교회는 만인을 위한 화려하고 매혹적으로 장식되었습니다. 이 과제는 바로크 시대에서야 만족할 정도로 성취되었고, 매너리즘에서는 트렌트 종교회의의 엄격한 규정들이 여전히 지배적이었습니다. 교회가 보장했던 미술의 자유주의는 트렌트 종교회의로 종식되었습니다. 교회를 위한 미술품은 신학자들의 감독 하에 놓였고, 특히 대규모 작품은 담당 성직자의 지시를 엄격하게 지켜야했습니다. 밀라노 화가 조반니 파올로 로마초Giovanni Paolo Lomazzo(1538-1600)는 서른세 살에 실명한 후 미술 이론에서 당대의 최고 권위자가 되었는데, 그는 종교화를 그릴 경우 화가는 신학자의 조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매너리즘 화가인 타데오와 페데리코 주카로 형제는 채색에 있어서도 교회의 지시를 따랐으며, 바사리도 파울리네 예배당을 위해 작업할 때 도미니크회의 수도사로 미술에 조예가 깊은 빈첸조 보르기니가 내린 지시에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없을 때는 불안해했습니다.

이 시기는 표현을 예술가의 재량에 맡겼던 중세보다 더 엄격하게 규정되었습니다. 특히 이단 학설에 영향을 받은 미술품을 교회에 두는 것을 철저히 금지했습니다. 예술가들은 성서에 나오는 에피소드의 공식화된 형식이나 교리 문제의 공식적인 해석을 정확하게 지켜야만 했습니다. 안드레아 질리오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 등장하는 수염 없는 그리스도, 그리스 신화에서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저승으로 가는 강 너머로 건네주는 카론의 나룻배, 그의 언급처럼 투우장에서 구경하고 있는 듯한 성자들의 태도, 묵시록에 언급되는 천사들의 배열이 성서와는 반대로 화면의 네 모퉁이에 나눠 있지 않고 나란히 서 있다는 사실 등을 들어 비판했습니다.

베로나 태생이라서 별명이 베로네제인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1528-88)는 <레위 가의 만찬>에서 성서에 열거된 인물 외에도 난장이, 개, 앵무새를 데리고 있는 바보 등과 같은 임의로 선택한 모티프를 그림에 첨가했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소에 호출되었습니다. 이런 비관용적인 정신은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오로 4세는 1559년 다니엘레 다 볼테라Daniele da Voltera(1509-66)에게 <최후의 심판>에서 특히 자극적으로 보이는 누드를 덮어씌우게 했습니다. 후임 교황 바오로 5세는 미켈란젤로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인 1566년, <최후의 심판>에서 자신의 비위를 거슬리게 만든 몇몇 부분을 제거시켰습니다. 클레멘스 8세는 <최후의 심판>을 아예 없애려고까지 했지만, 아카데미의 탄원으로 겨우 만류되었습니다. 교황들의 이런 태도에 동조라도 하듯 미켈란젤로를 서양의 최고 예술가로 꼽은 바사리조차 1568년에 출간한 『미술가 열전』 재판에서 <최후의 심판>의 누드상은 이 그림이 놓인 장소에 비추어볼 때 적합하지 못하다고 적었습니다. 이러한 비난은 <최후의 심판>을 문화사의 획기적인 전환점으로 만들었습니다. 즉 미켈란젤로가 신학보다 예술적인 표현을 중시함으로써 ‘예술의 자유’를 말해주는 사례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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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심약한 영혼의 부르짖음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639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1536-41, 프레스코, 시스티나 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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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의 부분: 바르톨로메오와 미켈란젤로의 자화상

그리스도 바로 아래 왼쪽에 석쇠 위에서 순교한 성 로렌스가 석쇠를 들고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살가죽이 벗겨지는 고통 속에서 순교한 성 바르톨로메오가 오른손에 칼 왼손에 살가죽을 들고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성 바르톨로메오가 들고 있는 축 늘어진 살가죽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지옥 위에 매달린 모습으로 표현했지만, 성인의 손에 잡혀있는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을 통해 사람들에게 죄를 고통스럽게 여기게 했고,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구원이 가능하다는 점을 상기시켰습니다.


1535년 9월 1일 반포된 모투프로프리오motuproprio(교황의 사적인 포고령)로 미켈란젤로는 바티칸의 최고 건축가·화가·조각가로 임명되었으며, <최후의 심판>에 집중하기 위해 그동안 연기했던 많은 작업들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콘디비는 클레멘스 7세가 궁리 끝에 <최후의 심판>을 시스티나 예배당에 장식하기로 결정했다고 적었습니다. 이때 모세와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표현한 페루지노의 작품들과 미켈란젤로가 제작했던 두 반월창이 사라졌습니다. 가장 큰 손실은 페루지노의 제단화 <성모 승천>이 사라진 것인데, 원래 이 예배당은 승천하는 성모에게 봉헌되었던 교회입니다. 따라서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은 원래의 예배당 장식이 지닌 일관성을 크게 손상시켰습니다.

<최후의 심판>은 1541년 10월 31일 ‘성자들의 밤’에 공개되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지상과 지옥은 아래, 천국은 상단에 위치하며 죽은 자는 그리스도의 오른쪽, 저주받은 자는 왼쪽에 서게 됩니다. 이 작품은 이러한 구성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대작입니다. 미켈란젤로는 그리스도를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일어서려고 하는 모호한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그리스도의 다리는 <모세>의 다리를 반대로 한 것처럼 보이고, 상체는 <부활한 그리스도>와 닮았으며, 수염은 없고 배에 우람한 근육이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리스도가 오른팔을 올리며 일어서서 저주받은 자들을 지옥으로 던지려는 모습으로 이해하지만, 그의 표정은 부드러우며 저주받은 자들이 모두 지옥으로 빠지기 전에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더 구제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모는 그리스도의 둥근 광채 안에 앉아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십자가 처형 드로잉>에서도 성모를 이렇게 움츠린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도와 성인들에 에워싸여 있습니다. 사도와 성인들은 아래의 사람들에 비해 훨씬 크게 묘사되었는데, 부분적으로는 아래서 올려다볼 때 비례를 조절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의도적으로 크게 부각시켰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축복받은 영혼들로 하늘나라에 속하게 된 사람들이며, 그리스도의 군대를 이루는 이들에게는 죄인들을 구제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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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의 부분: 당나귀 귀를 한 미노스가 뱜에 의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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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의 부분: 스틱스 강의 나루지기 카론이 최후의 심판을 받은 자들에게 배에서 내려가라고 노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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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의 부분


하단 맨 끝에 당나귀 귀를 한 미노스가 뱀에 의해 고문을 당하고 있는데 뱀이 그의 몸을 휘감고 그의 성기를 물고 있습니다. 카론Charon(그리스 신화에서 스틱스 강Styx의 나루지기)은 성난 모습으로 노를 들어 운명이 정해진 영혼들을 위협하며 자신의 보트에서 쫓아냅니다. 최후의 심판을 받은 영혼들은 불구덩이 지옥의 낮은 곳으로 떨어지도록 저주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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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의 부분: 공포에 휩싸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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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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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의 부분: 죽은 자가 부활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벽화 하단 왼쪽에는 무덤으로부터 죽은 자들이 살아나오고, 가톨릭의 교리대로 뼈들은 몸을 만나 부활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활한 몸은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 승천하지만 프레스코 반대편을 보면 저주받은 자들은 과격한 물리적 방법으로 지옥 속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지옥은 부분적으로 단테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지만 인간의 추락에 관한 표현에서 그의 상상력도 작용했습니다.

아놀드 하우저는 미켈란젤로가 자신을 완전히 내바치고 속세적·육체적·육감적인 일체의 것을 자신 속에서 용해 소멸시키려는 욕망이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다고 적었습니다. 르네상스의 구도에서 보이는 화면의 공간적 조화는 사라지고 대신 비현실적·비연속적일 뿐 아니라 하나의 단일한 기준에 의해 구성되어 있지도 않으며 통일적으로도 보이지 않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투시도·환영주의의 효과를 버리고 하단의 인물들에 비해 상단의 인물들을 너무 크게 그렸습니다. <최후의 심판>은 아름답지 않은 것으로 말하면 최초의 근대 작품이고, 아름답지는 않지만 표현이 풍부했던 중세의 작품과는 유사한 데가 있습니다. 하우저는 이 작품을 아름답고 완전무결한 형식에 대한 매우 힘들여 얻은 항의이자 일종의 선언이며, 그 선언의 형식 무시 자체는 공격적이고도 자기 파괴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최후의 심판>은 보티첼리나 페루지노가 동일한 장소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예술적인 이상을 부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켈란젤로 자신이 일찍이 그곳 천장화를 그릴 때 추구했던 목적도 부정하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이 예배당 전체의 존재 이유이자 르네상스의 모든 조형예술의 근원이 되었던 ‘미’의 이념들도 파기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결코 무책임한 일개 괴짜의 실험작이 아니라 기독교 세계의 가장 명망 높은 예술가의 손에 의해서, 그것도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장소인 교황의 개인 예배당의 정면 벽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된 미술품이었다. 그야말로 한 세계의 몰락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것이다.”(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195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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