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활 보호권에 대한 합헌 논의


 

사생활 보호권에 대한 합헌 논의에서 종종 개인에 대한 자원주의 개념과 중립적 국가 개념이 결합됩니다. 낙태를 예로 들면 국가는 ‘생명에 관한 특정한 견해를 채택’하여 ‘자신의 임신 상태를 끝낼지 여부에 대해’ 결정할 여성의 권리를 무시해선 안 됩니다. 국가는 도덕적 관점을 강요해선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어느 개인도, 단순히 그가 선호하는 가치가 다수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스스로 결정을 내릴 자유를 포기하도록 강요당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처럼 사생활의 자유에 있어서도 중립성이 자원주의 개념을 반영합니다. 학자들은 사생활 보호권이 “개인의 자율권이라는 개념을 기초”로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연방대법원은 “사람은 누구나 자율적으로 삶을 살 자격이 있으며, 그것을 행사할 권리를 가진다”고 판결했습니다. 연방대법원은 피임기구 사용 금지법이 “임신과 관련된 개인의 자율권에 대한 헌법적 보호”를 침해한다고 규정했습니다. 법원은 “개인의 존엄성 및 자율권과 관련해서 자신의 임신을 끝낼지 여부에 대한 여성 자신의 결정보다 더 중요한 결정은 없다”는 이유로 낙태 권리를 지지했습니다. 그리고 네 명의 판사들은 “인간관계의 다양함과 풍성함의 상당 부분이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의 자유에서 비롯된다”는 이유로 사생활 보호권을 동성간 성행위에까지 확장했습니다.

사생활 보호권이 1960년대 이전까지 헌법으로 논의되지 않았습니다. 연방대법원이 처음 사생활 보호권 문제를 다룬 건 1961년으로 포 대 울먼Poe vs. Ullman 사건을 통해서였습니다. 코네티컷의 한 제약업자가 피임용품 사용을 금하는 주법에 이의를 제기하자, 다수의 판사들이 그 소송을 기각했지만, 더글라스 판사와 할런Harlan 판사는 반대의견을 제시하면서 법이 사생활 보호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이 옹호한 권리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사생활 보호권이었습니다. 초점이 되는 권리는 피임용품을 사용할 권리가 아니라 법의 감시로부터 자유로울 권리였기 때문입니다. 더글라스 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법을 엄격하게 집행한다면 수색영장이 발부되고 경찰들이 침실에 들어가 거기에서 벌어지는 일을 조사하는 수준에 이를 것이다. ... 법이 만들어지면 집행되는 건 당연한 수순 아닌가? 이 법의 위반을 입증하는 데는 필연적으로 부부관계에 대한 심문이 수반된다.

더글라스는 피임용품 판매를 금하는 것과 그 사용을 금하는 것은 다르다고 말합니다. 『왜 도덕인가? Why Morality』의 저자이며 하버드 대학의 교수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1953)은 판매 금지는 피임용품의 판매를 금하지만 부부의 은밀한 생활을 조사의 대상으로 만들지는 않는다면서, 판매금지법은 경찰을 침실이 아니라 약국으로 향하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전통적인 의미의 사생활 보호권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더글라스와 마찬가지로 할런도 피임용품 사용을 금하는 주법을 시행하면 결혼이라는 중요한 관습에 꼭 필요한 사생활을 침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전통적 의미에서의 사생활 침해에 반대한 할런은 “형사법이 결혼이라는 사생활의 중심에 침입해 남편과 아내에게 법정에서 부부관계를 위해 사용한 물건을 밝히라고 요구하는 셈”이라고 말했습니다. 할런은 코네티컷 주정부가 피임이 비도덕적이라는 신념을 법으로 구체화할 권리는 있지만, “그 법을 시행하기 위해 불쾌할 만큼 간섭적인 수단을 실행할” 권리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로부터 4년 후 그리스월드 대 코네티컷Griswold vs. Connecticut 재판에서 피임용품 금지법에 대한 반대의견이 우위를 점했습니다. 연방대법원은 피임용품을 금하는 코네티컷 주법을 위헌이라고 판결하고 처음으로 사생활 보호권을 명시했습니다. 법원은 이 권리를 불법행위법이 아닌 헌법의 기본권으로 인정했지만, 여전히 사생활 보호권은 사적인 생활을 타인에게 노출시키지 않는다는 전통적인 개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더글라스는 말했습니다. “피임용품을 사용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부부의 침실을 경찰이 수색하도록 할 것인가? 그런 생각은 부부관계와 관련된 사생활을 정면으로 침해하는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와 『왜 도덕인가? Why Morality』의 샌델은 연방대법원이 인정한 사생활 권리는 각 개인인 원하는 성생활을 선택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혼이라는 사회적 관습을 승인하고 보호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합니다. 당시 사생활 보호권의 정당화가 자원주의가 아니라 도덕적 판단에 근거를 두었다는 말입니다.

8년이 지난 뒤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사건에서 연방대법원은 낙태를 금하는 텍사스 주법을 위헌 판결하면서 새로운 사생활 보호권을 제시했습니다. 법원은 사생활 보호권을 “임신을 끝낼지의 여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여성의 결정권”으로까지 확장했습니다. 처음에는 피임용품과 관련해, 나중엔 낙태와 관련해 사생활 보호권이 국가의 개입 없이 선택을 내릴 수 있는 권리가 된 것입니다.

낙태 권리를 지지한 판결들 역시 쟁점이 되는 사생활 보호를 논하면서 자율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낙태와 관련된 한 판결에서 연방대법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개인의 존엄성 및 자율권과 관련해, 임신을 끝낼지 여부에 대한 여성 자신의 결정보다 더 적절하거나 근본적인 요인은 없다. 그런 결정을 자유롭게 내릴 여성의 권리는 대단히 중요하다.

사생활 보호권을 자율권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방대법원은 사생활 보호권을 동성애에까지 확장하는 건 거부했습니다. 화이트White 판사는 법정의 다수의견을 밝히면서 사생활 보호권과 관련된 이전 판례들은 자녀 양육 및 교육, 가족관계, 출산, 결혼, 피임, 낙태와 관련된 권리만을 보호한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반대의견을 낸 네 명의 판사들 중 하나인 블랙먼Blackmun은, 사생활 보호권과 관련된 법원의 이전 판결들은 그것들이 지지하는 행동의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문제에 관한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존한다고 주장하면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권리가 보편적인 공공복지에 기여하기 때문에 보호하는 것이다. 사생활 보호권 개념은 개인이 타인이나 사회에 속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속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구현하는 것이다.” 성생활에 있어서 사생활 보호권은 “지극히 개인적인 행동들의 종류와 성질을 선택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므로 동성애 역시 보호해야 하는 것입니다.

샌델은 사생활 보호권을 동성애까지 확장하지 않으려 한 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사생활 보호권과 관련된 지난 25년의 판례들은 개인에 대한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비롯된 가정들을 풍부하게 보여준다고 지적합니다. 아울러 이들 판례는 자유주의에 관한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하는데, 하나는 논쟁적인 도덕적 주제들을 배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사생활 보호권에 대한 자원주의 관점이 그 권리를 보호하는 이유들을 제한하는가 하는 질문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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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 스캔들에 출연합니다



KBS2 토요일 오후 10시 10분에 방영하는 ‘명작 스캔들’에 출연합니다.

이번 주 토요일인지 다음 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폴레옹 초상화’에 관한 스캔들입니다.

스튜디오에 직접 출연하는 것이 아니라 영상으로 출연합니다.

많은 시청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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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존재한 예술가 미켈란젤로의 타계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1564년 2월 14일 미켈란젤로는 뇌졸중을 일으켰습니다. 18일 늦은 오후, 그는 생일을 보름 남짓 남겨놓고 거의 89해의 생을 살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추기경 살비아티가 임종식을 거행했으며, 친구 몇 명이 임종을 지키며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숨을 거두기 전 살비아티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나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충분히 행하지 못한 점과 내 직업에서 알파벳을 겨우 배우기 시작할 때 죽게 되어 유감입니다.


714

아고스티노 치암펠레의 <산 로렌초 성당에서 거행된 미켈란젤로 장례식에서 바르치의 추도사>, 1617, 캔버스에 유채, 152-13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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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조 바사리 외 그의 그룹의 <미켈란젤로의 무덤>, 1564-75, 대리석, 산타 크로체


미켈란젤로는 1546년 3월에 로마 명예시민이 되었지만, 타계하기 이틀 전 자신은 피렌체에 묻히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바사리에 의하면 미켈란젤로의 시신은 논쟁거리가 되었습니다. 로마 시는 산 아포스톨리 성당에서 국가장으로 장례식을 성대하게 베풀고 시신을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2월 21일에 로마에 도착한 미켈란젤로의 조카 레오나르도는 미켈란젤로의 유언에 따라 시신을 피렌체로 옮겨가야 한다고 우겼습니다. 결국 레오나르도는 미켈란젤로의 시신을 운반하여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에 안장했습니다. 산타 크로체에는 미켈란젤로가 평생 영웅으로 섬긴 단테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는 곳입니다. 시신이 피렌체에 당도한 건 3월 10일로 바사리가 장례와 안장 문제에 적극 나섰습니다.

미켈란젤로가 타계한 지 몇 달 후에 새로 설립된 피렌체의 예술가 아카데미는 산 로렌초 성당에서 기념식을 개최하고 자신들의 영웅 미켈란젤로의 업적을 기렸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기념식은 정치가들에게만 허락되었던 것으로, 커다란 영구대를 설치하고 은유적인 인물들을 장식하여 그의 일생을 회고한 것은 예술가에게는 영광이었습니다. 기념식의 취지는 미켈란젤로가 위대한 피렌체인이란 점과 메디치 가의 일원이면서 토스카나와 시에나의 대공 코시모 1세의 저명한 신하였음을 널리 알리는 데 있었습니다. 하지만 코시모는 미켈란젤로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미켈란젤로가 생애 마지막 30년을 로마에서 지내면서 메디치 가에 대한 봉사를 회피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여느 예술가들과 달리 자신의 작업장을 갖고 미술 사업에 뛰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한시도 작업에서 손을 뗀 적이 없었습니다. 레오나르도와는 달리 그는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오로지 창작에만 몰두했습니다. 이런 점이 예술가로서 그를 서양미술의 최고 규범이 되게 했습니다. 피렌체 예술가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그는 어떤 문화적인 전통에도 속하지 않고 자연의 힘처럼 스스로 존재했습니다.

중세는 예술론이나 비평이 거의 부재한 시기로, 예술적 자의식과 기술의 성취 사이에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확고한 직업예술가적 자의식이 성기 르네상스의 주요 특징들 중 하나로 나타나게 했습니다. 그는 예술가이면서 이론가였습니다. 그가 즐겨 사용한 말은 “나는 확고한 의견을 갖고 있다”, “나는 나 자신에 모순되지 않는다”, “나는 나의 본래의 의견을 유지할 것이다” 등입니다. 이런 태도는 1555년 율리우스 3세의 뒤를 이어 교황에 오른 마르첼로 2세와 그의 사이를 불화하게 만들었습니다.

가톨릭과 피치노가 소개한 신플라톤주의에 평생 심취했던 그는 늘 자신의 정신을 맑게 하는 데 전념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고, 정신에 내재한 형상을 두드러지게 구현할 완벽한 기술을 습득하고 있었습니다. 미술사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을 가장 잘 실현시킨 예술가 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미켈란젤로일 것입니다. 회화의 무궁무진한 예술적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준 그에 관해 콘디비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듯이 미켈란젤로는 수천 가지 형상을 그렸지만, 그 중에 서로 비슷한 모습이나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 반대로 그는 선 하나를 그을 때도 이전에 이미 사용한 선이 아닌가를 반드시 확인하며, 남에게 보여줄 그림을 그릴 때 만일 그런 선이 발견되면 지워버린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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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코트의 선서

운을 찾아 나선 다비드는 상황을 예의 주시하면서 한편으로 애국심을 고취하는 그림을 그려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상류층 귀족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고 많은 돈을 받았습니다. 그는 18세기 초 영국에서 시작되어 유럽에 퍼진 세계시민주의적, 인도주의적 우애를 목적으로 한 단체 프리메이슨에서 만난 저명한 물리학자이며 화학자 <라부아지에 부부의 초상>(T079)를 그렸는데, 정부의 위임을 받아 세금을 징수하던 회사에 투자하기도 한 라부아지에는 화약 담당 책임자이기도 해서 1789년 8월 6일 화약을 파리로부터 다른 지역으로 옮기기로 결정했을 때 병기고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린치를 당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화면은 불운이 닥치기 한 해 전 자신의 운명을 미처 모를 때의 단란한 부부의 모습입니다. 라부아지에의 책상 가운데 가스계량기가 보이고, 오른편에는 단순한 형태의 기압계와 가스채취용 물통이 보이며, 앞으로 내민 발치에 유리 플라스크와 시간측정기가 보여 그가 다양한 기구들을 사용하여 과학실험을 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줍니다.

정치적 야심을 갖고 다비드는 1790년 9월 자코뱅파에 가입했습니다. 자코뱅파는 중산층 부르주아와 소생산자층에 기반을 둔 공화정 지지 급진파입니다. 지방에 450개의 지부를 거느리고 1790년 7월 14일에 파리에서 프랑스 국민의 통합을 기리는 연맹제를 열 정도로 그 규모가 매우 컸습니다. 다비드는 파리 자코뱅파로부터 혁명을 주제로 한 작품을 의뢰받고 1791년에 <테니스코트의 선서>를 그렸습니다. 6백 명의 대의원이 일체가 되어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보여준 뜻 깊은 사건입니다. 새로운 프랑스를 탄생하게 한 그날의 사건을 기념비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그는 세로 7m 가로 10m의 크기로 그려 의회 안에 걸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그날 현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목격자들의 말을 토대로 그렸습니다. 하지만 드로잉만 남겨야 했는데,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테니스코트의 선서를 위한 인물들의 습작>(T098)을 보면 그가 남성적인 장점을 부각시키려고 의도했음을 알 수 있는데, 한 곳에 모인 남자들의 제스처를 하나로 통일시켜 남성의 우월과 일체감을 시위하려고 했습니다. 남자들의 몸이 이념적으로 바람직한 형상, 올바른 정신, 완전한 도덕성으로 표현되었으며, 모든 남자의 제스처를 한 곳으로 집중하게 하여 혁명의 기운이 팽창할 대로 팽창한 단호한 결의의 정점을 묘사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테니스코트의 선서를 위한 누드습작: 미라보>(T099)를 보면 그가 인물들을 누드로 그린 후 각자에 어울리는 옷을 입힌 것입니다. 이는 오랜 훈련을 통해 익힌 인체 묘사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로써 이런 제작방식은 그의 다른 작품에도 적용됩니다.

<테니스코트의 선서>(T100, T097)는 역사화이지만, 자코뱅파의 시각으로 본 혁명사회입니다. 다비드는 정치적 이상뿐 아니라 남자들 간의 이상적 관계를 특유의 정교한 솜씨로 유감없이 드러냈습니다. 화면 중앙 오른손을 든 사람이 장 실베스트르 베일리로 대의원들을 향해 감동적인 연설을 한 사람이고, 그 아래 성직자 셋이 혁명의 당위성에 지지를 보냈습니다. 세 사람 가운데 왼편 카르투지오 수도회 제의를 입은 사람은 돔 제르유로 그날 참석하지 않았지만, 다비드가 삽입했습니다. 그 옆은 아베 앙리 그레고아르(089)와 라보 생 에티엔(N109)입니다. 하단 오른편 양손을 가슴에 대고 억제할 수 없는 감격의 제스처를 취하는 사람이 자코뱅파의 일원으로 훗날 공포정치를 자행했다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097)입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선서를 거부하는 마르탱 도흐의 모습이 오른편 끝에 보이는데, 의자에 앉은 채 머리를 숙이고 양팔을 가슴 위에 어긋나게 포개고 움츠린 모습입니다. 왼편 끝 병석에서 부축을 받고 나와 역사의 현장에 참석한 모페티 드 라 마이엔, 그의 오른편에 신부 두 사람 티볼트와 리벨의 포옹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양쪽 창문과 왼쪽 입구에는 역사의 현장을 놓치지 않고 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T103bb)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현장을 보여주는 부모도 보이고, 오른쪽 첫 번째 창문에 있는 두 소년은 다비드의 두 아들 샤를과 외젠입니다. 작은 발코니에 사람들의 무리가 보이며, 그들 가운데 칼을 들고 있는 궁정근위병 뒤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장-폴 마라(106)가 열심히 현장기사를 적고 있습니다. 마라는 정치적 일간지 『인민의 벗』을 창간했습니다.

대의원들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창문으로 밀려온 강한 바람이 그 열기를 식혀줍니다. 전제정치에 대한 시민의 반발은 이처럼 걷잡을 수 없이 거세었으므로 혁명은 필연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풀어야 할 숙제가 있었는데, 재정적자와 50억 리브르에 가까운 부채입니다. 파산을 피하기 위해 의원들이 1789년 11월 2일에 30억 리브르로 추산되는 성직자들의 재산의 국유화를 선포했습니다. 당시 성직자들이 전국의 8%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교육과 공공부조를 보장하고 재산을 빼앗긴 성직자들의 생계를 국가가 책임지는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국유재산을 담보로 채권 아시냐를 발행했습니다. 아시냐의 어원은 ‘할당하다’는 뜻입니다. 아시냐는 새로운 지폐가 되었으나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지폐의 과잉이 인플레이션을 야기했지만, 교회재산을 아시냐로 지불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또 다른 암초는 가톨릭교회의 반발이었습니다. 1790년 7월 12일에 발표된 ‘성직자의 시민헌장’은 주교와 주임사제를 국가공무원으로 간주함으로써 교황에 의한 서임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로마로부터 독립하여 종교공무원이 된 성직자들에게 시민헌장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는 선서가 요구되었습니다. 선서는 1791년 1월부터 의무조항이 되었습니다. 선서를 한 주임사제의 절반은 ‘선서파’로 불렸고, 선서를 거부한 나머지 주임사제와 대부분의 주교들은 ‘선서거부파’로 불렸습니다. 1791년 3월, 교황 피우스 6세가 성직자의 시민헌장에 대한 충성 맹세를 비난하자 선서파의 많은 주임사제들이 선서를 취소했으며, 애국파 인사들은 그들을 반혁명 분자와 동일시했습니다.

1792년 봄, 가치의 40%를 상실한 아시냐의 폭락이 엄청난 물가상승을 자극하여 많은 농민들이 곡식의 판매를 거부하는 소요가 벌어지고 있을 즈음 다비드는 루이 16세로부터 왕세자에게 자신이 헌법을 보여주는 장면을 그릴 것을 주문받았습니다. 왕이 이런 장면을 주문한 데서 건재한 왕정과 혁명의 기운을 동시에 감지할 수 있습니다.

다비드는 왕이 왕세자에게 헌법을 보여주는 장면(095bb)과 프랑스 국민이 왕에게 왕관과 왕위를 바치는 장면(096bb)을 은유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이는 왕권이라도 헌법을 준수하지 않으면 사라질 수 있다는 뜻이 담겨있더라도 왕권에 대한 옹호로 보입니다. 이는 다비드의 기회주의 태도를 반영한 것으로 반은 혁명, 반은 왕정에 기운 권력지향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 작품도 완성하지 못했는데, 정치적 전환기를 맞았기 때문입니다. 훗날 루이 16세를 그리려고 했다는 비난을 받았을 때 다비드는 부인하면서 <브루투스 아들들의 시신을 운반하는 릭토르들>을 그린 화가가 어떻게 왕을 그리려 했겠느냐고 거짓말을 하며 궁색하게 변명했는데, 이중적 성격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브루투스 아들들의 시신을 운반하는 릭토르들>(T092, T093)은 루이 16세가 1787년 살롱을 통해 공개하도록 주문한 작품으로 제때에 완성하지 못해 2년 후 살롱에서 선보인 작품입니다. 여기서 브루투스는 율리우스 시저를 살해한 마르쿠스 브루투스가 아니라 기원전 508년 로마의 마지막 전제군주 타르퀴니우스에 맞서 왕정을 폐하고 로마 공화정을 수립하여 최초의 집정관이 된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를 말합니다. 사건은 타르퀴니우스의 아들 섹스투스가 브루투스의 동료 콜라티누스의 정숙한 아내 루크레티아를 강간한 데서 시작됩니다. 루크레티아가 남편과 브루투스가 보는 앞에서 자살하자 브루투스는 그녀의 몸에 꽂힌 칼을 뽑아낸 후 그녀의 피에 대한 복수와 더불어 부패한 독재자를 몰아내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결국 타르퀴니우스는 추방되고 브루투스와 콜라티누스는 첫 로마공화국의 집정관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런데 브루투스의 두 아들 티투스와 티베리우스가 타르퀴니우스의 복귀에 가담했다가 아버지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다비드는 브루투스가 비정한 아비로 아들의 처형에 참석한 모습을 드로잉하며 습작했습니다.(075) 그러나 공식석상에서의 브루투스의 모습보다는 자신의 가정에서의 비정한 아비의 모습을 그리기로 했습니다.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한 스케치에는 바느질 바구니가 없지만 완성작의 테이블 위에 바구니를 그려 넣음으로써 어머니와 두 딸이 함께 바느질을 하다가 시신이 운반되어 오는 것을 보고 경악해하는 장면으로 각색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맏딸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실신하여 어머니의 왼팔에 매달려 있습니다. 화면에 보이는 가구들은 다비드가 로마의 유명한 가구제작자 야곱에게 주문 제작한 것들입니다. 이런 작품을 신고전주의라고 합니다. 신고전주의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양식을 규범으로 하며, 주제를 고대의 에피소드에서 가져오는 것이 보통입니다. 고고학적 정확성과 냉철한 표현을 특징으로 합니다. 18세기 말 프랑스를 중심으로 성행한 신고전주의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대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여 가구와 그릇, 의상, 심지어 그리스의 헤어스타일까지 유행했습니다.

<브루투스 아들들의 시신을 운반하는 릭토르들>은 5년 전에 그린 <호라티우스의 맹세>와 마찬가지로 가족에 대한 사랑과 국가에 대한 의무 사이에서 국가를 선택한 남자와 이에 처절하게 반응하는 여자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호라티우스의 맹세>보다 더욱 극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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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간이라도 규칙적으로 매일 수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붓다 브레인Buddha's Brain』의 저자 릭 핸슨과 리처드 멘디우스는 명상 수련의 결과를 누리려면 무엇보다도,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규칙적으로 매일 수련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마음챙김 명상법을 다음과 같이 권합니다. 마음챙김이란 주의를 잘 집중해 지속하는 걸 의미합니다. 즉 원하는 곳에 주의를 옮겨 가 그곳에 머무를 수 있으며, 옮기고 싶을 때는 언제나 가 그곳에서 그대로 주의를 집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자는 14가지 지침을 소개합니다.


1. 마음을 집중하고 방해받지 않을 만한 편안한 장소를 찾아라. 서서도, 걸어가면서도 또는 누워서도 명상을 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자나 방석에 앉아서 한다.

2. 마음이 이완되어 있으면서도 깨어있을 수 있으면서 척추를 똑바로 유지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하라.

3. 선禪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능숙한 기수가 말을 다룰 때 고삐를 지나치게 조이지도 않고 너무 느슨하게 잡지도 않는 것과 같이 명상할 때 자신의 마음을 잘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4. 하고 싶은 시간만큼 명상하라. 처음 시작할 때는 5분 정도 짧게 시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30분에서 1시간 정도로 오래 앉아 있을 수 있으면 깊은 경지로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된다.

5. 명상을 시작할 때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할 것이라고 미리 정해서 할 수도 있으며, 형편을 봐서 되는 대로 해도 된다. 명상하는 동안 시계를 봐도 괜찮고, 타이머로 시간을 정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향을 피우고 그것이 다 탈 때까지 한다.

6. 눈을 뜨거나 감은 채 깊게 호흡하면서 이완하라. 왔다가 사라져가는 소리를 알아차림 하라. 그 소리가 어떤 소리이든 상관하지 말고 내버려두라. 오직 당신은 지금 이 시간 명상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려라.

7. 명상하는 동안에는 안락의자에 앉기 직전 무거운 주머니가 내려앉는 것처럼 온갖 잡다한 생각에 빠져들 수 있다. 명상이 끝난 후 원한다면 이런 잡다한 생각을 다시 할 수도 있다.

8. 이번에는 호흡할 때의 감각 쪽으로 의식을 모아라. 호흡을 통제하려 하지 말고, 그냥 그대로 내맡겨두어라. 숨을 들이킬 적에 시원한 느낌과 숨을 내쉴 적에 따뜻한 느낌을 느껴보아라. 가슴과 배가 솟아올랐다가 내려가는 걸 느껴라.

9.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호흡할 때마다 느껴지는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머물러 있어라. 원한다면 자신의 호흡을 부드럽게 세어갈 수도 있다. 즉 하나에서 열까지 세고, 그 다음 다시 하나에서 열까지 셀 수도 있으며, 마음이 흔들리면 열에서 하나까지 거꾸로 세어갈 수도 있다. 또는 숨을 들이쉴 때는 ‘들’하고 내쉴 때는 ‘토’하고 조용히 마음속으로 말할 수도 있다.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마음이 흔들리면 바로 호흡으로 되돌아가라. 자신에 대해 부드럽고 친절하게 하라.

10. 연속적으로 열 번째 호흡까지 주의가 흔들리지 않고 지속될 수 있는지 살펴보라. 명상에 들어간 후 처음 일 분 동안 마음이 안정되면 호흡에 집중적으로 몰입하고 다른 일들에는 상관하지 말고 내버려두라.

11. 호흡에서 느낄 수 있는 단순한 쾌감에 먼저 마음을 열고 난 후 호흡으로 넘어가라. 조금 수행이 진전되면 열두어 번 정도 연속적으로 호흡하면서 현재에 머물 수 있는지를 살펴보라.

12. 호흡을 일봉의 닻으로 사용하라. 마음속에 일어나는 무엇이든 살펴보라. 생각이나 느낌, 소원이나 계획, 상상과 기억들이 왔다가 사라져버리는 것을 살펴보라. 그것이 무엇이건 상관하지 말고 내버려두어라. 잡으려 하지도 말고, 다투려 하지도 말며, 끌려가지도 말라. 열려 있는, 깨어 있는 마음의 공간 속으로 무엇이 지나가든 오직 그것을 수용하겠다는 마음을 가진 채, 호흡 속에 머물고 있으면 평화로운 느낌이 더욱 커질 것이다.

13. 마음속에 나타나 지나가는 것들은 모두 변화하는 성질이라는 것을 알아차림 하라. 의식의 공간 속에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어떤 것에 붙잡혀있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가? 또는 붙잡은 그것을 내려놓았을 때는 어떤 느낌이 드는가? 지극히 평화롭고, 광대무변한 의식 그 자체를 알아차림 하라.

14. 자기가 원할 때쯤 명상을 끝내라. 어떻게 느껴졌는지 주목하고 명상의 좋은 점을 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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