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니스코트의 선서
운을 찾아 나선 다비드는 상황을 예의 주시하면서 한편으로 애국심을 고취하는 그림을 그려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상류층 귀족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고 많은 돈을 받았습니다. 그는 18세기 초 영국에서 시작되어 유럽에 퍼진 세계시민주의적, 인도주의적 우애를 목적으로 한 단체 프리메이슨에서 만난 저명한 물리학자이며 화학자 <라부아지에 부부의 초상>(T079)를 그렸는데, 정부의 위임을 받아 세금을 징수하던 회사에 투자하기도 한 라부아지에는 화약 담당 책임자이기도 해서 1789년 8월 6일 화약을 파리로부터 다른 지역으로 옮기기로 결정했을 때 병기고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린치를 당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화면은 불운이 닥치기 한 해 전 자신의 운명을 미처 모를 때의 단란한 부부의 모습입니다. 라부아지에의 책상 가운데 가스계량기가 보이고, 오른편에는 단순한 형태의 기압계와 가스채취용 물통이 보이며, 앞으로 내민 발치에 유리 플라스크와 시간측정기가 보여 그가 다양한 기구들을 사용하여 과학실험을 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줍니다.
정치적 야심을 갖고 다비드는 1790년 9월 자코뱅파에 가입했습니다. 자코뱅파는 중산층 부르주아와 소생산자층에 기반을 둔 공화정 지지 급진파입니다. 지방에 450개의 지부를 거느리고 1790년 7월 14일에 파리에서 프랑스 국민의 통합을 기리는 연맹제를 열 정도로 그 규모가 매우 컸습니다. 다비드는 파리 자코뱅파로부터 혁명을 주제로 한 작품을 의뢰받고 1791년에 <테니스코트의 선서>를 그렸습니다. 6백 명의 대의원이 일체가 되어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보여준 뜻 깊은 사건입니다. 새로운 프랑스를 탄생하게 한 그날의 사건을 기념비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그는 세로 7m 가로 10m의 크기로 그려 의회 안에 걸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그날 현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목격자들의 말을 토대로 그렸습니다. 하지만 드로잉만 남겨야 했는데,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테니스코트의 선서를 위한 인물들의 습작>(T098)을 보면 그가 남성적인 장점을 부각시키려고 의도했음을 알 수 있는데, 한 곳에 모인 남자들의 제스처를 하나로 통일시켜 남성의 우월과 일체감을 시위하려고 했습니다. 남자들의 몸이 이념적으로 바람직한 형상, 올바른 정신, 완전한 도덕성으로 표현되었으며, 모든 남자의 제스처를 한 곳으로 집중하게 하여 혁명의 기운이 팽창할 대로 팽창한 단호한 결의의 정점을 묘사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테니스코트의 선서를 위한 누드습작: 미라보>(T099)를 보면 그가 인물들을 누드로 그린 후 각자에 어울리는 옷을 입힌 것입니다. 이는 오랜 훈련을 통해 익힌 인체 묘사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로써 이런 제작방식은 그의 다른 작품에도 적용됩니다.
<테니스코트의 선서>(T100, T097)는 역사화이지만, 자코뱅파의 시각으로 본 혁명사회입니다. 다비드는 정치적 이상뿐 아니라 남자들 간의 이상적 관계를 특유의 정교한 솜씨로 유감없이 드러냈습니다. 화면 중앙 오른손을 든 사람이 장 실베스트르 베일리로 대의원들을 향해 감동적인 연설을 한 사람이고, 그 아래 성직자 셋이 혁명의 당위성에 지지를 보냈습니다. 세 사람 가운데 왼편 카르투지오 수도회 제의를 입은 사람은 돔 제르유로 그날 참석하지 않았지만, 다비드가 삽입했습니다. 그 옆은 아베 앙리 그레고아르(089)와 라보 생 에티엔(N109)입니다. 하단 오른편 양손을 가슴에 대고 억제할 수 없는 감격의 제스처를 취하는 사람이 자코뱅파의 일원으로 훗날 공포정치를 자행했다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097)입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선서를 거부하는 마르탱 도흐의 모습이 오른편 끝에 보이는데, 의자에 앉은 채 머리를 숙이고 양팔을 가슴 위에 어긋나게 포개고 움츠린 모습입니다. 왼편 끝 병석에서 부축을 받고 나와 역사의 현장에 참석한 모페티 드 라 마이엔, 그의 오른편에 신부 두 사람 티볼트와 리벨의 포옹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양쪽 창문과 왼쪽 입구에는 역사의 현장을 놓치지 않고 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T103bb)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현장을 보여주는 부모도 보이고, 오른쪽 첫 번째 창문에 있는 두 소년은 다비드의 두 아들 샤를과 외젠입니다. 작은 발코니에 사람들의 무리가 보이며, 그들 가운데 칼을 들고 있는 궁정근위병 뒤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장-폴 마라(106)가 열심히 현장기사를 적고 있습니다. 마라는 정치적 일간지 『인민의 벗』을 창간했습니다.
대의원들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창문으로 밀려온 강한 바람이 그 열기를 식혀줍니다. 전제정치에 대한 시민의 반발은 이처럼 걷잡을 수 없이 거세었으므로 혁명은 필연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풀어야 할 숙제가 있었는데, 재정적자와 50억 리브르에 가까운 부채입니다. 파산을 피하기 위해 의원들이 1789년 11월 2일에 30억 리브르로 추산되는 성직자들의 재산의 국유화를 선포했습니다. 당시 성직자들이 전국의 8%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교육과 공공부조를 보장하고 재산을 빼앗긴 성직자들의 생계를 국가가 책임지는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국유재산을 담보로 채권 아시냐를 발행했습니다. 아시냐의 어원은 ‘할당하다’는 뜻입니다. 아시냐는 새로운 지폐가 되었으나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지폐의 과잉이 인플레이션을 야기했지만, 교회재산을 아시냐로 지불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또 다른 암초는 가톨릭교회의 반발이었습니다. 1790년 7월 12일에 발표된 ‘성직자의 시민헌장’은 주교와 주임사제를 국가공무원으로 간주함으로써 교황에 의한 서임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로마로부터 독립하여 종교공무원이 된 성직자들에게 시민헌장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는 선서가 요구되었습니다. 선서는 1791년 1월부터 의무조항이 되었습니다. 선서를 한 주임사제의 절반은 ‘선서파’로 불렸고, 선서를 거부한 나머지 주임사제와 대부분의 주교들은 ‘선서거부파’로 불렸습니다. 1791년 3월, 교황 피우스 6세가 성직자의 시민헌장에 대한 충성 맹세를 비난하자 선서파의 많은 주임사제들이 선서를 취소했으며, 애국파 인사들은 그들을 반혁명 분자와 동일시했습니다.
1792년 봄, 가치의 40%를 상실한 아시냐의 폭락이 엄청난 물가상승을 자극하여 많은 농민들이 곡식의 판매를 거부하는 소요가 벌어지고 있을 즈음 다비드는 루이 16세로부터 왕세자에게 자신이 헌법을 보여주는 장면을 그릴 것을 주문받았습니다. 왕이 이런 장면을 주문한 데서 건재한 왕정과 혁명의 기운을 동시에 감지할 수 있습니다.
다비드는 왕이 왕세자에게 헌법을 보여주는 장면(095bb)과 프랑스 국민이 왕에게 왕관과 왕위를 바치는 장면(096bb)을 은유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이는 왕권이라도 헌법을 준수하지 않으면 사라질 수 있다는 뜻이 담겨있더라도 왕권에 대한 옹호로 보입니다. 이는 다비드의 기회주의 태도를 반영한 것으로 반은 혁명, 반은 왕정에 기운 권력지향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 작품도 완성하지 못했는데, 정치적 전환기를 맞았기 때문입니다. 훗날 루이 16세를 그리려고 했다는 비난을 받았을 때 다비드는 부인하면서 <브루투스 아들들의 시신을 운반하는 릭토르들>을 그린 화가가 어떻게 왕을 그리려 했겠느냐고 거짓말을 하며 궁색하게 변명했는데, 이중적 성격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브루투스 아들들의 시신을 운반하는 릭토르들>(T092, T093)은 루이 16세가 1787년 살롱을 통해 공개하도록 주문한 작품으로 제때에 완성하지 못해 2년 후 살롱에서 선보인 작품입니다. 여기서 브루투스는 율리우스 시저를 살해한 마르쿠스 브루투스가 아니라 기원전 508년 로마의 마지막 전제군주 타르퀴니우스에 맞서 왕정을 폐하고 로마 공화정을 수립하여 최초의 집정관이 된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를 말합니다. 사건은 타르퀴니우스의 아들 섹스투스가 브루투스의 동료 콜라티누스의 정숙한 아내 루크레티아를 강간한 데서 시작됩니다. 루크레티아가 남편과 브루투스가 보는 앞에서 자살하자 브루투스는 그녀의 몸에 꽂힌 칼을 뽑아낸 후 그녀의 피에 대한 복수와 더불어 부패한 독재자를 몰아내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결국 타르퀴니우스는 추방되고 브루투스와 콜라티누스는 첫 로마공화국의 집정관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런데 브루투스의 두 아들 티투스와 티베리우스가 타르퀴니우스의 복귀에 가담했다가 아버지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다비드는 브루투스가 비정한 아비로 아들의 처형에 참석한 모습을 드로잉하며 습작했습니다.(075) 그러나 공식석상에서의 브루투스의 모습보다는 자신의 가정에서의 비정한 아비의 모습을 그리기로 했습니다.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한 스케치에는 바느질 바구니가 없지만 완성작의 테이블 위에 바구니를 그려 넣음으로써 어머니와 두 딸이 함께 바느질을 하다가 시신이 운반되어 오는 것을 보고 경악해하는 장면으로 각색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맏딸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실신하여 어머니의 왼팔에 매달려 있습니다. 화면에 보이는 가구들은 다비드가 로마의 유명한 가구제작자 야곱에게 주문 제작한 것들입니다. 이런 작품을 신고전주의라고 합니다. 신고전주의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양식을 규범으로 하며, 주제를 고대의 에피소드에서 가져오는 것이 보통입니다. 고고학적 정확성과 냉철한 표현을 특징으로 합니다. 18세기 말 프랑스를 중심으로 성행한 신고전주의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대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여 가구와 그릇, 의상, 심지어 그리스의 헤어스타일까지 유행했습니다.
<브루투스 아들들의 시신을 운반하는 릭토르들>은 5년 전에 그린 <호라티우스의 맹세>와 마찬가지로 가족에 대한 사랑과 국가에 대한 의무 사이에서 국가를 선택한 남자와 이에 처절하게 반응하는 여자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호라티우스의 맹세>보다 더욱 극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