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 베퇴이유의 자연에 빠지다



 



 

 

난 깃발을 좋아했지. 첫 국경일인 6월 30일 몽토르궤유 가를 거닐러 나갔어. 거리는 작은 깃발들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로 덮여 있었어. 발코니를 발견하고 그리로 올라갔지.



 

 



모네의 <몽토르궤유 가, 1878년 6월 30일 The Rue Montorgeuil, 30 June 1878>, 1878, 유화

 

프랑스 정부는 1878년의 만국박람회 성공을 기념하여 6월 30일을 국민의 축제일로 결정했습니다. 1870-71년 보불전쟁 후 처음 맞는 경축일입니다. 모네는 이 작품을 제4회 인상주의전에 출품했습니다.



1920년 10월 여든 살의 모네가 당시를 회상한 글입니다. 1878년 6월 30일 파리는 만국박람회를 축하하는 국경일로 거리에 프랑스 국기가 펄럭거렸고, 사람들은 축제 분위기에 들떴습니다. 모네가 그 발코니에서 깃발로 물결치는 거리를 그린 것이 <몽토르궤유 가, 1878년 6월 30일>입니다. 온통 깃발로 출렁이고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는 대각선 구성이라 더 강렬한 인상을 줍니다.



 

 



마네의 <깃발로 장식된 모니에 가 Rue Mosnier Decorated with Flags>, 1878, 유화, 65-81cm.

경축을 마친 후의 적막함을 나타낸 마네의 작품은 깃발들로 넘실대는 모네의 것과 비교됩니다.



 

같은 날 마네가 그린 <모니에 가의 깃발>은 모네의 작품에 비해 허전하고 낯선 풍경입니다. 그는 나부끼는 깃발보다는 피서철을 맞아 거리에 나타난 빛과 어둠의 조화에 더 관심을 두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쪽 다리를 잃은 상이군인의 쓸쓸한 뒷모습과 보도 옆에 멈춰 선 마차는 국경일을 바라본 마네의 시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화실 창문으로 이 거리를 종종 내려다봤으며, 국경일을 맞이하기 전 도로를 포장하는 장면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마네의 <모니에 가 The Road-Menders, Rue de Berne>, 1878, 유화, 63-79cm.

이 거리는 당시 모니에 가로 불리었지만, 오늘날에는 베르느 가로 불리고 있습니다.



 

 



마네의 <모니에 가의 깃발 La Rue Mosnier Pavoisee>, 1878, 유화, 65-80cm.

마네의 화실 창문에서 내려다본 이 장면은 7월 14일의 축제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 6월 30일의 축제를 묘사한 것이 아닌가 추측도비니다. 축제가 남긴 분위기를 전하려고 했는지 적막한 거리의 풍경이 이륜마차와 목발을 집고 걸어가는 남자의 모습을 통해 인상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마네의 기록에 의하면 이 작품은 1879년에 5백 프랑에 팔렸습니다.



 

모네는 <몽토르궤유 가, 1878년 6월 30일>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파리 장면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모네는 파리를 떠나 베퇴이유의 센 강변, 너무도 멋진 장소에 텐트를 쳤다는 소식을 전했고(1878. 9. 1 뮈레에게), 작품을 팔기 위해 들르는 일 외에는 파리에 가지 않을 작정이라고 편지했습니다.(1879. 2. 8 뒤레에게)



 

 



모네의 <안개 낀 베퇴이유 Vetheuil dans le Brouillard>, 1879, 유화, 60-81cm.

처음으로 안개 속에 형태가 부서진 모습으로 그린 것으로 장차 그릴 비물질화 작품들의 효시가 되는 작품입니다.



 

 



모네의 <베퇴이유의 언덕 The Hills of Vetheuil>, 1880, 유화, 61-99cm.



 

 



모네의 <베퇴이유 교회 Vetheuil Chuech>, 1879년경, 유화, 51-61cm.

 

모네는 6년 동안 거주했던 아르장퇴유를 떠나 1878년 베퇴이유로 이주해 그곳에서 1881년 말까지 살았습니다. 베퇴이유는 센 강 오른쪽 언덕에 위치한 작은 마을입니다. 교회는 마을의 작은 언덕 중간에 있습니다. 이 교회는 1873년에 그린 <아르장퇴유의 가을>에 배경으로 나타난 적이 있습니다. 강물이 언덕을 치며 흐르는데, 봄의 증수가 시작된 것입니다. 아직은 춥고 흐린 날에 모네는 정적인 가운데 움직임이 있는 풍경을 짧은 붓질로 묘사했습니다. 언덕에는 아직 잔설이 있습니다.



파리 서북쪽 센 강둑에 위치한 베퇴이유는 오래된 교회가 우뚝 솟은 작은 동네로 경관이 아름다워 풍경화가인 모네가 이곳을 놓칠 리 없었습니다. 강둑에 서면 숲으로 우거진 섬들이 흩어져 있는 센 강의 만곡부가 훤히 보이는 곳입니다. <안개 낀 베퇴이유>는 안개 짙은 날 교회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는 집들을 강둑에서 바라본 장면이고, <베퇴이유 교회>와 <베퇴이유의 언덕> 등은 맑은 날 다양한 각도로 바라본 장면들입니다.

모네가 1878-81년에 거주한 베퇴이유는 약 6백 명이 사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모네는 1878년 12월 어른 4명과 아이 8명이 함께 살 수 있는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하는 한편 지난해부터 사용해오던 몽세이 가 화실을 처분하고 뱅탱유 가 20번지에 새 화실을 얻었습니다. 불황을 맞아 파산한 오슈드가 집과 소장했던 미술품들을 모두 잃어버렸으므로 두 가족은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한집에 살기로 한 것입니다.

모네가 아르장퇴유로부터 센 강을 따라 남쪽에 위치한 베퇴이유에 살게 된 건 마네의 경제적 후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네가 베퇴이유에서 마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친애하는 마네,

종종 선생을 떠올리며 얼마나 큰 빚을 제가 지고 있는가 생각해봅니다. 선생도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을 터인데 돈을 갚으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 선생의 그림이 열렬히 환영받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정말 기뻤습니다. 정말이지 놀라운 그림들을 그리셨습니다.

모네 올림”(1879. 5. 14)

 

베퇴이유의 집에는 강까지 이어지는 과수원이 있었습니다. 모네는 강에 정박해둔 자신의 보트를 타고 강을 오르내리며 주변 경관들을 캔버스에 담아왔습니다. 베퇴이유로 이주한 후 모네는 자연에 파묻혀 작업에만 열중했으므로 무명협동협회 화가들과는 만나는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제4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29점의 작품을 출품하기로 했지만, 1879년 3월 25일 뮈레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배신자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동의했을 뿐”이라고 적혀 있어 그가 전시회에 별 관심이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네의 <베퇴이유 마을 The Town of Vetheuil>, 1881, 유화

 

베퇴이유는 모네의 생애에 중요한 장을 차지하는 곳으로 새로운 체험을 하게 해준 곳이며, 또한 방대한 작업을 하게 해준 곳입니다. 베퇴이유를 센 강에 비친 아름다운 마을로 묘사했는데, 그의 작품에서 물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모네의 <인물이 있는 과수원 풍경, 베퇴이유 Landscape with Orchard and Figures, Vetheuil>, 1879, 유화, 72-91cm.



 

 



모네의 <베퇴이유의 예술가 정원 The Artist's Garden at Vetheuil>, 1880, 유화

실제로는 1881년에 그린 것입니다.



 

모네는 보트를 타고 거의 위치를 바꾸지 않은 채 동일한 주제를 끊임없는 빛의 변화에 따라 상이하게 묘사하는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을 보면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일기에 따른 변화를 눈으로 읽을 수 있는데, 붓질을 짧게 하는 기교로 특히 물의 운동을 강조했습니다. 이런 기교는 아르장퇴유에서 이미 익힌 것입니다. 그가 베퇴이유에 머문 기간에 그린 그림이 무려 300점이나 되는 걸로 봐서 매주 평균 2점씩 그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의 그림들을 카이유보트, 뒤레, 드 벨리오가 속속 구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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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 스캔들: 나폴레옹은 백마를 타고 알프스를 넘지 않았다

 



 

 

 

오늘, 5월 31일 화요일 밤 11시 45분,

KBS1에서 진행되는 '명작 스캔들'에 나폴레옹이 탄 백마는 사실이 아니라는 취지의 내용이 방영됩니다.

이 프로는 제가 쓴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저는 영상으로 프로에 참여합니다.  

이 프로를 위해 PD가 프랑스 메종 박물관에도 가는 등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저의 영상물은 저의 집에 와서 서재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시청하시고 좋은 의견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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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적으로 매일 수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붓다 브레인Buddha's Brain』의 저자 릭 핸슨과 리처드 멘디우스는 명상 수련의 결과를 누리려면 무엇보다도,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규칙적으로 매일 수련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마음챙김 명상법을 다음과 같이 권합니다. 마음챙김이란 주의를 잘 집중해 지속하는 걸 의미합니다. 즉 원하는 곳에 주의를 옮겨 가 그곳에 머무를 수 있으며, 옮기고 싶을 때는 언제나 가 그곳에서 그대로 주의를 집중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마음을 집중하고 방해받지 않을 만한 편안한 장소를 찾아라. 서서도, 걸어가면서도 또는 누워서도 명상을 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자나 방석에 앉아서 한다.

2. 마음이 이완되어 있으면서도 깨어있을 수 있으면서 척추를 똑바로 유지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하라.

3. 선禪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능숙한 기수가 말을 다룰 때 고삐를 지나치게 조이지도 않고 너무 느슨하게 잡지도 않는 것과 같이 명상할 때 자신의 마음을 잘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4. 하고 싶은 시간만큼 명상하라. 처음 시작할 때는 5분 정도 짧게 시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30분에서 1시간 정도로 오래 앉아 있을 수 있으면 깊은 경지로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된다.

5. 명상을 시작할 때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할 것이라고 미리 정해서 할 수도 있으며, 형편을 봐서 되는 대로 해도 된다. 명상하는 동안 시계를 봐도 괜찮고, 타이머로 시간을 정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향을 피우고 그것이 다 탈 때까지 한다.

6. 눈을 뜨거나 감은 채 깊게 호흡하면서 이완하라. 왔다가 사라져가는 소리를 알아차림 하라. 그 소리가 어떤 소리이든 상관하지 말고 내버려두라. 오직 당신은 지금 이 시간 명상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려라.

7. 명상하는 동안에는 안락의자에 앉기 직전 무거운 주머니가 내려앉는 것처럼 온갖 잡다한 생각에 빠져들 수 있다. 명상이 끝난 후 원한다면 이런 잡다한 생각을 다시 할 수도 있다.

8. 이번에는 호흡할 때의 감각 쪽으로 의식을 모아라. 호흡을 통제하려 하지 말고, 그냥 그대로 내맡겨두어라. 숨을 들이킬 적에 시원한 느낌과 숨을 내쉴 적에 따뜻한 느낌을 느껴보아라. 가슴과 배가 솟아올랐다가 내려가는 걸 느껴라.

9.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호흡할 때마다 느껴지는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머물러 있어라. 원한다면 자신의 호흡을 부드럽게 세어갈 수도 있다. 즉 하나에서 열까지 세고, 그 다음 다시 하나에서 열까지 셀 수도 있으며, 마음이 흔들리면 열에서 하나까지 거꾸로 세어갈 수도 있다. 또는 숨을 들이쉴 때는 ‘들’하고 내쉴 때는 ‘토’하고 조용히 마음속으로 말할 수도 있다.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마음이 흔들리면 바로 호흡으로 되돌아가라. 자신에 대해 부드럽고 친절하게 하라.

10. 연속적으로 열 번째 호흡까지 주의가 흔들리지 않고 지속될 수 있는지 살펴보라. 명상에 들어간 후 처음 일 분 동안 마음이 안정되면 호흡에 집중적으로 몰입하고 다른 일들에는 상관하지 말고 내버려두라.

11. 호흡에서 느낄 수 있는 단순한 쾌감에 먼저 마음을 열고 난 후 호흡으로 넘어가라. 조금 수행이 진전되면 열두어 번 정도 연속적으로 호흡하면서 현재에 머물 수 있는지를 살펴보라.

12. 호흡을 일봉의 닻으로 사용하라. 마음속에 일어나는 무엇이든 살펴보라. 생각이나 느낌, 소원이나 계획, 상상과 기억들이 왔다가 사라져버리는 것을 살펴보라. 그것이 무엇이건 상관하지 말고 내버려두어라. 잡으려 하지도 말고, 다투려 하지도 말며, 끌려가지도 말라. 열려 있는, 깨어 있는 마음의 공간 속으로 무엇이 지나가든 오직 그것을 수용하겠다는 마음을 가진 채, 호흡 속에 머물고 있으면 평화로운 느낌이 더욱 커질 것이다.

13. 마음속에 나타나 지나가는 것들은 모두 변화하는 성질이라는 것을 알아차림 하라. 의식의 공간 속에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어떤 것에 붙잡혀있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가? 또는 붙잡은 그것을 내려놓았을 때는 어떤 느낌이 드는가? 지극히 평화롭고, 광대무변한 의식 그 자체를 알아차림 하라.

14. 자기가 원할 때쯤 명상을 끝내라. 어떻게 느껴졌는지 주목하고 명상의 좋은 점을 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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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신간: 그림을 통해 배우는 삶의 지혜

 정치에 입문한 화가

 

 
다비드가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통해 운을 잡으려 한 때는 마흔네 살로 1792년 9월 국민공회를 통해 파리를 대표하는 의원에 선출된 후부터였습니다. 정치활동을 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탐욕을 채워줄 수 있는 부와 명성이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알았습니다. 부와 명성은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연한 개념이지만, 사람들이 일단 그것에 목표를 정하게 되면 돌진하는 경향을 나타냅니다. 끝장을 보는 쪽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화가가 회화보다 정치에 더욱 몰입한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국민공회의 의원에 선출된 것을 계기로 다비드는 산악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로베스피에르, 마라, 그리고 파리에서 변호사로 활약하던 조르주 자크 당통 등과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국민공회는 8월 10일 400명 이상이 사망한 시민의 봉기로 왕권이 정지된 후 입법의회에 이어 개설된 헌법제정의회입니다. 그해 9월 21일부터 1795년 10월 26일까지 존속했습니다. 보통선거로 선출된 의원 749명 중 자코뱅파를 중심으로 한 산악파가 약 200명이었습니다. 산악파에 맞선 세력은 상공업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한 온건한 지롱드파로 약 160명이었습니다. 약 400명의 우유부단한 중간파인 평원파는 사안에 따라서 산악파나 지롱드파를 지지했습니다. 국민공회는 개회와 함께 공화정을 선포했습니다.

스위스 출생의 외과의사이며 언론인 마라는 프랑스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입니다. 1770년대 런던에서 의사로 명성을 날리다가 1777년에 파리로 온 그는 1783년에 의사 직을 버리고 정치체제에 반항적 태도를 취하면서 몽테스키외와 장-자크 루소의 앙시앙 레짐에 대한 비판적 견해에 동화되었습니다. 언론인으로서 과격한 혁명분자들에게 호의적인 그는 왕실의 적자를 세금으로 충당하는 데 반대했으며, 1790년 초 재무총감 니케르를 신랄하게 공격한 글을 쓴 뒤 영국으로 피신했다가 석 달 만에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는 국민공회에서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되었습니다.

국민공회는 1792년 9월 21일 군주제의 종식을 선언하고 11월부터 루이 16세의 신병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관해 논의한 끝에 12월 11일 전제군주로 왕을 법정에 세웠습니다. 이듬해 1월 16일에 열린 국민공회는 왕에게 법적 심판을 내리기로 하고 이에 대한 대의원들의 의견을 24시간에 걸쳐 청취했는데, 산악파는 왕을 처형하여 혁명을 공고히 하자고 주장했고, 지롱드파는 인민투표를 통해 형의 선고를 재가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다비드는 처형에 찬동했습니다. 최종적으로 결의한 결과 387 대 334로 처형하자는 의견이 우세했습니다. 이틀 뒤인 1월 21일 루이 16세의 죄목이 공표되고 다음날 그는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왕을 처형하기 위한 단두대가 혁명광장에 설치되었습니다. 단두대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동등한 방법으로 처형하기 위해 고안된 된 것입니다. 고해신부는 왕이 처형대 계단을 오를 때 “성 루이의 아들이 하늘로 오른다”는 말로 조소했습니다. 왕은 군중을 향해 자신을 처형하는 사람들을 용서한다고 말했습니다. 왕의 두터운 목을 40kg에 달하는 칼이 내리치며 잘랐고, 한 젊은이가 왕의 머리를 들어 군중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몇몇 사람이 달려가 천과 종이를 들이대고 뚝뚝 떨어지는 왕의 피를 받았습니다.(099, 098bb, 100)

프랑스 국왕이 단두대에서 비참하게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의 왕족들이 치를 떨었습니다. 영국이 대불동맹의 결성에 앞장섰습니다. 국민공회는 2월 1일 영국과 네덜란드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대불동맹에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독일의 제후들, 러시아, 에스파냐, 교황, 이탈리아의 제후들이 가담하여 유럽 전체가 프랑스에 대항하며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프랑스는 벨기에를 상실했고, 동부의 정복지도 내주어야 했습니다. 남부에서 에스파냐 군대가 루시용을 침입하자 탈영이 빈번하게 나타났습니다. 국내에선 내전이 일어나 왕당파가 봉기했습니다. 1793년 4월 6일, 평원파의 지지를 받은 산악파는 국민공회에서 9인의 위원으로 이루어진 공안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받은 공안위원회는 부자들에게 강제로 부채를 부과하고 곡물에 대한 공정가격제의 실시를 결정했습니다. 지롱드파의 반발 속에 산악파가 공안위원회를 지휘한 기간은 1년이나 되었습니다. 공포정치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 시기에 파리에서 단두대를 보기란 쉬웠으며, 공안위원회는 너무 신속하게 많은 사람들을 처형했습니다. 단두대를 설치할 때 인근 주민과 상점 주인들이 심하게 반대했는데, 냄새가 지독한 데다 개들이 떼를 지어와 바닥에 떨어진 피를 핥아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단두대는 지역별로 필요에 의해 정기적으로 설치되었습니다.

탕플탑에 유폐된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국고를 낭비한 죄와 오스트리아와 공모하여 반혁명을 시도했다는 죄명으로 1793년 10월 16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녀에게는 루이 16세와의 사이에 네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차남 루이 17세는 1795년 감옥에서 폐결핵으로 죽었고, 장녀 마리 테레즈만이 성인으로 성장하여 당글렘 공작의 부인이 되었습니다.

루이 16세의 처형은 다비드 인생에 전환이 되었습니다. 다비드의 아내는 남편이 왕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진 데 대해 화를 내며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왕권을 신성시한 오랜 전통으로 인해 왕의 처형에 찬성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죄의식을 느꼈습니다. 다비드의 아내도 혁명을 지지했지만 남편이 지나치게 과격한 행동을 취하자 우려했으며, 불화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마침내 별거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다비드 부부는 1794년 3월 합법적으로 이혼했습니다. 아내의 돈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자 다비드는 한동안 경제적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가 두 아들을 맡고 아내가 두 딸을 맡았습니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여 다비드는 1794년 1월부터 2월까지 국민공회 회장직을 역임하고 자코뱅파 회장으로도 활약했으며, 안보위원회와 교육위원회 멤버로 활동했습니다. 안보위원회는 그날의 테러를 계획하고 결정하는 매우 과격한 단체로 이런 공포정치에 화가가 깊숙이 개입한 것입니다.(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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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생라자르 역>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모네는 아르장퇴유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여전히 궁핍했는데 1876년의 수입이 12,313프랑으로 1873년 이래 가장 수입이 많았지만, 지출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해 빚은 계속 늘어갔습니다. 드 벨리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후원자가 거액을 선뜻 내놓지 않는 한 우리는 아담하고 멋진 집에서 쫓겨날 것 같습니다. … 이 집에서 참으로 편히 작업해왔는데”(1876. 7. 25)라고 적었습니다. 또 다른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두 밤만 더 지나면 아르장퇴유를 떠나야 하네. 그러기 전에 빚을 갚아야 할 텐데”(1877. 1. 15)라고 적혀 있습니다.

모네는 1877년 초 파리의 몽세이 17번지 아파트로 화실을 옮겼는데, 그곳은 루앙, 노르망디, 아르장퇴유로 가는 기차역 생라자르 근처로서 마네가 1860-70년대에 살았던 지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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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생라자르 역, 도착한 기차 Gare Saint-Lazare, Arrival of a Train>, 1877, 유화

생라자르 역은 카페 게르부아에서 가까운 곳입니다. 1876년부터 이듬해 겨울까지 모네는 이 역을 주제로 여러 점 그렸습니다. 유리로 된 거대한 역 구내, 흰 증기와 연기를 뿜어내는 증기기관차, 연신 기차가 들고 나는 역 구내에서 보이는 맑은 하늘과 검은 기관차는 대비를 이룹니다. 모네는 그의 특유의 방법으로 같은 장소에서 이리저리 이젤을 옮겨 세우고 동일한 모티프를 달리 표현했습니다. 아르장퇴유에서 그는 이미 철로와 기차 그리고 기차가 방사하는 연기를 그린 적이 있습니다. 다양한 기상조건 속에서 바라보는 역의 모습은 각기 다른 한 폭의 그림입니다. 그는 1876-77년 겨울에 그린 시리즈 8점을 1877년 4월에 열린 제3회 인상주의전에서 선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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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유럽의 징검다리 The Pont de l'Europe>, 1877, 유화, 64-8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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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생라자르 역, 바깥 장면 La Gare Saint-Lazare, Vue Exterieure>, 1877, 유화, 64-8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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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생라자르 역 외관, 시그널 La Gare Saint-Lazare, a l'Exterieur, Le Signal>, 1877, 유화, 65-81.5cm.


모네는 그해 1월 생라자르 역 안에 들어가 그려도 좋다는 역장의 허락을 받고 4월까지 12점이나 그렸습니다. 그것들 중 세 점을 카이유보트가 소장했는데, 아파트를 얻어준 대가로 받은 것 같았습니다. 생라자르 역은 에밀 졸라의 소설 『인간이라는 짐승』(1889-90)에 자주 등장하는 장소로서 졸라는 리종이란 명칭의 증기기관차를 묘사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했습니다.

모네는 정거장 연작을 그리면서 시간에 따라 빛이 변화를 일으킬 때마다 색을 달리 사용했습니다. 그의 화면에 나타난 빛과 기차가 방사한 연기는 터너의 그림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추상적 색조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역과 역 밖의 두 세계를 병렬했는데, 파란색과 보라색이 어우러진 색으로 역 밖의 세계는 장밋빛과 금빛으로 묘사했습니다. 흩어지는 기차 연기는 도시의 에너지와 동력으로 캔버스를 가득 채웠습니다. 생라자르는 모네에게 아주 낯익은 곳으로 그가 르아브르에서 파리로 올 때 이 역에서 내리곤 했습니다.

그해 4월에 개최된 제3회 인상주의전에 모네는 <칠면조>, 몽제롱에서 그린 그림들, 파리의 공공 유원지를 그린 그림들, 생라자르 역을 주제로 한 그림 8점을 포함하여 모두 30점을 출품했습니다. 이 전시를 카이유보트가 재정적으로 후원했습니다. 이 전시를 관람한 평론가 샤를 비고는 모네의 그림에는 “예술가 내면의 느낌이 나타나 있지 않다. 인생의 교묘함이 없으며 개인적인 영상이 부재하고, 예술가와 인간에 관해 제시할 수 있는 주제의 선택도 없다. 그의 그림에는 혼과 정신이 부재한다”고 평했습니다. 폴 세잔도 <빅토르 쇼케의 초상>244을 포함하여 17점을 출품했는데, 이 역시 『르 샤리바리』의 평론가로부터 혹평을 받았습니다.

임산부와 함께 전시회에 간다면 세잔 씨의 남자 초상화 앞을 빨리 지나치도록 하십시요. … 머리와 구두색깔은 너무 기괴해서 임산부에게 충격을 줄 것이며 태아는 태어나기도 전에 황열병에 걸릴 테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드가의 친구인 소설가이면서 평론가 루이 에밀 에드몽 뒤랑티, 마네의 친구 테오도르 뒤레, 평론가 조르주 리비에르 등은 인상주의 화가들을 적극적으로 옹호했습니다. 리비에르는 세잔의 작품을 극찬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세잔의 <수욕도>를 냉소하는 자들은 파르테논 신전을 멋대가리 없다고 비판하는 야만인과도 같다.

평론가들이 주제에 대한 개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모네에 의해서였습니다. 모네는 자신이 본 것을 충실하게 재현했을 뿐 어떤 의미도 그림에 삽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관찰한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족했습니다. 그는 누드를 그린 적이 없었으며, 인물을 그리더라도 모델의 심리상태나 얼굴에 나타난 개성을 표현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모네의 작품이 진전된 사실주의라는 점을 먼저 안 사람은 졸라였고, 조르주 클레망소가 졸라의 의견에 동감했습니다. 졸라는 『마르세유의 신호대』(1877. 4. 19)에 기고했습니다.

클로드 모네는 이 그룹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금년 들어 그는 기차역 풍경을 담은 수작을 몇 점 선보였다. 그의 그림에서는 기차의 굉음이 들리는 듯하며 증기가 거대한 역 내부를 뒤덮으며 뭉실뭉실 떠가는 광경이 눈에 선하다. 여기 이 아름답고 널찍한 현대 캔버스 속에 오늘날의 그림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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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센 강둑, 라 그랑자트 섬 Les Bords de la Seine, Ile de la Grande Jatte>, 1878, 유화, 54-65cm.


모네의 부채는 줄지 않고 오히려 늘어만 갔습니다. 그는 1878년 1월 카미유와 장을 데리고 아르장퇴유를 떠나 파리의 데댕부르 가 26번지에서 몇 달 지내면서 여전히 몽세이의 화실에서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그랑자트 섬이 바라보이는 강둑에서 그곳 풍경을 그렸습니다. 모네는 그해 봄에 1874년부터 그린 그림 16점을 경매에 붙였는데, 한 점에 2백 프랑 미만에 팔렸으므로 그의 평생 최악의 상태였고, 스스로 경제적 궁핍으로부터 벗어나기란 불가능했습니다. 이 시기에 카미유의 건강이 몹시 나빴습니다. 그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가 미술품 수집가 에르네스 메에게 보낸 편지는 눈물겹습니다.

아내가 3월 17일에 둘째 아이를 낳았습니다만 돈이 없어 산모와 아이의 병원비조차 감당할 능력이 없습니다”(1878. 3. 30)

모네의 둘째 아들 미셸의 출생등록 증인이 되어 준 마네가 이번에도 앞장서서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미셸을 낳은 후 카미유의 건강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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