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는 신간: 그림을 통해 배우는 삶의 지혜

 정치에 입문한 화가

 

 
다비드가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통해 운을 잡으려 한 때는 마흔네 살로 1792년 9월 국민공회를 통해 파리를 대표하는 의원에 선출된 후부터였습니다. 정치활동을 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탐욕을 채워줄 수 있는 부와 명성이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알았습니다. 부와 명성은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연한 개념이지만, 사람들이 일단 그것에 목표를 정하게 되면 돌진하는 경향을 나타냅니다. 끝장을 보는 쪽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화가가 회화보다 정치에 더욱 몰입한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국민공회의 의원에 선출된 것을 계기로 다비드는 산악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로베스피에르, 마라, 그리고 파리에서 변호사로 활약하던 조르주 자크 당통 등과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국민공회는 8월 10일 400명 이상이 사망한 시민의 봉기로 왕권이 정지된 후 입법의회에 이어 개설된 헌법제정의회입니다. 그해 9월 21일부터 1795년 10월 26일까지 존속했습니다. 보통선거로 선출된 의원 749명 중 자코뱅파를 중심으로 한 산악파가 약 200명이었습니다. 산악파에 맞선 세력은 상공업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한 온건한 지롱드파로 약 160명이었습니다. 약 400명의 우유부단한 중간파인 평원파는 사안에 따라서 산악파나 지롱드파를 지지했습니다. 국민공회는 개회와 함께 공화정을 선포했습니다.

스위스 출생의 외과의사이며 언론인 마라는 프랑스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입니다. 1770년대 런던에서 의사로 명성을 날리다가 1777년에 파리로 온 그는 1783년에 의사 직을 버리고 정치체제에 반항적 태도를 취하면서 몽테스키외와 장-자크 루소의 앙시앙 레짐에 대한 비판적 견해에 동화되었습니다. 언론인으로서 과격한 혁명분자들에게 호의적인 그는 왕실의 적자를 세금으로 충당하는 데 반대했으며, 1790년 초 재무총감 니케르를 신랄하게 공격한 글을 쓴 뒤 영국으로 피신했다가 석 달 만에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는 국민공회에서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되었습니다.

국민공회는 1792년 9월 21일 군주제의 종식을 선언하고 11월부터 루이 16세의 신병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관해 논의한 끝에 12월 11일 전제군주로 왕을 법정에 세웠습니다. 이듬해 1월 16일에 열린 국민공회는 왕에게 법적 심판을 내리기로 하고 이에 대한 대의원들의 의견을 24시간에 걸쳐 청취했는데, 산악파는 왕을 처형하여 혁명을 공고히 하자고 주장했고, 지롱드파는 인민투표를 통해 형의 선고를 재가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다비드는 처형에 찬동했습니다. 최종적으로 결의한 결과 387 대 334로 처형하자는 의견이 우세했습니다. 이틀 뒤인 1월 21일 루이 16세의 죄목이 공표되고 다음날 그는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왕을 처형하기 위한 단두대가 혁명광장에 설치되었습니다. 단두대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동등한 방법으로 처형하기 위해 고안된 된 것입니다. 고해신부는 왕이 처형대 계단을 오를 때 “성 루이의 아들이 하늘로 오른다”는 말로 조소했습니다. 왕은 군중을 향해 자신을 처형하는 사람들을 용서한다고 말했습니다. 왕의 두터운 목을 40kg에 달하는 칼이 내리치며 잘랐고, 한 젊은이가 왕의 머리를 들어 군중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몇몇 사람이 달려가 천과 종이를 들이대고 뚝뚝 떨어지는 왕의 피를 받았습니다.(099, 098bb, 100)

프랑스 국왕이 단두대에서 비참하게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의 왕족들이 치를 떨었습니다. 영국이 대불동맹의 결성에 앞장섰습니다. 국민공회는 2월 1일 영국과 네덜란드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대불동맹에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독일의 제후들, 러시아, 에스파냐, 교황, 이탈리아의 제후들이 가담하여 유럽 전체가 프랑스에 대항하며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프랑스는 벨기에를 상실했고, 동부의 정복지도 내주어야 했습니다. 남부에서 에스파냐 군대가 루시용을 침입하자 탈영이 빈번하게 나타났습니다. 국내에선 내전이 일어나 왕당파가 봉기했습니다. 1793년 4월 6일, 평원파의 지지를 받은 산악파는 국민공회에서 9인의 위원으로 이루어진 공안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받은 공안위원회는 부자들에게 강제로 부채를 부과하고 곡물에 대한 공정가격제의 실시를 결정했습니다. 지롱드파의 반발 속에 산악파가 공안위원회를 지휘한 기간은 1년이나 되었습니다. 공포정치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 시기에 파리에서 단두대를 보기란 쉬웠으며, 공안위원회는 너무 신속하게 많은 사람들을 처형했습니다. 단두대를 설치할 때 인근 주민과 상점 주인들이 심하게 반대했는데, 냄새가 지독한 데다 개들이 떼를 지어와 바닥에 떨어진 피를 핥아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단두대는 지역별로 필요에 의해 정기적으로 설치되었습니다.

탕플탑에 유폐된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국고를 낭비한 죄와 오스트리아와 공모하여 반혁명을 시도했다는 죄명으로 1793년 10월 16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녀에게는 루이 16세와의 사이에 네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차남 루이 17세는 1795년 감옥에서 폐결핵으로 죽었고, 장녀 마리 테레즈만이 성인으로 성장하여 당글렘 공작의 부인이 되었습니다.

루이 16세의 처형은 다비드 인생에 전환이 되었습니다. 다비드의 아내는 남편이 왕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진 데 대해 화를 내며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왕권을 신성시한 오랜 전통으로 인해 왕의 처형에 찬성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죄의식을 느꼈습니다. 다비드의 아내도 혁명을 지지했지만 남편이 지나치게 과격한 행동을 취하자 우려했으며, 불화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마침내 별거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다비드 부부는 1794년 3월 합법적으로 이혼했습니다. 아내의 돈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자 다비드는 한동안 경제적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가 두 아들을 맡고 아내가 두 딸을 맡았습니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여 다비드는 1794년 1월부터 2월까지 국민공회 회장직을 역임하고 자코뱅파 회장으로도 활약했으며, 안보위원회와 교육위원회 멤버로 활동했습니다. 안보위원회는 그날의 테러를 계획하고 결정하는 매우 과격한 단체로 이런 공포정치에 화가가 깊숙이 개입한 것입니다.(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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