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 베퇴이유의 자연에 빠지다



 



 

 

난 깃발을 좋아했지. 첫 국경일인 6월 30일 몽토르궤유 가를 거닐러 나갔어. 거리는 작은 깃발들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로 덮여 있었어. 발코니를 발견하고 그리로 올라갔지.



 

 



모네의 <몽토르궤유 가, 1878년 6월 30일 The Rue Montorgeuil, 30 June 1878>, 1878, 유화

 

프랑스 정부는 1878년의 만국박람회 성공을 기념하여 6월 30일을 국민의 축제일로 결정했습니다. 1870-71년 보불전쟁 후 처음 맞는 경축일입니다. 모네는 이 작품을 제4회 인상주의전에 출품했습니다.



1920년 10월 여든 살의 모네가 당시를 회상한 글입니다. 1878년 6월 30일 파리는 만국박람회를 축하하는 국경일로 거리에 프랑스 국기가 펄럭거렸고, 사람들은 축제 분위기에 들떴습니다. 모네가 그 발코니에서 깃발로 물결치는 거리를 그린 것이 <몽토르궤유 가, 1878년 6월 30일>입니다. 온통 깃발로 출렁이고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는 대각선 구성이라 더 강렬한 인상을 줍니다.



 

 



마네의 <깃발로 장식된 모니에 가 Rue Mosnier Decorated with Flags>, 1878, 유화, 65-81cm.

경축을 마친 후의 적막함을 나타낸 마네의 작품은 깃발들로 넘실대는 모네의 것과 비교됩니다.



 

같은 날 마네가 그린 <모니에 가의 깃발>은 모네의 작품에 비해 허전하고 낯선 풍경입니다. 그는 나부끼는 깃발보다는 피서철을 맞아 거리에 나타난 빛과 어둠의 조화에 더 관심을 두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쪽 다리를 잃은 상이군인의 쓸쓸한 뒷모습과 보도 옆에 멈춰 선 마차는 국경일을 바라본 마네의 시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화실 창문으로 이 거리를 종종 내려다봤으며, 국경일을 맞이하기 전 도로를 포장하는 장면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마네의 <모니에 가 The Road-Menders, Rue de Berne>, 1878, 유화, 63-79cm.

이 거리는 당시 모니에 가로 불리었지만, 오늘날에는 베르느 가로 불리고 있습니다.



 

 



마네의 <모니에 가의 깃발 La Rue Mosnier Pavoisee>, 1878, 유화, 65-80cm.

마네의 화실 창문에서 내려다본 이 장면은 7월 14일의 축제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 6월 30일의 축제를 묘사한 것이 아닌가 추측도비니다. 축제가 남긴 분위기를 전하려고 했는지 적막한 거리의 풍경이 이륜마차와 목발을 집고 걸어가는 남자의 모습을 통해 인상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마네의 기록에 의하면 이 작품은 1879년에 5백 프랑에 팔렸습니다.



 

모네는 <몽토르궤유 가, 1878년 6월 30일>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파리 장면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모네는 파리를 떠나 베퇴이유의 센 강변, 너무도 멋진 장소에 텐트를 쳤다는 소식을 전했고(1878. 9. 1 뮈레에게), 작품을 팔기 위해 들르는 일 외에는 파리에 가지 않을 작정이라고 편지했습니다.(1879. 2. 8 뒤레에게)



 

 



모네의 <안개 낀 베퇴이유 Vetheuil dans le Brouillard>, 1879, 유화, 60-81cm.

처음으로 안개 속에 형태가 부서진 모습으로 그린 것으로 장차 그릴 비물질화 작품들의 효시가 되는 작품입니다.



 

 



모네의 <베퇴이유의 언덕 The Hills of Vetheuil>, 1880, 유화, 61-99cm.



 

 



모네의 <베퇴이유 교회 Vetheuil Chuech>, 1879년경, 유화, 51-61cm.

 

모네는 6년 동안 거주했던 아르장퇴유를 떠나 1878년 베퇴이유로 이주해 그곳에서 1881년 말까지 살았습니다. 베퇴이유는 센 강 오른쪽 언덕에 위치한 작은 마을입니다. 교회는 마을의 작은 언덕 중간에 있습니다. 이 교회는 1873년에 그린 <아르장퇴유의 가을>에 배경으로 나타난 적이 있습니다. 강물이 언덕을 치며 흐르는데, 봄의 증수가 시작된 것입니다. 아직은 춥고 흐린 날에 모네는 정적인 가운데 움직임이 있는 풍경을 짧은 붓질로 묘사했습니다. 언덕에는 아직 잔설이 있습니다.



파리 서북쪽 센 강둑에 위치한 베퇴이유는 오래된 교회가 우뚝 솟은 작은 동네로 경관이 아름다워 풍경화가인 모네가 이곳을 놓칠 리 없었습니다. 강둑에 서면 숲으로 우거진 섬들이 흩어져 있는 센 강의 만곡부가 훤히 보이는 곳입니다. <안개 낀 베퇴이유>는 안개 짙은 날 교회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는 집들을 강둑에서 바라본 장면이고, <베퇴이유 교회>와 <베퇴이유의 언덕> 등은 맑은 날 다양한 각도로 바라본 장면들입니다.

모네가 1878-81년에 거주한 베퇴이유는 약 6백 명이 사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모네는 1878년 12월 어른 4명과 아이 8명이 함께 살 수 있는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하는 한편 지난해부터 사용해오던 몽세이 가 화실을 처분하고 뱅탱유 가 20번지에 새 화실을 얻었습니다. 불황을 맞아 파산한 오슈드가 집과 소장했던 미술품들을 모두 잃어버렸으므로 두 가족은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한집에 살기로 한 것입니다.

모네가 아르장퇴유로부터 센 강을 따라 남쪽에 위치한 베퇴이유에 살게 된 건 마네의 경제적 후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네가 베퇴이유에서 마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친애하는 마네,

종종 선생을 떠올리며 얼마나 큰 빚을 제가 지고 있는가 생각해봅니다. 선생도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을 터인데 돈을 갚으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 선생의 그림이 열렬히 환영받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정말 기뻤습니다. 정말이지 놀라운 그림들을 그리셨습니다.

모네 올림”(1879. 5. 14)

 

베퇴이유의 집에는 강까지 이어지는 과수원이 있었습니다. 모네는 강에 정박해둔 자신의 보트를 타고 강을 오르내리며 주변 경관들을 캔버스에 담아왔습니다. 베퇴이유로 이주한 후 모네는 자연에 파묻혀 작업에만 열중했으므로 무명협동협회 화가들과는 만나는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제4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29점의 작품을 출품하기로 했지만, 1879년 3월 25일 뮈레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배신자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동의했을 뿐”이라고 적혀 있어 그가 전시회에 별 관심이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네의 <베퇴이유 마을 The Town of Vetheuil>, 1881, 유화

 

베퇴이유는 모네의 생애에 중요한 장을 차지하는 곳으로 새로운 체험을 하게 해준 곳이며, 또한 방대한 작업을 하게 해준 곳입니다. 베퇴이유를 센 강에 비친 아름다운 마을로 묘사했는데, 그의 작품에서 물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모네의 <인물이 있는 과수원 풍경, 베퇴이유 Landscape with Orchard and Figures, Vetheuil>, 1879, 유화, 72-91cm.



 

 



모네의 <베퇴이유의 예술가 정원 The Artist's Garden at Vetheuil>, 1880, 유화

실제로는 1881년에 그린 것입니다.



 

모네는 보트를 타고 거의 위치를 바꾸지 않은 채 동일한 주제를 끊임없는 빛의 변화에 따라 상이하게 묘사하는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을 보면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일기에 따른 변화를 눈으로 읽을 수 있는데, 붓질을 짧게 하는 기교로 특히 물의 운동을 강조했습니다. 이런 기교는 아르장퇴유에서 이미 익힌 것입니다. 그가 베퇴이유에 머문 기간에 그린 그림이 무려 300점이나 되는 걸로 봐서 매주 평균 2점씩 그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의 그림들을 카이유보트, 뒤레, 드 벨리오가 속속 구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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