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의 <루앙 대성당> 시리즈


 



 

 

모네는 1892년 루앙 대성당 건너편 2층에 방을 세 얻고 2월부터 4월까지 대성당을 주제로 연속적으로 그리면서 하루에 14점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대성당 서쪽 정면에 이젤을 세우고 작업했습니다. 알리스에게 보낸 편지에 “이 그림들은 색의 완고한 외피들로 ... 그림이라고 할 수 없소”라고 적었습니다.



 

 



모네의 <루앙 대성당: 햇빛을 가득 받은 파란색과 금색의 조화 Rouen Cathedral: Harmony in blue and Gold, Full Sunlight>, 1894, 유화



 

 



사진: 루앙 대성당, 모내가 작업할 대에 바라본 각도에서 본 장면

 

 

루앙은 지베르니에서 60km 떨어진 곳입니다. 모네는 1892년 2월 24일 루앙 마을을 그렸고, 2월 29일부터 뒤랑-뤼엘 화랑에서 열린 개인전 때문에 파리를 다녀와서 다시 대성당을 그렸습니다. 건초더미를 그리듯이 그는 시시각각 빛에 의해 달라지는 대성당의 모습을 캔버스에 담았습니다. 그의 작업은 빛의 효과와 씨름하는 것이었습니다. 뒤랑-뤼엘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일기가 불순해서 작업이 힘들지만, 대성당을 맹렬히 그리고 있다면서 멋지고 흥미 있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편지에서 대성당을 그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면서 방대한 작업을 하는 데 만족을 표했습니다. 모네는 1894년 봄 20점을 완성하고, 이듬해 봄에 공개했는데, 그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대성공이었습니다. 대성당의 거대한 돌 벽은 모네에 의해 풍화작용이 일어나는 영롱한 빛의 스크린이 되었습니다.

 



모네가 얼마나 작업에 열중했던지 병이 나서 지베르니로 돌아가 열흘 동안 몸조리를 한 후에야 다시 와서 그렸습니다. 그는 이듬해 같은 달에 다시 이곳을 그렸습니다. 그림에 1894년이라고 적었지만, 1892년과 1893년 두 차례에 걸쳐 세 군데서 그린 것들을 지베르니 화실에서 완성한 것들입니다. 그는 6개월 동안 30점을 완성했는데, 파란색, 핑크색, 노란색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알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성당을 정복하려는 강한 의욕이 보입니다.

 

매일매일 무엇인가를 보탤 것이 생기고 놓쳤던 새로운 영상이 무의식중에 떠오르는구려. 얼마나 힘겨운 작업인지 모르겠소. ... 하지만 성과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소. ... 기력이 쇠잔해져서 더 이상 작업하기가 힘들구려. .. 밤새 악몽을 꾼 적도 있다오. 대성당이 내 머리 위로 무너져 내렸는데, 아, 그것이 파란색, 핑크색, 노란색으로 보이지 않겠소?”(1892. 4. 3)

 

<대성당> 연작에서 날씨에 따른 대기의 변화를 파악하는 모네의 감각이 더욱 날카로워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건초더미나 포플러와는 달리 <대성당>에서는 모티프가 달라짐에 따라 대체로 같은 각도에서 관찰되었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빛의 조건이 달라짐에 다라 형상의 변화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당대의 화가와 평론가들이 모네의 작품의 중요함을 간파했습니다. 많은 평론가들이 모네의 작품을 호평했으며, 클레망소는 『정의』(1895. 5. 20)에 ‘대성당의 혁명’이란 제목으로 데성당 시리즈는 물질이 존재하는 찬송이라고 극찬했습니다.

 

지난번 지베르니의 화실에서 보고 너무 감동스러웠던 루앙 대성당 그림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뒤랑-뤼엘의 화랑에 들렸다. 어찌된 영문인지 갖가지 모습의 대성당이 날 따라와 있다.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다. ... 나는 완전히 홀린 상태이다. ... 사려 깊게 선정된 효과가 담겨진 20점의 캔버스를 보면서 우리는 이 화가가 50점, 100점, 1000점이라도 그릴 수 있어야, 아니, 그려야 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즉 자신의 삶의 순간 수만큼이나 얼마든지 그려야 하며, 또한 그를 통해 그의 삶도 그 석조건물만큼 오래 보존되어야 함을 알게 된다. 모네는 미래를 보는 눈으로 미래를 읽고, 우리 눈앞에 진화의 방향을 제시해준다. 그리하여 우주를 지각하는 우리의 능력을 어느 때보다 더욱 깊이 있고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준다.



 

 

 



사진: 조르주 클레망소(1841-1929)

 

 

의사였던 클레망소는 1871년 파리코뮌이 성립되기 전 파리 제18구 몽마르트르의 구장에 선출되어 그것을 기반으로 정계에 투신했습니다. 그는 1871년 7월에 급진공화당원으로 의회에 진출했습니다. 1876년 18구 대표의원에 선출되었고, 그 후 1885년 세 번째로 의회에 진출했습니다. 1893년 파나마사건으로 한때 정계를 떠나 있었으나, 1894~1906년의 드레퓌스사건에서 드레퓌스의 옹호를 위해 힘쓴 결과, 1903년에 상원의원이 되었습니다. 1906년 3월 사리앙 내각의 내무장관, 이어서 총리 겸 내무장관이 되어 8시간 노동제 ·생활개선 ·민주제화 등을 공약하는 한편, 영국 ·러시아 양국과의 협조체제를 확립했습니다. 그러나 1909년 총리직을 사임하고, 남아메리카 여러 나라를 편력하면서 정부에 대한 공격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상원의 육군위원장으로 활약, 1917년 불리한 전세에서도 총리 겸 육군장관에 취임하여 반역자나 패배주의자들을 즉결재판에 넘겨 총살하는 등 강경책으로써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모네의 <햇빛에 비친 루앙 대성당, 서족 외관 La Cathedrale de Rouen, le Portail (Soleil)>, 1894, 유화, 100-65cm.



 

 



모네의 <햇빛에 비친 루앙 대성당, 외관 La Cathedrale de Rouen, le Portail Olein Midi, Lumiere Refletee>, 1894, 유화, 106-73cm.



 

 



모네의 <루앙 대성당, 소쪽 외관>, 1894, 유화, 100-65cm.



 

 



모네의 <아침의 루앙 대성당, 외관>, 1894, 유화, 100-65cm.



 

 



모네의 <루앙 대성당: 파란색 조화 속의 아침 햇살>, 1894, 유화



 

 



모네의 <대낮의 루앙 대성당>, 1894, 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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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과 로젠Einstein and Rosen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블랙홀에 회의적이었으면서도 그보다 더욱 기이한 웜홀이라는 것이 블랙홀의 내부에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여 사람들을 한층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물리학자들이 웜홀재그 hole이라고 명명한 이유는 지렁이worm가 파놓은 가느다란 통로가 두 지점을 연결하는 지름길이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웜홀 대신에 차원입구dimensional portals, 혹은 차원통로dimensional gateways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합니다. 명칭이 어떻든 웜홀은 차원 사이의 여행을 가능하게 만들어줄 강력한 후보로 부상했습니다.

아인슈타인과 그의 제자이며 유대인 네이선 로젠Nathan Rosen(1909~95, MIT를 졸업한 뒤 1935년에 아인슈타인의 조수가 되었음)은 1935년에 물리적 공간에 웜홀을 도입함으로써 추상적인 다중연결공간multiply connected space 도형을 현실세계와 결부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들은 소립자를 서술하는 모형으로 블랙홀을 이용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어떤 물체에 가까이 다가갈 때 중력이 무한대가 된다는 뉴턴식 아이디어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뉴턴은 중력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므로 거리가 무한히 가까워지려면 (즉 거리가 0에 접근하면) 중력은 무한대가 됩니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특이성이 물리적 난센스이므로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전자는 크기가 없는 하나의 점으로 서술됩니다. 아인슈타인과 로젠은 블랙홀을 이용해 전자의 특성을 서술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이는 곧 일반상대성이론의 언어로 양자의 세계를 서술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기다란 주둥이를 가진 초대형항아리 모양의 표준블랙홀에서 실마리를 풀어나갔습니다. 즉 블랙홀의 주둥이를 잘라낸 후 다른 블랙홀을 뒤집어서 서로 연결시켰더니 전자와 비슷한 특성을 갖는 블랙홀이 탄생한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방법으로 블랙홀의 특이성의 제거하고 전자와 비슷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블랙홀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아인슈타인의 아이디어는 성공적인 결말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주론학자들은 아인슈타인과 로젠이 놓았던 다리가 서로 다른 우주들을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한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현재의 우주공간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면 화이트홀을 통해 반대편 우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과 로젠이 개발한 통로는 아주 잠시 동안 열렸다가 금방 닫혀버리기 때문에 현실적인 물체를 이동시킬 수 없습니다. 웜홀은 실제로 존재하지만 살아 있는 생명체가 그곳을 탐사한 후 우리에게 여행담을 들려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입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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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1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인슈타인과 로젠이 블랙홀을 이용해 전자의 특성을 서술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전자의 특성을 서술하는 것 이였나요?
 

모네의 회화적이면서도 장식적인 <포플러> 시리즈


 



 

 

뒤랑-뤼엘의 화랑에서 건초더미 시리즈를 소개하기 전 모네는 또 다른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포플러나무였습니다. 프랑스 남부엔 올리브나무가 흔한 대신 중부와 북부에는 포플러가 흔했습니다. 모네는 지베르니 위쪽 에프트 강둑에 늘어선 포플러나무를 주제로 연속적으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1891년 봄부터 가을가지 포플러를 그리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모네는 포플러를 여러 가지로 구성하여 일곱 그루를 그리기도 했고, 세 그루 혹은 네 그루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건초더미와 마찬가지로 포플러나무들도 다양한 색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가 한창 작업에 열중할 때 늪지 근처 공유지가 경매에 붙여졌습니다. 그는 작업 중에 포플러가 잘릴 것을 우려하여 공유지를 매입한 목재상에게 돈을 주고 좀 더 기다렸다가 포플러를 자르라고 청했습니다.



 

 

 



모네의 <석양의 포플러 Peupliers, Coucher de Soleil>, 1891, 유화, 100-60cm.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모습이지만, 화가의 구성적 의도에 따라 질서를 따르게 됩니다. 모네의 많은 풍경화에서 그의 미적 관점인 구성의 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네는 빛의 사냥꾼과도 같았고, 포플러는 그가 쳐놓은 올가미와도 같았습니다. 그는 시간과 일기의 변화에 따라 장소를 이동하면서 위치에 따라서 그리고 캔버스의 크기에 따라서 끊임없이 변하는 포플러를 묘사했습니다.



 

 

 



모네의 바람의 효과, 포플러 시리즈 Effet de Vent, Serie des Peupliers>, 1891, 유화, 100-73cm.



 

 

 



모네의 <핑크 효과의 포플러 Les Peupliers, Effet Rose>, 1891, 유화, 92-73cm.



 

 

 



모네의 <태양 아래의 포플러 Les Trois Arbres, Ete>, 1891, 유화, 93-73.5cm.



 

 

 



모네의 <세 그루, 가을 Les Trois Arbres, Automne>, 1891, 유화, 92-73cm.

 

 

카미유 피사로도 포플러나무를 좋아했는데, 그가 모네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저녁나절에 포플러 세 그루가 저렇게 늘어서 있다니 너무도 멋지네. 얼마나 회화적이면서도 장식적인가.”(1982. 3.9)



 

 

 



모네의 <세 그루, 구름이 낀 날 Les Trois Arbres, Temps Gris>, 1891, 유화, 92-73cm.

 

세 그루의 포플러가 강물에 비치면서 하늘 높이 치솟는데, 모네는 포플러의 비상하는 선과 우아한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자연히 수직구도를 사용했습니다.



 

 

 



모네의 <에프트 강둑의 포플러 Poplar on the Epte>, 1891



 

 

 



모네의 <에프트 강변의 포플러, 마라이에서 본 장면 Peupliers au Bord de l'Effet, Vue du Marais>, 1891, 유화, 88-93cm.



 

 

연작 <건초더미>와 마찬가지로 <포플러>도 성공이었습니다. 그는 스무여 점을 그렸는데, 1892년 1월 부소&발라동 소속의 테오를 대신해서 모리스 주아양이 몇 점 구입하여 몽마르트르의 화랑에서 소규모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모네는 누구에게도 낯익은 포플러나무를 아주 율동적이고 운치 있는 나무로 소개했습니다. 2월 28일에는 뒤랑-뤼엘이 15점의 포플러 시리즈를 자신의 화랑에서 소개했습니다. 뒤랑-뤼엘은 7점을 각각 4천 프랑에 구입했습니다. 연작이 한꺼번에 소개되기는 그대가 처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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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자신의 진실을 알리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연민은 자신을 포함해 모든 존재의 괴로움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주장은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고 어떠한 관계에서든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연민은 강인한 주장에 온기와 배려를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의지를 굽히지 않고 주장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와 타인을 옹호할 수 있으며 연민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스스로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공감은 진정한 연민을 위한 근거로, 다른 이들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을 깨닫게 하고 그들의 괴로움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또한 공감을 통해 인간관계에 큰 도움을 받게 되는데, 다른 이들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공감이 깨지면 괴로움과 당혹을 느끼게 되는데 특히 연약한 사람들, 예컨대 어린이들은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공감에는 다른 이들의 행동, 감정, 생각 등을 이해하고 인지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다른 이의 행동을 생각 속에서 흉내 내 보고 스스로의 몸에서는 어떻게 느껴지는지 관찰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자신의 정서를 이입하여 상대의 감정을 상상해 보고 상대의 얼굴과 눈을 가까이서 바라보십시요. 상대에 대한 지식을 상대의 생각을 상상해 보고 내면을 추리해 보십시요.

친밀함은 공감과 연민을 북돋웁니다. 따라서 가까워지는 걸 두려워 말아야 합니다. 가장 큰 위험은 대개 다른 사람들로부터 가해졌다는 인류 진화사에서 물려받은 특성과 개인적인 경험, 특히 어린 시절의 경험 등이 결합하여 친밀해지는 걸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친밀한 관계에서 편안하게 느끼기 위해서는 상대방보다도 자신의 내적 경험에 주의를 집중하고 의식 그 자체에 집중하며, 심상화를 이용하고 자신의 내면을 대상으로 마음챙김을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한 느낌, 감사 같은 진심어린 정서, 공감, 타인의 괴로움에 대해 열린 마음 가지기, 타인의 행복을 빌기 등을 통해 연민하는 힘이 배양됩니다. 다섯 부류의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도록 하십시요. 감사해야 할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 그저 중립적인 대상,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 그리고 바로 우리 자신입니.

능숙하게 자기주장을 하려면 일방적 미덕과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합니다. 미덕이란 자기 내면의 선함에 따라 원칙에 의지하여 사는 걸 의미합니다. 마음의 미덕은 뇌의 조절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미덕과 조절을 위해서는 건강한 목적, 건강한 범주 내에 존재하기, 유연한 변화 등이 필요합니다.

관계에 있어서 자신의 목적, 관계의 경계와 조화로운 상호작용을 모두 고려했다면 관계에서의 미덕에 관한 자신의 기준을 확립해야 합니다. 이 기준에 따라 상대방이 어떻게 행동하든 그 미덕을 실천하시십시요. 이를 통해 관계에서 타인에 좌우되지 않고 스스로가 조절할 수 있게 되며, 그 자체로서 즐겁고, 높은 도덕 기준을 가지게 되며, 타인에게서 마찬가지로 선한 행동을 끌어낼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 됩니다.

성공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는 타인을 바꾸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진실을 알리는 데 집중합니다. 자신의 경험, 특히 깊은 내면에 의지합니다. 사실을 확립합니다. 자신에 관해 상대가 제기하는 문제에는 합리적으로 최선을 다해 책임감을 가집니다. 관계의 진정한 기초에 부합하여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행합니다. 큰 그림을 잊지 않는다. 연민과 친절을 유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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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건초더미> 연작


 



 

 

 



모네의 <건초더미, 늦여름 Haystacks, end of Summer>, 1890-91, 유화, 60-100cm.



 

 



모네의 <서리를 맞은 건초더미 Les Meules, Effet de Gelee Blanche>, 1889, 유화, 65-92cm.



 

 



모네의 <석양의 건초더미 Meules, Derniers Rayons de Soleil>, 1890, 유화



 

 

모네는 한동안 지베르니를 떠나지 않고 그곳의 풍경을 그렸는데, 1890년 늦여름 건초더미를 주제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늦여름부터 겨울 한철에 이르는 계절의 변화에 의해 달라지는 인상을 포착했는데, 건초더미의 그림자 모양과 길이가 언제 어디서 그렸는지를 짐작하게 해줍니다. 말라르메가 건초더미에 대한 칭찬을 했습니다.

 

선생의 최근작 건초더미가 절 무척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선생은 프리즘을 통해 벌판을 바라보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만듭니다. 아니 그림이 절 그렇게 만든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1890. 7.)

 

모네는 제프루아에게 적었습니다.

 

전 지금 상이한 효과가 나타나는 연작물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작업이 진행될수록 더욱 절실하게 느끼는 점은 제가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 더욱 더 작업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설픈 솜씨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 저의 느낌을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하게 듭니다.”(1890. 10. 7)

 

모네는 “일견에 본 걸 그린다” 혹은 “다른 그림을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린다”면서 자연에 대한 개인적인 관망에 전념했습니다. 1889년과 1890년대의 그의 작품을 보면 일 년 후나 십 년 후 동일한 장소로 다시 가서 동일한 주제를 달리 묘사했음을 발견합니다. 그는 화실에서 그림을 그린 화가가 아니라 늘 야외로 또는 외국으로 나가 자연의 새로운 영상을 직접 찾았으며, 그것을 단번에 캔버스에 모두 옮길 수 없었으므로 동일한 장면을 그리고 다시 그렸던 것입니다. 그림을 그릴 때 과학자와도 같은 태도로 일기와 시각에 따라 변하는 빛을 관찰했으며, 그것이 거의 과장되어 나타났기 때문에 그의 그림을 사실주의로 분류하더라도 쿠르베와 휘슬러의 작품에 비하면 덜 사실주의적이었습니다.

 

모네는 그림을 그릴 때 긴급하게 붓을 사용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천천히 작업하는 것이 빛의 운동을 더욱 적절하게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순간적인 영상을 오랜 시간 안에서 음미하며 그렸습니다. 피사로에게 야외 작업에 관해 편지에 적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같은 장면은 어느덧 사라집니다. ... 전 화실에서 작업하는 예술가들이 부러운데 그들은 실망하는 인은 적지 않겠습니까?

 

나이 쉰이 되고부터 모네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습니다. 1889년 테오가 앙티브 그림을 1만350프랑에 팔았는데, 여태까지 판 작품 중 가장 고액이었습니다. 그 후 2년 동안 모네가 작품을 판 돈은 10만 프랑에 달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지베르니의 집주인은 모네에게 집을 아예 사라고 권했습니다. 모네는 집을 사서 하인과 정원사들을 고용하고 값비싼 식탁을 구입했으며, 자동차도 몇 대 구입했습니다. 여러 나라로부터 화가들이 지베르니로 그를 방문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신문사와 잡지사 기자들이 인터뷰를 요청했고, 그의 작업 장면을 자세히 소개했으며, 그가 소장한 친구 화가들의 작품들도 소개했습니다.

 

1891년 알리스의 남편 오슈드가 사망하자 모네는 알리스를 법적 아내로 맞았습니다. 오슈드의 유해는 지베르니에 안장되었습니다. 알리스의 셋째 딸 수잔은 미국인 화가 테오도르 버틀러와 사랑에 빠졌는데, 영국에 귀화한 미국인 화가 존 싱어 사전트가 모네와 알리스에게 버틀러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수잔과 버틀러는 1892년 7월에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은 수년밖에 존속되지 못했는데, 수잔이 둘째 아이를 낳은 후 몸이 쇠약해지기 시작하더니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버틀러는 수잔의 큰 언니 마르트와 재혼했습니다. 1890년대 말 모네의 아들 장은 루앙에 있는 아저씨와 함께 화학자로 일했는데, 알리스의 둘째 딸 블랑슈를 아내로 맞았습니다. 장은 의붓누이와 결혼한 것입니다.

 

모네는 1884-85년에 그린 적이 있는 건초더미를 1890-91년에 다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그림들 중 여섯 점이 햇빛이 건초더미의 측면을 비춘 것들이고, 일곱 점이 해가 중천에 떠 있어 그림자가 없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18점은 해가 관람자를 향한 실루엣의 장면입니다. 모두 겨울에 그린 이것들에 나타난 색들은 따듯한 느낌을 줍니다. 금빛 나는 지푸라기는 비와 서리를 맞아 엷은 회색으로 변했으며, 땅은 붉은 갈색입니다. 몇 점의 그림에는 눈과 서리가 보입니다.

 







모네의 <겨울의 건초더미 Meule, Effet de Neige, le Matin>, 1891, 유화, 65-92cm.



 

 



모네의 <건초더미, 겨울 Meule, Effet de Neige, Temps Couvert>, 1891, 유화, 65-92cm.

 

 

지베르니는 센 강과 구릉 사이에 있는 마을로 센 강 오른편 구릉은 양지가 바르며, 당시에 품질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포도밭이 있었습니다. 모네는 강가와 들을 산책하기 좋아했으며, 보통 블랑슈가 동행했습니다. 그대 건초더미가 빛에 의해 다르게 보이는 걸 보고 이를 주제로 시리즈를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클레망소에 의하면 모네는 이젤을 여러 곳에 세워놓고 관선이 변할 때마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빛의 조화에 의한 건초더미를 그렸습니다. 15점의 건초더미가 뒤랑-뤼엘 화랑에 진열되었는데, 사흘 만에 전부 팔려서 이 시리즈는 처음부터 성공이었습니다. 명성과 부가 모네에게 안겨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모네의 <건초더미 La Meule>, 1891, 유화, 65-92cm.



 

 



모네의 <건초더미, 해빙, 석양 Meule, Degel, soleil Couchant>, 1891, 유화, 65-92cm.



 

 



모네의 늦여름 아침의 건초더미 Haystacks at the End of Summer, Morning>, 1891, 유화



 

 



모네의 <햇빛 속의 건초더미 Meule au Soleil>, 1891, 유화, 60-100cm.



 

 



모네의 <지베르니 근처 석양의 건초더미 Neule, soleil Couchant>, 1891, 유화, 73-92cm.



 

 



모네의 <햇빛 속의 건초더미 Meule au Soleil>, 1891, 유화, 60-100cm.



 

 

같은 주재를 연속적으로 그리는 연작을 오늘날 많은 화가들이 그리고 있지만, 모네가 건초더미 시리즈를 그릴 때만 해도 과거에 없었던 획기적인 방법이었습니다. 홀란드의 평론가 비반크는 모네의 건초더미 시리즈를 보고 소감을 말했습니다.

 

그의 작품 한 폭은 건초더미를 아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다. 오후의 햇빛은 지푸라기를 금빛과 피 같은 붉은색으로 화염에 싸인 듯 빛을 발하도록 했다. 따뜻한 대기가 진동하는 것이 보이며, 건초더미는 푸른 아지랑이 속에서 투명하게 보인다.

 

<건초더미>를 부소&발라동 화랑이 1891년 초에 세 점을 구입하면서 각각 3천 프랑을 지불했습니다. 1888년 모네와 불화했던 뒤랑-뤼엘은 화해의 제스처를 보이고 다시 작품을 구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뒤랑-뤼엘은 부소&발라동 화랑이 건초더미 시리즈를 싹쓸이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염려했습니다. 모네는 몇 차례에 걸쳐 지베르니 집과 정원을 완전히 인수할 수 있도록 2만 프랑을 보내달라고 뒤랑-뤼엘에게 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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