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의 <루앙 대성당> 시리즈


 



 

 

모네는 1892년 루앙 대성당 건너편 2층에 방을 세 얻고 2월부터 4월까지 대성당을 주제로 연속적으로 그리면서 하루에 14점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대성당 서쪽 정면에 이젤을 세우고 작업했습니다. 알리스에게 보낸 편지에 “이 그림들은 색의 완고한 외피들로 ... 그림이라고 할 수 없소”라고 적었습니다.



 

 



모네의 <루앙 대성당: 햇빛을 가득 받은 파란색과 금색의 조화 Rouen Cathedral: Harmony in blue and Gold, Full Sunlight>, 1894, 유화



 

 



사진: 루앙 대성당, 모내가 작업할 대에 바라본 각도에서 본 장면

 

 

루앙은 지베르니에서 60km 떨어진 곳입니다. 모네는 1892년 2월 24일 루앙 마을을 그렸고, 2월 29일부터 뒤랑-뤼엘 화랑에서 열린 개인전 때문에 파리를 다녀와서 다시 대성당을 그렸습니다. 건초더미를 그리듯이 그는 시시각각 빛에 의해 달라지는 대성당의 모습을 캔버스에 담았습니다. 그의 작업은 빛의 효과와 씨름하는 것이었습니다. 뒤랑-뤼엘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일기가 불순해서 작업이 힘들지만, 대성당을 맹렬히 그리고 있다면서 멋지고 흥미 있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편지에서 대성당을 그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면서 방대한 작업을 하는 데 만족을 표했습니다. 모네는 1894년 봄 20점을 완성하고, 이듬해 봄에 공개했는데, 그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대성공이었습니다. 대성당의 거대한 돌 벽은 모네에 의해 풍화작용이 일어나는 영롱한 빛의 스크린이 되었습니다.

 



모네가 얼마나 작업에 열중했던지 병이 나서 지베르니로 돌아가 열흘 동안 몸조리를 한 후에야 다시 와서 그렸습니다. 그는 이듬해 같은 달에 다시 이곳을 그렸습니다. 그림에 1894년이라고 적었지만, 1892년과 1893년 두 차례에 걸쳐 세 군데서 그린 것들을 지베르니 화실에서 완성한 것들입니다. 그는 6개월 동안 30점을 완성했는데, 파란색, 핑크색, 노란색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알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성당을 정복하려는 강한 의욕이 보입니다.

 

매일매일 무엇인가를 보탤 것이 생기고 놓쳤던 새로운 영상이 무의식중에 떠오르는구려. 얼마나 힘겨운 작업인지 모르겠소. ... 하지만 성과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소. ... 기력이 쇠잔해져서 더 이상 작업하기가 힘들구려. .. 밤새 악몽을 꾼 적도 있다오. 대성당이 내 머리 위로 무너져 내렸는데, 아, 그것이 파란색, 핑크색, 노란색으로 보이지 않겠소?”(1892. 4. 3)

 

<대성당> 연작에서 날씨에 따른 대기의 변화를 파악하는 모네의 감각이 더욱 날카로워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건초더미나 포플러와는 달리 <대성당>에서는 모티프가 달라짐에 따라 대체로 같은 각도에서 관찰되었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빛의 조건이 달라짐에 다라 형상의 변화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당대의 화가와 평론가들이 모네의 작품의 중요함을 간파했습니다. 많은 평론가들이 모네의 작품을 호평했으며, 클레망소는 『정의』(1895. 5. 20)에 ‘대성당의 혁명’이란 제목으로 데성당 시리즈는 물질이 존재하는 찬송이라고 극찬했습니다.

 

지난번 지베르니의 화실에서 보고 너무 감동스러웠던 루앙 대성당 그림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뒤랑-뤼엘의 화랑에 들렸다. 어찌된 영문인지 갖가지 모습의 대성당이 날 따라와 있다.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다. ... 나는 완전히 홀린 상태이다. ... 사려 깊게 선정된 효과가 담겨진 20점의 캔버스를 보면서 우리는 이 화가가 50점, 100점, 1000점이라도 그릴 수 있어야, 아니, 그려야 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즉 자신의 삶의 순간 수만큼이나 얼마든지 그려야 하며, 또한 그를 통해 그의 삶도 그 석조건물만큼 오래 보존되어야 함을 알게 된다. 모네는 미래를 보는 눈으로 미래를 읽고, 우리 눈앞에 진화의 방향을 제시해준다. 그리하여 우주를 지각하는 우리의 능력을 어느 때보다 더욱 깊이 있고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준다.



 

 

 



사진: 조르주 클레망소(1841-1929)

 

 

의사였던 클레망소는 1871년 파리코뮌이 성립되기 전 파리 제18구 몽마르트르의 구장에 선출되어 그것을 기반으로 정계에 투신했습니다. 그는 1871년 7월에 급진공화당원으로 의회에 진출했습니다. 1876년 18구 대표의원에 선출되었고, 그 후 1885년 세 번째로 의회에 진출했습니다. 1893년 파나마사건으로 한때 정계를 떠나 있었으나, 1894~1906년의 드레퓌스사건에서 드레퓌스의 옹호를 위해 힘쓴 결과, 1903년에 상원의원이 되었습니다. 1906년 3월 사리앙 내각의 내무장관, 이어서 총리 겸 내무장관이 되어 8시간 노동제 ·생활개선 ·민주제화 등을 공약하는 한편, 영국 ·러시아 양국과의 협조체제를 확립했습니다. 그러나 1909년 총리직을 사임하고, 남아메리카 여러 나라를 편력하면서 정부에 대한 공격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상원의 육군위원장으로 활약, 1917년 불리한 전세에서도 총리 겸 육군장관에 취임하여 반역자나 패배주의자들을 즉결재판에 넘겨 총살하는 등 강경책으로써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모네의 <햇빛에 비친 루앙 대성당, 서족 외관 La Cathedrale de Rouen, le Portail (Soleil)>, 1894, 유화, 100-65cm.



 

 



모네의 <햇빛에 비친 루앙 대성당, 외관 La Cathedrale de Rouen, le Portail Olein Midi, Lumiere Refletee>, 1894, 유화, 106-73cm.



 

 



모네의 <루앙 대성당, 소쪽 외관>, 1894, 유화, 100-65cm.



 

 



모네의 <아침의 루앙 대성당, 외관>, 1894, 유화, 100-65cm.



 

 



모네의 <루앙 대성당: 파란색 조화 속의 아침 햇살>, 1894, 유화



 

 



모네의 <대낮의 루앙 대성당>, 1894, 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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