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루이 다비드의 공화국을 위한 제단화 <마라의 죽음>



 



 

 

 

정치에 대한 다비드의 관심이 급증했다. 그는 1794년 1~2월 한 달 동안 공회 회장직을 역임했고, 쟈코뱅 클럽 회장으로도 활약했으며, 안보위원회Committee of General Security와 교육위원회Committee of Public Instruction 멤버로 활동했다. 1794년의 쟈코뱅 클럽은 그 수가 6천 8백 개가 넘었고 멤버는 50만에 이르렀다. 1791년 파리를 방문한 영국인의 말에 의하면 거리마다 쟈코뱅 클럽이 있었다. 다비드는 지나칠 정도로 정치에 깊숙이 개입했다. 안보위원회는 매일 매일의 테러를 계획하고 결정하는 매우 과격한 단체로 이런 공포정치에 다비드가 깊숙이 개입한 것이다.

이 시기에 다비드는 혁명의 세 순교자들을 기념비적으로 그렸다. 르 펠레티에가 과거 왕의 호위대였던 파리스에 의해 저녁식사 도중에 살해되었다. 귀족 르 펠레티에는 정치적인 기회주의자로서 왕의 처형에 찬성했던 사람이다. 공화당원들은 그의 죽음을 자유를 위한 순교로 받아들였으며 그의 장례를 국장으로 성대하게 치렀다. 벤돔 광장에 놓인 시신의 머리에는 월계수관이 씌워졌으며 몸통을 천으로 덮지 않아 그가 어느 부위에 상처를 입고 살해되었는지 볼 수 있게 했다. 르 펠레티에의 찢겨지고 피 묻은 옷과 파리스가 사용한 칼도 함께 전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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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는 대리석을 사용해 기념비를 제작하려다 그림으로 그리기로 했다. 이 작품은 1793년 8월 10일에 개막된 살롱을 통해 소개되었는데 르 펠레티에의 시신이 고결하게 죽음을 맞이한 고대 전사의 모습처럼 보였다.115 그의 모습은 <헥토르의 죽음을 애도하는 안드로마케>9에서의 헥토르의 시신과 닮았다. 공화당 대의원의 성스러운 죽음이 왕을 처형한 데 대한 시민들의 죄의식을 다소나마 덜어주었다. 살해에 사용된 파리스의 칼은 르 펠레티에의 상처 부위 위로 한 가닥 실에 매달린 것으로 구성되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 칼이 왕의 경호원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칼은 종이를 뚫고 있는데 종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나는 전제군주의 죽음에 찬성표를 던졌다.” 다비드는 그림 하단 오른쪽에 “르 펠레티에에게 다비드가 1793년 1월 20일”이라고 적었다.

다비드는 1793년 4월부터 쓰기 시작한 자서전에서 르 펠레티에가 마지막 말을 남기고 막 숨을 거두는 장면을 그리려 했다고 적었다. 르 펠레티에의 마지막 말이다. “나는 조국을 위해 피를 흘리는 데 만족한다. 이것이 적들에게 교훈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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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게도 이 작품은 현존하지 않는다. 르 펠레티에의 딸 수잔이 훗날 다비드의 후손으로부터 10만 프랑이라는 거액을 주고 이 작품을 구입한 후,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불에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달리 그녀는 열렬한 군주제 지지자였다. 또한 타르디우가 다비드의 작품을 잉그레이빙한 것도 수잔이 오리지널 판화와 복사본을 여러 점 구입해 없애버렸다.116 오늘날 우리는 타르디우의 찢겨진 판화117와 다비드의 제자 드보제의 드로잉117을 통해서 다비드의 원래 작품을 어림할 수 있을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수잔이 아버지의 죽음을 영웅적으로 묘사한 다비드의 작품을 불태워 없앴음에도 불구하고, 1804년에 그녀의 두 번째 결혼을 기념하는 자신의 초상118을 다비드에게 의뢰했다는 사실이다.

다비드는 르 펠레티에의 순교 모습을 소개한 지 석 달반 만에 또다른 공화당 대의원의 죽음을 그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번에는 매우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장-폴 마라가 살해되었다.

마라는 인기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상에 심취했으며 ‘시민의 친구’로 불리며 존경받았다. 당시 국내에서는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쟈코뱅 행동대원들에 의해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한 유혈사태가 종종 발발하고 있었다. 마라는 과격한 행동을 통해서만 자유와 평등이 확립된다는 점을 강조했고 과격한 언행으로 1793년 4월에 구금된 적도 있었다.

마라는 노르망디 태생 스물네 살의 샤로트 코르데이에 의해 1793년 7월 13일 살해되었다. 카엥에서 온 샤로트는 드라마 작가 피에르 코르네유의 후손으로 보수적 왕당파 집안 출신이다. 그녀는 자신을 주디스(Judith, 아시리아 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죽인 유대인 여자 영웅)에 비견해 혁명의 정신적 지도자 마라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수녀단에서 교육을 받고 2년 동안 수녀로 헌신한 적도 있는 그녀는 플루타르크, 루소, 볼테르의 저서를 읽었고 왕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에 매우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7월 9일 마차를 타고 카엥을 떠나 11일 파리에 도착한 후 15센티미터 길이의 칼을 구입했다. 샤로트는 혁명 4주년 국민공회 기념식에서 마라를 죽일 계획이었지만 병중이었던 마라가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샤로트는 마라의 집에 침입하기로 계획을 변경하고 코르델리에 가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갔지만 마라의 아내 시몬느 에브라르가 안으로 들이지 않아 실패했다.

빈틈 없고 기민한 샤로트는 마라에게 카엥에서 벌어지는 반혁명적인 운동에 관해 적어 보내 환심을 샀다. 그녀는 다시 마라의 아파트를 찾았다. 이번에도 그의 아내가 들이지 않자 신문 파는 사람이 시몬느를 성가시게 구는 사이 쏜살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마라는 피부병 때문에 터번을 두르고 식초를 탄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는 목욕을 자주해야 했으므로 목욕탕에 조그만 탁상을 놓고 그곳에서 집무를 하곤 했다. 그는 샤로트에게 반혁명분자들이 누구냐고 물었고 샤로트가 국민공회의 대의원 열여덟 명이라고 답하자 그들의 이름을 적으라고 했다. 그녀는 반혁명분자의 이름을 적었고 마라가 그들은 파리에서 단두대의 처형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는 미리 준비한 칼을 꺼내 들고 마라의 심장을 찔렀다. 마라는 큰 소리로 아내를 불렀고 몇 분 뒤 아내의 품에서 숨을 거뒀다. 샤로트는 재빨리 그 방을 빠져나왔는데 한 사내가 그녀를 막고 서서 쇠사슬로 내리쳤다. 얼마 후 경찰이 와서 그녀를 끌고 갔다.

이튿날 공회에서 대의원 귀로는 샤로트에게 죽음보다 더 지독한 고문을 가해야 한다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샤로트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9월의 대학살을 부른 장본인을 복수한 것에 불과하며 자신이 “한 사람을 살해함으로써 십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고 했다. 그녀는 또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할 것”이라고 했다.

귀로는 대의원들을 향해 외쳤다.

 



살해 자의 손이 우리에게서 시민을 가장 용기있게 옹호하신 분을 강탈했소. 그분에게 죄가 있다면 자유를 위해 늘 자신을 바쳐온 것 밖에는 없소. 우리는 아직도 우리 가운데 그분을 찾고 있소. … 다비드, 당신은 어디에 있는 거요? 당신은 나라를 위해 죽어간 르 펠레티에의 순사 모습을 후세에 남기려고 그렸는데 당신이 그려야 할 작품이 여기 하나 더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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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다비드는 “제가 하겠습니다”하고 응답했다. 다비드는 마라와 함께 프리메이슨에 속해 있었으므로 그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마라가 살해되던 날 밤 현장으로 달려가 그의 손에 펜과 종이가 들려 있는 것을 보았다. 목욕하는 동안에도 마라는 나라를 위해 집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본 장면을 그대로 그려서 프랑스 시민에게 보여주겠다고 했다. 마라의 장례장면을 그리려고도 생각했지만 여름이라 시신이 금새 부패해졌으므로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마라의 시신이 초록색으로 변했으므로 화장으로 색을 달리 했고 뻣뻣해진 손에 억지로 깃펜을 쥐게 만들고 시신을 조금 위로 세운 후 그렸다. 펜으로 검정색과 브라운색을 혼용해 드로잉한 것은 시신을 직접 보고 그렸기 때문인 듯하다.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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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의 시신은 코르델리에르 정원 나무 아래 안장되었는데 그 나무 아래서 마라는 시민들과 대화하곤 했다. 샤로트는 혁명의 광장에서 처형되었다. 그녀는 임종에 신부가 입회하는 종교의식을 거부했다.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11을 그렸는데 그가 혁명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관여했는가를 말해주며 양식과 독창성에 있어 빼어남을 알게 해준다.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시킨 최고의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을 1793년 11월 14일 공회에 소개했다. 코르델리에 교회에서 거행된 장례식 때 마라는 대의원들에 의해 예수에 비견될 정도로 숭배를 받았다. 다비드가 묘사한 마라는 예수 외에도 고대의 죽어가는 영웅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높은 곳으로부터 내려오는 빛에 의한 명암이 초자연적인 분위기를 창출해 마라의 모습을 더욱 미화시킨다. 목욕탕에서의 죽음은 이후 판화 제작자들이 선호하는 주제가 되었고 공포영화에 종종 사용되었다.

다비드가 그린 <르 펠레티에>와 <마라의 죽음>은 공화당의 제단화가 되었다. 두 작품은 파리 시민에게 두려움과 존경심 그리고 혁명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었다. 두 작품은 1795년 2월 9일까지 대회장 회장석 양편에 걸렸고 그해 10월 27일 다비드의 소유로 허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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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이론은 물리학의 끝인가?


 

 

 

 

M-이론은 우주의 시작에 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지만 이론이 제시하는 모형 자체는 미완성이다. 1968년에 탄생한 끈이론에는 아직 최종적인 방정식이 없다. 현재 M-이론은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중 하나가 이론에서 허용되는 막이 너무 많은 것이다. 실로 다양한 막들이 난립하고 있다. M-이론에 등장하는 수백 가지의 막들은 근본적인 개념이 될 수 없다. 아인슈타인은 물질을 오로지 시공간의 기하학적 특성으로 설명했다. 즉 전자를 비롯한 모든 소립자를 시공간의 기하학적 교란으로 해석할 것이다. 비록 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M-이론에서 화려한 부활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아인슈타인의 목적은 기하학을 이용하여 미시세계 물리학을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는 입자를 점으로 간주한 상태에서 기하학적인 접근을 시도했지만 입자를 끈이나 막으로 해석하면 새로운 결과가 얻어질 수도 있다.



컬럼비아 대학의 물리학자이며 『엘러건트 유니버스 Elegant Universe』와 『우주의 구조 The Fabric of the Cosmos』의 저자 브라이언 그린Brian Greene(1963~)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끈이론학자들은 등가원리equivalence principle를 빼앗긴 아인슈타인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다. 1968년에 베네치아노에 의해 처음 제기된 후로 끈이론은 흩어진 조각들을 모으고 새로운 발견을 꾸준히 이루어내면서 혁명적인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모든 요소를 하나로 아우르고 끈의 존재에 필연성을 부여하며 이론의 앞길을 인도할 만한 기본원리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 원리가 발견되면 끈이론은 다시 한 번 혁명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모든 것이 명쾌하게 드러날 것이다.”



수백만 개에 달하는 끈이론의 해들은 각기 나름대로 자체모순이 없는 우주를 서술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의 우주에 해당하는 단 하나의 해를 골라낼 수 없는 것은 그런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모든 해가 똑같으며 각각의 해에 해당되는 다중우주들이 동일한 물리법칙을 만족하면서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발생학적 원리에 입각하여 디자인된 우주라는 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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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Black Hole과 정보역설Information Paradox


 

 

 

 

끈이론string theory은 정보이론information theory에 등장하는 난해한 역설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완전히 검은 천체가 아닌 블랙홀에서 소량의 에너지가 양자역학의 터널효과에 의해 서서히 밖으로 새어나오고 있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물질이나 에너지의 흐름이 강한 장벽에 부딪혔을 때 그들 중 일부는 벽을 뚫고 빠져나올 수 있다. 그 결과 블랙홀은 소량의 복사를 서서히 방출하고 있는데, 이것을 호킹복사Hawking radiation라 한다.



블랙홀의 복사는 사건지평선event horizon의 면적에 비례하여 고유한 온도를 갖고 있다. 호킹은 이와 관련된 방정식을 유도했는데, 정확한 결과를 얻으려면 통계역학적 이론을 십분 활용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통계역학적 계산이란 원자나 분자가 취할 수 있는 상태의 수를 헤아리는 작업을 의미한다.



블랙홀의 상태수를 해결하기 위해 하버드 대학의 이론물리학자들 앤드루 스트로밍거Andrew Strominger(1955~)와 쿰룸 바파는 M-이론을 이용하여 블랙홀의 특성을 분석했다. 블랙홀을 직접 다루기 어려웠으므로 그들은 다른 각도로 문제에 접근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했다. “블랙홀의 이중dual은 무엇인가?” 전자의 이중은 자기홀극magnetic monopole이다. 그러므로 약한 전기장electric field 속에서 전자의 특성을 연구하면(이 실험은 어렵지 않다) 강한 자기장magnetic field 속에 놓인 자기홀극의 특성을 유추할 수 있다(이 실험은 직접 수행하기 어렵다). 블랙홀의 이중을 찾아내어 그 특성을 분석하면 블랙홀을 직접 상대하지 않고서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스트로밍거와 바파는 일련의 수학적 과정을 거친 끝에 블랙홀의 듀얼은 1-브레인(막)과 5-브레인(막)의 조합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스트로밍거와 바파는 이 계산을 수행하여 호킹과 동일한 결과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물리학자들에게 이것은 희소식이었다. 실제세계에 적용할 수 없다는 비난을 감내하던 끈이론이 블랙홀 열역학thermodynamics의 해를 가장 우아한 방법으로 구한 것이다.



이제 끈이론학자들은 블랙홀물리학의 가장 커다란 수수께끼인 정보역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호킹은 블랙홀로 무언가를 던졌을 때 그 안에 들어있는 정보는 영원히 소실된다고 주장했다. 멀리서 바라볼 때 블랙홀에 관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정보라고는 질량과 스핀 그리고 전하량뿐이다. 우주에 관한 정보가 손실되는 것은 아인슈타인 이론의 필연적인 결과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정보가 결코 손실되지 않는다는 양자역학의 원리에 위배된다. 원래의 물체가 블랙홀에게 잡아먹힌 후에도 그 물체와 관련된 정보는 우주의 어딘가에 남아있어야 한다. 호킹은 말했다.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정보가 손실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아마도 그 저변에는 우리의 세계가 안전하고 예견 가능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시공간에는 일종의 매듭이 형성되어 있으며, 그 근방에서 정보는 얼마든지 유실될 수 있다. 정보의 유실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오늘날 이론물리학이 안고 있는 커다란 숙제이다.”



호킹이 물리학자들에게 준 이 역설은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다. 끈이론학자들은 잃어버린 정보의 행방을 언젠가는 알아낼 수 있을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예를 들어 블랙홀을 향해 책을 던졌다면 책에 들어있는 정보는 호킹복사를 통해 서서히 우주공간으로 방출될 것이다. 또한 블랙홀 반대쪽에 있는 화이트홀을 통해 밖으로 유출될 수도 있다. 2004년 호킹은 TV 카메라 앞에서 정보이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시인했으며 인터뷰 내용은 『뉴욕타임스』의 머리기사를 장식했다. 30년 전 호킹은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 정보는 결코 재현될 수 없다고 단언하면서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물리학자들과 백과사전 전질을 걸고 내기를 벌인 적이 있었다. 호킹은 과거에 했던 계산을 다시 수행한 끝에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 책은 복사장을 교란시키며, 이 과정에서 책에 담긴 정보는 밖으로 유출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정보 자체는 이리저리 난도질당해 완전히 망가져 있겠지만 정보의 흔적이 블랙홀 밖으로 서서히 유출된다는 점을 시인한 것이다. 이로써 호킹은 정보가 유실되지 않는다고 믿는 양자역학의 주류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남아있다. 정보는 평행우주들 사이를 오락가락할 수 있을까? 표면적으로 보면 호킹의 결과는 웜홀을 통한 평행우주들 간의 정보교환을 부정하는 듯이 보이지만, 이것을 최종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끈이론이나 양자중력이론이 완성되기 전까지 정보 역설은 여전히 미해결문제로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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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사 랜들Lisa Randall(1962~)


 

 

 

 

M-이론은 기존의 끈이론을 모두 포함하는 강력한 이론이면서 또한 열한 번째 차원의 규모가 실험실에서 관측 가능할 정도로 크다는 것이 가장 매력적인 점이다. 하버드 대학의 리사 랜들은 우리의 우주가 정녕 고차원 공간을 표류하고 있는 3-브레인(막)이라면 이로부터 중력이 다른 힘들보다 현저하게 약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란 일념으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뉴욕시의 퀸즈에서 성장한 랜들은 어려서 수학을 유별나게 좋아했다. 아인슈타인은 “순수수학은 논리적인 생각을 표현하는 한 편의 시이다”라고 말했다. 일찍이 갈릴레오는 자신의 저서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우주를 이해하려면 그에 적절한 언어를 반드시 익혀야 한다. 그 언어란 삼각형과 원을 비롯한 여러 도형들이 알파벳으로 사용되는 수학이다. 수학 없이 우주를 논리적으로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랜들은 하버드 대학원생이던 1980년대 초에 우주의 구체적인 모델을 제시하는 물리학에 매력을 느끼고 진로를 바꿨다. 물리학자들은 이론을 처음 내놓을 때 수학자들처럼 한 무더기의 방정식을 늘어놓지 않는다. 새로운 물리학이론은 자연현상을 근사적으로 서술하는 간단하고 이상적인 모형에서 출발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모형들은 상당히 시각화되어 있어서 이해하기도 쉽다. 예를 들면 쿼크모형은 하나의 양성자가 세 개의 쿼크로 이루어져 있다는 간단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랜들은 1990년대에 우주전체가 하나의 막이라는 브레인세계가설brane world scenario에 매력을 느껴 M-이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특히 그녀는 중력이 다른 힘들보다 형편없이 약한 이유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우주에 존재하는 세 종류의 힘들 전자기력, 약력, 강력은 거의 비슷한 세기로 작용하는 반면 중력은 이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미미한 힘이다. 특히 쿼크의 질량은 양자중력과 관계된 질량보다 훨씬 작은 값을 나타내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해 랜들을 말했다. “그 차이는 실로 대단합니다. 두 질량의 차이는 무려 1016배나 되거든요. 이 엄청난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있다면 그 이론은 표준모형까지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중력이 약한 이유는 별의 덩치가 그토록 큰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중력 자체가 워낙 약한 힘이기 때문에 양성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전기적 척력repulsive을 이겨내고 안으로 수축되려면 중력을 행사하는 질량이 엄청나게 많아야 한다. 별의 덩치가 상대적으로 큰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리사 랜들과 그녀의 연구동료인 라만 선드럼Raman Sundrum은 다섯 번째 차원이 우리로부터 수mm가 아니라 무한히 멀리 떨어져 있을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새로운 접근방법을 선택했다. 먼저 그들은 다섯 번째 차원이 뉴턴의 중력법칙을 어기지 않은 채로 무한대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을 설명해야 했는데, 랜들이 제시한 해답은 다음과 같다. “3-브레인(막)의 중력은 다섯 번째 차원으로 이탈하는 것을 방지한다.” 즉 3-브레인(막)이 행사하는 중력 때문에 중력자들이 3-브레인(막)에 들러붙어 있다는 것이다. 벌레잡이용 끈끈이에 들러붙어 있는 파리와 비슷하다. 그러므로 뉴턴의 중력법칙은 우리의 우주에서 거의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물론 3-브레인(막)을 이탈하면 중력이 약해지지만 중력자가 3-브레인(막)으로부터 멀리 이탈하지 못하기 때문에 역제곱 비례법칙은 거의 정확하게 유지된다. 랜들은 우리의 우주와 나란히 존재하는 또 하나의 막을 도입했다. 두 막 사이의 미묘한 중력적 상호작용을 계산할 수 있다면 중력이 약해지는 정도를 수치적으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 랜들은 말했다. “여분의 차원이 계층문제의 기원을 설명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처음 제시되었을 때 물리학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차원이 존재한다는 아이디어는 일견 황당하기도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논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중력은 원래 다른 힘들과 거의 비슷한 크기였는데, 일부가 더 높은 차원으로 새나가면서 약해졌다고 설명할 수 있다. 이로부터 얻어지는 가장 심오한 결과는 양자적 효과에 의한 에너지가 과거의 생각처럼 플랑크에너지(1028 전자볼트)만큼 크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 에너지가 수조(1012) 전자볼트electron volt 정도라면 초대형 강입자가속기Large Hadron Collider를 이용해 관측할 수 있을 것이다. 실험물리학자들은 표준모형을 넘어서 존재하는 신비의 입자를 남보다 먼저 관측하기 위해 다양한 실험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막의 개념은 아직 이론에 머물러 있긴 하지만 암흑물질에 대한 나름대로의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의 우주 바로 위로 떠다니는 평행우주는 3차원의 높낮이 개념이 아니라 3차원 공간과 아예 분리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 평행우주 속에 있는 은하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초공간의 굴곡은 중력을 야기하기 때문에 중력은 두 우주 사이를 건너뛸 수 있다. 즉 다른 우주에 있는 은하가 초공간을 통해 우리 우주에 있는 은하와 중력을 주고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은하의 특성을 잘 관측하면 은하의 중력이 뉴턴의 법칙으로 예견되는 값보다 크게 나올 수도 있다. 근처에 숨어있는 막에 다른 은하가 추가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은하들의 질량이 우리 은하의 질량보다 압도적으로 크다면(약 9배) 암흑물질의 정체는 평행우주에 속한 은하라고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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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과 루이 16세의 처형



 



 

 

 

다비드는 1792년 봄 루이 16세로부터 아들이며 후계자 도핀(Dauphin, 프랑스 왕세자 칭호)에게 자신이 헌법을 보여주는 장면을 그릴 것을 주문받았다. 전제정치에 반대하던 다비드로서는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왕이 이런 주제의 작품을 주문한 데서 전통 왕정정치와 혁명의 새로운 기운을 동시에 감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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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다비드는 루이 16세가 왕세자에게 헌법을 보여주는 장면108과 프랑스 국민이 왕에게 왕관과 왕위를 바치는 장면109을 은유적으로 그렸다. 이는 왕권이라도 헌법을 준수하지 않으면 사라질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지만 그 보다는 왕권에 대한 옹호처럼 보인다. 이 작품은 다비드 자신의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 반은 혁명에 반은 왕정에 기울어진 태도로 보인다. 이것 역시 완성하지 못했는데 정치적 전환기가 왔기 때문이다.

루이 16세는 헌법 제정에 협력하지 않았으며 이는 공화당이 출범하는 발판이 되었다. 훗날 루이 16세를 그리려 했다는 비난을 받자 다비드는 부인하면서 브루투스를 그린 화가가 어떻게 왕을 그리려 했겠느냐고 거짓말을 하며 궁색하게 변명했는데 그의 이중적 성격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때는 1792년 9월 국민공회에 의해 파리를 대표하는 의원으로 선출된 후부터였다. 이를 계기로 그는 정치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장-폴 마라, 그리고 파리에서 변호사로 활약하는 조르주 자크 당통 등과 어울리게 된다. 마라는 49세로 가장 나이가 많았고 로베스피에르는 34살, 당통은 33살이었다.

1792년 9월 21일 국민공회는 전제정치의 종식을 선언했다. 11월부터 루이 16세의 신병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관한 논의에 들어가, 12월 11일 그를 전제군주로 법정에 세웠다.

1793년 1월 16일에 열린 국민공회는 왕에 대해 법적 심판을 내리기로 하고 왕에 대한 모든 대의원들의 의견을 24시간에 걸쳐 청취했다. 왕을 구금하는 선에서, 또는 추방하는 것으로 매듭을 짓자고 주장한 대의원들이 많았지만, 왕을 처형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다비드는 왕의 처형에 찬동했다. 최종적으로 결의한 결과 387 대 334로 왕을 처형하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이틀 뒤 1월 21일 루이 16세의 죄목이 공표되었고 다음날 왕은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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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6세를 처형하기 위한 단두대는 혁명 광장의 처형대 위에 설치되었다. 고해신부로 참석한 아일랜드 태생 아베 헨리 에지워츠는 루이 16세가 처형대 계단을 오를 때 “성 루이의 아들이 하늘로 오른다”는 말로 조소했다. 왕은 마지막으로 군중을 향해 자신을 처형하는 사람들을 용서한다고 했다. 왕의 두터운 목을 칼이 내리치며 잘랐고 한 젊은이가 왕의 머리를 들어 군중에게 보여주었다.112~114 몇몇 사람이 달려가 천과 종이를 들이대고 뚝뚝 떨어지는 왕의 피를 받았다.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비참하게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의 왕족들이 치를 떨었고, 혁명을 지지하던 사람들 중에서도 왕에 대한 동정심이 생겨 자유와 평등의 이상은 한때 무정부 상태를 맞았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왕위를 신성에 의한 절대적 권리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에서 단두대를 보기란 쉬웠다. 너무 신속하게 많은 사람들을 처형했다. 단두대를 설치할 때 인근 주민들과 상점 주인들은 단두대 설치에 반대했는데 냄새가 지독한 데다 개들이 떼를 지어와 바닥에 흘려진 피를 핥아 먹기 때문이었다. 이후 단두대는 지역별로 필요에 의해 정기적으로 설치되었다.

왕의 처형은 다비드 인생에 한 전환이 되었는데 다비드의 아내는 남편이 왕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진 데 대해 화를 내며 이혼을 요구했다. 왕권을 신성시해온 전통이 너무 오래 지속되었으므로 다비드의 아내뿐 아니라 왕의 처형에 찬성했던 사람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왕이 처형된 데 대해 죄의식을 느꼈다. 혁명은 과연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비드의 아내도 혁명을 지지했지만 남편이 지나치게 과격한 정치적 행동을 취하자 반감을 갖게 되었고 두 사람의 불화가 걷잡을 수 없게 되어 별거에 들어갔다. 다비드 부부는 1794년 3월 합법적으로 이혼했다. 아내의 돈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자 다비드는 한동안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는 두 아들을 맡아 길렀고 아내는 두 딸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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