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루이 다비드의 공화국을 위한 제단화 <마라의 죽음>

정치에 대한 다비드의 관심이 급증했다. 그는 1794년 1~2월 한 달 동안 공회 회장직을 역임했고, 쟈코뱅 클럽 회장으로도 활약했으며, 안보위원회Committee of General Security와 교육위원회Committee of Public Instruction 멤버로 활동했다. 1794년의 쟈코뱅 클럽은 그 수가 6천 8백 개가 넘었고 멤버는 50만에 이르렀다. 1791년 파리를 방문한 영국인의 말에 의하면 거리마다 쟈코뱅 클럽이 있었다. 다비드는 지나칠 정도로 정치에 깊숙이 개입했다. 안보위원회는 매일 매일의 테러를 계획하고 결정하는 매우 과격한 단체로 이런 공포정치에 다비드가 깊숙이 개입한 것이다.
이 시기에 다비드는 혁명의 세 순교자들을 기념비적으로 그렸다. 르 펠레티에가 과거 왕의 호위대였던 파리스에 의해 저녁식사 도중에 살해되었다. 귀족 르 펠레티에는 정치적인 기회주의자로서 왕의 처형에 찬성했던 사람이다. 공화당원들은 그의 죽음을 자유를 위한 순교로 받아들였으며 그의 장례를 국장으로 성대하게 치렀다. 벤돔 광장에 놓인 시신의 머리에는 월계수관이 씌워졌으며 몸통을 천으로 덮지 않아 그가 어느 부위에 상처를 입고 살해되었는지 볼 수 있게 했다. 르 펠레티에의 찢겨지고 피 묻은 옷과 파리스가 사용한 칼도 함께 전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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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는 대리석을 사용해 기념비를 제작하려다 그림으로 그리기로 했다. 이 작품은 1793년 8월 10일에 개막된 살롱을 통해 소개되었는데 르 펠레티에의 시신이 고결하게 죽음을 맞이한 고대 전사의 모습처럼 보였다.115 그의 모습은 <헥토르의 죽음을 애도하는 안드로마케>9에서의 헥토르의 시신과 닮았다. 공화당 대의원의 성스러운 죽음이 왕을 처형한 데 대한 시민들의 죄의식을 다소나마 덜어주었다. 살해에 사용된 파리스의 칼은 르 펠레티에의 상처 부위 위로 한 가닥 실에 매달린 것으로 구성되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 칼이 왕의 경호원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칼은 종이를 뚫고 있는데 종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나는 전제군주의 죽음에 찬성표를 던졌다.” 다비드는 그림 하단 오른쪽에 “르 펠레티에에게 다비드가 1793년 1월 20일”이라고 적었다.
다비드는 1793년 4월부터 쓰기 시작한 자서전에서 르 펠레티에가 마지막 말을 남기고 막 숨을 거두는 장면을 그리려 했다고 적었다. 르 펠레티에의 마지막 말이다. “나는 조국을 위해 피를 흘리는 데 만족한다. 이것이 적들에게 교훈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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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게도 이 작품은 현존하지 않는다. 르 펠레티에의 딸 수잔이 훗날 다비드의 후손으로부터 10만 프랑이라는 거액을 주고 이 작품을 구입한 후,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불에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달리 그녀는 열렬한 군주제 지지자였다. 또한 타르디우가 다비드의 작품을 잉그레이빙한 것도 수잔이 오리지널 판화와 복사본을 여러 점 구입해 없애버렸다.116 오늘날 우리는 타르디우의 찢겨진 판화117와 다비드의 제자 드보제의 드로잉117을 통해서 다비드의 원래 작품을 어림할 수 있을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수잔이 아버지의 죽음을 영웅적으로 묘사한 다비드의 작품을 불태워 없앴음에도 불구하고, 1804년에 그녀의 두 번째 결혼을 기념하는 자신의 초상118을 다비드에게 의뢰했다는 사실이다.
다비드는 르 펠레티에의 순교 모습을 소개한 지 석 달반 만에 또다른 공화당 대의원의 죽음을 그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번에는 매우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장-폴 마라가 살해되었다.
마라는 인기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상에 심취했으며 ‘시민의 친구’로 불리며 존경받았다. 당시 국내에서는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쟈코뱅 행동대원들에 의해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한 유혈사태가 종종 발발하고 있었다. 마라는 과격한 행동을 통해서만 자유와 평등이 확립된다는 점을 강조했고 과격한 언행으로 1793년 4월에 구금된 적도 있었다.
마라는 노르망디 태생 스물네 살의 샤로트 코르데이에 의해 1793년 7월 13일 살해되었다. 카엥에서 온 샤로트는 드라마 작가 피에르 코르네유의 후손으로 보수적 왕당파 집안 출신이다. 그녀는 자신을 주디스(Judith, 아시리아 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죽인 유대인 여자 영웅)에 비견해 혁명의 정신적 지도자 마라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수녀단에서 교육을 받고 2년 동안 수녀로 헌신한 적도 있는 그녀는 플루타르크, 루소, 볼테르의 저서를 읽었고 왕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에 매우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7월 9일 마차를 타고 카엥을 떠나 11일 파리에 도착한 후 15센티미터 길이의 칼을 구입했다. 샤로트는 혁명 4주년 국민공회 기념식에서 마라를 죽일 계획이었지만 병중이었던 마라가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샤로트는 마라의 집에 침입하기로 계획을 변경하고 코르델리에 가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갔지만 마라의 아내 시몬느 에브라르가 안으로 들이지 않아 실패했다.
빈틈 없고 기민한 샤로트는 마라에게 카엥에서 벌어지는 반혁명적인 운동에 관해 적어 보내 환심을 샀다. 그녀는 다시 마라의 아파트를 찾았다. 이번에도 그의 아내가 들이지 않자 신문 파는 사람이 시몬느를 성가시게 구는 사이 쏜살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마라는 피부병 때문에 터번을 두르고 식초를 탄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는 목욕을 자주해야 했으므로 목욕탕에 조그만 탁상을 놓고 그곳에서 집무를 하곤 했다. 그는 샤로트에게 반혁명분자들이 누구냐고 물었고 샤로트가 국민공회의 대의원 열여덟 명이라고 답하자 그들의 이름을 적으라고 했다. 그녀는 반혁명분자의 이름을 적었고 마라가 그들은 파리에서 단두대의 처형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는 미리 준비한 칼을 꺼내 들고 마라의 심장을 찔렀다. 마라는 큰 소리로 아내를 불렀고 몇 분 뒤 아내의 품에서 숨을 거뒀다. 샤로트는 재빨리 그 방을 빠져나왔는데 한 사내가 그녀를 막고 서서 쇠사슬로 내리쳤다. 얼마 후 경찰이 와서 그녀를 끌고 갔다.
이튿날 공회에서 대의원 귀로는 샤로트에게 죽음보다 더 지독한 고문을 가해야 한다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샤로트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9월의 대학살을 부른 장본인을 복수한 것에 불과하며 자신이 “한 사람을 살해함으로써 십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고 했다. 그녀는 또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할 것”이라고 했다.
귀로는 대의원들을 향해 외쳤다.
살해 자의 손이 우리에게서 시민을 가장 용기있게 옹호하신 분을 강탈했소. 그분에게 죄가 있다면 자유를 위해 늘 자신을 바쳐온 것 밖에는 없소. 우리는 아직도 우리 가운데 그분을 찾고 있소. … 다비드, 당신은 어디에 있는 거요? 당신은 나라를 위해 죽어간 르 펠레티에의 순사 모습을 후세에 남기려고 그렸는데 당신이 그려야 할 작품이 여기 하나 더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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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다비드는 “제가 하겠습니다”하고 응답했다. 다비드는 마라와 함께 프리메이슨에 속해 있었으므로 그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마라가 살해되던 날 밤 현장으로 달려가 그의 손에 펜과 종이가 들려 있는 것을 보았다. 목욕하는 동안에도 마라는 나라를 위해 집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본 장면을 그대로 그려서 프랑스 시민에게 보여주겠다고 했다. 마라의 장례장면을 그리려고도 생각했지만 여름이라 시신이 금새 부패해졌으므로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마라의 시신이 초록색으로 변했으므로 화장으로 색을 달리 했고 뻣뻣해진 손에 억지로 깃펜을 쥐게 만들고 시신을 조금 위로 세운 후 그렸다. 펜으로 검정색과 브라운색을 혼용해 드로잉한 것은 시신을 직접 보고 그렸기 때문인 듯하다.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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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의 시신은 코르델리에르 정원 나무 아래 안장되었는데 그 나무 아래서 마라는 시민들과 대화하곤 했다. 샤로트는 혁명의 광장에서 처형되었다. 그녀는 임종에 신부가 입회하는 종교의식을 거부했다.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11을 그렸는데 그가 혁명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관여했는가를 말해주며 양식과 독창성에 있어 빼어남을 알게 해준다.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시킨 최고의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을 1793년 11월 14일 공회에 소개했다. 코르델리에 교회에서 거행된 장례식 때 마라는 대의원들에 의해 예수에 비견될 정도로 숭배를 받았다. 다비드가 묘사한 마라는 예수 외에도 고대의 죽어가는 영웅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높은 곳으로부터 내려오는 빛에 의한 명암이 초자연적인 분위기를 창출해 마라의 모습을 더욱 미화시킨다. 목욕탕에서의 죽음은 이후 판화 제작자들이 선호하는 주제가 되었고 공포영화에 종종 사용되었다.
다비드가 그린 <르 펠레티에>와 <마라의 죽음>은 공화당의 제단화가 되었다. 두 작품은 파리 시민에게 두려움과 존경심 그리고 혁명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었다. 두 작품은 1795년 2월 9일까지 대회장 회장석 양편에 걸렸고 그해 10월 27일 다비드의 소유로 허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