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멘 하라의 『일체감이 주는 행복』(도서출판 知와 사랑)

부제: 나를 치유하는 신성한 연결고리

 

 

 

『일체감이 주는 행복』을 활용하는 방법

 

 

당신은 곧 일체감을 삶 속에 어떻게 합치시킬 것인지, 또 지원과 보살핌을 아끼지 않는 신성한 연결고리를 어떻게 느낄 수 있을지 배우게 될 것이다. 또한 힘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자아를 버리기가 어째서 그토록 어려운지 살펴보고, 신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창조의 힘을 믿음으로써 성장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 자신의 본성과 전체 간의 관계를 이해하다보면, 두려움은 사그라지고 용기와 믿음이 서서히 쌓일 것이다. 더불어 인간의 역사에서 자아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순간 지혜를 잃게 된다는 사실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성스러운 지성을 되찾음으로써 자신을 치유하고 더 나아가 인류 전체를 치유할 수 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서는 왜 우리가 일체감 앞에서 머뭇거리는지 알아보고 의식의 진화가 왜 이토록 시급한 일인지 살핀다.

•제2부 각 장에서는 이제까지 지나쳐왔던 일체감과 신성한 연결고리를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제3부에서는 일체감을 성취하는 데 매우 중요한, 관점의 전환이라는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 그중 하나는 시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종교와 과학 그리고 영성의 관점을 얻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당신이 지금까지 배운 제한적 사고와 작별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끝으로 제4부에서는 사고방식을 전환하고 사람들과 더 많이 소통함으로써 일체감이라는 개념을 세상 속에 적용할 수 있는 현실적 방법을 발견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이 분열감을 덜 느끼고 서로 소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각 장마다 당신에게는 세 가지씩 임무가 주어질 것이다. 첫째, 자신과 자신이 겪은 경험을 관찰할 것, 둘째, 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할 것, 셋째, 일체감을 구현하려는 실천을 할 것이 그것이다. 관찰, 기도, 행동, 이 세 가지는 인류의 진화와 고통의 치유를 위한 중요하고 효과적인 노력에 속한다.

 

 

관찰

늘 깨어 있으며 현재 일어나는 모든 일을 흡수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지금 당신은 매우 불안정하고 겁에 질려 있을 수도 있다.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시간을 들여 관찰해본다면 자신이 변화의 한가운데에 서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삶의 한 부분이다.

하지만 자아는 앞으로 나아가는 데 두려움을 느끼고 엄청난 힘으로 저항하려 한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부정할 수 있는 상황은 오래가지 못한다. 부정은 그저 괴로움을 연장하고 악화시킬 따름이다. 이제 나는 현재의 상황을 관찰하고 반성할 수 있는 용기를 내는 법을 보여주려 한다. 언제라도 신성한 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으면 용기를 내기가 훨씬 쉬워진다.

 

 

기도

‘기도pray’라는 단어는 ‘간절하게 부탁하다, 간청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precari에서 비롯되었다. 기도란 어떤 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신과 나누는 대화를 이른다. 어떤 사람은 신이나 상위의 존재에게 기도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지만, 또 어떤 사람은 진지하게 부탁하면 소원을 들어준다는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개념에 발끈하기도 한다.

기도에 대해 생각할 때 당신은 상처받거나 짜증을 내거나 불신에 차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결함이 있는 사람들과 기도를 결부시키기 때문이리라. 그런 사람들은 기도의 목적을 잘못 이해하고 있으며, 인간을 고립시키고 분리하는 데 기도를 이용한다. 하지만 기도는 분열이 아니라 합일이다. 기도는 힘세고 변덕스러운 하나님에게 당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달라고 간청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당신도 한 부분에 속하는 무한하고 신성한 기원과 연결되는 것이며, 도움을 청하고 어떤 형태로든 전해지는 도움에 자신을 열어놓는

것이다. 당신의 기도에 응답이 있겠지만 당신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방법으로는 아닐 것이다. 기도하는 습관을 기르다 보면 이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기도를 하다 보면 당신이 어떤 도움을 원하는지, 또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가 보다 분명하게 보일 것이다.

만일 모든 존재의 근원에게서 도움을 받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계속해서 이 책을 읽기 바란다. 그러다 보면 당신에게 남아 있던 불신과 불편함이 점점 사라질 것이다. 당신이 느끼는 에너지를 여성이나 남성 혹은 부모님과 같은 모습으로 상상할 필요는 없다. 그저 사랑과 이해, 무한히 자비롭고 배려로 가득 찬 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나는 그것을 이나 영적 존재 혹은 신성한 존재라고 부를 테지만, 당신은 당신 편할 대로 불러도 좋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당신은 신성한 존재와의 연결을 경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당신 자신을 위한 신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도 없앨 수 있다. 각 장이 끝날 때마다 일체감과 그 중요한 측면을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도하기를 제안하고 싶다. 그것이 마음이든 몸이든 영이든 우주적 일체감이든 혹은 다른 형태의 측면이든 상관없다.

 

 

행동

당신도 이미 알고 있듯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의도나 의지가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실천적인 행동이다. 간디는 “세상의 변화를 보고 싶으면 스스로 그 변화가 되라”라고 말했다. 이 말에는 평화를 스스로 받아들이고 명상하며 행동에 나서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또한 갈등의 불씨를 보더라도 평화를 선택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자아의 두려움에 굴복해 다른 이들과 싸움을 시작한다면 당신이 보고 싶은 변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 외부 세계의 변화는 내부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행동은 언제나 중요한 변화의 한 부분이다. 원하는 것을 결정하고 행동에 나서야만 당신의 생각과 행동 유형도 바뀔 수 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노력일지 모르지만 그 작은 행동이 훗날 큰 파도를 일으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 세 가지 훈련을 통해 당신은 개체이면서도 전체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모든 피조물 및 신과의 조화 속에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심장과 마음 그리고 정신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째서 이러한 개인적 경험(즉 자신과 진실의 본성을 느끼고 깨닫는 것)이 자신의 치유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의 치유와 진화를 앞당기는 데 큰 역할을 하는지 설명하려 한다.

내 말을 믿기 바란다. 당신이 전체라는 커다란 씨줄과 날줄에서 담당하는 역할은 실로 핵심적이다. 인간성은 위기에 처해 있으며, 좀 더 높은 의식으로 진화하려면 우리가 가진 모든 용기와 지혜 그리고 힘을 모아야 한다. 진정한 목적과 운명이 드러나면서 당신은 자신이 속한 영역에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고 공동체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일체감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의 한 부분으로 만들면 가능하다. 자신의 삶을 발전시키고 다른 모든 존재의 안녕과 행복에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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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 하라의 『일체감이 주는 행복』(도서출판 知와 사랑)

부제: 나를 치유하는 신성한 연결고리

 

 

 

카르멘 하라의 당신과 전체, 일체감과 신성한 전체

 

 

당신과 전체

당신은 개체인가 아니면 거대한 전체의 한 부분인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당신은 그 두 가지 모두 될 수 있다. 전체성이라는 법칙을 수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개인의 자아를 완전히 잃어버린다는 의미는 아니다(사실 그건 불가능하다). 오히려 개별적 존재전체의 일부분이라는 두 정체성을 모두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또한 감각만이 이 세상의 유일한 실재라는 환상(너무나 오랫동안 많은 괴로움의 근원이 된 환상)을 흘려보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문제는 우리가 신성한 연결고리보다 분열성에 집중하기 훨씬 쉽다는 점이다. 왜곡된 자기 이미지는 삶의 불균형의 근원이기도 하다. 비록 자신이 불균형을 만들어내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자기 왜곡은 세상의 불균형에 어느 정도 기여한다.

개별성 그리고 ‘우리 집단’ 대 ‘너희 집단’을 나누는 사고방식 때문에 인류는 고대의 예언자들이 전환점이라고 부를 만한 재앙의 문턱에 이르렀다. 우리의 두려움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인정하고 자아의 지배를 거부한다면, 인간에게도 커다란 희망이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영혼의 기억상실증을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단지 하나의 개체이거나 유한한 존재가 아니라 창조의 씨줄과 날줄 속에 신의 사랑으로 짜인 영원한 실체다. 태어나면서부터 얻게 된 성스러운 권리, 순수한 기쁨과 고요함, 건강과 웰빙을 요구할 수 있다. 일체감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일체감과 신성한 전체

대개의 경우 ‘신성한holy’이라는 단어는 종교 지도자나 종교 의식과 의례에 독점적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축복받은 존재이고 다른 모든 존재와 신성한 합일을 이루고 있으며 영적 존재와 관계를 맺는 데는 누구의 허락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신성한 존재가 될 만큼 자신이 훌륭하지 않다고 두려워할 필요도 전혀 없다. 매리언 윌리엄슨Marianne Williamson은 『사랑으로의 회귀A Return to Love』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불안함을 느끼지 않도록 스스로를 위축시킬 필요가 전혀 없다. 우리는 아이들이 그렇듯이 모두 빛나야 할 존재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신의 영광을 항상 구현하기 위해 태어났다. 신의 영광은 특정한 몇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깃들어 있다. 자신이 빛을 발하는 순간 그 빛은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도 똑같이 빛을 발하도록 만든다. 두려움에서 해방된 나라는 존재가 다른 존재가 해방될 수 있게 하는 촉매가 되는 것이다.

자신이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느낌이나 중요하지 않다는 느낌은 자아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다. 둘 다 다른 존재와의 합일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내서 고통과 고립 속으로 몰고 가는 요소다. 사랑과 힘이 넘치는 영령과 연결되었을 때, 우리는 깊은 경외심과 치유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외로워하지 말고 일체감 속으로 들어오라, 그러면 자신이 그 안에 속해 있으며 사랑과 도움을 받고 있음을 실감할 것이다. 더 이상 상실감이나 괴로움에 짓눌리지 않아도 된다. 당신은 자신이 생명과 치유로 가득 찬 에너지를 스스로에게 전해주는 거대하고 사랑에 가득 찬 자비로운 전체의 일부임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육체적·정신적·감정적인 모든 측면에서 편안함과 행복함을 느낄 것이다. 처음에는 그런 느낌이 그리 오래 머물지 않고 곧 사라진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것이 세상과 당신의 자연스러운 상태이며, 일체감을 경험하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어느새 그런 상태가 당신 주위에 구현되어 있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괴로움 또한 삶의 조건이라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괴로움이 존재의 중심이 될 필요는 없다. 모든 인간이 일체감을 받아들이면 갈등과 질병, 불행도 곧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완벽하고 완전무결한 상태, 온전한 치유의 상태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 일체감을 구현하는 데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행복해질 수 있다. 불화와 질병 그리고 불균형에 병들지 않고 영광 속에서 사는 삶, 그것이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은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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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 하라의 『일체감이 주는 행복』(도서출판 知와 사랑)

부제: 나를 치유하는 신성한 연결고리

 

 

 

도서출판 知와 사랑: 우리의 영혼은 비일상적이다

 

 

눈을 보면 모든 인간이 특별한 육체와 마음, 생각과 성격을 지닌 개별적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감각만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하나의 위대한 실체를 깨닫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이 위대한 실체의 일부분이라고 느낄 때가 있다. 이런 순간은 너무나 짧고 또 오래전에 경험한 일이라서 기억의 장난이 아닐까 넘겨버릴 수도 있다. 아니면 모든 존재와 하나가 된 느낌을 주는 그 신비한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애써 그 중요성을 외면해버릴 수도 있다.

사실 당신은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커다란 가족의 일원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세상에서 경험하는 괴로움이나 소중한 사람을 잃고 겪는 고통이 너무나 커서 혼돈과 무질서밖에 생각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양과 소리, 냄새로 이루어진 세상 안에는 숨겨진 질서, 진실의 구조가 있다. 그것은 보거나 만질 수는 없지만 분명 실재한다. 논리와 가능성의 법칙을 배반하는 이상한 우연과 마주치거나 어떤 사람을 보는 순간 방금 만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자신과 결혼할 운명이라고 느낄 때, 당신은 숨겨진 구조를 감지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결고리는 갑자기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지거나 어떤 신성함이 당신의 삶에 들어왔다고 마음으로 느끼는 순간 좀 더 분명하게 자각된다.

우리의 영혼은 비일상적이며 감각을 넘어서는 이런 위대한 진실을 깨닫지만 머리는 거부한다. 위대한 진실을 들여다볼 기회가 있더라도 당신의 마음은 그것을 이해하거나 조절하거나 진실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거부하려 한다. 그래서 좌절감에 빠져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확신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양자역학 같은 과학이 이제까지 감춰졌던 진실을 드러내려고 하는 요즈음, 논리를 중시하는 당신의 마음도 영혼이 속삭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을 수 있다. ‘인생에는 꼭 괴로움과 투쟁만 있는 게 아니야. 당신이 느끼지 못하는 의미도 있을 거야.’

고대 철학자나 예언자, 주술사나 영적 지도자의 가르침을 읽다 보면, 아름답고 진실한 그들의 가르침에서 우리가 잊어버린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고대의 현자들은 물질세계의 한계를 뛰어넘어 우리 모두를 하나의 진실로 감싸는 정교한 씨줄과 날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진실은 정보이자 깨달음이다. 성스러운 사랑이며 순수한 의식의 빛이다. 끊임없이 진화하고 점점 밝아지면서 무지와 두려움, 전쟁과 괴로움 그리고 질병을 사라지게 하는 창조의 틀이다. 우리는 모두 거대한 ‘전체’에 속한 하나의 작은 조각이다. 형형색색의 조각보와도 같다. 신성하며 그 자체의 법칙으로 존재한다.

나의 다른 책 『11개의 영원한 원칙The Eleven Eternal Principles』에서도 설명했듯이, 우리가 만지고 냄새 맡고 보고 듣는 이 세계는 너무나 실제적으로 느껴져서 그러한 육체적 감각 너머에 있는 신성한 진실의 본래 모습을 망각하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신성한 법칙 속에 자신을 던지기보다 인간이 만들어낸 법칙을 따른다. 아무리 힘겨운 상황일지라도 가족들과 직장, 친구들을 위해 정해진 법칙에 복종하려 최선을 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이들처럼 역시 상실과 고통, 부당함을 겪고 산다.

그러한 고통에 대항하고자 인간은 영원히 지속되리라 믿고 제도와 시스템을 만들어 그에 의존한다. 또 물질세계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어떻게 하면 생존과 행복, 자유의 기회를 넓힐 수 있을지 온 마음을 다 바쳐 고심한다. 한동안은 인간이 고통을 덜고 기쁨과 성취감을 주는 길로 스스로를 인도하는 데 상당히 성공한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최선을 다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인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제들이 우리를 짓누르고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고문당

하고 노예로 착취당했는가. 그리고 지금도 당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신과 종교의 이름으로 잔혹한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는가? 인간의 시스템이나 규칙, 법률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수많은 문제들이 여전히 우리를 병들게 하는 것도 모자라 점점 더 최악으로 치닫고 있을까?

우리가 부정과 두려움을 떨치게 해달라고, 우리에게 깨달음을 진화시킬 용기를 달라고 천지가 함께 울부짖고 있다. 이제 우리가 만들어낸 괴로움을 치유하고 마땅히 경험해야 할 세계로 돌아가야 할 때가 왔다. 이제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감각을 벗어난 진실 속에서 하나가 되는 법칙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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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 이것이냐 저것이냐 』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철학 논고라기보다는 소설에 가깝다. 그리고 소설들이 그렇듯이 말을 바꾸어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주된 관심은 분명하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물었던 물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다. 이 물음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답은 분명하지 않아서 때로는 모순되고 때로는 혼동되는 해석들이 꼬리를 문다. 겉보기에 이 책은 적어도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두 가지 삶의 방식을 탐색한다. 탐미적 삶과 윤리적 삶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작업은 내부로부터 이루어진다. 즉 각 견해들이 요약되어 제시되기보다는 이 책의 허구적 저자들인 두 등장인물에 의해 표현된다.

가명 저술 pseudonymous authorship

키에르케고르의 저술은 장난기 어린 측면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가명의 사용이다. 이는 단순히 키에르케고르가 여러 필명으로 글을 쓴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과는 다른 성격의 허구적인 인물들을 창조하여 그들의 목소리로 말한다는 뜻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어조는 서론에서 설정된다. 빅터 에레미타라는 나레이터가 어떻게 자신이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원고를 손에 넣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일전에 한 가게의 진열장에 있던 중고 덮개책상(서류함과 서랍이 내장된, 덮개가 달린 프랑스 고전풍의 책상: 옮긴이)을 샀다. 이것은 그가 오래 전부터 사고 싶었던 책상이었다. 어느 날 휴가를 떠나려던 참에 그 책상의 서랍 하나가 무언가에 끼어 움직이지 않았다. 어쩔 도리가 없어서 그는 책상을 발로 찼고 그때 비밀서랍 하나가 불쑥 열리면서 원고뭉치가 드러났다. 이 원고는 두 사람에 의해 작성된 듯이 보였다. 그는 이 두 사람에게 ‘A’와 ‘B’라는 이름을 주고, 순서를 바로잡아서 출판했다. B는 나중에 빌헬름이라는 판사로 드러났지만, A의 정체는 알 길이 없다. 이 이야기는 물론 허구이며 A와 B도 가상의 인물이다. 이 책상에 관한 이야기는 이 책의 중심 테마를 보여주는 메타포를 제공한다. 즉 현상과 실재 사이의 불일치, 또는 키에르케고르가 주로 표현하듯이 ‘내부는 외부와 다르다the inner is not the outer’는 것을 암시한다.

가명 저술 기법을 통해 키에르케고르는 이 책에서 탐색되고 표현되는 견해들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으며, 자신의 입장을 그가 등장시킨 인물들 뒤에 숨길 수 있다. 또한 이런 기법을 통해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이 창안해낸 다양한 입장들의 내부로 들어가며, 이런 입장들을 가상적 개인들의 내적 삶의 관점에서 검토할 수 있게 된다. 철학자들이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차가운 추상적 개념화를 통해서 검토하기보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키에르케고르의 간접 의사전달의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추상적 비인격적 개념들을 기술하기보다는 인간 삶의 여러 모습들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살아있는 인간에 대한 진리를 전달하려는 자의식적 시도인 것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수월하게 읽히는 부분은 ‘이것’이란 제목이 붙은 제1부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딱딱하고 다소 힘겹게 쓰인듯한 B의 글보다는 A의 글이 더 흥미롭고 다채롭다고 느낀다. ‘이것’을 재미있게 읽은 사람들 가운데, ‘저것’의 내용을 끝까지 한장 한장 힘들여 읽어낼 사람은 극히 드물다. 심지어 그것이 일반적으로 그런 식으로 더 많이 출간되는 단축본인 경우에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것’은 삶에 대한 A의 접근, 즉 탐미적 접근을 비록 치우치긴 했지만 상세하게 비평하면서 B 자신의 윤리적 접근을 옹호해 나간다. 반면에 A의 글은 삶에 대한 자신의 접근을 직접적으로 기술하지 않는다. 오히려 A는 자신의 관심과 글쓰기 스타일을 통해 삶에 대한 자신의 접근을 예를 들어 보여준다.

삶에 대한 탐미적 접근 the aesthetic apporach to life

삶에의 탐미적 접근이란 단순한 의미로는 감각적 즐거움의 쾌락주의적 추구를 중심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키에르케고르의 용법을 특징짓기에는 부적절하다. 앞의 의미는 육체적 만족을 좇는 동물적 갈망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반면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 탐미적 접근은 지성적 탐미가의 더욱 세련된 쾌락추구를 포함한다. 탐미가의 쾌락은 아름다움에 대한 명상에서 올 수도 있고, 예술작품에 대한 세련된 감상에서 올 수도 있다. 아니면 ‘유혹자의 일기’라는 제목의, ‘이것’의 한 절에서 드러나는 태도처럼, 가학적 권력행사에서 얻는 즐거움을 포함할 수도 있다. A가 추구하는 것들이 모두 이런 쾌락들이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 삶에 대한 탐미적 접근은 새로운 쾌락을 향한 쉼 없는 모색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이런 삶의 양식을 채택한 사람들에게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란 바로 권태이기 때문이다. 탐미가에게 권태란 모든 악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A는 권태를 피하기 위한 반쯤 진지한 전략을 제안한다. 이것을 그는 우스개 삼아 ‘돌아가며 밭 갈기crop rotation(윤작)’라고 이름 붙인다.

윤작 crop rotation

윤작은 삶에 대한, 또는 당신이 어떤 일에 관여했든 그것에 대한 당신의 태도를 임의로 돌려가며 바꾸는 것을 뜻한다. 농부가 이런 방법을 써서 지력을 보충하듯이, 임의적인 관점 변경은 개인을 충전시키고 권태를 막아준다. A가 드는 예는 따분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경우이다. A가 그 따분한 사람의 콧잔등을 따라 흘러내리는 땀방울에 집중하기 시작하자마자 그 따분한 사람은 더 이상 따분하지 않게 느껴진다. 여기서 키에르케고르는 삶에 대한 임의적이며 뒤틀린 접근을 찬미함에 있어서 초현실주의의 씨앗을 뿌리는 듯이 보인다. 즉 그는 연극의 중간으로 건너뛸 것을, 또는 책의 제3부만을 읽을 것을 제안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칫 지루할 어떤 것에 대해 새로운 자극적인 관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구성하는 논설들의 주제와 스타일이 끊임없이 바뀌는 것은, 삶에의 탐미적 접근 특유의 새로운 자극을 향한 간단없는 탐색을 반영한다. 이런 특징은 ‘디아프살마타’(‘후렴’을 뜻하는 그리스어)라는 제목의, ‘이것’의 첫 소절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 소절은 일련의 단편적인 비평들과 경구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의 다른 부분들은 준 학술논문의 형태로, 아니면 아주 특이하게도 한 소절은 일기의 형태로 제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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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 하라의 『일체감이 주는 행복』(도서출판 知와 사랑)

부제: 나를 치유하는 신성한 연결고리

 

 

 

도서출판 知와 사랑의 『일체감이 주는 행복』

 

 

눈을 보면 모든 인간이 특별한 육체와 마음, 생각과 성격을 지닌 개별적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감각만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하나의 위대한 실체를 깨닫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이 위대한 실체의 일부분이라고 느낄 때가 있다. 이런 순간은 너무나 짧고 또 오래전에 경험한 일이라서 기억의 장난이 아닐까 넘겨버릴 수도 있다. 아니면 모든 존재와 하나가 된 느낌을 주는 그 신비한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애써 그 중요성을 외면해버릴 수도 있다. 사실 당신은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커다란 가족의 일원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세상에서 경험하는 괴로움이나 소중한 사람을 잃고 겪는 고통이 너무나 커서 혼돈과 무질서밖에 생각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양과 소리, 냄새로 이루어진 세상 안에는 숨겨진 질서, 진실의 구조가 있다. 그것은 보거나 만질 수는 없지만 분명 실재한다. 논리와 가능성의 법칙을 배반하는 이상한 우연과 마주치거나 어떤 사람을 보는 순간 방금 만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자신과 결혼할 운명이라고 느낄 때, 당신은 숨겨진 구조를 감지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결고리는 갑자기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지거나 어떤 신성함이 당신의 삶에 들어왔다고 마음으로 느끼는 순간 좀 더 분명하게 자각된다.

우리의 영혼은 비일상적이며 감각을 넘어서는 이런 위대한 진실을 깨닫지만 머리는 거부한다. 위대한 진실을 들여다볼 기회가 있더라도 당신의 마음은 그것을 이해하거나 조절하거나 진실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거부하려 한다. 그래서 좌절감에 빠져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확신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양자역학 같은 과학이 이제까지 감춰졌던 진실을 드러내려고 하는 요즈음, 논리를 중시하는 당신의 마음도 영혼이 속삭이는 소리에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을 수 있다. ‘인생에는 꼭 괴로움과 투쟁만 있는 게 아

니야. 당신이 느끼지 못하는 의미도 있을 거야.’

고대 철학자나 예언자, 주술사나 영적 지도자의 가르침을 읽다 보면, 아름답고 진실한 그들의 가르침에서 우리가 잊어버린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고대의 현자들은 물질세계의 한계를 뛰어넘어 우리 모두를 하나의 진실로 감싸는 정교한 씨줄과 날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진실은 정보이자 깨달음이다. 성스러운 사랑이며 순수한 의식의 빛이다. 끊임없이 진화하고 점점 밝아지면서 무지와 두려움, 전쟁과 괴로움 그리고 질병을 사라지게 하는 창조의 틀이다. 우리는 모두 거대한 ‘전체’에 속한 하나의 작은 조각이다. 형형색색의 조각보와도 같다. 신성하며 그 자체의 법칙으로 존재한다.

나의 다른 책 『11개의 영원한 원칙The Eleven Eternal Principles』에서도 설명했듯이, 우리가 만지고 냄새 맡고 보고 듣는 이 세계는 너무나 실제적으로 느껴져서 그러한 육체적 감각 너머에 있는 신성한 진실의 본래 모습을 망각하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신성한 법칙 속에 자신을 던지기보다 인간이 만들어낸 법칙을 따른다. 아무리 힘겨운 상황일지라도 가족들과 직장, 친구들을 위해 정해진 법칙에 복종하려 최선을 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이들처럼 역시 상실과 고통, 부당함을 겪고 산다.

그러한 고통에 대항하고자 인간은 영원히 지속되리라 믿고 제도와 시스템을 만들어 그에 의존한다. 또 물질세계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어떻게 하면 생존과 행복, 자유의 기회를 넓힐 수 있을지 온 마음을 다 바쳐 고심한다. 한동안은 인간이 고통을 덜고 기쁨과 성취감을 주는 길로 스스로를 인도하는 데 상당히 성공한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최선을 다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인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제들이 우리를 짓누르고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고문당

하고 노예로 착취당했는가. 그리고 지금도 당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신과 종교의 이름으로 잔혹한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는가? 인간의 시스템이나 규칙, 법률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수많은 문제들이 여전히 우리를 병들게 하는 것도 모자라 점점 더 최악으로 치닫고 있을까?

우리가 부정과 두려움을 떨치게 해달라고, 우리에게 깨달음을 진화시킬 용기를 달라고 천지가 함께 울부짖고 있다. 이제 우리가 만들어낸 괴로움을 치유하고 마땅히 경험해야 할 세계로 돌아가야 할 때가 왔다. 이제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감각을 벗어난 진실 속에서 하나가 되는 법칙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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