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 이것이냐 저것이냐 』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철학 논고라기보다는 소설에 가깝다. 그리고 소설들이 그렇듯이 말을 바꾸어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주된 관심은 분명하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물었던 물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다. 이 물음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답은 분명하지 않아서 때로는 모순되고 때로는 혼동되는 해석들이 꼬리를 문다. 겉보기에 이 책은 적어도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두 가지 삶의 방식을 탐색한다. 탐미적 삶과 윤리적 삶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작업은 내부로부터 이루어진다. 즉 각 견해들이 요약되어 제시되기보다는 이 책의 허구적 저자들인 두 등장인물에 의해 표현된다.

가명 저술 pseudonymous authorship

키에르케고르의 저술은 장난기 어린 측면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가명의 사용이다. 이는 단순히 키에르케고르가 여러 필명으로 글을 쓴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과는 다른 성격의 허구적인 인물들을 창조하여 그들의 목소리로 말한다는 뜻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어조는 서론에서 설정된다. 빅터 에레미타라는 나레이터가 어떻게 자신이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원고를 손에 넣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일전에 한 가게의 진열장에 있던 중고 덮개책상(서류함과 서랍이 내장된, 덮개가 달린 프랑스 고전풍의 책상: 옮긴이)을 샀다. 이것은 그가 오래 전부터 사고 싶었던 책상이었다. 어느 날 휴가를 떠나려던 참에 그 책상의 서랍 하나가 무언가에 끼어 움직이지 않았다. 어쩔 도리가 없어서 그는 책상을 발로 찼고 그때 비밀서랍 하나가 불쑥 열리면서 원고뭉치가 드러났다. 이 원고는 두 사람에 의해 작성된 듯이 보였다. 그는 이 두 사람에게 ‘A’와 ‘B’라는 이름을 주고, 순서를 바로잡아서 출판했다. B는 나중에 빌헬름이라는 판사로 드러났지만, A의 정체는 알 길이 없다. 이 이야기는 물론 허구이며 A와 B도 가상의 인물이다. 이 책상에 관한 이야기는 이 책의 중심 테마를 보여주는 메타포를 제공한다. 즉 현상과 실재 사이의 불일치, 또는 키에르케고르가 주로 표현하듯이 ‘내부는 외부와 다르다the inner is not the outer’는 것을 암시한다.

가명 저술 기법을 통해 키에르케고르는 이 책에서 탐색되고 표현되는 견해들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으며, 자신의 입장을 그가 등장시킨 인물들 뒤에 숨길 수 있다. 또한 이런 기법을 통해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이 창안해낸 다양한 입장들의 내부로 들어가며, 이런 입장들을 가상적 개인들의 내적 삶의 관점에서 검토할 수 있게 된다. 철학자들이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차가운 추상적 개념화를 통해서 검토하기보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키에르케고르의 간접 의사전달의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추상적 비인격적 개념들을 기술하기보다는 인간 삶의 여러 모습들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살아있는 인간에 대한 진리를 전달하려는 자의식적 시도인 것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수월하게 읽히는 부분은 ‘이것’이란 제목이 붙은 제1부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딱딱하고 다소 힘겹게 쓰인듯한 B의 글보다는 A의 글이 더 흥미롭고 다채롭다고 느낀다. ‘이것’을 재미있게 읽은 사람들 가운데, ‘저것’의 내용을 끝까지 한장 한장 힘들여 읽어낼 사람은 극히 드물다. 심지어 그것이 일반적으로 그런 식으로 더 많이 출간되는 단축본인 경우에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것’은 삶에 대한 A의 접근, 즉 탐미적 접근을 비록 치우치긴 했지만 상세하게 비평하면서 B 자신의 윤리적 접근을 옹호해 나간다. 반면에 A의 글은 삶에 대한 자신의 접근을 직접적으로 기술하지 않는다. 오히려 A는 자신의 관심과 글쓰기 스타일을 통해 삶에 대한 자신의 접근을 예를 들어 보여준다.

삶에 대한 탐미적 접근 the aesthetic apporach to life

삶에의 탐미적 접근이란 단순한 의미로는 감각적 즐거움의 쾌락주의적 추구를 중심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키에르케고르의 용법을 특징짓기에는 부적절하다. 앞의 의미는 육체적 만족을 좇는 동물적 갈망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반면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 탐미적 접근은 지성적 탐미가의 더욱 세련된 쾌락추구를 포함한다. 탐미가의 쾌락은 아름다움에 대한 명상에서 올 수도 있고, 예술작품에 대한 세련된 감상에서 올 수도 있다. 아니면 ‘유혹자의 일기’라는 제목의, ‘이것’의 한 절에서 드러나는 태도처럼, 가학적 권력행사에서 얻는 즐거움을 포함할 수도 있다. A가 추구하는 것들이 모두 이런 쾌락들이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 삶에 대한 탐미적 접근은 새로운 쾌락을 향한 쉼 없는 모색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이런 삶의 양식을 채택한 사람들에게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란 바로 권태이기 때문이다. 탐미가에게 권태란 모든 악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A는 권태를 피하기 위한 반쯤 진지한 전략을 제안한다. 이것을 그는 우스개 삼아 ‘돌아가며 밭 갈기crop rotation(윤작)’라고 이름 붙인다.

윤작 crop rotation

윤작은 삶에 대한, 또는 당신이 어떤 일에 관여했든 그것에 대한 당신의 태도를 임의로 돌려가며 바꾸는 것을 뜻한다. 농부가 이런 방법을 써서 지력을 보충하듯이, 임의적인 관점 변경은 개인을 충전시키고 권태를 막아준다. A가 드는 예는 따분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경우이다. A가 그 따분한 사람의 콧잔등을 따라 흘러내리는 땀방울에 집중하기 시작하자마자 그 따분한 사람은 더 이상 따분하지 않게 느껴진다. 여기서 키에르케고르는 삶에 대한 임의적이며 뒤틀린 접근을 찬미함에 있어서 초현실주의의 씨앗을 뿌리는 듯이 보인다. 즉 그는 연극의 중간으로 건너뛸 것을, 또는 책의 제3부만을 읽을 것을 제안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칫 지루할 어떤 것에 대해 새로운 자극적인 관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구성하는 논설들의 주제와 스타일이 끊임없이 바뀌는 것은, 삶에의 탐미적 접근 특유의 새로운 자극을 향한 간단없는 탐색을 반영한다. 이런 특징은 ‘디아프살마타’(‘후렴’을 뜻하는 그리스어)라는 제목의, ‘이것’의 첫 소절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 소절은 일련의 단편적인 비평들과 경구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의 다른 부분들은 준 학술논문의 형태로, 아니면 아주 특이하게도 한 소절은 일기의 형태로 제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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