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장-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버려짐abandonment, 불안anguish, 절망despair, 이 세 가지는 장-폴 사르트르의 공개강연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에 담긴 핵심개념이다. 1945년 10월에 파리에서 시작해 훗날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같은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었으며, 이 책은 아마 그의 철학서 가운데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일 것이다. 훗날 사르트르는 강연을 책으로 출판한 점을 후회했다. 하지만 몇 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아직도 우리의 상상력에 불을 지피고, 인간의 선택과 책임에 관한 진지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사르트르가 나중에 훨씬 난해한 책인 『존재와 무』를 집필하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실존주의에 대한 그의 강연은 파리가 독일에 점령당한 2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토대로 시작한 것이었다. 강연을 시작한 1945년 10월은, 여느 때라면 평온한 삶을 누렸을 법한 사람들이 독일의 점령, 저항운동, 비시 정부 등과 관련한 지조, 배신, 참여 같은 피할 수 없는 문제에서 막 벗어난 때였다. 사르트르 자신도 참전 후 전쟁포로가 되었다가 독일군에 점령된 파리로 돌아온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사르트르의 사상 가운데 많은 부분은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려는지, 그리고 어떤 존재가 되고자 하는지를 결정하는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실존주의란 무엇인가? what is existentialsim?

실존주의는 철학과 심리학뿐 아니라 여러 예술장르에도 영향을 미친 철학운동이다. ‘실존주의자’라는 용어는 가브리엘 마르셀이 사르트르를 언급하면서 처음 사용했다. 사르트르가 실존주의자라는 명칭을 받아들이기까지는 몇 년이 걸렸다.

실존주의자들은 저마다 다양한 신념을 갖고 있다. 그런데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 따르면, 모든 실존주의자들이 공유하는 신념은 인간의 경우 ‘존재는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것이다. 이 말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선재적先在的 청사진이 없다는 의미이며, 우리가 반드시 따라야 하는 인간의 본성 또한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자신이 되고자 하는 바를 선택한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는 우리의 본질이 의존하는 정신을 가진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먼저 존재하고, 행동을 통해 스스로 원하는 바를 만들어간다. 선택을 통해 우리는 각자 어떤 식으로 존재할지 결정한다. 우리는 우리가 되고자 하는 것을 완전히 자유롭게 결정한다. 이와 동시에 사르트르가 보기에는 이런 자유에는 피할 수 없는 짐이 동반된다.

반면 인공적인 사물은 그것의 기능, 본래의 목적에 의해 규정된다. 가령 주머니칼이 있다고 할 때, 만약 그것이 물건을 자르지 못하거나 거기에 접는 칼날이 없다면 그것은 주머니칼이 아니다. 주머니칼의 본질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주머니칼이게끔 하는 것— 은 그것이 탄생하기 전에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정신 속에 있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다르다. 우리에게는 미리 결정된 목적이 없고, 우리의 본질을 자신의 정신 속에서 결정하는 신적 존재도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사르트르는 도덕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인간의 공통적인 본성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선택할 인간의 자유를 강조한 점은 모든 실존주의 사상가들의 특징이다. 비록 사르트르는 무신론자였지만, 가브리엘 마르셀 같은 실존주의자들은 기독교인이었다.

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 what is humanism?

사르트르 강연의 중심축은 그가 표방한 실존주의가 휴머니즘의 한 형태임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휴머니즘’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용어이다. 따라서 사르트르가 이 용어를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지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선 휴머니즘은 인간을 만물의 중심으로 여기는 이론에 해당한다. 일례로 르네상스 시대의 휴머니즘은 신의 본성에 관한 고찰에서 벗어나 예술과 문학을 중심으로 인간의 업적에 관심을 갖는 경향이었다. 휴머니즘은 인간적 가치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휴머니즘은 세속적 운동 —도덕적 원천으로서의 신이 존재한다는 관념에 반대하는 운동— 을 가리키는 용어이기도 하다.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를 휴머니즘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 즉 모든 가치의 창조과정에서 인간의 선택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를 창조하고, 심지어 도덕까지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중요시하는 가치에 책임이 있다. 한편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를 휴머니즘이라고 주장한 것은 그의 접근법을 인간의 정신과 잠재력에 관한 음울하고 위험한 비관론으로 바라본 비평가들에게 답하는 차원이기도 했다.

비판에 답하다 answering his critics

몇몇 비평가들은 실존주의가 ‘절망에 따른 정적주의靜寂主義’로 귀결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실존주의를 무위의 철학philosophy of inaction, 즉 사람들을 절망에 빠트려 어떤 행동방침도 고수하지 않도록 하는 단순한 정관적 철학으로 여겼다. 또 어떤 비평가들은 실존주의자들의 지나치게 비관적인 태도, 그리고 유독 부정적인 인간 조건에 집중하는 점을 지적했다. 가톨릭 진영의 비평가인 메르시에는 사르트르가 아기의 미소를 잊고 있다고 꼬집었다.

한편 실존주의가 개인의 선택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인간의 연대를 도외시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실존주의는 개인을 사회의 필수요소가 아니라 하나의 섬으로 간주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기독교인들은 공통적으로 이 점을 지적한다. 실존주의가 자유로운 실존적 선택이라는 핑계로 극악한 범죄를 합리화한다고 비판하는 관점도 있었다. 실존주의자들은 천부적인 도덕률 개념을 부인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와 같은 비판에 대한 사르트르의 반응은 버려짐, 불안, 좌절이라는 세 가지 개념을 분석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었다. 사르트르의 관점에서 이 세 가지 개념에는 특유의 의미가 있었다. 모두가 전문용어인 이들 개념이 함축한 의미는 일상적인 용법에서의 의미와 크게 달랐다. 세 가지 개념 모두 일상적인 용법에서(적어도 영어의 경우에는) 다양한 종류의 무기력과 고통을 암시한다. 하지만 사르트르의 관점에서 이들 개념에는 피상적인 독해로는 알아채기 어려운 낙관적인 측면도 담겨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카르멘 하라의 『일체감이 주는 행복』(도서출판 知와 사랑)

부제: 나를 치유하는 신성한 연결고리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카르멘 하라 박사는 '더 뷰The view', '굿모닝 아메리카Good morning America', '투데이 쇼Today show' 그리고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 [뉴욕 포스트The New York Post]를 비롯한 미국의 텔레비전 쇼와 언론 매체에 출연하는 유명 인사이며 심리치료학자다.

할리우드 스타에서부터 저명한 정치인들까지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다년간의 경험을 통한 부부 치료나 인지치료 방식이 그녀의 신비한 직관력과 합쳐져 그녀는 세계적인 상담사로 발돋움했다. 또한 세 장이나 음반을 낸 재능 있는 음악가이며, 자신만의 고유한 보석을 디자인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홈페이지 www.CarmenHarra.com과 페이스북 carmen Harra- (Wholeliness)를 방문해보기 바란다.

 

 

카르멘 하라의 ‘일체감에 관한 세 가지 진실을 받아들이기’

인간에 대한 새로운 경험에 참여하기

 

관찰

다음번에 화가 나고 비판적인 생각이 들 때는 그런 생각들을 멈추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나를 화나게 하는 이런 행동을 나는 한 적이 없는가.” 아무리 사소한 행동이라도 그런 적이 있다면 마음속에 새겨두기 바란다.

인류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라. 아니면 주변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이고 탐욕스러운 태도를 버리고 일체감을 얻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보기를 바란다. 당신 자신과 친구들, 이웃들과 가족들도 좋고 모르는 사람들도 괜찮다. 작성한 목록을 자주 들여다보라. 그러다보면 모든 이들이 자신만 생각한다는 파괴적이고 잘못된 믿음이 줄어들 것이다. 그런 믿음에 집착하는 자신의 모습을 깨달을 때마다 그것을 떨쳐버려라.

 

기도

당신의 삶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상황을 잘 헤쳐 나가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할 일을 알려달라고 신에게 기도하라. 두려움을 사랑과 용기로 바꿀 수 있도록 기도하고, 일체감이란 개념을 확장하도록 노력하라. 이렇게 말이다. ‘세상의 변화를 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것의 해결을 위해 기도하라. ‘제 생각과 행동이 정의롭고 공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제가 평화로워지고 말과 행동에서 평화가 우러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제 몸과 저를 둘러싼 세상을 존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도록 신이 도와줄 것이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증거를 보여달라고 신에게 기도하라. 평등과 화합, 조화에 대한 열망, 고통을 종식하고자 하는 열망은 당신 혼자만의 이상이 아니라는 증거를 보여달라고 신에게 기도하라. 인간의 의식이 서서히 일체감을 향해 움직이고 있음을 신에게 감사하라. 그리고 당신도 이 거대한 변화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맘껏 느껴보라.

정부나 공동체의 지도자에게 분노를 느끼기보다 이들이 각자의 삶에서 신의 힘을 느끼고 일체감과 사랑에 눈뜨게 되기를 기도하라. 당신이 새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영적 기운으로 가득 찼다면, 아직 낡고 파괴적이며 분리적인 방식에 매달려 있는 이들에게 그 강력한 힘을 나누어주라. 깨달음과 각성이 테러리스트들에게도 찾아오기를 기도하라. 그리고 아직도 분노와 잔인함, 지배욕이 당신의 일부에 남아 있다면 치유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위해 기도하라. 또 당신에게 속속들이 영향을 미치는 사랑의 힘을 추구하라. 좀 더 효과적으로 기도하는 방법 중 한 가지를 소개하겠다. 일단 하늘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자신의 딜레마에 대해 명상한다. 그리고 해결 방법을 알려달라고 기도하며 하늘을 차분히 관조한다. 그러면서 끊임없는 은총을 느껴보라. 천천히 흘러가는 하늘의 구름, 땅 위로 쏟아져 내리는 수없이 많은 빗방울, 소리 없이 바닷물을 끌어당기고 밀어내는 달의 힘을 느껴보라. 이런 신성한 영적 존재와의 소통은 아주 중요하다.

해결해야 할 일들에 매달려 모든 것을 한꺼번에 처리하려고 서두르지 말라. 우선 가만히 앉아 자연과 천국 속에 자리잡은, 신이 창조한 모든 것들을 느껴보라. 하늘을 바라보며 당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어깨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평화를 달라고 기도하라. 이러한 몇 분간의 기도 방식에 익숙해지면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기도하고 며칠 혹은 몇 주가 지나면 당신이 처했던 딜레마의 해결책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면 기도 후에 그 사람의 든든한 존재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살아서 당신과 함께했을 때 그 사람이 보여주던 격려와 보살핌 그리고 사랑을 똑같이 느낄 수도 있다. 만약 일자리를 잃어버렸다면 기도 후에 새로운 기회가 다가오거나 예상치 않게 자신에게 꼭 맞는 구인 광고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또 몸이 좋지 않다면 이러한 기도를 한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상태가 호전되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기도는 아주 강력한 실천 방식이다. 그 효과를 무시하지 말기 바란다.

이렇게 하늘을 바라보며 명상하는 방법은 힘든 시간을 극복하고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와 우리를 연결해준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생활 방식을 바꾸게 하는 자극이 된다.

 

행동

이 책에서 나는 여러분에게 일체감을 믿고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특정한 행동을 제안하려 한다. 우선 각 장이 끝날 때마다 자신의 해결 과제에 대한 생각을 담아 일기장에 적어보라. 또 일기장과는 별도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담은 목록을 작성하는 것도 좋다. 목록을 다 작성하고 나면 각 목록 옆에 자신이 그 일을 실천한 날짜를 기록한다. 내가 제안한 몇 가지 행동은 지금 당장 실천하기에는 너무 버거울 수 있다. 일단 적어놓고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날짜를 기록해놓기 바란다. 말이 쉽지 실천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관찰하고 기도하고 행동하라.

내부의 변화를 실천하기 위한 든든한 조력자로서 일기장과 해야 할 일의 목록 그리고 달력, 이 세 가지를 활용하라.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변화는 내부에서 시작된다. 바로 당신에게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장-폴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존재와 무』는 실존주의의 경전과도 같다. 그런데 이 책은 대전 이후 유럽과 북미를 휩쓸었던 실존주의 운동의 중심에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만큼 내용이 불분명하다. 당대 실존주의자 가운데 이 책을 제대로 읽고 이해할 수 있었던 사람이 거의 없었을 정도다. 특히 서론은 이해하기가 지독히 어렵다. 거기다 대륙 철학에 대한 배경적 지식이 없다면 더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자 하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이런 초기의 절망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참아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존재와 무』는 ‘인간이 처한 딱한 처지’에 관련된 근본 물음을 붙들고 진정으로 씨름한 금세기의 몇 안 되는 철학책들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이 책의 다소 명료한 구절들은 교훈적이며 즐거움을 준다. 소설가요 연극작가로서의 사르트르의 경력은 이 책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특정 상황에 대한 뛰어난 묘사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존재와 무』의 중심 주제는 ‘의식의 본성은 그것이 아닌 것일 수 있음이며 동시에 그것으로 있을 수 없음이다’라고 하는 수수께끼 같은 문장에 압축되어 있다. 이 문장은 처음 읽으면 마치 심오한 체하는 사이비 사상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은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사르트르의 설명의 요약이다. 이 문장의 충분한 의미는 이 장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분명해질 것이다.

실존주의란 무엇인가? what is existentialism?

실존주의란 일종의 철학 운동으로서 철학과 심리학뿐만 아니라 예술의 여러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 실존주의 사상가들은 그들의 사상에 있어 매우 다양하다. 그렇지만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1945년에 행한 한 강좌)이라는 책에서 사르트르는, 그들 모두가 인간 존재에 대해서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신념은 ‘존재는 본질에 선행한다’는 신념이라고 말한다. 이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반드시 동의해야 하는 인간성에 대한 이미 존재하는 청사진이란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 존재란 그들이 되어가는 것을 선택할 뿐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 신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의 본질은 그의 마음속에 놓여 있지 않다. 우리는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에 스스로를 우리가 원하는 바대로 만든다. 주머니칼은 그 기능에 의해서 규정된다. 다시 말해서 그 주머니칼이 잘 들지 않는다면 그리고 칼이 접히지 않는다면 그것은 주머니칼이 아니다. 주머니칼의 본질, 즉 그것을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주머니칼로 만드는 것은 그것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그 제작자의 마음에 존재했다. 인간은 이런 주머니칼과는 다르다. 인간에게는 사전에 정해진 그 어떤 기능도 주어진 어떤 것도, 그의 마음속에 이미 우리의 본질이 정해져 있는 그런 제작자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 나타난 견해이다. 그런데 『존재와 무』를 저술할 당시 사르트르는 자신을 실존주의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주된 관심은 인간의 조건에 빛을 밝히는 것이었다. 그의 접근은 현상학이라고 알려진 철학의 한 학파에 의해 크게 영향 받았다.

현상학적 접근 phenomenological approach

『존재와 무』에 나타난 사르트르 사상의 뚜렷한 특징은 그것이 상당히 장황하게 묘사되는 실재의 또는 상상적 상황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데 있다. 이것은 단지 표현상의 기교가 아니라 오히려 사르트르의 현상학적 접근이 가지는 하나의 특징이다. 사르트르는 후설이라는 철학자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후설은 ─ 의식에 나타나는 것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옆으로 치워두고 ─ 의식의 내용을 기술함으로써 사물의 본질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후설에게 철학에서 중요한 일은 기술이다. 즉 우리의 경험을 기술해야 한다. 추상적인 단계에서 사유하기보다는 말이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후설의 사상을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의식 내용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의식되는 대상의 본질적 성질을 드러내 준다고 하는 가정은 거부한다. 사르트르에게 현상학적 방법이 현실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살아가고 우리가 느끼는 있는 그대로의 삶에 집중하는 것이다. 과학이나 경험적 심리학이 기술하는 그런 인간 존재에 집중하기보다는 말이다. 그 결과로서 생겨난 것이 고도로 추상적인 논의와 생생하고 뛰어난 소설가적 시나리오 및 서술의 절묘한 결합이다.

존재 being

『존재와 무』 전체는 여러 다른 존재 형태들 사이의 근본적인 구별에 의존한다. 사르트르는 의식 존재와 의식 없는 존재 사이의 차이에 주목한다. 앞의 것은 ‘대자 존재(그것을 향한 존재: 옮긴이)’라고, 뒤의 것은 ‘즉자 존재(스스로 있는 존재: 옮긴이)’라고 불린다. 대자 존재란 그 특징에 있어 인간에 의해 경험되는 그런 종류의 존재이며, 『존재와 무』의 대부분은 이것의 주된 성격을 밝히는 데 주어진다. 불행하게도 사르트르는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이 합당하게 대자 존재로 분류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아무런 답변을 주고 있지 못하다. 한편으로 즉자 존재는 의식이 없는 사물들, 가령 바닷가의 돌멩이와 같은 존재를 말한다.

nothingness

무는 이 책의 제목이 말해주는 것처럼 사르트르의 저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의식을 우리 존재의 한가운데에 있는 빈터, 즉 무로 특징짓는다. 의식은 언제나 무엇에 대한 의식이다. 의식은 결코 그 자신일 수 없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를 미래에로 투사project할 수 있게 그리고 우리의 과거를 재평가할 수 있게 해준다.

무의 구체적인 모습은 우리가 어떤 것이 없다는 것을 인식할 때 경험된다. 당신은 4시에 카페에서 당신의 친구 피에르를 만나기로 했다. 당신은 15분 늦게 그곳에 도착한다. 그는 거기에 없다. 당신은 그를 보리라 기대했고 그렇기에 그를 존재결핍, 즉 부재로서 인식한다. 이것은 가령 카페에서의 무하메드 알리의 부재와는 성격이 아주 다르다. 왜냐하면 당신은 거기서 알리를 만나기로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카페에 있지 않은 사람들 모두의 목록을 작성하는 일종의 지적 게임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경우에는 오직 피에르의 부재만이 진정한 존재결핍으로 느껴질 것이다. 피에르만이 기대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 즉 어떤 것을 부재로 인식할 수 있는 인간 의식의 능력은 사르트르가 의식의 초월성이라 부르는 것의 일부를 이룬다. 이것은 그의 자유의 관념과 연계된다. 왜냐하면 사물을 실현되지 않은 것으로서, 또는 실현될 것으로서 인식할 수 있는 우리의 이러한 능력이야말로 가능성으로 넘치는 세계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는 어떤 경우에 그것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세계를 드러내주기도 한다. 즉 자기기만이라는 독특한 종류의 세계, 사르트르가 ‘그릇된 믿음bad faith’이라고 이름 붙인 그런 것이 지배하는 세계, 그리하여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 자유의 진정한 크기를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그런 세계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카르멘 하라의 『일체감이 주는 행복』(도서출판 知와 사랑)

부제: 나를 치유하는 신성한 연결고리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카르멘 하라 박사는 '더 뷰The view', '굿모닝 아메리카Good morning America', '투데이 쇼Today show' 그리고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 [뉴욕 포스트The New York Post]를 비롯한 미국의 텔레비전 쇼와 언론 매체에 출연하는 유명 인사이며 심리치료학자다.

할리우드 스타에서부터 저명한 정치인들까지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다년간의 경험을 통한 부부 치료나 인지치료 방식이 그녀의 신비한 직관력과 합쳐져 그녀는 세계적인 상담사로 발돋움했다. 또한 세 장이나 음반을 낸 재능 있는 음악가이며, 자신만의 고유한 보석을 디자인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홈페이지 www.CarmenHarra.com과 페이스북 carmen Harra- (Wholeliness)를 방문해보기 바란다.

 

 

카르멘 하라의 ‘가장 절실한 순간에 신의 도움이 찾아온다’

 

신은 우리가 괴로움에 처해 있을 때는 언제라도 자비로운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우리는 신과 강하고 신성하게 연결되어 있다. 저 어딘가에 당신을 사랑하고 언제든지 당신에게 힘이 되어줄 존재가 있다. 그 깨달음을 기억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신의 권능은 사람들을 거치면서 힘을 발휘한다. 당신이 힘들 때 신은 누군가를 보내 당신이 사랑받는 존재임을 알려준다. 물론 바닥을 헤매는 상황에서 그 믿음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고통 받는 이들은 종종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벌린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무릎 꿇는 자세는 신에게 기도하는 보편적인 표상이다. 태양의 신인 라Ra를 숭배했던 고대 이집트 사람들도 태양의 힘을 받기 위해 해를 바라보았다. 또한 태양을 향해 예를 올리는 힌두교인들은 일출 시간에 맞춰 요가를 시작한다. 태양신인 수리야Surya를 맞이하기 위한 의식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째서 도움이 필요하면 자연스럽게 눈이 하늘로 향하는가? 하늘에서 우리에게 빛을 내려주시는 신을 인간은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구 너머 저 멀리 어딘가에 우리가 겪고 있는 괴로움을 초월하도록 도와주는, 사랑과 자비로 가득 찬 누군가가 있음을 느낀다. 고대인들은 직관의 힘으로 태양이 지구에 생명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날 과학도 그 사실을 인정한다. 태양 에너지가 없으면 생명이 자라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눈을 들고 저 먼 곳을 바라보며 고통이 사라지게 해달

라고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우리 위에 있는 존재는 초월적이고 우리보다 덜 무겁다. 우리는 하늘의 빛이 우리에게 닿으면 무거운 짐을 벗고 가벼워질 수 있다고 느낀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릇된 믿음이나 생각 그리고 느낌이 우리 자신을 내리누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높은 곳에 올라가서 새가 땅을 내려다보듯이 자신의 문제를 내려다보고 싶어 한다. 인간은 누구나 날아오르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으며, 식을 줄 모르는 태양의 따뜻함은 어둠과 폭풍을 물리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준다. 또한 태양빛을 받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긍정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빛을 충분히 받지 못하면 우울증

을 비롯한 여러 질병에 걸리기 쉽다. 이렇듯 우리는 절대적으로 빛을 흡수하는 것이 필요한 존재다.

스스로 만들어낸 문제를 극복하고 이후의 미래를 계획하기 위해 우리 모두는 절박하게 신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땅에 발이 묶여 눈앞의 산이 넘을 수 없는 장애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산 너머에 있는 가능성을 보아야 한다. 이 세상의 몰락새로운 탄생을 눈앞에 두고 우리는 겁에 질려 있다. 하지만 힘과 축복을 바라며 하늘을 올려다본 고대의 인류처럼, 우리도 급격한 변화를 헤치고 우리에게 안전하게 도달하는 저 위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일부는 가까운 미래에 다가올 것이며, 또 많은 부분은 이미 우리를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사실 전 세계에서 신은 절망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우리를 통해 힘을 베풀고 있다. 자원봉사자들, 여러 단체들, 교회들, 자선단체들, 정부들 그리고 개인들이 각자 세상을 치유하기 위한 성스러운 일을 하고 있다. 가난한 어린이들을 후원하고 버림받은 동물들을 돌보며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이 모든 것은 절박한 도움을 바라는 이들에게 신이 우리를 이용하여 베푸는 도움의 방식이다.

1997년에 힐러리 클린턴이 창설한 ‘생명의 목소리Vital Voice’라는 단체를 예로 들어보자. 내가 관여하기도 한 이 단체에서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전 세계의 여성들을 도와주고 있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여성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여성들 혹은 원치 않은 결혼이나 남편의 학대를 피해 도망쳤다가 붙잡혀 고문당하거나 살해당할 위협에 처한 여성들을 돕는다.

많은 유명 인사들이 ‘생명의 목소리’에 힘을 보태며 가치 있는 일에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 애쓰고 있다. 회원 개개인은 자신의 능력이나 인맥을 활용하여 상황을 개선할 방법을 찾고 있다. 예로 들자면 나는 자선 위원회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다. 이 단체를 상징하는 메달을 디자인한다. 나는 이 단체를 위한 일을 할 때마다 정의를 위해 낯선 이들을 돕는 일에 기꺼이 나선 위대하고 성스러운 사람들의 일원이 된 느낌이 든다. ‘생명의 목소리’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나는 사랑과 열정이라는 에너지를 가득 품게 된다. 긍정적으로 세상을 돕는 일에 다른 이들과 동참하면 누구나 이러한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고 나는 진정으로 믿는다. 기름을 뒤집어쓰고 죽어가는 동물이나 학대당하고 버림받은 동물을 구하려는 노력도 그중 하나다.

인간은 빛을 흡수하여 영양소로 바꾸는 식물과도 같다. 다만 여기서 빛이란 사랑 자체를 의미한다. 그저 얼굴을 돌려 바라보고 느끼기만 하면 된다, 우리에게 힘을 주는 사랑으로 가득 찬 영적 에너지인 태양을 그리고 심장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사랑을 말이다. 보도블록의 갈라진 틈으로 솟아올라 하늘을 향해 자라나는 풀처럼,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아무리 우리를 가두려 할지라도 우리는 신의 빛을 받을 수 있다. 자연은 아스팔트와 돌 사이를 뚫고 자라나, 고대의 피라미드 시대로 돌아갈 것을 꿈꾸며 힘의 근원을 향해 끊임

없이 솟아오르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래야 한다고 속삭인다. 파괴된 것도 사랑의 힘으로 치유의 손길을 내밀어 고칠 수 있다. 잃어버린 것도 다시금 되돌려놓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속 이야기는 모든 것을 잃고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은 욥의 이야기다. 끔찍한 상실을 겪고도 욥은 엄청난 비극을 내려주신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 무릎을 꿇고 회개한다. 결국 이 위대한 영웅은 더 많은 자손과 재물 그리고 행복이라는 엄청난 보상을 얻는다. 우리도 욥과 마찬가지로 상실을 겪고 나서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더 나은 삶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상실에 대한 슬픔 때문에 과거에 갇혀 더 나은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슬픔으로 가득 찬 순간에 낙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영적 존재에게 도움과 지원을 청하고 나면 다시 온몸으로 태양빛을 느낄 수 있다.

신이 홍수를 일으켜 곡식들과 사람들 그리고 동물들을 한꺼번에 휩쓸어버린 이야기는 여러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나 길가메시Gilgamesh 서사시도 그중 하나다. 하지만 사실 홍수에 떠내려와 강가에 쌓인 침전물에는 새로운 생명이 자랄 수 있는 영양소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신이 내린 천벌이라 생각하는 일들도 사실은 새로운 것이 자리 잡기 위해 오래된 것이 제거되는 과정일 수 있다. 신은 결코 누구도 처벌하기

를 원하지 않으며 상처 주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홍수에 잠긴 들판에서 울기만 한다면 영적 존재와 힘을 합칠 수 없다. 그런 태도는 고립된 채 지구에 대항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지구상에서 서로 도우며 환경을 파괴하지 않고 살아가려면 자연의 리듬을 받아들이고 기후의 변덕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변화란 삶의 한 부분이며 그에 저항해봐야 괴로움만 커질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서 신성한 에너지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그것과 함께 나아가야 한다.

좀 더 은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가 세운 현대 문명은 홍수로 넘실거리는 들판에 세워진 것이며, 미래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물에 띄워 내려보내야 한다. 미래의 세계란 일체감 같은 신의 이상이 지금보다 더 실현된 세계를 뜻한다. 현재와 같은 경제나 정치, 사회나 종교의 구조에서 볼 수 있는 분리되고 나누어진 세상은 신이 우리가 창조하기를 바란 세상과 거리가 멀다. 강력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홍수나 지진, 지진해일(쓰나미) 등의 자연재해는 지구온난화의 결과인 동시에, 인간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다. 스스로 깨어나 신과 함께 우리 자신과 우리의 공동체를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의미다. 자연재해는 우리 삶의 불균형을 그대로 반영하는 거울과 같다. 도움의 손길은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우선 필요 없는 것을 없애야 한다. 그래야만 신성한 힘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 나갈 수 있다.

영적인 조력이라고 해서 언제나 도움이 되는 듯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우선 자기 내면의 문제를 파악해 자신과 세상에 고통을 초래하는 요소를 해결하는 것이 과제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변화가 파괴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저항하던 변화에서 오는 좋은 면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신은 우리를 소중하게 여기지만 그 신의 뜻을 거역한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우리는 자신이 한 일을 두고 신을 탓하지 말아야 한다. 신은 우리가 일체감을 경험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모든 것들과의 일체성을 자각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안전하게 머무를 자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류가 되도록 노력하기 바란다.

우리의 실천과 신의 도움을 분리해 생각할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가 실천할 때 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열정을 가지고 신성한 힘과 조우함으로써 신이 우리를 인도할 수 있도록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신성한 창조주의 아름다운 도구이며, 마치 체스 판의 말처럼 신의 손이 우리를 인도하여 움직일 수 있도록 스스로를 맡겨야 한다.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며 예전에는 몰랐던 힘과 창의력,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일하다 보면, 내면의 두려움과 불편함도 사라지고 다시금 일체감의 힘을 믿을 수 있게 된다. 곧 풍요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고, 풍요로움은 전부터 그 자리에 존재해왔음을 그제야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전까지는 단지 우리가 보지 못했을 따름이다. 창조와 진화에 대한 우리의 가능성이 얼마나 큰지 아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A. J. 에이어의『언어, 진리 그리고 논리』

 

대부분의 사람들이 때때로 무의미한 말 또는 글을 쓴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언제나 무의미한 말과 글을 쓴다. 그러나 정확히 누가 언제 무의미하게 말하고 글을 쓰는지를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을 때가 있다. 『언어, 진리 그리고 논리』에서 에이어는 자신이 믿기에 절대로 확실한 무의미 식별기, 곧 두 개의 갈퀴를 가진 의미기준을 제시하는데 이것을 그는 검증원리라고 부른다. 이 기준을 가지고 그가 내보이고자 하는 것은 엄청난 양의 철학저술들이 사실은 전혀 철학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한마디로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철학을 젖혀두고, 철학의 본업, 즉 개념들의 의미를 명료히 하는 일에 충실해야 한다고 그는 제안한다. 에이어가 자신의 검증원리를 휘두르고 난 뒤에, 전통적으로 철학에 속한다고 여겨졌던 주제들이 많이 제거되어 철학의 몸집이 크게 줄었다. 예를 들어 형이상학을 위한 여지는 남지 않았다.

에이어가 26번째 생일을 맞기 전에 출판한 『언어, 진리 그리고 논리』는 다분히 우상파괴적인 책으로, 철학과 철학함의 성격을 변모시키기 위한 책이다. 이 책이 완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이 책에 있는 아이디어의 대부분은 데이비드 흄의 저작이나, 이른바 비엔나 서클, 즉 1920년대 후반에 철학 토론을 위해 모임을 가졌고 후에 논리 실증주의라고 알려진 학파를 창시한 지식인 그룹의 저작에서 이미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이어의 책은 이런 사상들을 영어로 소개한 최초의 그리고 가장 널리 알려진 종합서였다.

검증원리 the Verification Principle

모든 언명statements들이 참 아니면 거짓이라는 생각은 누구에게나 매력적이다.* 그러나 세 번째 중요한 부류가 있다. 즉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닌, 전혀 무의미한 언명들이 있다. 에이어의 검증원리는 이 세 번째 부류의 언명들을 집어내기 위해 마련되었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이 글을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이다. 내가 손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거짓이다. 그리고 내가 ‘무색의 초록 관념들이 미친 듯이 잠자고 있다’고 말하면 이 언명은 무의미하다. 이 마지막 언명은 ‘어쩌고저쩌고’하는 것처럼 쓸모없는 말과 같다. 이 말은 비록 말로 사용되기는 하지만 참도 아니요 거짓도 아니다. 그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결정할 아무런 기준도 설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검증원리는 모든 언명에 대해 두 가지 물음을 묻는다. 첫째로, ‘그 언명은 정의에 의해 참인가?’ 둘째로 ‘그 언명은 원칙적으로 검증 가능한가?’ 이런 시험에 통과하는, 즉 정의에 의해 참이든가 원칙적으로 검증 가능하든, 이런 언명은 모두 유의미하다. 이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는 언명은 무의미하다. 따라서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사실 에이어는 보통 언명이라는 표현보다는 명제라는 표현을 쓴다. 명제란 언명의 바탕에 있는 논리적 구조이다. 요점은 ‘고양이가 매트 위에 앉아 있다’라는 언명은 다른 언어로도 같은 뜻으로 표현될 수 있는 한 명제를 표현한다. 이 언명이 프랑스어로 표현되든 스와힐리어로 표현되든 이런 사실은 언명의 참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다른 언어로 표현된 여러 언명들은 하나의 동일한 명제를 표현할 수 있다. 또한 에이어는 ‘추정적인’ 명제라는 표현을 흔히 사용한다. 여기서 ‘추정적인putative’이란 단어는, 이 명제가 아예 명제가 아닐 수도 있다(즉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기 위해 사용된다. ‘추정적’이라는 말은 ‘가정된supposed’이란 말과 다름없다.

이제 검증원리의 첫 번째 갈퀴인 ‘그것은 정의에 의해 참인가?’의 물음을 고찰해보자. 정의에 의해 참인 명제의 예로서 ‘모든 독신남은 미혼 남자이다’를 들 수 있다. 이 언명이 참임을 확립하기 위해서 실제로 조사를 시행할 필요는 없다. 독신남임을 주장하는 결혼한 남자가 있다면, 그는 ‘독신남’이라는 말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을 뿐이다. 앞의 언명은 토톨로지tautologous(항진명제), 곧 논리적으로 참인 언명이다. 정의에 의해 참인 언명의 또 하나의 예로서, ‘모든 고양이는 동물이다’를 들 수 있다. 이것 역시 이 언명이 참인지 아닌지를 평가하기 위해 온갖 연구를 할 필요가 없다. 이 언명은 그저 단어들의 의미들에 의해 참일 따름이다. 이런 종류의 언명은 때에 따라 분석적 진리이라 불린다(여기서 ‘분석적’이란 말은 전문적 의미로 쓰임).

이와 달리 ‘모든 독신남은 지저분하다’ 또는 ‘그 어느 고양이도 30년 이상을 못산다’와 같은 언명들은 경험적인 언명이다. 이것들이 참인지 아닌지를 가리기 위해서는 특정한 관찰이 필요하다. 당신은 이 문제를 어느 정도 조사해보지 않고는 이것들이 참인지 아닌지를 결론지을 수 없다. 이런 언명들은 사실언명이라고 불린다. 이것들은 단어들의 의미에 관련된 것들이라기보다는 단어들이 지시하는 세계의 어떤 성질들에 관해 보고하는 성격의 것들이다. 이런 언명들이 바로 검증원리의 두 번째 갈퀴에 걸려드는 언명들이다.

에이어는 앞의 경험적 언명들에 대해 ‘이것들은 원칙적으로 검증 가능한가?’라고 묻는다. 여기서 ‘검증 가능하다’는 말은, 한마디로 참 또는 거짓으로 밝혀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검증 가능하다’라는 말은 약간 혼동을 준다. 일상어에서 어떤 것을 검증하는 것은 그것이 참임을 밝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이어는 어떤 것이 거짓임을 밝히는 것도 그것을 검증하는 경우에 포함시킨다. 그가 ‘원칙적으로’라는 단어를 물음에 포함시킨 이유는 현실적으로는 테스트될 수 없는 수많은 유의미한 언명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요즘처럼 우주공간을 여행할 수 있기 전, 어떤 과학자는 달이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을 수 있다. 이것은 그 당시 현실로는 반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칙적으로 그것이 어떻게 반박될 수 있는지 알기는 쉽다. 즉 달의 암석표본을 채취하여 그것이 석회암인지 확인하면 된다. 그러므로 이런 주장이 있었을 당시에는 이 주장을 테스트하기가 불가능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주장은 유의미한 언명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달은 크림치즈로 이루어져 있다’와 같은 황당한 언명조차도 유의미하다. 어떻게 하면 이 주장이 거짓으로 판명날 수 있는지가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도 에이어가 ‘유의미하다’는 단어를 전문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일상어에서 우리는 거짓이라고 알고 있는 언명을 ‘유의미하다(즉 의미 있다)’고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 발생했던 것에 대한 언명들은 특히 현실적으로 검증하기가 어렵다. 이런 언명들은 오직 원칙적으로 검증 가능하기만 하면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런 언명들의 지위를 평가하는 데 발생하게 될 문제들을 피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어떤 추정적 명제를 고찰할 때 에이어에게는 오직 세 가지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그 명제는 유의미하면서 참이다. 그것은 유의미하지만 거짓이다. 그것은 전혀 무의미하다. 이 마지막 부류, 즉 전혀 무의미한 발언들이 바로 『언어, 진리 그리고 논리』에서 에이어가 공격하고자 하는 주요 표적이다.

에이어에 따르면 많은 철학자들이 스스로 속아서 자신들이 유의미한 언명을 제시하고 있다고 믿어왔다. 에이어의 검증원리를 적용하면 드러나듯이 실제로는 그들이 무의미한 글을 쓰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철학계에서 그런 무의미에 대해 에이어가 주로 사용하는 말이 바로 ‘형이상학’이다. 형이상학적 문장은 진정한 (즉 의미 있는) 어떤 것을 말하고자 의도된 문장이지만, 그것은 정의에 의한 참도 아니요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하지도 않기 때문에 실제로는 무의미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