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The Great Couples 4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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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을 읽으면서 The Great Couples시리즈를 나불댐

 

 

나에게 국내에 번역된 미술서 중에 하나만 추천하라면 숨도 안쉬고 The Great Couples시리즈를 권한다. 시리즈 중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에 대해서는 불만이 하나도 없다. 나는 김광우씨를 통해 마네, 모네, 뭉크, 쉴레, 클림트, 다비드 다섯분을 새롭게 알았다. The Great Couples의 가장 만족스러운 점은 도판의 다양성이다. 다른 책의 도판들이 서로를 닮은 아이돌 가수의 랩같다면 이 책들은 손때와 연필 때문에 너덜너덜한 가사집을 가진 mc의 랩처럼 환상적인 라임과 플로우의 도판이 끝없이 나온다. '공들였구나'하는 생각이든다.

yes24에 있는 ntitled2001님의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리뷰를 따와 본다. 내가 적어도 이미 나의 생각과 같은 글을 봐버렸기 때문에 여기서 벗어나지 못할듯 해서다.
도판에서 진정한 내공이 드러난다. . 왠만큼 우리의 미술서적들의 인쇄상태와 화질을 아는지라 얼마나 원화에 가깝게 색에 신경을 썼는지 한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김광우선생님의 뒤샹에 관한 책을 읽은지라 새로운 책이 나와 무척 반가웠다. 사실 나 역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 미술서적에 관심이 많은 편이지만 책을 보다 보면 그림없는 이론서는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었고 그림이 있는 책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은 그런 부분에서 모든 것을 충족시켜주는 아름다운 책이다. 한 권의소설을 읽듯 자연스럽게 읽혀지면서도 작가의 세부적인 것까지 놓치지 않는 부분은 글쓴이가 오랜 시간 공들인듯 했다. 모네의 작가정신은 날 돌아보게 했는데 그림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 어린 화가 지망생, 그들의 부모,그리고 앞만 보고 가는 작가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살 때 값이 좀 부담스러웠지만 책을 읽고 마네와 모네의 모든 것을 안 순간 난 부자가 되었다. 오히려 출판사가 손해본 것 아닌지...
이렇게 좋은 기억만 남아있다면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이 출판 되자마자 집어들었어야 하는데 2003년에 나온 책을 이제야 읽는다. 앞의 것들이 성공적이라 돈 좀 벌었는지 반양장이였던 껍질이 하드커버로 바뀌고 표지를 씌웠는데 금색의 포스가 너무 강력해 내손과 같은 극을 가진 자석같아 손의 접근을 원천봉쇄한다. 출판사에서도 해놓고 보니 '아뿔사' 였던지 다음 책인『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하얀색으로 돌아왔다. 그나마 사하도서관에선 껍질이 벗겨진 체 딸기색을 띄고 있어 겨우 마음을 허락했다. 게다가 다비드와 나폴레옹을 묶으니 왠지 자크 루이 다비드가 아니라 미켈란젤로씨의 '대두' 다비드상이 떠올라서 또 한 번 움찔. 나폴레옹이 왜 미술서에 나오는 거야 하면서 또 움찔. 어렵게 어렵게 집어 들었다.

역시나 도판은 양과 질은 모두 최고다. 자크 루이 다비드씨는 그림 몇 개로 단편적으로만 알았는데 명성과 돈에 집착하는 야심가였다니 그림들이 새로 보인다. 하지만 책의 절반이 넘어가 다비드씨와 나폴레옹씨가 헤어지면 나폴레옹씨의 전기문이 되어버린다. 나폴레옹씨는 예술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지만 그 영향력을 인정했기에 다비드씨를 이용했고 다비드씨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로서 인정받기위해 권력을 가진 나폴레옹씨를 이용한 서로 땔수 없는 관계인 것은 알겠다. 하지만 나는 나폴레옹씨의 삶이 궁금해서 이 책을 집어든게 아닌데. 나폴레옹씨의 비중을 약간 줄이는 편이 좋을 듯하다. The Great Couples라는 컨셉에 내용이 희생된 느낌이 든다.

다음 책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도 기대 반 걱정 반이다. 두 분 다 좋아하는데다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지만 익숙한 커플이라(코와붕가~) 둘의 이야기를 같이 하는 책들 있었다. 독창적일 수 있을까. 한가지 더, 책 대여점에 팔릴 것도 아닌데 1,2권으로분책 한 게 조금 찝찝하다.(페이지수가 많긴 하지만 해리포터 외국 초딩은 해리포터도 통째로 보는데...) 게다가 결정적으로 더 이상 새 책이 안나왔다. 부들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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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자신과 가장 동일시되는 존재인 니체의 광인이 물었다

 

 

 

프로이트가 1927년 『환상의 미래 l'Avenir de l'illusion』를 발표했을 당시, 많은 영국계 지식인들은 종교가 서서히 고사하고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심지어 19세기 중반에도 매튜 아널드Matthew Arnold(1822-88) 같은 영국의 시인은 인류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맞이하고 초월적인 믿음에 종지부를 찍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아널드를 비롯해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한 지식인들은 믿음이 완전히 소멸되는 날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아내기 위해 상당한 지적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니체도 이 문제를 우려했습니다. 그의 우려는 신의 죽음을 논한 『즐거운 학문 The Gay Science』에 잘 나타납니다. 니체 자신과 가장 동일시되는 존재인 니체의 광인이 물었습니다. “모두 살인자인 세상에서 어찌 편히 살 수 있겠는가? 세상에서 가장 신성하고 가장 강력한 건 아직도 우리의 칼 아래 죽음으로 흘린 피를 소유하고 있다. 누가 이 피를 닦아줄 것인가? 우리를 깨끗이 씻어줄 물은 과연 존재하는가? 속죄의 향연과 성스러운 경기를 반드시 만들어야 하는가? 우리의 이러한 행위가 정녕 위대하지 않단 말인가? 스스로 가치를 지닌 우리 자신들은 절대로 신이 될 수 없는 것인가?

『환상의 미래』는 포괄적인 무신론의 탄생에 대해 피상적으로 긍정합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종교와 가부장 중독 현상에는 희망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 서구 종교의 본질은 근본주의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단 하나의,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아는, 지구 위의 생명과 우주 전체를 통제하는 신적 존재를 믿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근본주의는 종교의 심장으로, 그것은 아버지와 그의 힘이 모두 존재하던 초창기 상태를 가장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상징합니다. 영국의 소설가 살만 루시디Salman Rushdie(1947-)는 사람들 모두 자기 속에 ‘신-모양의 구멍’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프로이트가 그의 생각을 접했다면 분명 그 말에 동의했을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모든 ‘아버지 종교’의 중심에 근본주의가 있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왠지 미묘하고 자비로운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중력에 이끌리듯 아버지와 그의 말을 아무런 의심 없이 따른다고 지적했습니다.

근본주의는 사랑과 술 그리고 전제정치처럼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데, 그런 근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권위주의적 종교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답은 자신의 종교적 경험이 아닌, 윌리엄 제임스가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에서 칭찬한 규격화된 체계 밖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프로이트의 시대 이후 영성이라 불리기 시작한 모호한 혼합물이 아닙니다. 프로이트가 추천한 건 가부장적 신앙이라는 마약을 완전히 끊는 것으로, 그것은 호전적인 무신론의 형태를 취합니다. 믿음의 힘을 초기 단계로 되돌리기 위한 해답으로 그는 어느 신도 믿지 않는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일단 신이 사라지기만 하면 개인은 지도자로부터 사회적 논란, 애국주의, 열렬한 수행, 이런저런 통치 관념까지 무수한 형태로 나타나는 신의 대리인을 경계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잔인한 독재자와 전제적 신들에게 복종하면서 자신들의 심리적, 유아기적 요구를 만족시킨다는 관점을 피하기 힘듭니다. 그들은 인간의 가능성을 탐구하기보다는 자신들을 위한 건전하고 강력한 주체를 만들어냅니다. 프로이트는 가부장 콤플렉스, 전제적 정부와 전제적 종교라 불리는 것들 이면의 공포를 지적하고 왜 그것이 우리를 영원히 떠나지 않는지 설명했습니다. 그런 정부와 종교가 공공의 이익에, 심지어는 독재자와 이성을 잃은 전도자들의 이익에 명백히 위배되는데도 그것이 영원히 존재하리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독재자의 운명은 종종 무솔리니의 최후로 간단히 묘사됩니다. 그는 총탄 여러 발을 맞은 뒤 밀라노 광장에 매달리는 것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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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 하라의 『일체감이 주는 행복』(도서출판 知와 사랑)

부제: 나를 치유하는 신성한 연결고리

 

 

 

 

카르멘 하라의 ‘두려워하는 저항에서 용감한 성찰로’

변화에 대한 저항은 두려움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다음에 무엇이 올지 확실히 알고 싶어 하며 익숙한 것에서 위로를 받는다. 문제의 심연을 보지 않고 사소한 부분만 고쳐서 만족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멕시코 만에서 발생한 엄청난 기름 유출 사건으로 돌아가보자. 대다수의 사람들이 처음에는 수면 아래쪽을 실제로 들여다보지도 않았고, 그러려 하지도 않았다. 화석연료와 심해 시추에 의존하는 우리의 방식을 바꿔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슬쩍 수면을 훑어보고 “그렇게 심각하지 않아요”라며 단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완전히 달랐다. 기름 덩어리가 가라앉아 바다 밑바닥에 쌓이면서 거대한 죽은 바다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우리가 보지 못한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변화가 두려운 나머지 우리는 너무 자주 그런 식으로 생각해버린다. 실수하면 어떡하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면 어떡하지? 상황이 더 나빠지면 어떡하지? 하지만 그것에 도전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두려움에 직면할 수밖

에 없으며, 그 난관을 피할 길은 없다.

당신 자신도, 당신의 삶도 커다란 변화를 겪어야만 한다. 아무리 의식이 반대편을 향하더라도 더 이상 돌아갈 길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무의식까지 속일 수는 없다. 부정과 저항은 두려움만 키울 뿐이다. 그러다 보면 변화라는 현실을 부정하는 당신의 마음은 점점 피곤해지고 우울해질 수밖에 없다. 모든 일이 잘되고 있다고 착각하는 가면을 벗어던지면 커다란 해방감을 맛볼 수 있다. 문제에 정면으로 대응함으로써 당신 스스로에게 생각을 조절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면, 문제 자체도 훨씬 더 가벼워 보일 것이다.

‘좋았던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환상을 일단 접으면, 자신의 상황을 처리할 능력도 새롭게 생겨난다. 애써 부정했던 짐을 내려놓고 나면 변화를 감당할 수 있다는 희망을 느낄 것이다. 조너선이라는 남자와 얽힌 문제로 나에게 상담을 하러 왔던 앨리셔도 바로 그런 경우였다. 그녀는 완전히 그 남자에게 빠져 서로가 결혼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거의 2년 넘도록 그 남자와의 결혼을 꿈꾸어온 것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그에게 이메일과 편지를 보내고, 초대받지도 않았는데 그의 집을 찾아가곤 했다. 그는 한 번도 화답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가 자신에 대한 감정이 없다는 현실을 계속해서 부정했다.

앨리셔는 마침내 나의 충고를 받아들여 조너선을 만나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기와 결혼할 의사가 있는지 물었다고 한다. 그는 정중하지만 확고한 목소리로 그녀와 삶을 함께할 뜻이 없음을 밝혔다. 사실 그는 게이였다! 상처를 입은 그녀는 울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앨리셔는 세상이 새롭게 보이는 환희를 경험했다고 한다. 자신을 사랑할 누군가를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져 완전히 현실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 믿음이 고통스러웠던 만큼

표면 위로 떠오른 현실을 직시하자 자유와 해방감을 느꼈다고 한다. 자기부정의 뿌리가 얼마나 깊었는지, 환상에 매달려 스스로 얼마나 많은 압박과 고통을 받았는지 깨닫고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그 후 그녀는 자신감 부족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존중하는 삶을 택하라는 내 말을 받아들였고, 그에 맞는 치유법을 따르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도 자아의 두려움에 매달려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그것이 더 큰 고통을 야기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어려움을 인정하고 난 후에야 두려움을 들여다보고 그 원인을 분석할 수 있다. 두려움은 대부분 비이성적이며 근거가 없는 것이다. 당신이 가진 어떤 두려움이 만약 이성적이라면 기존의 상황에서 당신을 일깨워 문제를 들여다보게 한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그렇다고 해서 불안한 마음으로 두려움의 불꽃을 키울 필요는 없다. 당신이 가진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 에너지를 변화와 진화를 향해 쏟아 붓는 쪽이 훨씬 더 쉽기 때문이다.

 

 

일체감을 통해 무력감에서 실천으로

일체감은 이 우주의 자연스러운 상태다. 하지만 감각을 창조해낸 우리의 영혼은 일종의 기억상실증에 걸린 상태나 마찬가지다. 모든 개별적 존재 간의 신성한 연결고리가 영적 존재와 우리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말이다. 인간적인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이러한 연결고리를 다시금 기억해낼 때, 분리되었다는 느낌과 의심이라는 감정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화합과 함께하려는 노력에 힘쓰지 않고 갈등의 씨앗을 부채질하기를 좋아하는 파렴치하고 이기적이며 겁에 질린 사람들이 많다. 사방에 존재하는 부패와 욕망 때문에 일체감을 기억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누군가를 손가락질하거나 자신을 무력한 희생자로 여기지 않는 태도는 중요하다. 우리 모두에게는 생각과 행동을 바꿀 능력과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실천의 길을 선택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일체감이 잘 구현된 제도와 시스템이 갖추어진 더 나은 세상을 마음속에 그려보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파악하고 물리칠 수 있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일체감이 구현된다. 두려움은 행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직면한 커다란 변화를 언급하며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세상이 굴러갈 수 없다고 내가 진단할 때마다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문제의 범위를 부정하거나, 낙심한 나머지 무력감에 빠져 “인간은 아마 스스로 진화해서 자신을 구원하기 어려울 거야”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불확실한 미래를 정면으로 바라보기보다 비관에 빠지는 길을 선택한다. 적어도 내일을 예측할 수 있다는 안도감 때문이다. 하지만 일체감을 받아들이면 용기를 그리고 과감하게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마음가짐과

행동을 바꾸면 이 세상의 한 귀퉁이는 변화시킬 수 있다. 개인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져 그것만 생각하다 보면, 결국 낙심하고 포기하게 된다.

하지만 일체감에 마음을 기울이면, 치유를 위한 우리의 작은 행동이 미치는 영향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더 멋지게 만들 수도, 끔찍한 괴로움 속에 던져 넣을 수도 있다. 결과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우리는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일체감을 더 많이 받아들이고 실천할수록 진화의 속도는 빨라진다.

사실 지금이 두려운 순간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자신의 두려움과 마주보는 것은 불편한 일이지만, 불편함도 변화하고 진화하는 과정의 한 부분이다. 당신의 두려움을 곰곰이 점검해보면 자신이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잘못된 생각이 그 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대부분이 근거 없는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이성적이지 못한 두려움도 많다. 일체감은 이러한 두려움의 존재를 믿는 것이 얼마나 바보스럽고 파괴적인가를 보여주고, 그런 믿음을 더 건강한 믿음으로 바꾸어주는 힘이 있다.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카르멘 하라 박사는 '더 뷰The view', '굿모닝 아메리카Good morning America', '투데이 쇼Today show' 그리고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 [뉴욕 포스트The New York Post]를 비롯한 미국의 텔레비전 쇼와 언론 매체에 출연하는 유명 인사이며 심리치료학자다.

할리우드 스타에서부터 저명한 정치인들까지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다년간의 경험을 통한 부부 치료나 인지치료 방식이 그녀의 신비한 직관력과 합쳐져 그녀는 세계적인 상담사로 발돋움했다. 또한 세 장이나 음반을 낸 재능 있는 음악가이며, 자신만의 고유한 보석을 디자인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홈페이지 www.CarmenHarra.com과 페이스북 carmen Harra- (Wholeliness)를 방문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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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사고해야 하는 수고를 덜어주길 원하지 않았다. 『철학적 탐구』는 독자들이 편리하게 소비할 수 있도록 미리 잘 꾸려진 사상들을 제공하기보다는, 독자들을 자극하여 스스로 사고하도록 의도되었다. 이런 의도는 글 쓰는 스타일에서 잘 드러난다. 그의 글은 파편적이고 우회적이며, 한 주제에서 다음 주제로 건너뛰는가 하면, 어느새 다시 되돌아온다. 그는 철학적 물음들에 직접 답하기보다는 오히려 특정한 예들이나 이야기들을 통해 암시한다. 실마리는 주어지지만 그 함축은 대개는 분명하지 않다. 풍성한 비유들이 있지만 이것들을 해석하는 일은 독자에게 달려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장보다는 번호 매긴 짤막한 절을 사용한다. 책의 이러한 구성이 모두 그의 탓만은 아니다. 이 책은 그가 죽은 지 2년 뒤인 1953년에 출간되었으며, 그가 수년 동안 작업해온 필사본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논리-철학 논고』와의 관련 relation to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비트겐슈타인의 생시에 출간된 유일한 책은 1921년에 출판된 『논리-철학 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이하 『논고』)였다. 이 책은 번호를 매긴 일련의 간결한 서술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논리와 인간 사고의 한계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시적인 스타일과 잘 결합시켰다. 이 책은 ‘말할 수 없는 곳에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그의 최종적인 선언으로 가장 유명하다. 이것은 실천을 위한 격언이라기보다는 사고의 한계에 대한 자기 견해들의 요약이다. 인간 삶에서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 의미 있게 말해질 수 있는 것들의 세계 바깥에 있다. 이것들은 표현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많은 면에서 『철학적 탐구』는 『논고』에 나타난 견해들에 대한 비판이다. 심지어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더 최근 사상과의 분명한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서 『논고』를 『철학적 탐구』의 서론으로 출판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철학의 본성 the nature of philosophy

『철학적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파리가 갇혀 있는 병에서 그 파리를 꺼내주는 일을 자신의 역할로 본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철학자들은 윙윙거리며 돌아다니면서 언어가 할 수 없는 일을 언어로 억지로 시도하다가 스스로 갖혀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들은 언어의 마법에 걸린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대로 “철학적 문제들은 언어가 ‘휴가를 떠날’ 때에(언어가 활동을 멈출 때: 옮긴이) 생겨난다”(38절). 다른 말로 하자면 철학적 문제는 말을 부적절한 맥락에서 사용하는 데서부터 생겨난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접근은 그런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한 기획이다. 언어의 실제적 사용에 귀 기울임으로써 그리하여 병에 갇힌 파리를 나올 수 있게 해줌으로써 말이다. 따라서 그의 철학적 접근은 때때로 치료적 접근으로 특징지어진다. 철학은 치료를 요하는 질환이다. 철학은 ‘인간의 이해력이 언어의 한계를 향해 치닫다가 부딪혀서 얻은 혹’(119절)을 검사한다. 치료법은 언어가 실제로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살피는 일이다. 우리는 어째서 언어가 반드시 기능해야만 한다고 상상하는지를 살피기보다는 말이다. 그러나 언어의 실제 사용에 대한 그의 분석은 사회 인류학에서의 작업 같은 것은 아니다. 언어가 사용되는 몇 가지 방식들을 확인시켜줌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은 사고와 유의미성의 한계들에 주목하게 만든다. 이런 기획의 많은 부분이 언어의 본성에 관한 그릇된 이론들을 제거하는 일을 포함한다. 언어의 특정한 사용에 초점을 맞추는 또 다른 이유는 그러한 대규모의 이론화는 길을 잘못 들었다고 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신념에 있다. 이런 이론들은 우리가 탐구하는 사물의 본질이 발견될 수 있다는 틀린 가정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사용으로서의 의미 meaning as use

『철학적 탐구』의 중요한 부분은,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본성에 대한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이라고 여기는 이론을 공격의 표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견해의 대표적인 예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언어 습득에 관한 설명, 즉 대상을 가리키고 이것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언어를 습득한다는 설명을 꼽는다. 언어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적인 그림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단어는 대상의 이름이며, 결합된 단어의 고유한 기능은 실재를 기술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 ‘사과’라는 말의 의미를 가르치기 위해 우리는 어린 아이에게 사과를 내보이며 ‘이것이 사과다’라고 말한다. 이런 방법을 직시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에 의한 가르침이라 부른다. 즉 그 이름으로 불리는 대상을 가리키는 방법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직시적 정의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이것이 모든 언어습득의 기초가 된다는 견해에 따르는 많은 어려움들에 주목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그러한 직시적 정의는 상당량의 배경설정을 요구한다. 그 아이는 대상을 가리키는 손짓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또는 당신이 그 사과의 색깔이나 모양을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직시적 정의는 지적되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허용한다. 나아가서 설령 그 아이가 어떤 특정 사례의 직시적 정의를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가 이 사례에서 이것과 유사한 다른 사례로 넘어가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언어는 단순히 세계를 표상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매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언어는 우리가 여러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는 다양한 종류의 용구들을 한데 모아놓은 도구상자와도 같다. 비트겐슈타인의 또 다른 비유를 빌면 언어는 기관실의 레버들과도 같다. 단어들은 서로 모양이 닮았기에 우리는 이것들 모두가 동일한 종류의 기능을 하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가진다. 그러나 기관실의 레버들처럼 그 유사성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한 레버는 밸브를 작동시키고 다른 레버는 브레이크를 작동시킨다. 어떤 것은 오직 두 개의 위치, 즉 ‘꺼짐’과 ‘켜짐’의 위치만을 가지지만 다른 것은 연속선상에서 작동할 수도 있다(가령 라디오의 음량조절 단추는 연속적으로 작동한다: 옮긴이).

실제 언어의 성격을 검토해본다면 우리는 금방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림이 부정확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단어들의 의미는 이것들의 사용에 의해 주어지며 이것들이 지시하는 대상들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밑바닥에 있는 본질, 즉 공통분모 또는 하나의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언어를 조사해보면 우리는 여러 다른 맥락에서 작용하는 중첩된 기능들을 발견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게임’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 어구가 의미하는 바는 언어사용이란 ‘가지고 노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다양한 규칙에 따르는 작용들이 있고 이것들 안에서 언어가 기능한다는 것이다. 언어는 우리의 삶의 형식, 즉 그 다양한 사용들을 통해 발전된 사회적 규약들 안에 붙박여 있다. 말의 의미는 우리가 그것들을 그런 뜻으로 사용하게 된 방식에 의해 지배된다. 사용의 맥락인 삶의 형식에서 벗어나면 말들은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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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 하라의 『일체감이 주는 행복』(도서출판 知와 사랑)

부제: 나를 치유하는 신성한 연결고리

 

 

 

카르멘 하라의 ‘두려움에서 가능성으로

인류는 거대한 불확실함과 변화의 시간에 봉착해 있다. 당신의 삶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라 할지라도, 엄청난 파도가 밀려와 지금까지의 삶이 뒤집어질 듯한 불안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경제 위기가 전 세계를 뒤흔들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또 지구온난화가 심각하게 지구를 위협한다고 불안해하는 이들도 많다. 2001년 미국에서 일어난 테러 사건과 2002년에 멕시코 만에서 발생한 기름 유출 사고도 마찬가지로 일종의 경고처럼 여겨졌다. 전 세계가 미쳐가는 듯한 상황에서 어찌 우리가 안전하다고 느끼고 미래를 믿을 수 있겠는가?

새로운 탄생과 변화의 시기가 두렵고 고통스러울 수는 있지만, 변화를 통해 우리는 종종 잃어버린 것을 보상하고도 남을 더 나은 기회를 얻기도 한다. 좋지 않은 상황까지 같이 쓸어가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까지의 걱정과 두려움, 머뭇거림을 버리고 앞에 놓인 새로운 가능성에 흥분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당신이 왜 그리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는 곰곰이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두려움이 힘을 얻는 이유는 당신이 두려움에 힘을 보태주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삶이 두려움에서 벗어나면, 더 나은 삶과 인간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기회에 기쁜 마음으로 동참할 수 있게 된다.

 

 

변화를 통해 불안 없애기

전 지구적으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사람들은 인류의 미래가 어디로 향할지 불안해한다. 우리의 기억만큼이나 오래전부터 믿어온 제도들은 마치 모래성처럼 불안하기 짝이 없다. 은행들과 대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 경제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여러 나라들은 서로를 구제하느라 바쁘다. 사람들은 집을 빼앗기기도 하고, 자신이 가진 담보의 가치보다 빚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젊은이들은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다. 학자금 대출이나 주택 대출, 신용카드 빚만이 아니라 국가의 채무까지 갚아 나가야 한다. 가톨릭교회는 어린이 성추행 같은 추문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기독교는 동성 결혼 같은 사회적 이슈 때문에 갈등을 빚고 있다. 이 모든 혼돈을 떠올린다면, 개인들이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우울증이나 불안에 시달리는 이유를 짐작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수많은 문제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지만 진정한 해결책도 멀리 있지 않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당신도 내부의 혼란을 잠재우려고 기분 전환용 물질(술이나, 항우울증 약, 그 밖의 다른 마약들 등)에 정기적으로 의존해왔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해결책들은 잠시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더 큰 문제를 발생시킨다. 게다가 무의식은 당신이 두려움에 빠지거나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혔을 때 그것을 더 잘 알아차린다. ‘난 괜찮아’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작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런 목소리가 들린다. ‘너 미쳤

니? 네 삶은 완전 엉망진창이야! 온통 악재뿐이라고!’ 비록 삶을 화학 안정제에 의존하지는 않더라도, 끊임없이 돈이나 법적인 문제로 충돌을 일으키는 가족 중 누군가와 다툰다거나 끔찍한 범죄 뉴스를 접하게 되면 마음속 깊은 곳에 도사린 공포는 더 강해진다. 즉 단단해 보이던 땅이 발 아래로 꺼져버리는 느낌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경제적 문제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자신의 재정은 괜찮은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한 일이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몰락해가는 거대한 제도를 개인이 구제할 길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많은 미국인들은 기존의 의료 제도가 이미 망가져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두려워한다(사실을 말하자면 새로운 개혁은 피할 수 없으며, 지난 수십 년간 미루어왔던 일이다.)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변화 앞에서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는,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배우고 다른 이들과 소통하며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를 계획해서 새로운 변화가 불러올 장단점을 미리 파악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가 보이는 가장 일반적인 반응은 두려움과 슬픔 그리고 분노다. 모두 부정적인 반응뿐이다. 우리 모두는 좀처럼 ‘이대로 두는 편이 가장 좋아’ 혹은 ‘이런 변화는 필요하지 않아’라는 환상을 버리지 못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삶이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도 변화하고 있다.

오래된 것들과 작별하고 새로운 것을 맞이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은 실제 변화가 긍정적인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주변에 있는 모든 지인들이 나쁜 식습관을 버리고 열심히 운동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당신은 그 소식에 기뻐하며 본받으려 애쓰는가? 아니면 죄의식과 두려움을 느끼며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는가. ‘난 절대 단것과 파스타를 포기할 수 없어. 게다가 운동은 절대로 못해! 도저히 계속할 자신이 없다고.’ 하지만 사실은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친구들이 모여서 운동을 하고 있어. 같이 하지 않는 나는 왕따가 된 기분이야.’ 우리의 무의식은 비관적인 생각을 만들어내는 데 아주 능숙하다. 그래서 변화와 마주쳤을 때, 그것이 불러올 긍정적인 면을 보지 않고 저항하거나 부정적으로 반응하기 쉽다.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카르멘 하라 박사는 '더 뷰The view', '굿모닝 아메리카Good morning America', '투데이 쇼Today show' 그리고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 [뉴욕 포스트The New York Post]를 비롯한 미국의 텔레비전 쇼와 언론 매체에 출연하는 유명 인사이며 심리치료학자다.

할리우드 스타에서부터 저명한 정치인들까지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다년간의 경험을 통한 부부 치료나 인지치료 방식이 그녀의 신비한 직관력과 합쳐져 그녀는 세계적인 상담사로 발돋움했다. 또한 세 장이나 음반을 낸 재능 있는 음악가이며, 자신만의 고유한 보석을 디자인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홈페이지 www.CarmenHarra.com과 페이스북 carmen Harra- (Wholeliness)를 방문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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