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멘 하라의 『일체감이 주는 행복』(도서출판 知와 사랑)

부제: 나를 치유하는 신성한 연결고리

 

 

 

 

카르멘 하라의 ‘일체감에 대한 자아의 저항을 극복하는 법’

 

 

집단의 자아는 어째서 통제력을 잃어버리는가

우리는 우리가 속한 집단이 너무 커지면 당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의심과 불신을 느낄지도 모른다. 자신이 속한 회사나 교회 혹은 사회의 규모가 작을 때는 소속된 사람들을 대부분 잘 알고 있고 모든 이들을 믿을 수 있으며 서로 잘 섞이게 마련이다. 하지만 집단이 커지면 더 큰 안정감을 얻기 위해 그 안에서 소규모 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개인의 영향을 받지 않을 만큼 시스템이 거대하다고 느낄 때 일체감을 깨닫고 지각하기란 쉽지 않다. 회사가 커지고 나라가 확장되고 지구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이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우리가 무력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이와 동시에 기술이 발달하면서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점점 구체적으로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거대한 세상에서 길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마음은 일체감에 의해 완화될 수 있다. 이는 우리의 개별적 자아와 집단의 자아 그리고 정체성이 모두 창조의 한 부분이며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전제로 한다. 아주 낮은 단계에서부터 변화하기 시작해 전체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우리는 일체감을 통해 지닐 수 있다. 혼자 힘으로 세상의 굶주림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집 없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로 작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기 시작했다. 이 같은 생각의 변화는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쳐주고, 작으나마 자신이 할 수 있는 몫을 실천할 수 있게 한다. 그러다 보면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 도움과 힘이 되어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함께 깨닫게 된다. 자아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더 깊이 깨달을수록, 당신의 판단도 빠르게 변화할 것이다. 또한 자아의 목적을 깨닫는 데 익숙해지면 항상 깨어 있으면서 분열 대신 일체감을, 두려움과 의심 대신 사랑을, 냉소 대신 믿음을 지닌 채 살 수 있다.

 

 

일체감에 대한 자아의 저항을 극복하는 법

 

관찰

일기장에 자신이 속해 있다고 느끼는 집단의 이름과 그 안에서 불리는 이름을 목록으로 정리해보라. 가령 ‘나는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난 아시아 여성이고 샌프란시스코 주민이고 지역단체와 연합 교회의 일원이다’라는 식으로 자신을 묘사해보라. 자신이 속한 단체에 대해 가능한 상세히 생각해보라. 이제 그 집단의 장점을 한번 적어보라. 이들과 자신이 동일시되는 것이 좋은가? 어떤 점이 당신에게 그 집단에서 안정감과 안전함 그리고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가?

그다음에는 부정적인 측면을 모두 살펴보고, 장점 목록과 단점 목록 중 어느 쪽을 만들기가 더 쉬웠는지 생각해보라. 자신이 속한 집단의 모든 것에 만족하는가? 어떤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거나 불편한데 다른 집단에서는 긍지를 느끼는가? 어떤 집단이 일체감과 상반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가?

이제 그 집단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성격을 당신이 어떤 식으로 표출하는지 생각해보라. 당신은 외부에서 자신이 속한 집단의 긍정적 성격을 갖춘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가? 잘 생각해보라. 주변 사람들을 잘 보살피고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그 사람은 어째서 당신의 집단에 속해 있지 않을까? 그 사람과 당신의 연결고리는 무엇인가?

이런 훌륭한 장점을 지닌 다른 이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라. 그는 누구인가? 그와 자신을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다시 살펴보라.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해보라.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며 나 자신을 사랑해. 다른 사람이 나의 이런 면을 치유하는 데 도움을 줄 거야. 지금도 치유되고 있는 중이야.”

 

 

기도

자신 안에 있는 부정적인 면을 치유하고 긍정적인 면을 찾도록 기도하라. 자신이 몰랐던 긍정적인 면이 무엇이든 자신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을 확신하라. 당신이 지닌 아름다운 재능을 보여달라고 신에게 기도하라. 자신과 다른 이들을 더 많이 사랑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라. 사랑과 자비를 퍼뜨릴 기회에 동참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이런 감정들을 잘 받아들이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라. 두려움을 물리치고 가슴을 열어 당신과 달라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도록 신에게 도움을 청하라.

 

 

행동

다른 이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행위는 다른 이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준다. 같이 먹고 어울리는 것은 인간의 역사에서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된 행위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속하지 않은 집단의 사람, 잘 모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해보라. 이때 서로 약간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당신이 발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니까. 같이 식사를 하는 동안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여러 가지를 물어보라. 식탁에 앉은 이들 모두 아이가 있는가? 같은 도시 혹은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인가? 또한 당신의 경험을 들려주며 다른 이들과 공통된 목적을 찾아보라. 그날 같은 식탁에 앉은 사람들과 당신은 적어도 공통점을 다섯 가지 이상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공언할 수 있다. 그러니 공통점을 찾으려고 시도해보라. 그런 자리를 정기적으로 마련해도 좋다. 가령 한 달에 한 번씩 이들과 간단한 식사를 하는 것이다.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먹는 것도 좋다. 그럴 때는 장소나 메뉴를 잘 정해 누구도 소외당하지 않게 배려해야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개인의 자아와 집단의 자아가 분열된 결과로 찾아오는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할 수 있다.

식사를 하기 전과 후에 지상의 양식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소박한 축복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이들을 창조한 신에게 감사하기 바란다.

다른 이들과 우아하게 식사를 하며 기쁨과 웃음 그리고 내일의 희망을 함께 나누던 풍습은 이제 사라져버렸다. 당신이 힘을 숭배하는 자아를 얻은 대가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생각해보기 바란다. 바쁜 생활 중에 무엇을 잊어버리고 사는가? 우리가 잃어버린 단순한 즐거움은 무엇인가? 집단뿐 아니라 개인적인 관계에서도 스스로 얼마나 많은 단절과 고립을 초래했는가? 당신의 가족은 각자 컴퓨터나 텔레비전 앞에서 혼자 저녁을 먹고 있지는 않은가? 각자의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서로 알고 있는가? 다른 이들과 식사를 하며 대화해보라. 그러면 당신은 균형 잡힌 시각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개인인 동시에 더 큰 전체의 일원이며, 두 정체성이 모두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제2부에서는 자아 때문에 애정 가득한 도움을 베풀어주는 신성한 연결고리를 당신이 얼마나 많이 잃어버리고 사는지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런 연결고리를 자각하기 시작하면 당신은 일체감을 서서히 경험할 수 있다. 그러면 당신의 감각이 그것은 거짓이라며 당신을 속이려고 할 때조차 믿음을 버리지 않을 수 있다. 모든 존재와 완벽하게 하나가 된 느낌을 경험하는 순간도 올 것이다. 그런 경험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그 순간이 삶의 진정한 실체를 깨닫는 때임을 알아차리기 바란다. 당신은 이런 경지를 받아들이고 이 지구

에 일체감을 퍼뜨리기 시작할 것이다.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카르멘 하라 박사는 '더 뷰The view', '굿모닝 아메리카Good morning America', '투데이 쇼Today show' 그리고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 [뉴욕 포스트The New York Post]를 비롯한 미국의 텔레비전 쇼와 언론 매체에 출연하는 유명 인사이며 심리치료학자다.

할리우드 스타에서부터 저명한 정치인들까지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다년간의 경험을 통한 부부 치료나 인지치료 방식이 그녀의 신비한 직관력과 합쳐져 그녀는 세계적인 상담사로 발돋움했다. 또한 세 장이나 음반을 낸 재능 있는 음악가이며, 자신만의 고유한 보석을 디자인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홈페이지 www.CarmenHarra.com과 페이스북 carmen Harra- (Wholeliness)를 방문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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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 하라의 『일체감이 주는 행복』(도서출판 知와 사랑)

부제: 나를 치유하는 신성한 연결고리

 

 

 

 

 

카르멘 하라의 희생자적 태도와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사회: 균형

 

 

희생자적 태도

집단의 자아가 너무 강하면 우리는 자신의 문제를 지나치게 집단의 문제와 동일시하고 ‘희생자적 태도’를 키우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즉 살면서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는 힘(단지 태도를 선택하는 힘에 불과하더라도)을 지닌 자신을 대견해하기보다 자신의 무력감에 사로잡히기 쉽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경향은 분열적이고 파괴적인데, 불행히도 요즘에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의사소통 기술이 발달하면서 우리는 집단에 쉽게 가입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를 더 자주 느낄 수 있는 환경에서 살다 보니, 그것이 자아를 더 촉발했다.

집단의 자아에 사로잡히면, 문제가 생겼을 때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문제를 파악하기보다 외부 요인으로 책임을 돌리기 바쁘다. 예를 들어 미국은 다른 나라보다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인과 대화를 하면서 가끔 이런 사실을 지적하면, 상대는 그 사실을 수긍하는 대신 대체로 중국이나 인도 같은 신흥 에너지 소비국을 들먹이며 이렇게 비난하곤 한다. 지구의 자원을 보존하려면 저쪽 집단이 먼저 행동을 시작해야 해! 우리는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런 비판이 사실일까? 내가 더 잘 할 수 있을까? 우리 집단이 잘할 수 있도록 내가 도울 일이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타인을 비난함으로써 비판을 모면하려 한다. 인생은 누가 더 많이 오해받고 잘못 받아들여지고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지 겨루는 장이 아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변명은 결국 자신을 진부한 틀에 묶어둘 뿐이다.

일체감은 진정제와 같아서,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공포와 불안을 누그러뜨린다. 일체감은 개인이 지닌 여러 정체성, 즉 개인이며 여러 집단의 일원 그리고 피조물의 일부분이라는 다양한 정체성에 균형을 잡아준다. 일체감은 당신이 모르는 사람들조차 (그들도 일체감을 믿기 때문에) 당신을 지켜준다는 사실뿐 아니라, 우리도 그들을 지킬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준다. 더 나아가 타인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상처 입을 각오로 손을 내밀 용기를 불러일으킨다. 결속을 느끼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멋진 상황을 겪으며 우리는 내부에서부터 변화시킬 수 있고, 더 쉽게 자신의 행동을 바꿀 수 있다. 그렇게 개인의 자아와 집단의 자아를 조절하여 비이성적인 감정이 의식을 지배하지 않도록 할 수 있다.

살다 보면 자신이 속한 집단의 기대에 끊임없이 부응하고 다른 집단과 경쟁하는 것에 피로를 느낄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을 경쟁자로 봐야 하는 부담을 안고 살 필요는 없다. 다른 집단을 비하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집단을 사랑하고 자신의 집단이 ‘최고’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다른 종교와 인종, 의견과 생각을 존중한다면, 지구상에 일체감을 실현하는 일을 도울 수 있다.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사회: 균형

모든 사회에는 집단의 자아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제 우리 모두는 개인의 욕구와 집단의 욕구, 작은 집단의 욕구와 더 큰 집단의 욕구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분열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버려야만 한다. 그래야만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 사회는 두 가지 형태, 즉 개인적 사회와 집단적 사회로 나눌 수 있다. 미국은 개인적 사회에 속하며, 아시아나 남아메리카는 집단적 사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사회는 독창적인 사람, 스스로 노력하여 자수성가한 사람을 높이 평가한다. 물론 이 셋 모두 멋진 장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에서 개인은 자기중심적이 되기 쉽다. 사람들은 부모나 공동체, 스승이나 경찰 혹은 정부와 주위 환경으로부터 받은 도움에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하다. 슬픈 일이지만, 이렇듯 개인주의가 지나치게 강조되다 보면 더 큰 집단에 속해 있다는 축복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쉽다.

그에 반해 집단적 문화가 중시되는 사회에서는 단체로 일하고 협동하여 전체의 발전을 중시한다. 집단에 순종하는 대가로 보호를 받다 보니 개인의 자유가 제한된다는 단점이 있다. 또한 개인이 자기표현을 할 때마다 자신이 속한 집단을 배신한다거나 전체에게 피해를 준다는 부담을 느끼기 십상이다. 서구에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유에는 책임과 차이에 대한 관대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순응하는 문화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개인적 문화의 다양함을 불편하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이 급격한 변화에 자신을 열어놓지 못

하면, 집단의 자아가 개인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물론 두 시스템 모두 당연히 장점과 단점이 뒤따른다. 루마니아에서 살던 20대 때 나를 포함해 모든 친구와 그 가족들에게 집과 차 그리고 직업이 있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압도할 만큼 물질적 부나 재산을 소유하지 못했지만, 모두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극단적인 부나 가난은 없었지만, 사회적 신분의 사다리를 타고 상승할 수 있는 기회 역시 없었다. 두 사회에서 다 살아본 나로서는 이제야 문제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정부가 나라를 어떻게 운영하는가를 뛰어넘는 개인의 자아와

집단의 자아 사이의 균형에 관한 문제였다. 사람들이 일체감을 받아들인다면 불화와 경쟁 그리고 자기중심주의 대신 조화가 생겨나고, 그리하여 사회의 약점과 단점은 극복될 수 있다.

일체감은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으로서, 우리를 눈뜨게 해준다.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가 이룬 것들은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인간 의식에 길을 내줄지 모른다. 신성한 율법과 더 나은 통합된 세상이 이루어지면 그것들이 무용지물처럼 여겨질 날이 올지 모른다.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카르멘 하라 박사는 '더 뷰The view', '굿모닝 아메리카Good morning America', '투데이 쇼Today show' 그리고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 [뉴욕 포스트The New York Post]를 비롯한 미국의 텔레비전 쇼와 언론 매체에 출연하는 유명 인사이며 심리치료학자다.

할리우드 스타에서부터 저명한 정치인들까지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다년간의 경험을 통한 부부 치료나 인지치료 방식이 그녀의 신비한 직관력과 합쳐져 그녀는 세계적인 상담사로 발돋움했다. 또한 세 장이나 음반을 낸 재능 있는 음악가이며, 자신만의 고유한 보석을 디자인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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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 하라의 『일체감이 주는 행복』(도서출판 知와 사랑)

부제: 나를 치유하는 신성한 연결고리

 

 

 

『일체감이 주는 행복』: 영혼의 그림자와 집단의 자아

 

 

영혼의 그림자

우리의 정신 깊은 곳, 깨어 있는 의식의 빛이 닿지 않는 곳에는 자아의 두려움을 살찌우고 자아가 과민하게 반응하도록 만드는 믿음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아 속에 불편한 진실과 믿음을 감추고 있는 그림자가 깃들어 있다고 심리학자 카를 융Carl Jung은 이야기했다. 그런 생각이나 느낌은 스스로가 야기하는 고통을 두려워한 나머지, 정신의 어두운 골방에 처박혀 있다. 우리는 자신이 부족하거나 멍청하다고 생각되면, 자신에 대한 깊은 슬픔과 분노 그리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때 자아는 그러한 느낌을 점검하고, 과연 어디서 그런 느낌이 왔으며 그것이 진정한 느낌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하지만 자아는 오히려 공포에 쫓기다 못해 그림자 속에 숨고 만다. 그리고 의식이 깨닫지 못하거나 보지 못하는 무의식 속에서 잘못된 믿음은 두려움과 분노를 더욱 키운다. 이런 파괴적인 생각을 우리는 치유해야 한다.

당신의 무의식을 샅샅이 뒤져 사랑과 깨달음의 빛을 어두운 구석에 비추면, 고통을 불러온 요인을 없앨 수 있다. 대체로 고통은 잘못된 믿음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지만, 혹여 그 믿음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당신의 의식 깊은 곳에는 자신을 주위 사람들과 비교해 스스로가 바보스럽다고 여기는 마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깨달음의 빛은 그런 마음이 잘못되었음을 밝혀준다.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영리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관습적인 의미에서 영리하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영리하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학자가 될 만큼 지성이 충만하지는 않지만, 학자가 되려다 좌절한 다른 사람에게 용기와 즐거움을 줄 재능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어떤 형태로든 재능을 지니고 있으며, 재능이 한 가지뿐이라고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사랑은 그 자체로 빛을 발하며, 숨겨진 자신의 내면을 부드럽게 살피다 보면 우리의 내면은 비판이 아닌 연민으로 가득 찰 것이다. 당신의 믿음이 무엇이든 그림자 속에 가두려 하지 말라. 믿음을 표면 위로 드러내어 그것을 탐색하고 분석해야 한다. 그림자 속에 빛을 비추다 보면, 스스로 부족하고 열등하다는 의식으로 스스로를 부끄럽게 혹은 무가치하고 두렵게 만들던 거짓이 어느덧 사라져버린다. 동시에 당신만의 ‘골방’에 잊힌 채 처박혀 있던 멋진 품성이 광채 속에 드러날 것이다. 아름다움이나 높은 가치, 고유한 힘처럼 자신에게는 없다고 믿었던 당신의 장점들 말이다.

일체감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그림자 속에 있는 것들을 의식적 깨달음과 결부한다는 뜻이다. 숨겨진 보석을 찾고 낡아 부서진 마음속 가구(감정)에 빛을 드리우기 위해 어두운 구석에 조명등을 들이대보라. 버려야 할 것이 부모님이나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 유산일 수도 있지만, 찾아낸 이상 쓰레기통으로 곧바로 보내버려야 한다. 마음속 골방을 청소하다 보면, 필요 없는 것들을 없앨 수 있고 잊었거나 깨닫지 못한 자신의 멋진 품성을 다시금 찾아낼 수 있다. 잃어버렸던 자신에게 돌아오면서 일체감과 치유의 감각이 되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소중한 보석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림자와 비밀은 자아의 두려움을 살찌우는 내면의 야수이므로 이들을 길들여야 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테세우스처럼 미로로 들어가 내면에 깃든 끔찍한 야수인 미노타우로스를 만나 죽여야 한다. 어둠 속을 뚫고 들어가지 않는 한, 괴물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둠을 뚫고 들어가 괴물을 없앨 수 있을까? 연민과 이해가 있으면 가능하다. 연민과 이해가 마치 동화에서처럼 미노타우로스를 왕자나 영웅으로 변모시킬 것이다. 통제하기 어려운, 야수 같은 당신의 자아는 두려움에 맞설 내면적 힘과 어두운 내면에 빛을 비출 용기에 힘입어 길들여질 것이다. 지금까지 억눌러온 머릿속 문제와 직면했을 때, 미노타우로스는 더 이상 물리치기 힘든 강적이 아닐 것이다.

집단의 자아

 

앞에서 설명했듯이, 우리의 자아는 위험에 처하면 도망치거나 싸우라고 종용한다. 또한 자기를 보호하는 방편 중 하나로 여럿이 모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기도 한다. 이러한 정신적 태도는 초기에 인류가 살아남는데 크게 기여했다. 집단을 찾는다는 것은 개인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집단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다. 당신이 속한 집단과 다른 집단을 분리해서 인식한다는 것은 개인의 자아와 집단의 자아를 동일시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이 속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지배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이 중요시하는 것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뿐이다(당신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집단에 필요한 것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들의 모임은 가족일 수도 있고, 회사 내의 부서일 수도 있으며, 자신이 속한 인종이나 종교일 수도 있다. 어떤 집단이든 그 집단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을 이방인으로 취급하고 수상한 시선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차이점만 집중적으로 보려 하고, 차이에서 느끼는 두려움 탓에 곧바로 ‘이방인’과 어울리는 일에 피곤을 느낀다. 불행히도 그러다 보면 이러한 ‘외계인들aliens(우리가 외국 이민자나 외국인을 지칭할 때도 지구를 ‘침략’하는 외계의 존재를 의미하는 외계인이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하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을 경계하게 되고, 당신이 이들을 적대시하듯이 그들도 당신의 집단을 똑같이 대할 것이라는 믿음에 빠져버린다.

하지만 일체감의 범위 안에서 우리는 자신이 속한 집단과 자신을 좀 더 신중하게 바라볼 수도 있다. 개인적인 정체성을 느끼기는 하지만,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더 훌륭하거나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한 자신의 집단이 더 우월하다는 의식 없이 집단의 정체성을 자각할 수 있다. 일체감에 대한 이해가 자리 잡으면 어떤 방식으로 분류되었든 상관없이 자신과 다른 이들 사이의 공통점을 볼 수 있게 된다.

집단의 자아는 본능적이다. 단체 모임에 나가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입고 어떻게 행동하는지(내가 너무 화려하거나 촌스러운 옷을 입은 건 아닐까?), 또 자신이 그곳에 어울리는지(사람들이 모두 술을 마시고 있나? 정치에 대해 얘기해볼까? 텔레비전으로 스포츠 중계를 볼까?) 살피게 된다. 그리고 아는 사람이 없는지 곧장 둘러보게 된다. 만약 아는 사람이 없으면, 접근할 만한 사람이 있는지 혹은 자신과 비슷하거나 관심사가 비슷해 보이는 사람이 있는지 찾게 된다. 우리 모두 그렇게 산다.

하지만 이러한 자아 표현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 불안하거나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할 경우, 파괴적으로 변하거나 자아도취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자신이 보호받고 있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그 집단의 일원임을 확인하고 싶은 것뿐이다. 이러한 행동의 근저에는 두려움이라든지 자신보다 더 힘센 집단에 속해 살아남고자 하는 갈망이 도사리고 있다. 자신이 속한 ‘부족’이 도움을 주리라고 생각하고 부족의 힘이 강해지기를 바란다.

현실 세계에서 집단의 자아는 차별적인 성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너희보다 나으니까 나 또한 당신보다 나아’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집단 학살이나 전쟁은 이러한 정신적 태도의 극단적인 표출이지만, 우리는 실제 삶에서도 이러한 일을 종종 경험하곤 한다. 가령 자신보다 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이웃과 관계 맺기를 꺼리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속한 집단의 자아에 의해 피해를 볼 수도 있다. 학교에서 당신의 자녀가 ‘다르다’는 이유로 따돌림당한 경험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행동으로 악업을 쌓기 전에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의 밑바탕에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볼 때 당신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자아는 자신이 강하고 중요하고 우월하다고 느끼기 위해 그 두려움을 독선적인 분노와 판단으로 바꾸어버린다. 그럼으로써 그 감정을 위장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타인에게 독선적인 태도나 적대감을 드러낼 때는 그것이 두려움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자신의 못난 행동을 인정하기는 어렵지만, 우리 모두는 가끔씩 자아의 손아귀에 사로잡힌다. 자신이 남들과 다르고 자신이 속한 집단이 자신을 열등하게 볼까 두려워 우리는 부정적으로 행동하기 쉽다. 이런 두려움은 우리가 사랑으로 정복해야 할 야수와도 같은 것이다.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카르멘 하라 박사는 '더 뷰The view', '굿모닝 아메리카Good morning America', '투데이 쇼Today show' 그리고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 [뉴욕 포스트The New York Post]를 비롯한 미국의 텔레비전 쇼와 언론 매체에 출연하는 유명 인사이며 심리치료학자다.

할리우드 스타에서부터 저명한 정치인들까지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다년간의 경험을 통한 부부 치료나 인지치료 방식이 그녀의 신비한 직관력과 합쳐져 그녀는 세계적인 상담사로 발돋움했다. 또한 세 장이나 음반을 낸 재능 있는 음악가이며, 자신만의 고유한 보석을 디자인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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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 하라의 『일체감이 주는 행복』(도서출판 知와 사랑)

부제: 나를 치유하는 신성한 연결고리

 

 

 

 

카르멘 하라의 자기중심주의와 자아도취

 

자아에게 지배당하는 인생은 만성적인 두려움으로 가득 찬 투쟁과 갈등의 연속일 것이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면 감정적으로 조금이라도 힘들다고 느껴지는 상황이 왔을 때 무조건 도망치려고 한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부당하게 대접받고 있다고 느끼며, 세상이 가장 공격적인 사람들만 살아남는 곳이라 여기게 된다. 마음은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만 반응하고, 현실감은 왜곡된다.

안전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거나 자신의 세계를 통제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에 빠지면(그래서 고통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것이 진정한 문제의 시발점이다. 자신이 이미 누리고 있는 행복과 안전을 잊어버리고 서서히 자아도취에 빠져,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거만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자기중심주의와 두려움은 인간성의 일부분이다. 주위를 둘러보라. 종종 그렇게 올바르고 점잖고 겸손해 보이는 사람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겁에 질려 사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생각은 자아에게 지배당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들의 가슴속은 두려움과 분노로 가득 차 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사탄도 한때는 천사였다. 하지만 자아가 지나치게 강한 나머지, 모든 것을 통제하려 들다가 결국 천국에서 추방되었다고 한다. 이는 자아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면 자신이 만든 지옥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은유

이기도 하다.

자아도취에 젖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나 상황들을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는 도구나 자신에 대한 위협으로 여긴다. 형제애도 불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자아도취에 젖은 사람은 자신이 다른 이들을 자신과 동등하게 대할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닫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을 자신과 동등하게 대하는 것은 통제에 대한 환상을 마지못해 넘겨주는 행위라고 여길 것이다. 자아도취가 심해지면, 자신의 진정한 자아로부터 너무나 멀어진 탓에 다른 이들을 부당하게 대하더라도 어떠한 후회도 느끼지 않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다

행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일체감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지경에 이르지는 않는다. 인생이 생존 투쟁의 장만은 아니라는 인식을 어렴풋이나마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와 세상’의 대결 구도로 삶을 대하는 것이 본능적으로 옳지 않다고 느끼며, 신의 창조적인 힘을 표현하고 확장하려면 협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대할 때 우리는 죄의식과 슬픔을 느끼는데, 이는 사람들을 두려움과 이기심으로부터 구제해 일체감을 깨닫게 하려는 신의 뜻이기도 하다.

우리의 양심은 영원한 영혼의 목소리다. 일체감을 받아들이고 악업을 쌓지 않게 해주며 삶을 온당한 방향으로 이끈다. 우리를 지켜보고 사랑하는 신과 영적 존재는 신성함과 치유의 에너지가 넘치는 연결고리를 우리 스스로 깨닫도록 지속적인 신호를 보내고 있다. 어떤 가치도, 성취감도, 행복도 찾아볼 수 없는 자아의 텅 빈 사막에서 외로이 헤매지 말고 천국으로, 울타리 안으로 돌아오라고 신이 우리를 부르고 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탕자의 우화를 들려주고 있다. 그 우화에는 아무리 우리가 신으로부터 멀어지더라도 여전히 신은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으며 안전함과 사랑, 보호와 즐거움이 있는 삶으로 우리를 이끌고 싶어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신은 우리를 꾸짖거나 처벌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탕자의 아버지인 하나님은 사랑과 보호로 가득 찬 자신의 품으로 우리 모두가 돌아오기를, 그래서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고통을 끝내기를

바라신다. 자아에게 끌려 다니는 한, 그것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아도취는 독약이나 다름없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켜 사람들을 마약 중독이나 섹스 중독 혹은 사악하고 잔인한 게임 중독에 빠뜨린다. 사람들은 혼자라는 외로움을 잊기 위해 그런 일들을 탐닉한다. 이런 사람들을 보게 되면, 고통받는 이들 안에 깃든 착한 영혼을 발견하고 연민을 느껴보라. 자신 속에 깃든 자기중심주의를 발견하면, 그것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스스로를 용서해보라. 기도와 명상으로 신에게 다시 돌아오라. 신의 신성함과 치유 에너지를 실제로 느낄 수 있도록 기도하라.

인간성의 변화를 앞당기고 스스로 힘과 평화를 느끼고 싶다면, 자아도취와 부정의 세계로 자신을 이끄는 지나친 생존 본능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다. 명상과 지속적인 훈련이 두려움에 가득 찬 반응을 늦추는 효과는 있겠지만,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다(위험한 순간에 보호 작용을 하므로 긍정적인 면도 있다). 하지만 두려운 상황에서 뇌가 즉각적으로 반응한다고 해서 이에 흥분하거나 달아나려는 태도는 자제할 필요가 있다. 두려움이 느껴지면 그런 감정이 과연 정당한지 아니면 그저 자동적이고 왜곡된 반응인지 마음속을 찬찬히 탐색해보라.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카르멘

 

 하라 박사는 '더 뷰The view', '굿모닝 아메리카Good morning America', '투데이 쇼Today show' 그리고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 [뉴욕 포스트The New York Post]를 비롯한 미국의 텔레비전 쇼와 언론 매체에 출연하는 유명 인사이며 심리치료학자다.

할리우드 스타에서부터 저명한 정치인들까지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다년간의 경험을 통한 부부 치료나 인지치료 방식이 그녀의 신비한 직관력과 합쳐져 그녀는 세계적인 상담사로 발돋움했다. 또한 세 장이나 음반을 낸 재능 있는 음악가이며, 자신만의 고유한 보석을 디자인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홈페이지 www.CarmenHarra.com과 페이스북 carmen Harra- (Wholeliness)를 방문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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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의 『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존 롤스의『정의론』

 

만일 당신이 어떤 위치를 차지할지 모른다는 전제하에 당신이 살 사회를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사회를 선택할 것인가? 존 롤스의 『정의론』은 이 질문에 대한 합리적인 사람의 반응을 가정함으로써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원칙을 제시한다. 1917년에 나온 이 책은 기존 정치철학의 지형을 바꿔놓았다. 『정의론』은 홉스, 로크, 루소 등이 확립한 사회계약설 전통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정의론』은 복잡할 뿐 아니라 곳곳에서 아주 무미건조한 내용이 펼쳐지지만, 20세기 역사상 가장 널리 읽힌 정치철학서 가운데 하나이다. 『정의론』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공평함과 정의에 관한, 그리고 우리가 사회제도를 통해 이것들을 성취하는 방법에 관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점이다.

원초적 입장 the original position

만일 당신이 가장 이상적인 사회에 적용할 원칙을 선택해야 한다면, 아마 계층, 직업, 성적 기호 등에 따른 다양한 형태의 편견이 작용하게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롤스가 선택한 방식은 사고실험, 즉 당신의 자아와 특정한 욕구에 관한 모든 사실이 당신 모르게 무지의 장막veil of ignorance 뒤에 감쳐진 가상의 상황을 설정하는 것이다. 당신은 자신에게 직업이 있는지 없는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가족이 있는지 없는지, 어디에 사는지, 얼마나 똑똑한지, 낙관론자인지 비관론자인지, 마약중독자인지 모른다고 가정해야 한다. 또한 정치학과 경제학, 사회조직의 기초, 인간심리의 법칙 등에 정통하다고 가정해야 한다. 당신은 거의 모든 생활방식에 필요한 기본적 가치가 있다고, 거기에는 일정한 자유, 기회, 소득, 자존심 등이 포함된다는 점을 안다. 롤스는 사회에서 차지하는 자신의 위치를 모르는 상황을 ‘원초적 입장’으로 부른다.

원초적 입장이라는 가상적 상태에서 과연 개인이 사회조직을 위해 어떤 원칙을 선택해야 합리적일까?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과연 어떤 사회가 옳은가에 대한 우리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실생활의 모든 부적절한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다. 롤스는 원초적 입장이라는 조건에서 합리적으로 선택한 원칙들은 정당한 원칙이라는 특별한 권리를 가질 것이고, 다른 조건들 또한 같다면, 우리는 그것을 채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과정에서 도출된 원칙은 논란의 여지가 없어야 한다. 왜냐면 만일 우리가 사고실험을 효과적으로 수행했다면, 거기에 참여하는 개인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어야하기 때문이다. 즉 원초적 입장에서 개인들의 차이를 드러내는 모든 요소들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원칙들은 합리적인 참가자들이 동의하는 원칙이어야 한다. 이런 사고실험을 진행하면서 롤스는 두 가지 기본적인 원칙에 도달한다. 하나는 자유에 관한 원칙이고, 다른 하나는 정의로운 분배에 관한 원칙이다. 이 두 가지 원칙은 자유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인 그의 정치적 결론의 구체적인 사례이다.

일부 사회계약설 이론가들과 달리 롤스는 우리 모두가 이런 원칙들에 동의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는 원초적 입장에 대한 사고실험을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기본적 원칙을 도출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미세조정 차원에서 그 원칙들을 기존의 제도들과 비교한다. 또 롤스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원칙들에는 ‘공정성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라는 이름이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 원칙들은 합리적이고 공명정대한 과정을 통해 도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성된 두 가지 원칙 가운데 첫 번째는 자유의 원칙이다.

자유의 원칙 the liberty principle

자유의 원칙이란 ‘각 개인은 만인에게 해당되는 비슷한 자유의 체계와 양립하는 아주 폭넓고 동등한 기본적 자유의 종합체계에 대한 동등한 권리가 있다.’라는 것이다. 바꿔 말해 무지의 장막 뒤에서 선택할 때 합리적 개인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다른 누구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자유에 대한 동일한 권리를 갖기를 바랄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 개인은 차별의 희생자가 되고 말 것이다. 예를 들어 양심의 자유, 설득력 있어 보이는 어떤 종교적, 세속적 신념을 간직할 자유는 국가가 함부로 제한할 수 없는 기본적 자유이다. 당신의 행동이 타인의 자유를 위협할 때에만 비로소 국가의 개입이 정당화된다. 이 경우 당신의 자유는 다른 모든 사람의 동동한 자유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타인에게 관용적이지 못한 사람들도 타인의 동등한 자유를 위협하기 전까지는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이런 도덕률은 사회의 각 구성원이 다양한 자유를 누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롤스는 그가 원초적 입장에 놓인 개인의 합리적 선택으로 제시하는 원칙들이 축자적으로 배열되어 있다고 말한다. 즉 첫 번째 원칙이 충족되어야 두 번째 원칙을 고려할 수 있고, 두 번째 원칙이 충족되면 세 번째 원칙으로 넘어가는 식으로 정렬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때 동등한 자유에 대한 권리는 롤스의 이론에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며 항상 우선권을 가진다. 이 원칙은 먼저 충족되어야하고, 두 번째 원칙보다 중요하다. 따라서 롤스가 그리는 정의로운 사회는, 모든 사람의 동등한 자유에 대한 권리를 법으로 강제하고 지탱하는 사회이다.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과 차등의 원칙 the fair equality of opportunity principle and the difference principle

롤스의 두 번째 원칙은, 기본적 가치의 정의로운 분배와 관련한 것인데, 다시 두 가지 원칙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과 차등의 원칙— 으로 나뉜다. 전반적으로 이 두 번째 원칙에는 효율성에 관한 원칙들보다 축자적 우선권을 갖는다. 즉 정의가 효용보다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이란, 특정한 직위나 직업과 연관된 모든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그 직위나 직업이 공정한 기회균등의 조건에서 모두에게 열려있을 때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 누구든 성적 기호나 인종 같은 부적절한 근거에서 가장 보수가 많은 직업을 가질 기회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 롤스가 보기에 기회균등은 단순한 차별반대가 아니다. 기회균등에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재능을 개발하도록 유도하는 교육의 제공이 포함된다. 기회균등의 원칙은 다음에 소개할 차등의 원칙에 대해 축자적 우선권을 갖는다.

차등의 원칙이란, 모든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불평등은 그것이 사회에서 가장 불리한 입장에 처한 사람들에게 최대의 이익을 주는 조건에서만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최소극대화maximin’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다. 최소극대화는 ‘maximise the minimum’의 줄임말로 최악의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최대의 몫을 부여할 수 있는 방안을 선택하라는 의미이다. 정의로운 사회에서의 공평한 임금을 사례로 든다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첫 번째는, 대다수 사람들이 높은 임금을 받지만 전체의 10퍼센트는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의 임금만 받는 경우이다. 두 번째는, 평균적인 생활수준은 첫 번째 경우보다 훨씬 낮지만 가장 가난한 10퍼센트의 사람들도 어느 정도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경우이다. 롤스의 주장에 따르면, 원초적 입장에서 선택하는 사람은 두 번째 경우를 고를 가능성이 높다. 왜냐면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적당한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가장 열악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도 그다지 나쁜 상황에 처하지 않는다. 반면 첫 번째 경우에서는 비록 무척 부유해질 기회가 있지만, 극빈자의 처지로 떨어질 위험도 있다. 최소극대화의 전략을 선택할 때 우리는 최악의 위험을 최소화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경우 우리는 두 번째 경우를 선택해야 한다. 비참한 빈곤상태에서 살아갈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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