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멘 하라의 『일체감이 주는 행복』(도서출판 知와 사랑)

부제: 나를 치유하는 신성한 연결고리

 

 

 

 

 

 

 

열린 마음과 열린 가슴으로 듣기

 

당신의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있기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자신의 개인적 견해를 설명하는 사람 앞에서 화를 낸다는 것은 당신이 자신의 생각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는 뜻이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지평을 넓히고 일체감을 받아들이는 것이니, 잠시만이라도 당신의 믿음에 대한 집착을 거두어보라. 그 사람의 의견이 당신과 반대된다고 해서, 그 사람이 틀 렸고 그걸 고쳐야 하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 사이의 의견 일치도 멋지지만, 믿음이 다양하다는 것도 그만큼 더 아름답다. 그 사람의 말에 담긴 가치를 발견하고, 그가 말하는 내용을 넘어서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함께 느껴보라. 이 사람은 당신과 전혀 다른 삶을 경험해오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당신은 그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을 확장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사람과의 대화에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까?
자신의 반응을 솔직하게 점검해보라. 혹시 상대방의 논리가 당신의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당신의 위치를 불편하게 할지 몰라 방어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가? 반응을 보이는 주체는 더 높은 의식이라기보다 당신의 자아가 아닌가? 당신과 사고방식이 완전히 다르거나 당신이 이해하고 수용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대화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바로 당신의 자아가 다른 사람에 대한 ‘공포’를 부추기는 것이며, 그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공격받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당신의 자아 때문이다. 어떤 집단이 당신에게 두려움을 안겨준다면, 그중 한 사람에게 다가가 예의 바르게 당신의 생각을 밝히라. 그러면서 동시에 그 사람과 자신 간의 공통점을 찾으려 애써보라.
앞에서도 말했지만,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고(즉, 순서를 정해 차례대로 질문하고 그에 답하고) 멋진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지고의 진리에 이르는 길이자 일체감을 구현하는 길이다. 일체감을 이상으로 가슴에 품고 나면, 당신과 당신 주위의 사람들 사이에
서 공통점을 찾기가 훨씬 쉬워진다. 당신과 다르게 보이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실천해야 할 시간에 세상의 온갖 문제를 직접 해결하기 위해 끙끙대며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 남보다 먼저 일어나 편안한 삶의 보금자리를 박차고나가 다른 사람을 포용하라.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카르멘 하라 박사는 '더 뷰The view', '굿모닝 아메리카Good morning America', '투데이 쇼Today show' 그리고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 [뉴욕 포스트The New York Post]를 비롯한 미국의 텔레비전 쇼와 언론 매체에 출연하는 유명 인사이며 심리치료학자다.

할리우드 스타에서부터 저명한 정치인들까지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다년간의 경험을 통한 부부 치료나 인지치료 방식이 그녀의 신비한 직관력과 합쳐져 그녀는 세계적인 상담사로 발돋움했다. 또한 세 장이나 음반을 낸 재능 있는 음악가이며, 자신만의 고유한 보석을 디자인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홈페이지 www.CarmenHarra.com과 페이스북 carmen Harra- (Wholeliness)를 방문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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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젖은 설악산, 먹구름 낀 동해

 

 

 

속초에서 2박3일을 보냈습니다.

지인이 콘도를 예약하여 비가 내리는 데도 8월 15일 아침 속초를 향했습니다.

속초는 자주 가는 편이지만,

비에 젖은 설악산을 보기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덕분에 줄 서는 일 없이 케이블카를 탈 수 있었습니다.

비에 젖은 산은 산수화의 풍경으로 보입니다.

겨우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산의 모습이 신령스러워서 바라보기에 좋았습니다.

케이블카가 데려다준 곳은 700m 고지로 1000m를 더 올라가 대청봉에서 바라본다면 발아래 작은 곳이지만,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즐거움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기암의 절경이 마음속 깊이 새겨집니다.

 

 

 

 

 

 

 

 

 

 

 

 

 

 

 

 

 

 

젖은 모습으로 젖은 산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한 장 남겼습니다.

 

 

 

 

 

속초에 오면 늘 울산바위를 카메라에 담는데,

이번에는 비에 젖은 울산바위가 너무 좋습니다.

 

 

 

 

 

속초 앞바다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였습니다.

 

 

 

 

 

 

 

그렇지만 금요일엔 날이 개어서 해수욕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물속에서 파도타기를 얼마나 했는지 얼굴과 가슴 그리고 팔다리가 벌겋게 익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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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지와 사랑의 신간 <법왕 달라이 라마> 중에서

 

 

 

윤리를 상실한 정치, 도덕적 타락을 멈추려면

 

윤리를 상실한 정치
윤리를 상실한 정치는 인간의 복지를 향상시키지 않습니다. 그리고 비도덕적인 삶은 인간을 동물의 수준으로 끌어내립니다. 종교와 윤리는 정치와 상관이 없으며, 종교적인 사람은 은둔자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통념에 저는 의문을 갖습니다. 종교에 대한 그러한 관점은 너무 단편적이어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 그리고 생활 속의 종교의 역할에 대한 적절한 시각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윤리는 종교 수행자뿐만 아니라 정치가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정치가와 법이 도덕 원칙을 망각한다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도덕적 타락을 멈추려면
도덕적 타락을 멈추라고 떠들썩하게 요구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뭔가 해야만 합니다. 이 시대의 정부들은 ‘종교적’ 책임을 짊어지지 않기 때문에, 인도주의와 종교 지도자들이 현존하는 시민, 사회, 문화, 교육, 종교 조직들을 강화하여 인간과 종교 가치를 부활시켜야만 합니다. 필요하다면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새로운 조직을 창설해야 합니다. 희망하건대 그래야만 세계평화를 위해 더욱더 안정적인 기반을 만들 수 있습니다.

 

 


동료 시민들의 고통을 나누세요
사회에 살면서 우리는 동료 시민들의 고통을 나누고, 사랑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적에게도 연민과 관용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요구하는 것과 동일한 수준의 높은 진실성과 희생정신에 입각해 살아야 합니다. 모든 종교의 궁극의 목적은 인류에게 봉사하고 인류를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종교가 단지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목적이 아닌, 모든 존재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쓰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종교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중요한 건 각자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종교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특정한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다른 종교나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중요한 사실은 실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그 구성원들과 조화를 이루며 계속 살아가야 합니다. 실제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 종교의 근본 목표이므로 공동체에서 도망치면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점검과 자기 수정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지속적으로 점검하는 한편, 자기 자신 또한 주의 깊게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된 길로 빠진 걸 발견하면 즉시 수정해야만 합니다.

 

 


물질적 발전의 한계
사람이 우선한다는 전제하에 물질적 발전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모든 방면에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물질적 진보를 영적 성장과 결합하고 조화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 한계 역시 알아야 합니다. 과학과 기술의 형태를 띤 물질주의적 지식이 인간의 행복에 크게 기여해왔지만, 그것이 영구적인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예를 들어 다른 어느 나라보다 기술이 발전한 미국에서도 아직 물질적 고통은 매우 큽니다. 이는 물질주의적 지식이 물리적인 조건에 의존하는 행복만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주의적인 지식은 외적 요소와 구별되는 내적 발전에서 비롯된 행복을 제공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가치 회복
인간의 가치를 회복하고 영구적인 행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세계 모든 나라의 인도주의적 유산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심 어린 호소
지금까지 쓴 내용은 제가 지속적으로 느끼고 있는 생각입니다. ‘외국인’을 만날 때면 저는 언제나 “인류가족 중의 한 사람을 만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이런 태도를 지니면 모든 존재에 대한 애정과 존경이 더욱 깊어집니다. 이러한 자연스런 소망이 세계평화에 작게나마 기여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행성에 사는 인류가족이 더욱더 다정하고, 서로를 아껴주고, 이해심 많은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이 고통을 싫어하고 영구적인 행복을 소중히 여기는 모든 이들을 향한 저의 간절한 호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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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예정론과 자유의지론

 

기독교는 유대교의 실낙원을 형이상학의 색채로 덧칠했다. 아담과 이브가 저지른 개인적인 실수를 보편적이며 절대적 의의가 있는 원죄로 전환시켰다. 원죄는 현실에서 모든 죄악의 근원으로 유전되어 아담의 자손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원죄와 동일하게 절대적 의의를 갖춘 하느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구속만이 원죄를 소멸시킬 수 있다. 그런데 하느님은 전지전능하고 긍휼과 공의가 충만하며 세상을 창조한 창조
주인데 왜 세상에 죄악이 생겼을까?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이 모든 악을 제거하고 싶은데 할 수 없다면, 제거할 수 있지만 제거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제거하기를 원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면, 혹은 제거하기를 원하고 할 수 있다면 등의 상황을 놓고 하나하나 따졌다. ‘신이 원하지만 할 수 없다면’의 경우는 나약해서 신의 모습에 부합하지 않고 ‘할 수는 있는데 원하지 않으면’의 경우는 사악해서 신의 성품과 충돌한다. ‘원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면’의 경우는 악하고 나약해서 신이라 할 수 없다. 악을 제거하기를 원하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이 유일하게 신의 성품과 부합한다. 그렇다면 악행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신은 왜 악행을 없애지 않는 걸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의 본질을 논할 때 악에는 실체성 혹은 본체성이 없고 선이 손상된 것이거나 본체가 손상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하느님이 창조한 만물의 자연 속성은 선한 것이다. 창조물은 현실에 존재하므로 실체라 부른다. 하느님은 결코 악을 창조하지 않았고 선한 창조물에 결함이 생길 때 비로소 악이 되는 것이다. 그는 자유의지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자유의지를 포함하여 하느님이 창조한 모든 것은 선하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건 그것 없이는 인간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며, 자연 사물을 능가하여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로 악행을 저지르도록 내버려두기 위함이 아니라 바른생활을 하게 하기 위함이다. 사람이 자유의지를 남용해 죄를 범하는 건 하느님의 의지가 아니라 사람의 의지다.


사람이 자유의지로 죄를 짓게 될 상황을 하느님이 과연 예견했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만일 하느님이 예견하지 못했다면 전지전능하지 않은 것이고 예견했다면 사람의 죄는 필연이므로 스스로 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의 예견은 강제적이지 않다고 답했다. 하느님은 사람의 죄를 예견하지만 죄의 원인은 사람의 자유의지 때문이지 하느님의 예견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누군가가 죄를 저지를 것이라고 예상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죄를 지으라고 우리가 강요하지 않은 것과 같다. 죄의 원인은 그 사람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예견하는 하느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예견은 죄를 짓게 하려는 데 있지 않고 죄를 징벌하는 데 있다.
하느님의 예견만을 강조하고 죄를 고려하지 않는 관점은 자신의 죄를 하느님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데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유의지를 중간 선으로 보았다. 그래서 자유의지는 덕성, 진리, 지혜 등의 영원한 큰 선으로 향할 수도 있지만, 육체의 즐거움 등 세속적인 작은 선을 탐닉할 수도 있다. 전자로 향하면 미와 덕을 이루지만 후자로 향하면 죄를 범한다. 그래서 자유의지는 인성이 선한가, 악한가를 가늠할 수 있는 최종 근거가 된다. 영혼이 성령으로 가득 차면 반드시 신앙이 견고하게 서고 미덕과 선행이 행위로 드러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론에 따르면 사람의 본성은 처음에는 티 없이 맑았지만 아담과 이브가 타락한 후에는 죄가 있는 사악한 존재가 되었다. 사람은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원죄를 낳았고 그 결과 아담의 자손인 인류는 악한 본성과 죽음 그리고 고통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예정론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론에 따르면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고 얼마 후 어떤 이유로 누구에게는 구원을, 누구에게는 영원한 형벌
을 예정하셨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현실에서 구원받는 근거가 더 이상 자유의지가 아
니라 일종의 신비로운 은혜라고 한다면 현실의 도덕적 노력은 모두 헛수고가 될 것이다. 중세의 예정론은 바로 이러한 이론적 모순과 도덕 폐기의 부정적 결과 때문에 선을 쌓아 구속받는다는 자유의지론으로 점차 대체되었다.
고대 유대교의 전통에는 하느님과 인간이 언약을 세우는 계약 정신이 있다. 『구약성경』에는 하느님이 유대 민족과 최소한 세 차례에 걸쳐 언약하는 계약 관계가 등장한다. 첫 번째는 하느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한 후 의인 노아와 그의 후손에게 세운 무지개 언약이다. 그래서 무지개는 신성 한 언약으로 인간과 하느님의 소통을 상징하게 되었다. 두 번째는 하느님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의 언약으로 할례를 상징물로 삼았다. 세 번째는 유대 민족을 데리고 이집트를 탈출한 영웅 모세와 하느님이 시나이 산에서 세운 언약으로 하느님은 그에게 십계명을 주었다. 십계명은 널리 전승되었다. 유대교뿐 아니라 기독교도 이 계약 정신을 이어받아 널리 알림으로써 서양문화의 뿌리 깊은 전통이 되었다. 계약은 평등을 기본 원칙으로 하는 사회 계약과 인간 계약으로 진화했다. 서양에서 국가와 종교가 민주제를 실시하고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평등을 원칙으로 하는 법치와 신성함이 특징인 기독교의 계약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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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의 육감六感

 

불교에서는 사람에게 여섯 가지 감각이 있다고 말한다. 그중 여섯 번째 감각은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단순히 우리의 마음이다. 듣고, 보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몸의 감각을 느끼는 것 외에 육감, 즉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 이것은 마음의 과정을 보는 독특한 방법이다. 생각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정말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하는가, 아니면 생각이 우리의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것일 뿐인가? 그렇다. 어떤 관심사, 예를 들면 풀어야 할 문제나 답하고자 하는 질문을 향해 의식을 집중한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생각을 일으킨다는 의미에서 우리가 생각하는가, 아니면 생각 자체가 저절로 떠오르는 것인가?
시각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눈이 빛과 접촉해서 전기화학적 신호를 뇌에 보낼 때, 우리가 어떤 것을 ‘보는가’, 아니면 보는 것이 단순히 일어나는가? 특정 시각적 대상에 자신의 주의를 기울인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보고 있는가 보는 것이 단순히 발생하는 것인가? 이는 청각에서도 마찬가지다. 특정 소리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들을 수 있지만, 우리가 실제로 듣고 있는가 듣는 것이 단순히 발생하는 것인가?
실제 경험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어떤 면에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손쉽게 알 수 있다. 이런 현상들은 발생하여 잠시 지속되다가 사라지는 유기적인 현상이다. 그것들은 자아가 없고 비영구적이다. 그것들은 존속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보는 것, 듣는 것,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행하지 않는다. 단지 광경과 소리 그리고 생각이 발생할 뿐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이런 현상들은 그냥 발생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깜짝 놀랄 만한 암시가 담겨 있다. 이것은 어떤 조건이 생길 때마다 생각이 일어남을 의미한다. 이것을 막으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빛이 망막에 닿고 그 신호가 뇌로 전달될 때 보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생각 또한 막을 수 없다. 생각은 그냥 발생한다. 생각은 단지 일어날 뿐이다. 뒤에서 이와 관련된 실험을 할 테지만, 우리는 이런 현상을 다룰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해봤자 소용이 없으며 오히려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중국이란 나라로 곧바로 가려고 애쓰는 사람처럼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노력하면 에너지만 소모될 뿐이다. 진리란 강은 흐르고, 비는 내리고, 나무에는 이파리가 나며, 뇌가 생각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피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이런 일들은 지속될 것이다.
우리에게 근심이 있을 때, 사람들은 선의로 “근심을 당신 마음에서 몰아내세요. 그냥 생각하지 마세요” 하고 말한다. 그러나 생각은 자동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생각하지 않는 것은 쉽지 않다. 실제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때에도 생각은 여전히 일어나며, 더욱이 생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피하려고 한다는 생각까지 더해진다. 그러면 우리는 긴장하게 되고 소모적인 싸움으로 자신을 몰아가게 된다. 우리가 생각을 인정하든 안하든 생각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우리는 자신의 의식을 전쟁터로 몰아넣기만 할 뿐이다.

 

 


생각실험
위와 같은 사실을 생각 실험을 통해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아래 지시를 읽고 눈을 감는다. 눈을 감는 순간 전력을 다해 이 지시를 따른다. 준비되었나? 지시는 다음과 같다.
날아가는 돼지들에 관해 생각하지 마라. 30여 초 뒤 실험을 중단하고 눈을 뜬다. 자 이제 해보자. 다음 두 가지 중 하나가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 대부분이 날아가는 돼지들에 관해 그들이 생각하고 있음을 이내 발견한다. 얼마나 낯선 일인가! 우리는 날아가는 돼지에 관한 생각을 자주 하지는 않겠지만, 우리의 의식 속에 있는 날아가는 돼지들에 관해 생각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더러는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이들은 실제로 자신들이 성공했다고 말한다. 날아가는 돼지들에 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약간 미묘한 문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 해당한다면 자신에게 다음의 간단한 질문을 해보라. 날아가는 돼지에 관해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처음부터 우리의 생각 어딘가에 ‘날아가는 돼지들’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공한 것은 우리의 일부가 날아가는 돼지들이라는 생각을 사용해서 그 돼지들이 우리의 의식 속에 존재하고 있었는지 확인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면 우리가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바로 그것을 참고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어찌 되었든 머릿속 어디엔가 그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 실험에서 성공이란 곧 실패를 의미한다. 실패했다고 해서 기죽을 필요는 없다. 이 실험은 단지 우리의 의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생각하지 말자는 소용없는 짓을 하는 대신 우리는 우리의 의식을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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