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우리나라에 힘이 없는 까닭이다
춘원 이광수에 의하면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는 1878년 무인년 11월 12일 대동강 하류에 있는 여러 섬들 가운데 하나인 도롱섬에서 한 농가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는 ‘흥국興國’(족보상 이름은 안교진安敎晋)의 셋째 아들로 나와 있고, 두산백과와 네이버캐스트 모두에는 11월 9일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잡아야 할 부분들입니다. 안창호 위로는 형 안치호安致昊와 형이 한 명 더 있었고, 아래로는 그가 6세 때 여동생 안신호安信浩가 태어났습니다.
안창호의 호 도산島山은 ‘섬에 있는 산’ 혹은 ‘산 모양의 섬’이란 뜻입니다. 선대는 문성공 안향安珦의 후손으로, 대대로 평양의 동촌東村에서 살았습니다. 공조참의를 지낸 안종검의 17대손으로, 세조 때의 재상 안지귀, 중종대의 정승 안당은 그의 방계 선조들입니다. 안중근, 안공근 일가는 안종검의 형제인 전라도관찰사 증贈 병조참판兵曹參判 안종신의 후손으로 역시 그의 먼 친족입니다. 안창호의 할아버지 안태열安泰烈은 관직이 통덕랑에 머물렀고, 가세는 더욱 기울어져서 아버지 안흥국은 관직을 지내지 못하고 가난한 농부로 생활하였다. 부친이 농토를 구하여 등촌으로부터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으로 이거했습니다. 안창호의 본래 이름은 치삼이었으나, 10세가 되어 학교에 다닐 무렵 창호로 개명했습니다. 부친이 다시 강서군 동진면 고일리로 이사했기 때문에 더러 문헌에 안창호의 적籍이 강서로 적혀 있습니다.
안팡호는 12세 때에 부친을 여의고 할아버지 안태열의 손에 자랐습니다. 8세 때까지 가정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9세에서 14세 때까지는 강서군 심정리에 머물며 저명한 성리학자 김현진金鉉鎭으로부터 한학과 성리학을 수학하며 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때 서당書堂 선배이며 몇 살 손위의 필대은畢大殷을 알게 되어 그로부터 민족주의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1894-95년에 걸친 청국과 일본 사이의 청일전쟁淸日戰爭이 발발한 갑오년은 안창호가 16세 되던 해였습니다. 이광수는 안창호가 “평양에서 일본군과 청군이 접전하는 모습을 보고 또 전쟁의 자취도 보았다. 평양의 주민은 헤어지고 고적과 가옥은 파괴되었다”고 적었습니다. 안창호는 “수년 연상인 필대은과 토의하느라고 야심토록 담론”한 뒤 “타국이 마음대로 우리 강토에 들어와서 설치는 것은 우리나라에 힘이 없는 까닭이다“라고 깨달았습니다.
이때의 일을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일본이 청국에 대한 승전의 결과로 조선의 독립을 주요한 요구로 한 것은, 우선 조선을 청국의 농중籠中(새장 안이라는 뜻으로, 속박되어 자유롭지 못한 처지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에서 꺼내어 놓고 서서히 자기 농중에 넣을 공작을 하려는 혼담인 것은 삼척동자라도 추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궁중에 난입하여 친청 수구정권이 무너지고 새로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세워졌습니다.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중심으로 갑오개혁甲午改革이 추진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갑신정변 주동자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져 박영효, 서광범 등이 귀국하여 복권되었습니다. 특히 1895년 5월 박정양朴定陽 내각이 성립되자 이 내각의 실세였던 내무대신 박영효는 개화당 동지인 서재필徐載弼(1864~1951, 영어명은 필립 제이손Philip Jaisohn)을 외무협판으로 임명하고 귀국을 종용했습니다. 하지만 병원을 개업한 직후일 뿐만 아니라 결혼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귀국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1895년 7월 실각한 박영효가 미국을 방문하여 재차 귀국을 권유하자, 서재필은 같은 해 12월 26일 고국을 떠난 지 10여 년 만에 미국 시민의 자격으로 그리던 조국 땅을 다시 밟았습니다.
명문가에서 성장한 서재필은 김옥균金玉均, 서광범徐光範, 홍영식洪英植, 박영효朴泳孝 등 지도층 자제의 개화파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개화사상을 접했습니다. 1883년 김옥균의 권유로 일본의 도야마戶山 육군유년학교에 입학하여 8개월간 현대군사훈련을 받고 이듬해 5월 졸업하고 귀국 뒤에 궁궐수비대에 배치되었고 고종을 알현하여 사관학교의 설립을 진언했습니다. 그 결과 설립 승낙을 받고 조련국操練局 사관장에 임명되었습니다. 1884년 12월 김옥균이 주도하는 갑신정변甲申政變에 가담하여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으며, 갑신정변 신정부조직에서 병조참판 겸 정령관正領官으로 임명되어 활약했으나 정변의 실패로(3일천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이들 망명객에게 일본이 냉담하게 대하자, 1885년 4월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국내에서는 역적의 가족으로 몰려 부·모·형·아내는 음독자살했고, 동생 재창載昌은 참형되었으며, 아들(2세)은 보살핌을 받지 못해 굶어 죽었습니다.
1890년 6월에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고, 1893년 6월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 면허를 취득한 서재필은 이듬해 미국 철도우편사업의 창설자(G.B. Armstrong)의 딸 뮤리얼 암스트롱Muriel Amstrong과 결혼했습니다. 이광수는 서재필이 “망명 신세로 조국을 떠난 지 십수 년 만에 조국의 독립 완성, 모든 정치를 새롭게 하자는庶政一新 웅장한 계획과 열정을 품고 고국에 돌아왔다”고 적었습니다.
안창호는 열일곱 살 되던 해인 1894년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서 어느 날 정동 교회가 있는 골목을 지나치다가 “배우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먹고 자고 마음대로 공부할 수 있으니 우리 학교로 오라”고 권하는 미국인 선교사를 만난 것을 계기로 예수교 장로회에서 설립한 경신학교敬新學校의 전신인 구세학당救世學堂, 일명 언더우드학당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한편 구세학당 재학 중 송순명의 전도로 장로교에 입교했습니다. 기독교 개종하면서 자신에게 개화사상을 심어준 필대은을 기독교로 전도했습니다. 1896년 구세학당 보통부를 졸업했는데, 상급 학부로 진학하지 않고 보통부의 조교로 취직했습니다. 그는 청일전쟁을 목도한 후 우리 민족에게 힘이 없음을 통감하고 힘만이 독립의 기초요 생명임을 깨달아 이를 신념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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