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맹味盲이란 무엇입니까?

 

 

 

구강oral cavity은 입술부터 목구멍의 인두 시작 부위까지를 말합니다. 하위기관으로 입술lips, 볼점막buccal mucosa, 위,아래 잇몸, 어금니뒤삼각retromolar trigone, 경구개hard palate(단단입천장), 입바닥floor of mouth(혀밑바닥), 구강부 혀oral tongue 등이 있습니다. 입술은 맛을 느끼지 못하지만 감각이 매우 예민한 부위입니다. 입술은 입안의 조직 일부가 밖으로 밀려나간 것으로 입을 꼭 다물면 입술아 안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습니다. 혀는 맛을 보거나 씹는 행위, 음식을 삼키는 일 외에도 발음이나 감정표현 등 여러 기능을 합니다. 혀의 끝 부분에서는 단맛, 혀뿌리에서는 쓴맛, 양쪽 가장자리에서는 신맛을 주로 느끼며, 짠맛은 혀 전체에서 감지합니다. 그렇지만 매운맛은 맛이 아닙니다. 맵다는 것은 아픔을 느끼는 통각痛覺입니다. 사람마다 혀의 모양이나 길이가 다르듯 화학물질에 대한 반응도 달라서 쓴맛을 내는 성분에 대해 그 맛을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맛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미맹味盲이라 합니다.

입안에는 늘 침이 돕니다. 침은 세 개의 침샘, 즉 귀밑샘, 턱밑샘, 혀밑샘에서 분비되는데, 음식을 씹는 저작詛嚼운동이 일어나면 보통 때보다 분비량이 더 많아집니다. 침의 분비에는 귀밑샘과 턱밑샘에서 분비되는 파로틴parotin이라는 호르몬이 작용하는데, 먹은 음식은 침과 섞이지 않으면 넘어가지 않습니다. “침 먹은 지네”란 말이 있을 정도로 사람의 침은 강한 독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특정 종의 세균을 용균하는 라이소자임lysozyme은 세균을 죽이는 항균기능 외에도 치아의 성숙, 혈액의 응고, 발암물질의 독성 제거 등, 그 밖에도 밝혀지지 않은 여러 기능이 있습니다. 그리고 침 속에 들어있는 호르몬은 뼈와 근육의 발달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침은 독사의 독과 같아서 다른 생물에게는 치명적입니다. 사람의 입김에 뱀이 맥을 못 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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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 - 이슬람세계에 대한 오해와 이해
바삼 티비 지음, 유지훈 옮김 / 지와사랑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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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민 교수의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중앙일보)

 

 

2010년 내내 미국 뉴욕에서는 모스크를 포함한 이슬람센터 건립을 놓고 거센 논란이 일었다. 그 장소가 9·11테러로 무너진 세계무역센터(WTC) 자리인 ‘그라운드 제로’ 인근이었기 때문이었다. 공화당의 보수파, 일부 기독교단체, 9.11테러 희생자들은 극렬히 저항했다. 이슬람 ‘종교’가 9·11테러 공격의 배후에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지도자들의 지지와 더불어 이슬람 문화센터 ‘파크 51’은 2011년 9월 문을 열었다.

 ‘파크 51’ 완공은 시리아 출신의 독일인 무슬림 바삼 티비(Bassam Tibi)가 추구하는 시각의 결정체다. 이슬람주의와 이슬람 종교를 분리해서 보자는 것이다. 티비는 정치적 성향의 이슬람주의를 비판하는 대표적인 진보주의 이슬람학자다. 40년에 걸친 그의 진보주의적 학문적 경험과 시각을 녹여 은퇴 직전 집필한 저작이 바로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다.

 티비에 따르면 이슬람교는 비정치적인 무슬림의 생활양식과 세계관을 규정하는 문화적, 그리고 종교적 시스템이다. 반면 이슬람주의는 이슬람교를 순수한 종교로 보지 않고 정치적으로 해석하여 신정정치를 실현하는 것을 무슬림의 사명으로 여기는 정치적 이념이다.

 그는 “이슬람주의는 신앙이 아닌, 정치질서에 중점을 두면서도 단순한 정치가 아니라 ‘종교화한 정치(religionized politics)’라는 점에서 이슬람교가 아니다”라는 ‘위험한’ 주장을 펼친다. 이 때문에 현재까지도 그는 과격 이슬람단체들로부터 살해위협을 받으면서 살고 있다.

궁극적으로 이슬람은 종교로서, 그리고 이슬람주의는 정치이념으로서 추구하는 목적이나 방법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티비가 역설하고 싶은 점이다. 이런 차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서양의 학자, 정치인 그리고 언론인들이 사실상 ‘문명의 충돌’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다고 티비는 강조한다. 이런 저변의 인식 속에서 펼쳐지는 중동 및 이슬람세계에 대한 서방의 정책과 개입은 이슬람주의자들의 활동영역을 넓혀주는 역효과를 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티비는 17억 명의 무슬림들이 물리적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이슬람주의자들 지지하고 있다는 오해에서 문명의 충돌이 초래되고 있다고 꼬집고 있다. 따라서 그는 ‘파크 51’의 개장을 상당히 긍정적인 현상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미국 내 다양한 문화와 종교 안에서 이슬람교가 순수한 종교로 받아들여진 상징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이슬람 테러로 연상되는 문명의 충돌의 구도에서 이슬람 종교가 ‘무죄’ 판결을 받은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티비의 이런 시각에는 허점도 있다. 그는 이슬람주의를 종교를 빙자한 정치세력으로 지나치게 획일화했다. 이슬람주의도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세속온건 성향의 터키의 집권 정의개발당과 과격테러단체 알카에다 모두 이슬람주의를 주창한다. 더불어 이슬람이 종교지도자인 동시에 정치지도자였던 사도 무함마드에 의해 창시됐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정치지도자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Hadith)도 『쿠란』과 더불어 이슬람의 경전이다.

서정민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중동아프리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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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찰의 보물


 

 

 

하루는 붓다가 1,250명의 승려들 앞에서 말없이 꽃 한 송이를 들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말 한마디 없이 서 있기만 했을 뿐이다. 마침내 마하가섭이란 이름의 제자가 붓다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마하가섭은 붓다의 뜻을 이해했다. 그리고 붓다도 그가 이해한 것을 보고 미소로 답했다. 붓다가 말했다.


 

내게는 통찰의 보물이 있는데, 그것을 마하가섭에게 전했다.

 

마하가섭이 이해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는 그 꽃 한 송이가 붓다가 할 수 있는 어떤 말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불법을 가르친다는 점을 이미 깨달았을 것이다. 그것은 한동안은 꽃이었겠지만, 곧 시들고 색이 바래서 쓰레기더미 위로 던져질 것이기에 아무 말 없이 무상함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꽃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우주의 완전한 발현임을 나타내며 조용히 무아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꽃이 항상 변화하고 처음부터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모든 고통이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생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바로 사성제에 대한 깨우침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너무나 직선적이고 지적이다. 간략히 말해 요점은 꽃을 바라보기이다. 마음을 챙기고 꽃을 만지면 얼마나 소중한 발현인지 알 것이다. 더구나 꽃이 잠깐 동안만 핀다는 점과 만물과의 신비로운 상호 연관성이 있다는 점을 안다면 꽃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꽃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꽃을 얼리거나, 비닐로 코팅하고, 사진을 찍거나 책 사이에 끼워둘 필요도 없다. 현재의 순간을 즐기면 충분하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둑카에서 이미 벗어난 셈이다. 마하가섭의 미소가 우리의 입가에도 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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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유교의 성인과 기독교의 하느님

 

최근 몇 년 동안 국내 학술계에서는 하늘과 하느님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관한 논문이 지속적으로 쏟아지면서 주목할 만한 새로운 관점이 많이 제기되었다. 수저우 대학 교수 저우커전(주하진周可眞)은 저서 『유교의 ‘하늘’과 기독교의 ‘하느님’』에서 양자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전면적으로 분석했다. 하느님은 세상을 초월하여 세상 밖에 존재하는 존재자이고, 하늘은 세상 속에 존재하면서 우주를 주재한다. 하느님은 유일한 참된 신이고, 하늘은 많은 신들의 주主이다. 하느님은 인류의 창조자이고, 하늘은 인류의 조상이다. 크리스천에게 실재하는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유교에서 실재하는 하늘은 성인이다.
저우커전은 기독교에서의 하느님은 세상과 분리된, 세상을 초월하여 세상 밖에 존재하는 존재자이며, 철학적으로 말하면 세상의 비존재자라고 말했다. 크리스천은 하늘의 뜻을 결정하고 모든 것을 총괄하며, 보편적인 존재자인 하느님에게 의지하고 귀의한다. 그래서 자신도 세상을 초월한 사람, 세상 밖에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유교에서의 하늘은 세상 속에 있는 객관적인 존재다. 공자와 맹자는 하늘이 창천으로서 만물의 성장과 사계절의 변화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동중서는 하늘을 창천 외에 춘하추동의 사시, 낮과 밤의 주야, 화·수·목·금·토 다섯 가지 물질의 오행과 산천 등을 포함한 자연으로 보았다. 동중서의 하늘은 그야말로 자연계 전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하늘이 땅의 대칭 개념으로 사용될 때가 종종 있는데 이때도 창천을 가리킨다. 그래서 어디까지가 하늘의 범위인지에 대해서는 불명확하지만 하늘의 근본 의미는 공자와 맹자가 말한 하늘과 상당히 일치한다.
훗날 유교가 믿었던 하늘 역시 자연 하늘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소박한 유물론자로 분류되는 사람과 유심론자로 분류되는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주희는 “푸르디푸른 것을 하늘이라 한다”, “천지가 처음 생겼을 때는 단지 음양의 기운뿐이었다. 이 기운이 운행하여…… 맑은 기운이 하늘이 되고, 해와 달이 되며, 항성과 행성이 되고”, “하늘은 기운으로서 땅의 형질에 의지하고, 땅은 형질로서 하늘의 기운에 매달려 있다. 하늘은 땅을 감싸고 있기에 땅은 하늘의 외물일 뿐이다”라고 했다. 남송의 유학자 육구연도 “하늘은 높아서 해, 달, 항성, 행성이 매달려 있고 음과 양 그리고 추위와 더위가 운행하니 만물이 생성되었구나. 땅은 두터워서 화산과 악산을 싣고 있으나 무겁지 않고 강과 바다를 수용하고 있으나 하나도 새지 않으니 만물이 땅에 실려 있는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천지를 벗어난 만물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유교는 자연 하늘을 인격화해서 천하 만물의 조상으로 삼았다. 유교의 특징 중 하나는 하늘을 의지와 도덕, 초월적인 힘을 지닌 지고지상한 우주의 주재로 삼아 숭배한 점이다. 이러한 특징은 한나라와 송나라의 유교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이학의 대가인 정자는 “만물은 하늘을 근본으로 삼고 사람은 조상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동지에 하늘에 제사하면서 선조를 배향하니”라고 말한 바 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하늘
숭배의 가장 뚜렷한 증거이며, 선조 제사와 함께 하늘 제사를 지내는 것은 유교가 하늘을 조상신으로 섬긴다는 가장 유력한 증거다. 자연숭배와 선조숭배를 결합한 이러한 방식은 유교가 종교로서 자연종교(원시종교)의 의식과 유사한 성격임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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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우리나라에 힘이 없는 까닭이다

 

 

 

 

춘원 이광수에 의하면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는 1878년 무인년 11월 12일 대동강 하류에 있는 여러 섬들 가운데 하나인 도롱섬에서 한 농가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는 ‘흥국興國’(족보상 이름은 안교진安敎晋)의 셋째 아들로 나와 있고, 두산백과와 네이버캐스트 모두에는 11월 9일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잡아야 할 부분들입니다. 안창호 위로는 형 안치호安致昊와 형이 한 명 더 있었고, 아래로는 그가 6세 때 여동생 안신호安信浩가 태어났습니다.

안창호의 호 도산島山은 ‘섬에 있는 산’ 혹은 ‘산 모양의 섬’이란 뜻입니다. 선대는 문성공 안향安珦의 후손으로, 대대로 평양의 동촌東村에서 살았습니다. 공조참의를 지낸 안종검의 17대손으로, 세조 때의 재상 안지귀, 중종대의 정승 안당은 그의 방계 선조들입니다. 안중근, 안공근 일가는 안종검의 형제인 전라도관찰사 증贈 병조참판兵曹參判 안종신의 후손으로 역시 그의 먼 친족입니다. 안창호의 할아버지 안태열安泰烈은 관직이 통덕랑에 머물렀고, 가세는 더욱 기울어져서 아버지 안흥국은 관직을 지내지 못하고 가난한 농부로 생활하였다. 부친이 농토를 구하여 등촌으로부터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으로 이거했습니다. 안창호의 본래 이름은 치삼이었으나, 10세가 되어 학교에 다닐 무렵 창호로 개명했습니다. 부친이 다시 강서군 동진면 고일리로 이사했기 때문에 더러 문헌에 안창호의 적籍이 강서로 적혀 있습니다.

안팡호는 12세 때에 부친을 여의고 할아버지 안태열의 손에 자랐습니다. 8세 때까지 가정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9세에서 14세 때까지는 강서군 심정리에 머물며 저명한 성리학자 김현진金鉉鎭으로부터 한학과 성리학을 수학하며 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때 서당書堂 선배이며 몇 살 손위의 필대은畢大殷을 알게 되어 그로부터 민족주의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1894-95년에 걸친 청국과 일본 사이의 청일전쟁淸日戰爭이 발발한 갑오년은 안창호가 16세 되던 해였습니다. 이광수는 안창호가 “평양에서 일본군과 청군이 접전하는 모습을 보고 또 전쟁의 자취도 보았다. 평양의 주민은 헤어지고 고적과 가옥은 파괴되었다”고 적었습니다. 안창호는 “수년 연상인 필대은과 토의하느라고 야심토록 담론”한 뒤 “타국이 마음대로 우리 강토에 들어와서 설치는 것은 우리나라에 힘이 없는 까닭이다“라고 깨달았습니다.

이때의 일을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일본이 청국에 대한 승전의 결과로 조선의 독립을 주요한 요구로 한 것은, 우선 조선을 청국의 농중籠中(새장 안이라는 뜻으로, 속박되어 자유롭지 못한 처지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에서 꺼내어 놓고 서서히 자기 농중에 넣을 공작을 하려는 혼담인 것은 삼척동자라도 추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궁중에 난입하여 친청 수구정권이 무너지고 새로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세워졌습니다.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중심으로 갑오개혁甲午改革이 추진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갑신정변 주동자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져 박영효, 서광범 등이 귀국하여 복권되었습니다. 특히 1895년 5월 박정양朴定陽 내각이 성립되자 이 내각의 실세였던 내무대신 박영효는 개화당 동지인 서재필徐載弼(1864~1951, 영어명은 필립 제이손Philip Jaisohn)을 외무협판으로 임명하고 귀국을 종용했습니다. 하지만 병원을 개업한 직후일 뿐만 아니라 결혼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귀국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1895년 7월 실각한 박영효가 미국을 방문하여 재차 귀국을 권유하자, 서재필은 같은 해 12월 26일 고국을 떠난 지 10여 년 만에 미국 시민의 자격으로 그리던 조국 땅을 다시 밟았습니다.

명문가에서 성장한 서재필은 김옥균金玉均, 서광범徐光範, 홍영식洪英植, 박영효朴泳孝 등 지도층 자제의 개화파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개화사상을 접했습니다. 1883년 김옥균의 권유로 일본의 도야마戶山 육군유년학교에 입학하여 8개월간 현대군사훈련을 받고 이듬해 5월 졸업하고 귀국 뒤에 궁궐수비대에 배치되었고 고종을 알현하여 사관학교의 설립을 진언했습니다. 그 결과 설립 승낙을 받고 조련국操練局 사관장에 임명되었습니다. 1884년 12월 김옥균이 주도하는 갑신정변甲申政變에 가담하여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으며, 갑신정변 신정부조직에서 병조참판 겸 정령관正領官으로 임명되어 활약했으나 정변의 실패로(3일천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이들 망명객에게 일본이 냉담하게 대하자, 1885년 4월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국내에서는 역적의 가족으로 몰려 부·모·형·아내는 음독자살했고, 동생 재창載昌은 참형되었으며, 아들(2세)은 보살핌을 받지 못해 굶어 죽었습니다.

1890년 6월에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고, 1893년 6월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 면허를 취득한 서재필은 이듬해 미국 철도우편사업의 창설자(G.B. Armstrong)의 딸 뮤리얼 암스트롱Muriel Amstrong과 결혼했습니다. 이광수는 서재필이 “망명 신세로 조국을 떠난 지 십수 년 만에 조국의 독립 완성, 모든 정치를 새롭게 하자는庶政一新 웅장한 계획과 열정을 품고 고국에 돌아왔다”고 적었습니다.

안창호는 열일곱 살 되던 해인 1894년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서 어느 날 정동 교회가 있는 골목을 지나치다가 “배우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먹고 자고 마음대로 공부할 수 있으니 우리 학교로 오라”고 권하는 미국인 선교사를 만난 것을 계기로 예수교 장로회에서 설립한 경신학교敬新學校의 전신인 구세학당救世學堂, 일명 언더우드학당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한편 구세학당 재학 중 송순명의 전도로 장로교에 입교했습니다. 기독교 개종하면서 자신에게 개화사상을 심어준 필대은을 기독교로 전도했습니다. 1896년 구세학당 보통부를 졸업했는데, 상급 학부로 진학하지 않고 보통부의 조교로 취직했습니다. 그는 청일전쟁을 목도한 후 우리 민족에게 힘이 없음을 통감하고 힘만이 독립의 기초요 생명임을 깨달아 이를 신념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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