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사단에는 어려운 문제가 일어났다
1921년 5월 임시정부의 노동국 총판을 사임한 안창호는 여운형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에 참여했습니다. 국민대표회의에 참여하면서 안창호는 1922년 이광수, 주요한 등에게 연락 경성부에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와 평양에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의 발족을 지시했습니다. 그는 단체의 기준과 회원자격, 단체명까지 구체적으로 이광수와 주요한 등에게 지시하고 거사자금을 보내 설립에 착수하게 했습니다.
한편 미국 내 국민회에서는 이승만파와 안창호파, 박용만파간 분쟁이 격화되면서 하와이 지방 국민회 총회가 해체되었습니다. 안창호는 한발 물러섰고, 이승만 계열은 대한인동지회를, 기타 일부는 하와이 한인 교민단을 조직하고, 안창호 계열만이 대한인국민회에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1923년 임시정부의 개조파와 창조파 대표자 124명이 참석한 가운데 임시정부의 존폐 여부를 논하는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으나 여기서도 창조파와 개조파의 의견차이가 좁혀지지 않아 5월 15일 국민대표회의는 63회 회의에서 결렬, 폐회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임시정부 내무부장 김구는 임정 개조파와 창조파를 상해에서 추방, 해산을 명했으나 안창호에게는 불이익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안창호는 1924년에 북중국 만주방면을 시찰, 여행하며 이상촌理想村 후보지를 탐사하고 난징에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한서문漢西門 안 쌍석고雙石鼓에 집을 세내어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설립했습니다. 동명학원은 구미와 중국의 대학에 유학하려는 뜻을 품고 본국으로부터 오는 청년들을 위해 어학語學, 덕육德育 기타 준비 교육을 하기 위한 기관이었습니다. 안창호는 학생들에게 민족혼과 어학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학교를 설립했는데, 초기에는 수십 명 정도에 불과했으며 흥사단 단원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이 바른 교육을 받으면 민족에게 보탬이 되겠지만 반대로 그들이 불행하게 되면 외국에 있는 동안에도 국내에 들어가서도 민족의 힘을 감손하는 큰 해가 될 것이므로 이들 청년들을 바른 사상으로 지도하고 또 학업의 편의를 돕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안창호는 학생들에게 국민으로서의 책임감, 협동생활의 원칙, 민족지도자로서의 자세, 착실주의着實主義 등을 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안창호는 난징과 소주蘇州의 중간에 있는 진강鎭江에 주목했습니다. 진강은 양쯔강 연안의 도시로 기후와 풍토가 좋았습니다. 그는 진강 부근에 모범 농촌도시를 건설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독립이 회복되기까지는 재외 동포가 환국하는 것이 심히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만주, 러시아령, 북아메리카, 하와이 등지에 흩어져 사는 수백만 명의 민족이 본국의 문화와 연락이 되지 않은 채 여러 해 혹은 여러 세대를 간다면 그들은 아주 그들이 거주하는 나라의 문화에 화하여서 한민족의 정신을 잃어버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야만몽매野蠻蒙昧한 인종으로 퇴화하여버릴 우려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국보다 높은 문명을 가진 북아메리카나 하와이 같은 지역에 사는 동포는 국혼國魂을 상실하기가 쉽고, 만주나 러시아령 같이 모국의 문화보다 낮은 지역에서 빈궁한 생활을 하는 동포는 모국의 문화를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토착민보다도 정도가 떨어져서 무산무지無産無知)한 유랑민流浪民을 이룰 근심이 있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재외 동포로 하여금 이런 두 가지 불행에 빠지지 않게 하는 길을 그는 해외에 한 곳, 재외 한족의 정신적, 문화적 중심지를 건설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이 참으로 중심지가 되려면 경제적으로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안창호는 “물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매양 말했습니다. 성현이나 지사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일반 대중은 자신의 재물이 있는 곳에 늘 마음이 끌린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는 무슨 회를 조직할 경우에도 거기 거액의 입회금을 내고, 정기적으로 의무금도 내어서 그 회에 자신의 재물이 들어있을 때에 비로소 그 단체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고, 그 단체가 망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간절하여져서 이것이 망하지 않고 잘되기를 힘쓸 생각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흥사단 입단 문답에서도 그는 입단금과 회비를 강조했습니다. 진강에 한민족의 중심지를 건설한다고 하면 될 수 있는 대로 다수 동포의 출자로 토지를 매입하고, 가옥을 건축하고, 생산기관, 금융기관까지 만들어 도시가 재외 동포의 정신적 중심지가 되게 하는 것이 안창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진강이나 난징 혹은 화華北이나, 중국인의 문화와 산업이 상당히 발달된 도시의 근방에 기지를 택하여, 중국인 도시의 모든 시설과 편의를 이용하면서, 한편으로 한민족 자신의 독특한 문화와 산업기관도 세워서 중국인에게 대해서는 호조호익互助互益의 친선한 관계를 수립하기를 바랐습니다.
북아메리카에 수십 년 동안 살면서 상당한 재산을 만들고 자녀를 가진 동포들 가운데 안창호의 이런 계획에 공명하여 출자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국에는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동포가 수만 명 집단적으로 사회를 이뤄 우리 문화 속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이런 요구에 응할 수 있는 국토는 중국 외에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안창호가 이상향理想鄕 기지로 주목한 곳은 난징, 진강 외에도 북쪽의 호로도葫蘆島, 금주錦州 경내, 만주의 경박호鏡泊湖 연안, 동경성東京城 부근 등지였습니다. 그는 이 여러 지방들을 몸소 답사하여 그 산천 풍토를 보았습니다. 지미地味(土理), 풍경, 마실 물까지 상세히 조사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정치적 사정으로 인해 그의 계획은 마침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1931년 9월 18일 류타오후사건柳條湖事件을 빌미로 시작된 일본 관동군關東軍의 중국 만주지방에 대한 침략전쟁인 만주사변滿洲事變으로 만주와 장성 부근은 물론 일본 제국 군대의 상해 상륙으로 진강 기타 장강 연안도 안전지대 되지 못했습니다. 류타오후사건이란 1931년 9월 18일 일본 제국의 관동군이 중국의 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벌인 자작극이었습니다. 만주 침략을 위한 작전의 시나리오는 관동군 작전 주임참모인 이시하라 간지, 관동군 고급 참모인 이타가키 세이시로, 관동군 사령관인 혼조 시게루 등 단 세 명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이들을 중심으로 ‘만몽영유 계획’이 모의되었습니다.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관동군은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30분경 류탸오후에서 만철 선로를 스스로 폭파하고 이를 중국의 장쉐량 지휘하의 동북군 소행이라고 발표한 후 관동군은 만주 침략을 개시했습니다.
만주사변으로 인한 이상향 건설 계획의 좌절은 안창호에게 있어서는 매우 마음 아픈 일이었습니다. 그가 거의 10년을 두고 생각하고 또 각지로 편력하면서 흙과 물을 맛보면서 그리던 꿈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 것이었습니다. 후에 그는 본국으로 잡혀 돌아와서 4년 징역을 치르고 출옥해서도 이상향 건설 계획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계획은 해외의 그것과는 성격이 달랐습니다.
안창호는 1924년에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동포들은 그를 매우 반겼습니다. “선생님, 다시는 북미를 떠나지 마시오. 선생님이 떠나시면 또 우리 동포들의 마음이 떨어지고 헷갈리오.” 이것은 동포들의 눈물겨운 진정이었습니다.
흥사단에는 어려운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이 마당에 수양은 다 무엇이냐. 있는 힘을 다해서 곧 독립 운동을 시작하자” 하는 일파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광수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나도 흥사단은 단으로서는 나서지 아니하였다. 단우들이 개인적으로 나섰다. 도산을 비롯하여 미국에서나 상해에서나 다수의 흥사단우가 요인으로서 독립 운동에 힘을 썼다. 그러나 흥사단으로서는 그 비정치성을 끝까지 지킨 것이었다. 그래서 흥사단의 기본 적립금과 준비 적립금에는 손을 대지 아니한 것이었다.
흥사단의 참 주지主旨를 깨닫지 못한 일부 단우들이 이를 불만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정치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할 것이라고 주장하여 자칭 신파라 하고, 흥사단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다수를 완고한 수구파라 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 수양이란 유치한 청소년이나 몽매한 무식쟁이들이 할 일이고, 자기들과 같이 대학을 나온 지식층에게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안창호는 소위 신파를 운운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일찍이 상해에서 장문의 서한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서한의 내용은 “우리 민족의 유일한 목적은 안전한 독립 국가를 건설하여 이것을 빛나게 유지, 발전함이니, 이 밖에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없다 하고 그러하기 위하여 우리는 건전한 인격을 수양하고 신성한 단결을 조성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고는 저것이 있을 수 없다는 인과 관계를 역설하고, 그러므로 우리 흥사단의 인격, 단결, 수양 운동이 곧 유일무이한 독립 운동이요, 또 모든 정치 운동의 모체라고 하였다.”
안창호는 수양이 곧 독립이라는 사상을 서한에서 밝혔습니다. 그의 서한은 1936년 수양동우회사건 검거 중에 발견되어 수양동우회 유죄의 가장 큰 증거물이 되었습니다.
안창호는 독립 국가의 건설을 건축에 비유하여 기초를 잘 다지지 못한 건축은 오래 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가 말한 기초란 수양된 국민, 국민의 자격을 의미합니다. 흥사단 약법의 목적에 ‘우리 민족 전도대업前途大業의 기초를 준비함으로 목적함’의 ‘기초’가 바로 그것을 의미합니다. 건축에 대한 안창호의 또 다른 비유는 건축과 재목에 관한 것입니다. 재목이 없이 아무리 설계를 잘 하더라도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재목을 구할 것이 없으면 씨를 심어 조림造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양이란 바로 기초이며 조림인 것입니다. 그래서 재목이 없더라도 건축을 짓자는 말에 안 된다면서 그것은 오직 공론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100년을 자란 뒤에야 비로소 재목이 된다 하면 오늘 심은 나무는 100년 후에는 재목이 될 것입니다.
안창호는 이런 점을 동포들에게 설명 강조하고 자신이 언제 미국을 떠나더라도 단에 동요가 있지 않도록 동지가 서로 다스리는 정신을 역설했습니다. 이렇게 흥사단을 정비한 후 안창호는 13개월간의 방문을 마치고 1926년 4월 22일 미국을 떠나 상해로 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