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의 대한민국 독립자금과 시사책진회
임시정부는 실력양성론과 외교독립론이 대립하면서 침체에 빠졌습니다. 1921년 독립 운동전선 내부에서는 임시정부의 활동과 전체 독립 운동의 방향전환을 논의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 개최 문제가 제기되었고, 논의는 1922년 5월 국민대표회주비회國民代表會籌備會가 국민대표회의 ‘소집선언서’를 발표하고 임시의정원에 후원을 요청하는 ‘인민청원안’을 제출함에 따라 구체화되었습니다. 1922년 8월에는 강석훈, 이한호, 박태열, 김성득, 방달성, 박진, 정유린, 박관해, 최찬학, 장덕진 등이 연서하여 국민대표회주비회 후원을 약속하는 선언문을 발표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한 민족의 대동단결을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임시의정원에서는 의원 상호간 심한 의견 차이만 노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에 입당하여 활동한 한형권韓馨權이 레닌으로부터 독립자금을 받아온 20만루블 사용 문제까지 겹치면서 독립 운동전선 내부에서는 심각한 정쟁과 파쟁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이동휘는 김립金立과 함께 1919년 5월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북간도지방에서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을 조직하여 활동한 영향력을 배경으로 군무총장을 지내고, 1920년에는 국무총리를 지냈습니다. 하지만 안창호, 이승만, 여운형 등과 독립 운동을 전개하는 방법론을 두고 대립했습니다. 이동휘는 오직 무력으로 일본군을 격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무장으로서 일본군과 싸우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20년 소련에서 독립 운동 자금으로 200만 루블을 제공할 의사를 전해오자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한형권, 여운형, 안공근을 파견하기로 결정했지만 이동휘는 자의적인 결정으로 한형권만 모스크바로 파견했습니다. 이동휘는 한형권이 레닌으로부터 1차로 받아온 60만 루블 가운데 40만 루블을 김립에게 전달하여 좌익 혁명가들의 정치활동비로 쓰게 했지만 이동휘의 개입으로 그 돈이 고려공산당에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그 돈이 고려공산당에도 전달되지 않아 임지정부에선 내분이 일어났습니다. 이승만이 이동휘를 공박했고, 이동휘는 이일 때문에 사퇴했습니다. 이동휘는 이미 사퇴를 준비하고 있었고 자금을 빼돌리기 위해 국무총리직을 유지했을 뿐이었다는 것이 훗날 알려졌습니다. 김립은 임시정부 경무국장 김구에 의해 암살되었고 이동휘가 이끌던 독립군단은 1921년 6월 28일 연해주沿海州의 자유시自由市 이만에서 러시아 적군敵軍들과 싸운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 혹은 흑하사변黑河事變에서 그가 믿었던 적군들에 의해 비참한 말로를 맞고 말았습니다. 이동휘는 시베리아에서 병사했습니다.
한형권은 1922년 11월 모스크바에서 2차로 나머지 20만 루블을 받아 윤해尹海와 함께 상해로 돌아왔습니다. 이 돈이 1923년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사용되었는데, 이로 인해 임시정부와 고려공산당 사이에 알력이 발생했습니다. 김립이 일부 자금을 개인적으로 사용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결국 김립은 임시정부에 반환하라고 주장한 오면직吳冕稷과 노종균盧宗均에 의해 상해에서 암살되었습니다. 이 일로 임시정부에 내분이 발생했고 고려공산당도 이르쿠츠크파, 상하이파로 갈라지게 되었으며, 레닌이 약속한 나머지 140만 루블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독립 운동전선 내부에서 정쟁과 파쟁이 일어나자 현안으로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성된 것이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입니다. 시사책진회의 회원은 임시정부 및 독립 운동 단체들의 주도적인 인물들로, 안창호를 포함하여 이동녕, 김구, 최일, 노백린, 여운형, 민충식,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김덕진, 최일, 한진교, 최여식, 조완, 홍진, 차리석, 정영준, 원세훈, 김인전, 연병호, 김철, 유기준, 안정근, 남형우, 김용철, 오영선, 이기룡, 손정도, 이탁, 도인권, 최대윤, 민병덕, 조상섭, 이진산, 이유필, 중숙, 옥관빈, 이필규, 양기하, 양헌, 현순, 천세헌, 장붕, 김홍서, 곽영, 윤기섭, 김현구, 김만겸, 심상완, 최준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상호간 노선의 차이가 크고, 이해관계에 따라 대립이 심각했을 뿐만 아니라 도중에 임시의정원 의원과 이승만 옹호파들이 전원 탈퇴함으로써, 시사책진회는 1922년 8월 11일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해체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