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이 무엇입니까?

 

 

우울증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개인적인 상담이 전제가 되어야 치료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는 자신의 우울증 증세를 알지 못하고 생활하는 가운데 몸의 기능이 상당히 떨어진 뒤에야 그 증세를 호소하기도 합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너무 예민해서 우울증이라고 말할 만하지 않는 데에도 자신에게 우울증 증세가 있다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일시적인 우울한 감정은 누구에게나 생기는 것인데 이를 우울증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의지를 새롭게 해서 우울한 감정을 없앨 수 있다면 그건 우울증이 아닙니다.

우울증은 일시적인 우울한 감정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울증의 원인은 다양한데 만약 생화학적 혹은 유전적인 요인 때문이라면 전문가의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생화학적 요인이란 신경전달 물질이라 불리는 뇌 속의 물질이 감정 등의 뇌 기능과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을 말하며, 호르몬 불균형도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울증을 가진 가족력도 선천적인 요인입니다. 우울증의 가장 심한 증세는 자살을 생각하거나 실제로 자살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후천적인, 즉 환경적 요인이 우울증을 야기한 것이라면 상담을 통해서 치유될 수 있습니다. 당연히 환경을 바꾸거나 환경에 대한 인식을 다르게 가지는 것으로 극복하는 것입니다. 환경적 요인으로 가장 일반적인 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 경제적인 문제, 그리고 강한 스트레스입니다. 정리하면 선천적인 원인은 정신과의사의 치료가 반드시 필요하고 후천적인 원인은 스스로 극복할 수 있거나, 증세 심할 경우에는 심리치료를 통해 완치된다는 말입니다.

우울증의 증상은 삶에 대한 의욕 상실로 시작됩니다. 일을 끝까지 마치지 못하는데, 학생은 학업에서 직장인은 과업에서 정상적으로 일을 하지 못하고, 새로운 일이나 도전에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이것이 심화되면 수면장애가 일어나 아침까지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고 도중에 자주 깨고, 식욕감퇴로 체중이 줍니다. 이와 반대되는 증상도 있는데 오히려 식욕이 증가하고 수면이 길어집니다. 사람의 성격에 따라서 증상에 차이를 나타냅니다.

우울증의 전형적인 증상은 불안입니다. 90퍼센트의 우울증 환자가 호소하는 것이 불안입니다. 마음이 조마조마해지고 걱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증세를 나타내는데, 이것이 6개월 이상 지속되면 불안장애를 의심해야 합니다. 불안장애가 생기면 숙면을 취하기 어려워지고 쉽게 피곤을 느끼며 몸이 지치게 됩니다. 온몸이 지속적인 긴장으로 여기저기에서 통증을 느끼게 됩니다. 성욕이 저하되는 건 물론입니다.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인지의 기능 또한 저하될 수밖에 없으므로 정상적인 일을 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지속됩니다. 몸에서 통증을 느낀다지만 내과적 검사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정신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울증은 한 마디로 감정, 생각, 몸의 상태, 그리고 행동 등에 변화가 생긴 질환입니다.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이 전형적인 증세입니다. 남들은 대수롭지 않게 느끼거나 생각하는 것을 혼자만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몸의 상태와 행동은 그 후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감정과 생각을 다스리면 몸의 상태와 행동에서 변화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상담을 요하는 이유는 감정과 생각의 변화에 원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생긴 억압이 자신도 모르게 현재의 감정과 생각에서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상담을 통해 본인 스스로가 깨닫지 못하는 과거의 억압을 발견하여 본인으로 하여금 극복하게 해서 다시금 정상으로 돌아오게 만듭니다. 우리말로 하면 화병입니다. 화의 근원이 몸에서 싹텄는데 이를 미처 알지 못하고 품고 살아오다가 자신도 모르게 화가 계속 치미는 것입니다. 불안은 화를 억제하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알면서 겪는 고통인 것입니다. 내성적인 성격의 사람들이 이런 고통을 받습니다. 남에게 화를 내거나 자증을 부리지 못하는 내성적인 성격과 매사에 완벽을 기하려는 소심한 사람들이 불안의 증세를 자주 겪습니다.

자신에게 우울증 증세가 있다는 것을 아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침저녁으로 기분에 변화가 있지만, 대체로 하루 종일 슬픔을 느끼거나 삶에 공허함을 느낀다. 눈물이 나오고 주변 사람들이 이를 알아챈다. 하루의 활동에 흥미가 생기지 않고 주변 사람들도 이를 관찰한다. 특별히 더 먹거나 적게 먹지 않는데도 체중의 늘거나 준다. 한 달 동안에 5% 이상의 체중에 변화가 나타난다. 매일 식욕이 감퇴되는 것을 느낀다. 자다가 자주 깨거나 지나치게 잠을 많이 잔다. 거의 매일 흥분의 감정을 느끼거나 불안한 감정이 생기고 주변 사람들이 이를 알아챈다. 거의 매일 피로는 느끼며 일에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꼭 집어서 말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을 비난하거나 책임을 묻는다는 생각이 든다. 남의 말에 과도하게 반응한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일에서 결정할 때에 망설이며 이를 주변 사람들이 관찰한다. 반복적 자살을 생각하거나 자살방법을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주변 사람들이 이를 관찰한다.

이상과 같은 증세를 하나쯤 나타내는 것은 우울한 감정입니다. 그렇지만 다섯 가지 혹은 그 이상을 증세로 나타낸다면 우울증이 확실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관찰을 운운한 것은 우울증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어서 주변 사람들이 먼저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본인이 극구 숨기려든다면 주변 사람들도 모르게 우울증을 겪을 수 있습니다. 만약 자신이 사람들과 어울릴 때와 혼자 있을 때의 기분이 180도 다르다는 것을 안다면 이는 자신의 감정을 주변 사람들에게 숨기고 있는 것입니다. 최소한 가까운 친구에게는 속에 있는 감정이나 생각을 털어놓을 수 있어야 돌파구가 생기는 것입니다. 화가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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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나라에 안창호라는 좋은 지도자가 있으니”

 

 

1927년 1월 길림에 도착한 안창호는 독립 운동가들을 만나 유일당 결성의 당위성을 주지시키고 1월 27일에 길림성 조양문朝陽門 밖 대동공창大同工廠에서 의사 나석주羅錫疇의 추도회 겸 독립 운동 지도자들 5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조선독립 운동의 과거와 현재’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습니다. 이때 들이닥친 중국 경찰에 체포되어 20여 일 만에 풀려난 이른바 길림대검거사건吉林大檢擧事件을 겪었습니다. 집회를 사전에 탐지한 일본 경찰이 중국 헌병사령관 양위팅揚宇霆에게 한국의 공산당이 불법집회를 하고 있으니 붙잡아 일본에 인도해줄 것을 요구했고, 이 말을 곧이들은 양위팅은 길림독군서吉林督軍署에 명하여 한국인을 잡을 것을 지시했습니다. 길림독군서는 헌병과 경찰 수백 명을 동원하여 길림성내 한국인 가옥을 수색하는 한편, 집회장을 포위하고 안창호를 비롯하여 300여 명을 잡아 경찰서에 투옥시켰습니다. 그 뒤 수감된 한국인 중 독립 운동자 50여 명을 고른 뒤 나머지는 석방했습니다. 일본당국은 50여 명을 일본 경찰로 인계해주도록 중국 당국에 강요했지만, 중국이 거부함으로써 중일간에 외교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중국 신문에 보도됨으로써 국제적으로 여론화되었습니다.

20일 만에 석방된 후에도 안창호는 만주 각지를 순회하며 대동단결을 호소했으며, 4월 1일에는 길림의 교민들과 함께 농민호조사를 결성하는 한편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3부 대표들이 모인 이른바 ‘신안돈회의’에 직접 참여하여 만주지역 유일당 조직 결성을 위한 준비모임을 주도했습니다. 불굴의 의지와 정력으로 민족통합과 대동단결을 주선해나간 안창호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북경에 이어 상해, 광동, 무한, 남경 등지에 차례로 한국독립당촉성회가 결성되었습니다. 중국인에게 구축당하는 비참한 한인들의 실정을 돌아본 안창호는 1928년에 들어와 중국인과 항일협력전선을 결성해 공동투쟁 할 것을 역설했으며 아울러 자신의 대공주의大公主義 사상을 정립해나갔습니다.

안창호는 어디에 있으나 그렇지만은 북경에 체류할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늙은이도 있고 젊은이도 있었으나 젊은이가 더 많았습니다. 그는 누가 찾아오거나 만나보고, 만나면 온화하고 공손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접대했습니다. 찾아온 사람이 무슨 문제로 가르침을 청하기 전까지 안창호는 결코 훈계하거나 충고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어리석은 말이라도 끝까지 다 들었으며, 남이 말하는 중에 꺾는 일이 없었습니다. 안창호는 모든 사람의 개성을 존중했습니다. 그는 누구에게 핀잔을 주는 일이 없었습니다. 비록 어린 사람이라도 하고자 하는 말을 다 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는 남이 하는 말을 다 들은 뒤에 자신의 의견을 말했습니다. 그대는 성의를 다하여 진실한 의견을 말했고 조금도 저편의 뜻을 받아들여 비위를 맞추는 일은 없었습니다. 안 될 일은 안 된다고 하고 안 믿는 말은 안 믿는다고 바로 말했습니다. ‘글쎄’ 같은 어름어름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말을 안창호는 사용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의 말은 늘 분명하게 긍정이거나 부정이었습니다.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도산을 찾아왔던 사람은 반드시 무엇을 얻어가지고 갔다. 충고도 훈계도 없었건만 회화 중에 언제인 줄 모르게 듣는 자에게 무슨 소득을 주어서, 한번 도산을 만나고 나면 뒤에 잊히지 아니하는 무엇이 남았다. 그것은 그의 모든 말이 정확한 지식과 움직이지 않는 신념과 또 한마디 한마디가 애국 애인의 진정에서 나오는 까닭이었다.

 

천진 남개대학 총장 장백령張伯岺은 안창호와 회견한 뒤 조선 사람을 만나면 “그대의 나라에 안창호라는 좋은 지도자가 있으니 부럽다”고 안창호의 인격과 식견을 찬양했습니다.

북경에 체류할 때 모씨가 안창호를 위해 거액을 구해주마고 말했습니다. 모씨는 안창호를 매우 숭배했으며 그에게 자금만 있으면 나라 일이 잘 될 것으로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씨는 수단이 놀라워서 몇 만, 몇 십만의 돈을 수월하게 만드는 위인이었습니다. 안창호는 그가 정당한 일을 하는 인물이 아니라 일종의 협잡꾼인 줄 알기 때문에 그에게 “나라 일은 신성한 일이오. 신성한 일을 신성치 못한 재물이나 수단으로 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오” 하고 말했습니다.

안창호는 재물의 출처를 적실히 알기 전에는 그 재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가 레닌 정부의 돈을 받기를 반대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독립 운동 당시에도 안창호가 부자를 협박하거나 꾀어서 돈을 내게 하는 일을 끝내 반대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안창호의 신념에 의하면 민족 운동을 하는 자가 도덕적으로 시비를 들어서는 안 되고, 동포가 백만 대금을 의심 없이 맡길 만하고 과년한 처녀를 안심하고 의탁시킬 인물이라야 비로소 동포의 신임을 받고 또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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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반 골절pelvic fracture이 무엇입니까?

 

 

두 개의 관골hip bone(볼기뼈)와 천골sacrum(엉치뼈) 및 미골coccyx(꼬리뼈)로 구성된 골반pelvis은 척추에서 전달되어 내려오는 체중이 천골을 거쳐 양측 관골 부위에 전달되면서 체중을 지탱하는 역할을 합니다. 고관절hip joint(엉덩관절)에서 양쪽 다리와 연결되어 걷기와 달리기 등의 신체동작이 가능하게 합니다. 또한 골반 안에는 내장과 방광, 여성의 경우에는 자궁과 난소 등의 중요한 장기가 위치하는데, 골반은 이런 장기가 담길 공간을 마련해주고,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손상되지 않도록 안전하게 보호해줍니다.

교통사고, 추락사고, 낙반사고와 같은 강력한 외부의 힘에 의해 골반 골절pelvic fracture이 발생할 수 있는데 다른 부위의 골절이나 연부조직의 손상 및 방광과 요도 등 골반강 안의 주요기관의 손상이 동반되기 쉽습니다. 골절 부위 자체의 출혈도 많지만 주위의 크고 작은 혈관들이 손상되어 더욱 많은 출혈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다른 질환에 걸릴 확률도 높고, 부러진 뼈 조각을 맞추어 고정하는 것도 힘들며, 골반고리의 안정과 회복이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치료 후에도 심한 후유증을 남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작은 외력 골절은 노년층에서의 낙상 또는 골 성장이 끝나지 않은 청소년기의 골 성장 부위가 당기는 힘에 의하여 골절된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는 골반고리를 구성하는 각각의 뼈의 골절은 있지만 골반고리의 안정은 유지됩니다. 큰 외력 골절은 교통사고나 낙반사고, 추락사고와 같은 커다란 외력에 의한 손상으로, 골반환의 두 군데 이상이 골절되어 안정을 잃을 뿐 아니라 주위의 연부조직과 내부 장기의 심각한 손상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증세는 골절 부위의 동통과 부어오름, 압통 등의 국소적인 증세가 나타납니다. 골반고리의 손상이 없는 골절이나 골반고리의 손상은 있으나 금만 가 있는 골절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침상에서의 안정 등 보존적 치료가 가능합니다. 골절의 전위轉位가 심할 때는 골반 및 다리가 변형됩니다. 골절이 심한 경우에는 해면질골spongy bone로 구성되어 있는 골절 면에서 다량의 출혈과 골반강 내의 출혈이 함께 일어나 출혈성 쇼크 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골반고리에 손상이 있고 뼈가 어긋난 경우에는 우선 보존적인 방법으로 뼈를 맞추는데, 뼈가 잘 맞지 않아 심각한 다리 길이의 차이 및 하지의 운동제한 등이 예상되는 경우에는 수술을 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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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아시아의 역사를 생각하다

 

 

토요일 오후 점심식사를 회 한 접시와 막걸리 한 잔으로 하고 나니 온몸이 나른합니다.

내 방에서 63빌딩이 일직선입니다.

그 아래 밤섬과 한강이 내려다보이는데 오늘은 얼음아 다 녹아 한강물이 햇빛에 반짝이며 영롱합니다.

서울의 젖줄 한강은 세계적인 강입니다.

대도시에는 강이 흐르기 마련인데, 강이 있었으므로 대도시가 형성된 것입니다.

서울은 명실공名實共히 세계의 도시입니다.

요즘 도산 안창호에 관한 글을 연재하고 있는데, 나와 그분의 공통점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분은 22살 때에 미국에 갔고 저는 23살 때에 미국으로 갔으며, 그분은 술 한 잔에 얼굴이 붉어졌는데 저 또한 그러하며, 그분은 평생 담배를 못 끊었는데 저도 그럴 것만 같은 것이 공통점입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공통점입니다.

저는 이따금 사람들에게 인문학에 관해 말하면서 인문학의 꽃은 철학과 역사라고 말하곤 합니다.

오늘 새삼스럽게 아시아의 역사를 생각합니다.

인구로 보나 문화로 보나 세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시아가 일부 서양세력에 밀려 후진의 역사로 비쳐진 것이 안타까워 새삼스럽게 생각이 난 것입니다.

아시아를 서아시아, 남아시아, 동아시아,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로 나눌 수 있습니다.

광대한 인간의 역사입니다.

아시아에서 출현한 대단한 인간들이 세계사의 대부분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인으로 우리에게는 세계를 향해 아시아의 문화를 자랑스럽게 주장하지 못한 부끄러운 구석이 있습니다.

길가메시, 아슈르바니팔, 조로아스터, 키로스 2세, 붓다, 아소카, 예수, 사도 바울, 아틸라, 무함마드, 아브드 알 말리크, 공자, 노자, 진시황, 나가르주나, 주희, 칭기즈 칸, 영락제, 히데요시, 이순신, 샤 아바스, 악바르 대제, 간디, 아타튀르크, 마오쩌둥, 호치민, 수하르토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걸출한 인물들이 아시아 각국에서 배출되었습니다.

세계의 6대 종교 모두 즉 기독교, 유대교, 불교, 유교, 도교, 이슬람교가 아시아의 종교입니다.

종교적으로는 아시아가 세계를 통째로 삼킨 것입니다.

최근에 서구세력이 아시아에 검은 손을 내밀며 식민주의로 아시아를 유린했지만, 아시아 역사의 놀라운 특징은 장구함입니다.

지구 최초의 정치체제가 발원한 곳도 아시아입니다.

세계 최초의 성문법을 완성한 것도 아시아입니다.

저는 바빌로니아와 함무라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이 발원한 곳은 아시아입니다.

기원전 4천 년경 현재 이라크의 수메르에서 인류 최초의 도시들이 생겨났습니다.

수메르인은 고대 서아시아의 뿌리를 형성하는 데 중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수메르의 도시국가가 있었으므로 해서 바빌론, 아시리아, 페르시아 제국이 출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시아와 서구세력과의 첫 대결은 페르시아 제국과 로마 제국이 지중해에서 맞닥뜨림이었고, 불행하게도 아시아가 패했습니다.

사아시아와 남아시아와는 멀리 떨어진 중국은 상나라와 주나라 황제들에 의해 중국만의 고유하고 지속적인 문화를 형성했습니다.

진시황의 통치 하에 중국이 통일되기 전 유가와 도가가 출현하여 통치철학의 자리를 놓고 자웅을 겨뤘습니다.

로마제국의 라틴어는 역사의 흔적이 되었지만, 중국어는 온전히 살아남아 유구한 역사의 기억을 후대에 전했습니다.

중국어의 생명력은 대단했는데 중국을 침략한 이민족들이 한족의 언어를 자신들의 공식 언어로 채택할 정도였습니다.

칼과 공포로 제압할 수 없는 힘을 지닌 언어로는 중국어 외에 페르시아어가 유일합니다.

하지만 중국어와 달리 페르시아어는 상당부분 변질되었습니다.

당나라와 송나라의 수도 장안과 카이펑에서는 중국의 문명이 만개했습니다.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는 2백만 명이 거주했다고 합니다.

단일 도시의 거주인구로는 당대 최고였습니다.

한반도와 일본에도 나름의 문화가 자리 잡았습니다.

한반도에는 유교가 깊이 뿌리를 내린 반면 봉건주의 사회였던 일본에서는 유교가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서아시아에 영향을 기친 건 역시 무함마드입니다.

이슬람교를 신봉한 아라비아 병사들이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에 이슬람교를 전파했습니다.

중앙아시아 하면 몽골의 영웅 칭기즈 칸을 빼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아시아, 러시아, 페르시아, 한반도, 중국, 캄보디아, 자바가지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습니다.

티베트군과 만주군 또한 강력한 주변 국가들을 하나둘 물리치고 제국의 앞날을 개척했습니다.

티메트군과 만주군 모두 중국 대륙을 노렸지만 1644년 중국 역사상 마지막 제국 청나라를 건국한 승리자는 만주에서 온 전사들이었습니다.

이처럼 화려한 문명을 꽃피운 아시아에는 근대에 이르러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서구세력의 거센 흐름을 막아낼 수 없었던 아시아 각국은 식민국과 속국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적 현실은 급물살을 타게 되었지만, 기술적 우위를 바탕으로 한 유럽과 미주의 서구열강은 아시아에 유례가 드물 정도로 공고한 지배체계를 구축했습니다.

영국과 대립각을 세운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과 티베트에서 유목민들을 정복하려는 야심을 드러냈는데, 그 지역의 풍부한 천연자원을 차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아시아는 옛날의 영광을 되찾고 있는 중입니다.

중국, 일본, 한국, 인도 등이 전면에서 아시아의 위상을 세계에서 높이고 있습니다.

아울러 아시아 문화의 우수성을 서양에 자랑하고 있습니다.

아시아는 세계 여러 대륙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바로 세계입니다.

그리고 한국은 아시아의 매우 중요한 몇 국가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강을 바라보면서 새삼 한국의 미래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새삼 아시아의 역사를 생각합니다.

아시아인의 우수성은 역사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를 확인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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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임시정부 국무령 취임을 거부하다

 

 

안창호가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1925년 9월에 임시정부 국무령에 이상룡李相龍(1858~1932)이 취임했으나 임시정부와의 통합 문제로 인한 정의부 내부의 분규가 일어나자 그는 급히 만주로 귀환했습니다. 1908년경에 계몽단체인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설립하여 애국강연, 회보발간 등을 통한 자강운동에 뛰어든 이상룡은 1911년 1월 가산을 정리하고 일가를 거느린 채 중국 동삼성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는 이회영, 이시영 등과 더불어 그곳에 새로운 생활의 터전이자 해외 독립 운동의 구심체가 되는 독립군 기지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동지들과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사장을 맡아 벼농사를 보급하는 등 이주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경학사는 거듭된 흉작과 토착민들의 반발 등 어려움을 극복하고 1912년에 부민단으로, 1919년에는 한족회로 변천하며 한인사회의 토착화를 이루어갔으며, 신흥강습소도 신흥학교,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며 군사교육기관으로서 수많은 독립군 장병들을 길러냈습니다. 이상룡은 임시정부의 국무령직을 사임하고 간도로 돌아와 1928년 5월부터 전민족유일당 결성을 위해 만주지역의 대표적 독립 운동 조직인 삼부 통합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상룡의 후임으로 1926년 2월 양기탁이 국무령에 임명되었지만 역시 취임을 거부해 국무령자리가 공석으로 남게 되었다. 임시의정원에서는 안창호가 상해로 돌아오기 전인 5월 8일, 그를 국무령에 임명했으나 안창호는 취임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자신은 정부 내에서보다는 재야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정부를 후원하고, 독립 운동계의 전선통일운동을 지원하는 것이 시세에 유리하다고 보고 취임을 거부한 것입니다.

임시정부 국무령으로 취임한 사람은 홍진洪震(1877~1946)이었습니다. 1898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홍진은 한성평리원漢城平理院 주사를 거쳐 1899년 평리원 판사가 되었습니다. 1905년부터 충청북도 충주 재판소 검사로 전보되어 근무하던 그는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검사직을 사직했습니다. 서울과 평양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일제에 항거한 독립 운동가들의 변호와 변론에 노력한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는 국내에 임시정부, 즉 한성정부漢城政府의 수립을 계획하고 1919년 3월 17일 한성정부를 조직하기 위한 준비모임을 서울의 한성오韓聖五 집에서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한남수韓南洙, 이규갑李奎甲, 김사국金思國 등과 함께 13도 대표자대회를 열어 정부 조직과 조각組閣을 결정하기로 하고 소집 책임을 자신이 맡았습니다.

홍진은 이 같은 사실을 국외 각 지역에 알리기 위하여 4월 8일 미리 정부 조직표와 조각 명단을 휴대하고 상해로 망명했습니다. 그를 통해 국내의 임시정부 수립 사실을 알게 된 상해의 독립 운동가들은 이에 자극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직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같은 해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공포했으며, 홍진은 임시의정원의 의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5월 2일 제4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홍진은 당장 시급한 임시정부의 재정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독립공채의 발행, 독립의연금의 수합, 세금 징수 등을 제안하여 실시하게 했습니다.

홍진은 서울에서 수립된 한성정부,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리고 노령에서 수립된 국민의회정부를 통합하여 통일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9월 6일 임시의정원에서 임시헌법 개정안과 정부 개조안이 통과됨에 따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임하고 한성정부를 그대로 승인함으로써 홍진의 주장이 관철되었고, 3개 정부의 통합이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4월 2일 홍진의 주도로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자대회가 개최되어 여기에서 한성정부의 조직과 조각이 정비 확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서 4월 23일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한성정부의 수립을 대내외에 선포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안창호와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한 홍진은 임시정부 국무령 취임석상에서 임시정부의 정강 중 “전민족을 망라한 공고한 당체黨體를 조직할 일”을 발표했는데 이는 안창호가 일찍이 주창한 독립당 내지 유일당 결성운동을 현실화하기 위한 도정에서 임시정부가 정강으로서 방향과 보조를 맞춰준 것입니다. 유일당 운동은 반임정세력의 집결지인 북경에서부터 시작되었고 1926년 10월 한국유일독립당 북경촉성회 결성으로 나타났습니다.

1926년 12월에 새로이 국무령으로 취임한 김구와 그 내각은 1927년 2월, 3차 임시약헌 개정에 착수해, 3월 5일에 이당치국以黨治國 체제로의 헌법 개정을 단행함으로써 유일당 결성의 추세를 임시정부 헌법에 반영했습니다. 안창호가 유일당 운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인 9월 26일, 미국에서는 막내아들 필영必英이 태어났습니다. 막내아들 필영은 태어나서 한 번도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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