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임시정부 국무령 취임을 거부하다

 

 

안창호가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1925년 9월에 임시정부 국무령에 이상룡李相龍(1858~1932)이 취임했으나 임시정부와의 통합 문제로 인한 정의부 내부의 분규가 일어나자 그는 급히 만주로 귀환했습니다. 1908년경에 계몽단체인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설립하여 애국강연, 회보발간 등을 통한 자강운동에 뛰어든 이상룡은 1911년 1월 가산을 정리하고 일가를 거느린 채 중국 동삼성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는 이회영, 이시영 등과 더불어 그곳에 새로운 생활의 터전이자 해외 독립 운동의 구심체가 되는 독립군 기지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동지들과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사장을 맡아 벼농사를 보급하는 등 이주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경학사는 거듭된 흉작과 토착민들의 반발 등 어려움을 극복하고 1912년에 부민단으로, 1919년에는 한족회로 변천하며 한인사회의 토착화를 이루어갔으며, 신흥강습소도 신흥학교,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며 군사교육기관으로서 수많은 독립군 장병들을 길러냈습니다. 이상룡은 임시정부의 국무령직을 사임하고 간도로 돌아와 1928년 5월부터 전민족유일당 결성을 위해 만주지역의 대표적 독립 운동 조직인 삼부 통합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상룡의 후임으로 1926년 2월 양기탁이 국무령에 임명되었지만 역시 취임을 거부해 국무령자리가 공석으로 남게 되었다. 임시의정원에서는 안창호가 상해로 돌아오기 전인 5월 8일, 그를 국무령에 임명했으나 안창호는 취임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자신은 정부 내에서보다는 재야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정부를 후원하고, 독립 운동계의 전선통일운동을 지원하는 것이 시세에 유리하다고 보고 취임을 거부한 것입니다.

임시정부 국무령으로 취임한 사람은 홍진洪震(1877~1946)이었습니다. 1898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홍진은 한성평리원漢城平理院 주사를 거쳐 1899년 평리원 판사가 되었습니다. 1905년부터 충청북도 충주 재판소 검사로 전보되어 근무하던 그는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검사직을 사직했습니다. 서울과 평양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일제에 항거한 독립 운동가들의 변호와 변론에 노력한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는 국내에 임시정부, 즉 한성정부漢城政府의 수립을 계획하고 1919년 3월 17일 한성정부를 조직하기 위한 준비모임을 서울의 한성오韓聖五 집에서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한남수韓南洙, 이규갑李奎甲, 김사국金思國 등과 함께 13도 대표자대회를 열어 정부 조직과 조각組閣을 결정하기로 하고 소집 책임을 자신이 맡았습니다.

홍진은 이 같은 사실을 국외 각 지역에 알리기 위하여 4월 8일 미리 정부 조직표와 조각 명단을 휴대하고 상해로 망명했습니다. 그를 통해 국내의 임시정부 수립 사실을 알게 된 상해의 독립 운동가들은 이에 자극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직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같은 해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공포했으며, 홍진은 임시의정원의 의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5월 2일 제4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홍진은 당장 시급한 임시정부의 재정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독립공채의 발행, 독립의연금의 수합, 세금 징수 등을 제안하여 실시하게 했습니다.

홍진은 서울에서 수립된 한성정부,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리고 노령에서 수립된 국민의회정부를 통합하여 통일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9월 6일 임시의정원에서 임시헌법 개정안과 정부 개조안이 통과됨에 따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임하고 한성정부를 그대로 승인함으로써 홍진의 주장이 관철되었고, 3개 정부의 통합이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4월 2일 홍진의 주도로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자대회가 개최되어 여기에서 한성정부의 조직과 조각이 정비 확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서 4월 23일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한성정부의 수립을 대내외에 선포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안창호와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한 홍진은 임시정부 국무령 취임석상에서 임시정부의 정강 중 “전민족을 망라한 공고한 당체黨體를 조직할 일”을 발표했는데 이는 안창호가 일찍이 주창한 독립당 내지 유일당 결성운동을 현실화하기 위한 도정에서 임시정부가 정강으로서 방향과 보조를 맞춰준 것입니다. 유일당 운동은 반임정세력의 집결지인 북경에서부터 시작되었고 1926년 10월 한국유일독립당 북경촉성회 결성으로 나타났습니다.

1926년 12월에 새로이 국무령으로 취임한 김구와 그 내각은 1927년 2월, 3차 임시약헌 개정에 착수해, 3월 5일에 이당치국以黨治國 체제로의 헌법 개정을 단행함으로써 유일당 결성의 추세를 임시정부 헌법에 반영했습니다. 안창호가 유일당 운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인 9월 26일, 미국에서는 막내아들 필영必英이 태어났습니다. 막내아들 필영은 태어나서 한 번도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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