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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도전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민주당이 이승만 정권을 타도하는 데 있어서 직접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 국가의 통제력을 갖출 수 없었던 가장 큰 원인이었지만, 새 정부가 들어서고 뚜렷한 이념과 정강 정책을 발표하지 못하자 정치적인 지도력이 결여될 수밖에 없었던 데에 두 번째 원인이 있었다.
또한 집회, 언론, 결사, 시위, 정당결성 등 시민적·정치적 권리를 마음껏 누릴 수 있게 함으로써 사회세력의 집단행동을 규제할 만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지 못한 것도 원인이었다.
게다가 혁명과업을 수행하기 위한 일환으로 경찰에 대해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벌이다 보니 사회세력의 욕구분출을 통제할 기본 수단인 경찰력의 사기가 저하되고 업무수행의 능력이 현저하게 쇠퇴해져서 수사력과 질서유지에 큰 차질을 가져왔다.
또한 내각 집권 후 3개월 동안에 내무부 장관이 세 번이나 경질되어 행정의 불안정을 드러내었으며, 확산되는 가두시위와 학생, 시민들의 불법행동을 제어하지 못하게 되었다.
장면 정권 때 학생 데모는 1,835건이나 발생했는데, 연인원 96만 9,630명이 데모에 참가했던 셈이다.
이는 매일 평균 7.3건의 시위가 발생했고 3,876명이 참가한 것을 뜻한다.


장면 정권에 대한 사회세력의 도전은 한 마디로 개혁의 속도와 방향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장면 정권에 가장 큰 도전을 행사한 것은 이념적으로 급진화된 학생 집단이었다.
이들의 불만을 크게 둘로 양분하면 첫째, 정부의 미온적인 반혁명 세력 처벌에 대한 항거였고, 둘째, 적극적인 자주화와 통일운동이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부정선거와 부패 관련자들에 대한 법원의 미온적 처벌에 학생들이 국회의사당을 점거한 극렬한 항의시위가 있었다.
장면 내각은 이에 비상 개헌으로 혁명재판소를 설치하고 소급입법을 서둘렀다.
이 사건은 국가에 대한 사회 세력의 힘이 정부를 위협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따라서 장면 내각의 정치적인 기반이 하나씩 상실되었다.


북한은 4월 민중항쟁이 진행되고 있던 4월 21일 「남조선 인민들에게 고함」이란 성명을 통해 남·북조선의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의 연합회의를 긴급히 소집할 것을 제의했다.
4월 27일에는 「남조선에 조성된 현 사태와 관련한 제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 연석회의 성명」을 발표하여 남북한의 자유왕래, 미군의 즉시 철수, 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의 개최를 재차 제안했다.
이어서 김일성은 8·15광복 15주년 기념 경축대회 연설을 통해 남북연방제를 포함한 일련의 남북협상 통일방안을 제의했다.
북한의 이 같은 제안은 남한의 민중과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60년 8월 16일자 국제신문 사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소개되었다.


(북한의 제안은) 우리 민족의 생활에 관한 문제, 국토의 통일에 관한 문제를 언제까지나 외세에 의존하고 타율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에서만 모색하지 말고 우리가 주체적으로 우리들끼리 흉금을 털어놓고 논의해 보자는 의욕이 풍겨 있기 때문에 민족적인 접근감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4·19혁명 후 정치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커졌고, 정부가 그들에게 만족할 만한 정책을 내놓지 못하자 학생들은 진보적 이념의 그룹을 결성하고 통일문제와 반외세 자주화 운동까지 벌이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통일논의는 대학별로 구성된 통일문제연구회나 학생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1960년 11월 초에 결성된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은 학생들의 통일운동의 중심에 위치했다.
민족통일연맹의 모체는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학생들이 중심이 된 신진회라는 이념적 독서회로, 이들은 반외세 자주통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학생들의 시위는 2~300명 정도의 소규모였지만 이념적 급진화와 더불어서 국가에 대해서는 큰 도전이 되었다.
특히 통일에 관한 그들의 운동이 정치적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전국의 대학들에서 결성된 민족통일연맹들이 선봉에 나섰다.
특히 서울대학교의 민족통일연맹은 창립대회에서 공산당이 참여한 남북한 보통선거를 주장했으며, 장면 국무총리가 미국과 소련을 방문해서 이 문제를 협의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 조직은 이듬해 5월 초에는 남북 학생회담을 제안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보수주의 통일관을 가지고 있던 장면에게 학생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반면 북한 정부는 학생들의 요구에 열렬히 지지하고 나섰고, 혁신세력의 민족자주통일연맹 역시 5월 13일 이를 지지하는 궐기대회를 개최했다.
이는 5·16쿠데타가 일어나기 불과 사흘 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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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세력의 도전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7·29총선에서 혁신세력은 참패했지만 그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학생들의 데모가 끊이지 않자 혁신세력은 학생들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학생들과 혁신세력의 국가정책에 대한 도전은 1961년 2, 3월에 고조되어 거의 매일 가두시위를 벌였다.
정치적 성격의 이 같은 데모는 4·19혁명 후 국회해산을 요구한 데모를 시작으로 7·29총선 때는 반민주 세력의 출마를 규탄하는 데모로 이어졌고, 대법원 판결에 불만을 품은 4·19혁명 때 부상당한 학생들을 중심으로 국회의사당을 점거하는 데모로 확산되었다.
그 뒤 점차 데모의 규모를 확장해서 1961년 3월 18일 서울에서 30여 개의 혁신단체가 연합하는 대규모의 시위로 발전했다.
이후 마산, 부산, 광주, 전주 등 전국 주요 도시로 데모가 확산되었다.


혁신세력 중 하나인 통일사회당은 창당선언문에서 “폐쇄적 할거성을 지양하고 이념적 산화를 시도할 겨를도 없이 산만하고 무력한 태세로 7·29총선에 임한 것”을 철저히 자아비판하고, “조국을 통일, 자주, 독립의 훌륭한 민주적 복지국가로 발전시키는 역사적 대과업을 능히 담당, 완수할 수 있는 … 민주적 사회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 대동적이고 단일화한 혁신정당을 창건하려 한다”고 밝혔다.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는 자주, 평화, 민주 3대 원칙 아래 남북통일을 실현시키기 위한 국민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으며, 구체적인 실천방안으로 첫째, 즉각적인 남북 정치협상을 재개하고, 둘째, 남북 민족대표들에 의한 민족통일건국 최고위원회를 구성하며, 셋째, 외세를 배격하고, 넷째, 통일협의를 위한 남북 대표자회담을 개최하며, 다섯째, 통일 후 오스트리아식 중립 또는 영세중립이나 다른 형태의 선택여부 결정 등의 중립화 통일방안을 주장했다.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는 이와 더불어 학생들의 남북 학생회담 제의를 적극 지지하여 1961년 5월 13일 남북 학생회담 환영 및 통일촉진 궐기대회를 개최했다.
1만여 명의 시민,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진 이날의 대회는 남북 학생회담의 전폭적 지지와 남북 정치협상 준비 등 6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으며,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판문점으로”라는 구호를 외치며 통일의 열기를 높였다.


혁신세력은 민주당 정권에 의해서 추진된 반공법과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안을 양대 악법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7·29총선에서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는 데 실패한 혁신세력은 시위와 과격한 행동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고자 획책하던 중 두 개의 안보법안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세력을 확대시키는 절호의 기회를 삼으려고 했다.
혁신 정당들과 노조세력, 일부 학생들은 1961년 3월 22일 오후 2시를 기해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대대적인 2대 악법 반대 성토대회를 열었다.
1만여 명이 넘는 군중은 “밥달라 우는 백성, 악법으로 살릴소냐”, “데모가 이적이냐, 악법이 이적이냐” 등의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를 벌였다.


이들과 맞서 4개의 반공단체가 동원되어 반공법안을 지지하는 데모가 벌어져 한때 서울의 거리는 데모의 물결로 뒤덮였다.


반공법의 성토대회에 참석했던 일부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혁신계 인사들과 합류하여 밤 8시경부터 시청 앞에서 시작된 횃불 데모대는 시가행진을 하는가 하면 일부는 미대사관 앞에 집결하여 연좌데모를 벌였다.
그날 밤의 횃불 데모대는 과격한 행동을 서슴지 않게 자행하면서 파출소를 파괴하는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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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한계를 넘어 방종으로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1961년 새해에 접어들면서 4월 위기설이 유포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위기의식이 가중되어 갈 때 3월 22일에 있었던 횃불 데모로 소요가 절정을 이루면서 4월로 이어져 갔는데, 정부로서는 그에 대해 통제능력이 없었다. 국가의 권력은 위축되어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자유는 그 한계를 넘어 방종으로 치닫고 있었다.
민주당 집권기간은 한국에서 처음 맞는 자유의 만개기였다.


장면은 자서전에서 그때의 상황과 자신의 대처 태도에 관해 다음과 기술했다.


자유당과 피투성이 씨름을 하면서 민주당이 국민에게 공약한 것은 자유의 절대 보장과 독재의 배제였다.
그래서 우리는 집권과 아울러 자유를 약속했다. 연일 계속되는 데모로 인해 사회가 혼란에 빠졌지만 민주당은 공약을 위배할 수가 없었다.
무슨 핑계로든지 계엄령이라도 선포할 수도 있었지만, 총검에 의한 외형적 질서는 진정한 민주적 질서가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학설로 배운 자유는 혼란을 일으키지만 경험으로 체득한 자유는 진정한 민주주의 단단한 초석이 되는 것이다.
자유가 베푼 혼란과 부작용에 국민이 스스로 혐오를 느낄 때 진실한 자유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장면의 인식은 파탄의 미스였다. 당시로서는 이상적인 자유를 구가할 적절했던 시기가 아니었다.
장면이 기대했던 자유를 바탕으로 하는 질서가 들어서기도 전에 통치기능이 마비되었고 민주정치의 파행성을 맛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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