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세력의 도전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7·29총선에서 혁신세력은 참패했지만 그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학생들의 데모가 끊이지 않자 혁신세력은 학생들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학생들과 혁신세력의 국가정책에 대한 도전은 1961년 2, 3월에 고조되어 거의 매일 가두시위를 벌였다.
정치적 성격의 이 같은 데모는 4·19혁명 후 국회해산을 요구한 데모를 시작으로 7·29총선 때는 반민주 세력의 출마를 규탄하는 데모로 이어졌고, 대법원 판결에 불만을 품은 4·19혁명 때 부상당한 학생들을 중심으로 국회의사당을 점거하는 데모로 확산되었다.
그 뒤 점차 데모의 규모를 확장해서 1961년 3월 18일 서울에서 30여 개의 혁신단체가 연합하는 대규모의 시위로 발전했다.
이후 마산, 부산, 광주, 전주 등 전국 주요 도시로 데모가 확산되었다.


혁신세력 중 하나인 통일사회당은 창당선언문에서 “폐쇄적 할거성을 지양하고 이념적 산화를 시도할 겨를도 없이 산만하고 무력한 태세로 7·29총선에 임한 것”을 철저히 자아비판하고, “조국을 통일, 자주, 독립의 훌륭한 민주적 복지국가로 발전시키는 역사적 대과업을 능히 담당, 완수할 수 있는 … 민주적 사회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 대동적이고 단일화한 혁신정당을 창건하려 한다”고 밝혔다.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는 자주, 평화, 민주 3대 원칙 아래 남북통일을 실현시키기 위한 국민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으며, 구체적인 실천방안으로 첫째, 즉각적인 남북 정치협상을 재개하고, 둘째, 남북 민족대표들에 의한 민족통일건국 최고위원회를 구성하며, 셋째, 외세를 배격하고, 넷째, 통일협의를 위한 남북 대표자회담을 개최하며, 다섯째, 통일 후 오스트리아식 중립 또는 영세중립이나 다른 형태의 선택여부 결정 등의 중립화 통일방안을 주장했다.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는 이와 더불어 학생들의 남북 학생회담 제의를 적극 지지하여 1961년 5월 13일 남북 학생회담 환영 및 통일촉진 궐기대회를 개최했다.
1만여 명의 시민,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진 이날의 대회는 남북 학생회담의 전폭적 지지와 남북 정치협상 준비 등 6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으며,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판문점으로”라는 구호를 외치며 통일의 열기를 높였다.


혁신세력은 민주당 정권에 의해서 추진된 반공법과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안을 양대 악법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7·29총선에서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는 데 실패한 혁신세력은 시위와 과격한 행동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고자 획책하던 중 두 개의 안보법안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세력을 확대시키는 절호의 기회를 삼으려고 했다.
혁신 정당들과 노조세력, 일부 학생들은 1961년 3월 22일 오후 2시를 기해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대대적인 2대 악법 반대 성토대회를 열었다.
1만여 명이 넘는 군중은 “밥달라 우는 백성, 악법으로 살릴소냐”, “데모가 이적이냐, 악법이 이적이냐” 등의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를 벌였다.


이들과 맞서 4개의 반공단체가 동원되어 반공법안을 지지하는 데모가 벌어져 한때 서울의 거리는 데모의 물결로 뒤덮였다.


반공법의 성토대회에 참석했던 일부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혁신계 인사들과 합류하여 밤 8시경부터 시청 앞에서 시작된 횃불 데모대는 시가행진을 하는가 하면 일부는 미대사관 앞에 집결하여 연좌데모를 벌였다.
그날 밤의 횃불 데모대는 과격한 행동을 서슴지 않게 자행하면서 파출소를 파괴하는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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