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신세계에 기고한 글입니다.

관능적 아름다움을 추구한 드가와 르누아르


에드가 드가(1834~1917)와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를 묶어서 말할 수 있는 공통점은 프랑스 전통회화를 유지 발전시킨 데 있다.
두 사람 이후 전통회화의 맥이 끊어진 것을 볼 때 두 사람은 전통회화의 마지막 보루였다.
프랑스 전통회화는 다비드와 앵그르로 이어지는 역사화와 인물화였으며 미적 강령은 일찍이 그리스 회화에서 성취된 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초월한 이상주의였다.
프랑스의 소묘 전통을 최고의 수준으로 완성시킨 앵그르의 선묘는 관능적인 느낌을 주어 낭만주의에 가까운 표현력을 발휘했고 그는 아카데미에 방향성과 권위를 부여했다.
이상적인 미의 추구는 프랑스 회화의 특징이었으며 이를 추종한 화가가 바로 드가와 르누아르이다.

19세기 프랑스 회화를 주도한 것은 낭만주의였으며 일상적 현실의 단조로움에 반발한 낭만주의의 한 측면은 이국 취향이었다.
이국 취향은 고갱의 경우 타히티에서 삶을 마감하는 현실 도피로도 나타났다.
평범한 현실에 숭고함을 부여하려는 노력도 낭만주의의 태도였다.
19세기 초 프랑스 회화의 가장 취약한 분야는 풍경화였다.
프랑스 회화의 선구자들 푸생과 클로드 로랭이 일찍이 풍경화를 그렸지만 인물들을 묘사하기 위한 배경으로서의 역사적 풍경화였고 풍경화를 고유한 장르로 발전시킨 것은 19세기 중반에 활약한 바르비종 화파였다.
바르비종 화파란 퐁텐블로 숲 외곽의 작은 마을에 정착한 테오도르 루소를 비롯한 화가들이 풍경화를 주로 그린 데서 붙여진 명칭이다.
풍경화는 19세기 말 인상주의 화가들에 의해서 독립된 장르가 되었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인상주의의 세계적 명성은 프랑스 전통회화의 종말을 의미한다.
19세기 말 드가와 르누아르는 인상주의자로 불렸지만 다른 인상주의자들과는 달리 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초월하는 이상을 구현하면서 프랑스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드가가 7살 연하의 르누아르를 만난 것은 훗날 인상주의로 불리게 될 화가들의 모임에서였다.
1862년 르누아르, 모네, 바지유, 시슬레 등 훗날 인상주의의 주역이 될 화가들은 스위스 태생의 글레이르의 파리 아틀리에에서 수학하면서 친구가 되었으며, 이들은 살롱전을 통해 프랑스 화단에 이름을 날린 마네를 중심으로 카페에서 자주 만났다.
그들은 마네가 1864년 새로 이사한 바티뇰 불바드에 있는 카페 게르부아에서 주로 만났으며 이들은 ‘바티뇰 그룹’ 또는 ‘마네파’로 불리었다.
드가가 2살 연상의 마네를 처음 만난 것은 1863년 루브르 뮤지엄에서였고 마네가 그를 게르부아로 오게 해서 젊은 화가들에게 소개한 것으로 짐작된다.
제1회 인상주의 그룹전이 1874년 4월 15일~5월 15일에 열렸을 때 드가는 10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드가는 모두 8차례에 걸쳐 열린 인상주의 그룹전에 7번이나 참가하여 ‘인상주의자’라는 말을 들었지만 독자적인 양식을 구사했고, 그들과는 달리 풍경화보다는 실내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 묘사하는 그림을 주로 그렸다.
특기할 점은 일본 판화의 영향을 받아 대각선에서 바라본 장면이나 그림 가장자리에 인물이 잘리기도 하는 낯선 구도를 사용했다.
드가의 작품은 자발적인 장면과 분위기 그리고 솔직한 행위가 스냅사진처럼 포착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외관적인 관점이고 그가 매우 신중한 태도로 구성한 결과이다.
몰래 들여다보는 장면처럼 그리는 것이 바로 그가 의도적으로 기획한 구성인 것이다.

드가는 파스텔로 그리기를 선호했으며 1880년대 시력이 나빠진 후에는 빠른 속도로 그림을 완성시킬 수 있는 파스텔화를 더욱 선호하게 되었다.
시력이 나빠지자 유화를 그리기 어려워져 밀랍으로 모델링을 하기 시작했으며 1890년대에 시력이 더욱 나빠지자 조각에 전념했다.
그가 회화에서 선호했던 모티프는 조각의 모티프이기도 했는데, 달리는 말, 목욕하거나 몸을 치장하는 누드 여인, 발레리나 등이었다.
이런 조각들은 그가 타계한 후에야 청동으로 주조되었다.
말년의 거의 20년 동안 드가는 거의 실명상태였으며 이 시기에 은둔생활을 했다.
피사로는 드가를 가리켜서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라고 칭찬했고 르누아르는 그가 “로댕보다 더 뛰어난 조각가”라고 극찬했다.

가난한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난 르누아르는 파리 시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몽마르트르에 거주하면서 동네 사람들을 그렸는데, 몽마르트르에는 상점 종업원, 식당 종업원, 잡부, 모델, 연예인들이 대거 거주했고 카페가 많아 밤이면 더욱 붐볐다.
르누아르는 귀엽게 생긴 어린이, 꽃, 자연의 경관, 여인의 초상 등을 특유의 따뜻한 느낌을 주며 화사한 색채로 그려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작품을 제작했고, 경제적으로 매우 쪼들렸지만 1880년경부터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1890년대에 관절염을 앓기 시작하고 1897년 자전거를 타다 팔이 부러져 병이 더욱 악화되었다.
유명해진 후에는 고전적 주제, 특히 여인의 누드와 어린 소녀를 즐겨 그리면서 신화에서 주제를 얻기도 했다.
그는 더욱 현란한 색채를 사용하면서 인체의 형태를 풍만하게 그리고 부드럽고 둥글게 표현했다.
1912년부터는 휠체어에 탈 정도로 몸이 쇠약해졌으며 간병인의 도움으로 자유롭지 못한 손가락 사이에 붓을 끼우고 계속 그림을 그렸다.
마티스는 이런 그의 모습을 보고 감동했으며 자신도 회화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르누아르의 아들이며 유명한 영화감독인 장 르누아르는 1962년에 <르누아르, 나의 아버지>를 썼으며 이 책은 그 해 프랑스와 영어로 출간되었다.

<드가의 초상>, 사진, 드가의 동생이 1895~1900년에 찍은 것이다.

드가의 <늘어진 옷을 걸친 서 있는 모습>, 1860~62년
26~28살 때 화가가 되기 위해 공부할 때 그린 드로잉이다.
선으로 정확하게 인체와 의상을 묘사하는 것은 아카데미가 추구한 목적이었으며, 따라서 프랑스 회화의 전통이 되었고, 드가는 앵그르의 제자로부터 이런 훈련을 받았다.
제자를 방문한 앵그르가 드로잉 훈련을 받는 드가를 보고 “젊은이, 선으로 그리게. 선은 회화의 생명일세”라고 격려해준 말을 드가는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드가의 <목욕 후>, 1883~84년
드가는 목욕하는 여인의 모습을 많이 그렸는데 마치 몰래카메라를 설치하고 바라본 모습처럼 모델로 하여금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하게 했다.
그는 모델로 하여금 목욕할 때 그리고 목욕 후 몸을 말릴 때 취할 수 있는 모든 다양한 포즈를 취하게 했으므로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당시 프랑스 여인들의 솔직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보듯 그는 파스텔로 인체와 방의 내부를 매우 정교하게 묘사했으며 따라서 파스텔화를 고유한 장르로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드가의 <댄스교실>, 1874년
이 작품은 댄스교실에서의 한 순간을 포착한 스냅사진처럼 보이지만 매우 사려 깊게 미리 준비한 인물들을 배열한 것이다.
드가는 인물 하나하나를 미리 습작을 통해 준비했다가 합성시키는 방법으로 작품을 제작했는데 오른편의 댄스 교사는 이미 타계한 사람으로 사진에서의 모습을 실제로 그곳에 있는 것처럼 삽입했다.

바지유의 <르누아르의 초상>, 1867년

르누아르의 <알프레드 시슬레와 그의 아내>, 1868년경
르누아르와 함께 수학한 시슬레는 파리에서 영국인 부자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 영국으로 보내져 언어와 상업을 공부했는데 아버지가 사업가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업보다는 회화에 더 관심이 많은 시슬레는 곧 파리로 돌아왔고, 글레이르의 아틀리에서 화가로서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르누아르의 말로 ‘유쾌한 사나이’인 그는 여자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
르누아르는 이 작품에서 남편을 놓치지 않으려는 아내를 매달리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르누아르의 <일광욕하는 사람들>을 위한 습작, 1886~87년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린 드로잉에서 르누아르의 뛰어난 소묘력을 볼 수 있다.
선을 중요시하는 것은 프랑스 회화의 전통으로 드가와 르누아르가 이어받았다.
인체의 가장자리를 흰색으로 칠한 것은 인체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한 일반적인 방법이다.
이런 유연하고 아름다운 선은 채색에서 사라지게 되지만 사실적 형상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한다.

르누아르의 <일광욕하는 사람들>, 1918~19년
이 작품은 타계하기 얼마 전에 그린 것으로 화면에 두 여인이 나란히 누워있지만 동일한 여인으로 포즈를 달리 하게 해서 합성한 것이다.
모델은 러시아 여인으로 르누아르의 아들 장과 결혼했다.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해 화사한 색을 사용했으며 붓질을 짧게 하면서 여러 색을 섞어 사용하는 방법은 그의 독창적인 양식이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