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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아트의 수도

김광우의 <비디오아트의 마에스트로 백남준 vs 팝아트의 마이더스 앤디 워홀>(숨비소리) 중에서



20세기 초 화가들과 작가들은 카페와 찻집, 화랑, 극장, 서점들이 즐비한 1880년대에 아일랜드인과 이탈리아인들이 줄지어 살던 그리니치빌리지Greenwich Village에 눈독을 들였다.
1920년대에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1899-1961), 더스 패서스, 윌라 시버트 캐더Willa Sibert Cather(1873-1947) 등이 문화 반란의 중심인 그리니치빌리지에서 살았다.
사회주의자, 페미니스트, 게이, 레즈비언, 성에서 해방된 사람과 자유연애 지지자, 기성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 전위예술가, 화가, 작가들이 이곳에서 한데 어울렸고, 모두 상업화에 대한 거부와 독립 의지 속에 결속되었다.

1900년의 뉴욕 미술계를 지배하던 풍경화, 신고전주의, 또는 인상주의 전통에 대한 반항으로 그리니치빌리지에서 두 가지 모더니즘 사조가 탄생했다.
하나는 사실주의로 20세기 초에 한 그룹의 필라델피아 화가들이 자신들의 이론가인 로버트 헨리Robert Henri(1865-1929) 주위로 모여 뉴욕에 정착한 뒤에 나타났다.
1907년, 국제디자인아카데미가 헨리와 나머지 일곱 명의 화가들 조지 룩스, 윌리엄 제임스 글래큰스, 존 슬론, 에버렛 신, 아서 B. 데이비스, 어니스트 로슨, 모리스 프렌더개스트의 전시를 거부하자 헨리가 보수적인 전시정책에 항의하여 결성한 에이트The Eight 그룹의 리더가 되었다.
그들은 에이트라는 명칭을 내걸고 맥베스 화랑에서 자신들의 작품을 전시했다.
‘애시캔파 Ash Can(쓰레기통파)’라는 별명이 붙은 헨리와 그의 동료들은 당시의 아카데미즘에 반발하여 뉴욕의 소음과 악취, 도시와 뉴요커들의 현실을 자신들의 방법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또 다른 사조인 반추상과 입체-미래파는 존 마린, 에이브러햄 워코비츠, 조지프 스텔라, 막스 웨버 같은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그들 예술가들은 사진작가 앨프리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1864-1946)와 그의 화랑 291 덕분에 앙리 마티스를 발견했으며, 뉴욕을 입체파의 도시라고 평한 프랑시스 피카비아의 말을 자신들의 작품에서 표현했다.
스티글리츠는 1905년에 뉴욕 5번로 291번지에 현대사진의 산실이 된 화랑 291을 개관하여 1차 세계대전과 재정악화로 1917년에 문을 닫기까지 독창적인 사진예술을 대중에게 전달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 모더니즘 회화와 조각 작품들을 소개했으며, 미국의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모더니즘 수호자들의 전투적인 태도가 뉴욕에서 국제모던아트전시회를 개최하게 했다.
1913년 2월 17일에 렉싱턴 애비뉴의 제69연대 병기고에서 개최된 아모리 쇼Amory show에 전시된 작품은 1,650점이 넘었는데 그중 3분의 1이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이었고, 판매된 174점 가운데 123점이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인 것으로 봐서 미국인이 유럽 모더니즘에 경의를 표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새로운 시도로 뉴욕 미술계의 점진적인 해방을 입증하게 되었다.
아모리 쇼 이후 25년 동안 모던아트는 점차 뉴욕에 자리 잡아갔으며, 독특한 개성의 소유자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Gertrude Vanderbilt Whitney(1875-1942)는 이런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상류층에서 태어난 휘트니는 1900년에 조각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1907년에 그리니치빌리지에 작업장을 차렸다.
그 후 그녀는 유명한 예술가인 동시에 모던아트에 재산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미술 후원자이자 수집가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수집품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이 거절하자 1930년에 휘트니 뮤지엄을 창설했다.
그녀는 6천여 점의 작품을 소장했는데, 로이 리히텐슈타인, 짐 다인, 앤디 워홀, 재스퍼 존스 등 모던아트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미국 예술가들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휘트니 뮤지엄의 공식 명칭은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이다.

예술가가 아닌 미술 후원자들도 모던아트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냈다.
1929년에 모마MoMA(Museum of Modern Art)가 릴리 블리스, 애비 록펠러(로드 아일랜드의 상원의원 넬슨 앨드리치의 딸이자 존 D. 록펠러 주니어의 아내), 메리 퀸 설리번의 주도로 개관했다.
모마는 휘트니 뮤지엄과는 달리 회화와 조각뿐만 아니라 모든 시각예술에 관심을 보였다.
필립 굿윈과 에드워드 더렐 스톤이 설계한 1939년의 뮤지엄 건물은 후에 필립 존슨의 설계에 따라 증축되었으며, 존슨은 1953년에 뮤지엄의 정원도 설계했다.
모마는 2004년에 1조 원을 들여 일본인 건축가 다니구치 요시오로 하여금 증축, 리모델링을 하게 했는데, 요시오는 12만 점이나 되는 소장품들을 효율적으로 전시할 수 있도록 1만7천 평의 넓이로 증축하면서 재료로 유리, 알루미늄, 화강암을 사용했다.
“도시 속의 도시, 도시 속의 뮤지엄을 디자인” 하겠다는 요시오는 “건축물이 눈에 띄지 않고 단지 마실 듯이 느낄 수 있도록 했다”면서 “우리가 좋은 집을 원한다면 집에서 편안하면 되는 것이다. 건축물은 잊어버려야 한다”고 했다.

1939년에는 광산 투자로 재산을 모은 실업가 솔로몬 R. 구겐하임이 특히 바실리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작품들을 전시하는 비구상회화 뮤지엄Museum of non-objective Painting에서 모은 자신의 수집품들을 대중에게 공개했다.
이 뮤지엄은 1952년에 솔로몬 R. 구겐하임 뮤지엄으로 개명했고, 1959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설계로 뉴욕의 ‘영적 전당 temple of spirit’을 상징하는 둥근 로툰다rotunda(원형이나 타원형 평면 위에 둥근 지붕을 올린 건물) 뮤지엄으로 건립했다.
달팽이 모양의 외관과 나선형 계단으로 건축사에 한 획을 그은 이 건축물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로 올라간 관람객이 경사로를 걸어 내려오면서 벽에 걸린 전시작품들을 볼 수 있게 만든 파격적인 양식이다.

그리니치빌리지는 1940년대에 보헤미안 분위기를 되찾았다.
그곳의 술집과 작업장들에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윌렘 드 쿠닝, 클래스 올덴버그, 프란츠 클라인, 아슐리 고르키, 로버트 머더웰 등 뉴욕파 화가들이 드나들었다.
그들은 추상표현주의자들로 불리었지만 그들은 진정한 화파나 운동을 전개하지 않았고 미술에서의 개인주의를 강력하게 수호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도 공통점은 있었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미국으로 망명 온 유럽의 예술가들, 특히 초현실주의자들인 살바도르 달리, 앙드레 브르통, 이브 탕기, 앙드레 마송 등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그들 모두 뉴욕으로 끌어들인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예술창조보조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작품은 문화적, 미학적 목적을 잘 아는 미술평론가 클레먼트 그린버그, 해럴드 로젠버그, 그리고 그들의 작품을 구입한 모마의 관장 앨프레드 바의 강력한 후원을 받았다.
그들은 대공황 시절의 사회적 사실주의에 대한 반발로 자신들이 추상 언어로 표현하는 세계적인 현대성을 주장했다.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1898-1979)이 1942년에 신생 화랑 금세기의 미술을 개관했다.
‘여성 카사노바’로 불린 그녀는 솔로몬 R. 구겐하임의 조카딸이기도 하다.
스위스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성공한 구리재벌 가에서 태어난 그녀는 런던에서 화랑을 연 경험이 있었다.
페기 구겐하임은 1943년에 최초로 잭슨 폴록Jackson Pollock(1912-56)을 위한 개인전을 열었다.
폴록은 캔버스 위에 물감을 떨어뜨리는 기법으로 인해 곧 ‘드리퍼 잭’이란 별명을 얻었다.
화랑 주인과 화가가 빠르게 성공을 거두었다.
액션페인팅의 대표적인 화가 폴록의 드리핑, 컬러필드의 선두자 마크 로스코의 채색된 직사각형, 프란츠 클라인과 그 밖의 화가들의 추상표현주의 작품이 몇 년 사이에 뉴욕을 모던아트의 수도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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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나라 독일로

 <비디오아트의 마에스트로 백남준 vs 팝아트의 마이더스 앤디 워홀>(숨비소리) 중에서


백남준의 예술여정은 15살 때인 1947년에 쇤베르크의 음악을 듣고부터였다.
16살부터 21살까지 은행원이었던 쇤베르크는 25살 때에 대표적인 작품 <정화된 밤 Verklarte Nacht>을 작곡하여 천재성을 드러냈다.
35살 때에 피아노 소품 11-1번을 작곡하면서 음과 음 사이에 위계질서를 이루는 으뜸음을 사용하지 않고 음들이 화성적, 선율적으로 배합되도록 했는데, 이는 훗날 무조성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그는 범조성pantonality이란 용어를 선호했다.
1921년에는 12개의 음이 위계구조를 갖지 않는 가운데 대등하게 연관되는 새로운 작곡법인 12음 기법을 발견하고 처음으로 <피아노 모음곡 Piano Suite> 작품 25를 작곡해 유명해졌다.
백남준은 이건우를 통해 12반음을 이용한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을 배울 수 있었다.
백남준은 훗날 회상했다.

“(이건우 선생님이) 어린 내게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음악세계에 관해 지독히 열심히 설명해주셨다.
그게 1946년의 이야기인데, 오죽하면 내가 쇤베르크 연구가가 되겠다는 생각까지 했을까.
그 결과 동경대학 졸업논문을 ‘아르놀트 쇤베르크 연구’로 하게 된 것이다.
미국에서 쇤베르크가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이 1948년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건우 선생님의 현대음악에 대한 이해와 열정은 그보다 앞서 있었다는 이야기다.”

1932년 7월 20일 종로구 서린동에서 3남 2녀 가운데 태어난 백남준은 피아노를 배운 것은 경기고등학교 전신인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하고부터였다.
그는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는데, 아버지는 해방 후 최대 섬유업체인 태창방직을 경영하고 있었고, 종로 5가와 동대문 일대 포목상 절반을 차지한 섬유업계의 대부였다.
6.25동란이 발발하기 한 해 전인 1949년 백남준은 홍콩을 무대로 인삼무역을 하던 부친을 따라 홍콩을 여행했는데, 그의 여권번호가 7번이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쉽게 이데올로기를 버린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그는 훗날 술회했다.

“나는 6.25 때 북한군이 우리 집에 들어와 개를 모조리 잡아먹고 달아난 뒤부터 이데올로기의 환상에서 벗어났다.”

6.25동란이 발발하자 백남준의 가족은 부산으로 갔고, 1950년 7월 27일 백남준은 이미 가지고 있던 일본 비자를 이용해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고베를 경유해 동경으로 갔다.
일제 때부터 일본을 빈번히 왕래한 부친은 동경에 집과 사업체를 마련해두었다.
그는 1952년 4월에 동경대 교양학부 문과에 입학했고, 3학년이 되자 미학과 미술사를 동시에 전공한 후 1956년에 졸업했다.
그해 그는 독일로 갔다. 뮌헨에 도착한 그는 트라지불로스 게오르기아데스 교수의 음악사 수업에 등록했다.
수업이 진행되던 중 그는 볼프강 포르트너 교수에게서 작곡을 배우기 위해 프라이 부르크 음악대학으로 옮겼다.
포르트너 교수는 백남준이 12음계 음악을 포함한 전통 음악에 관심이 없음을 알고 그에게 쾰른의 서독일 라디오 방송WDR의 전자 스튜디오에서 일할 것을 제안했다.
포르트너 교수가 1959년 초 백남준을 위해 써준 추천서에는 “백남준과 같이 매우 특이한 현상”은 맡아 가르칠 수 없다고 적혀 있고, 또한 “백남준은 파리의 피에르 셰퍼 그리고 미국인 존 케이지가 수행한 소리와 음향 연출 문제에 관심이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당시 다름슈타트에서는 여름이면 국제신음악 페스티벌이 열렸다.
젊은 작곡가들을 위한 중요한 포럼은 ‘새로운 음악을 위한 국제적인 휴가코스’로서 그곳에서 백남준은 1957년에 연사로 온 칼하인츠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1928-)을 만나 교류하게 되었고 이듬해에는 하기강좌에 강사로 초청되어 온 존 케이지를 만나 인생에 큰 전환을 이루게 되었다.
1951년 여름 처음 다름슈타트의 하기강좌에 참가한 슈톡하우젠은 1947년에 쾰른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배웠고, 동시에 쾰른 대학에서 음악학, 철학, 문헌학을 공부했다.
1953년부터 그는 다름슈타트의 강좌에 강사로 활동했다.
그는 쾰른 전자음악 스튜디오 창설에 참가했으며, 후에 상임위원이 되었고, 1963년에는 예술부장이 되었다.
1954-60년까지 일련의 중요한 작품을 작곡했고, 피에르 불레즈Pierre Boulez와 더불어 현대음악의 차세대 선두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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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인사가 된 워홀 

<비디오아트의 마에스트로 백남준 vs 팝아트의 마이더스 앤디 워홀>(숨비소리) 중에서



1965년 5월 워홀은 소나벤드 화랑에서 열릴 전시회를 위해 파리로 갔다.
소나벤드가 워홀의 일행을 위해 비행기 표를 사서 보냈다.
소나벤드 화랑은 2차 세계대전 기간 피카소가 살던 집 근처에 있었고 워홀은 피카소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까 궁금했다.
여느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피카소를 좋아하면서 “피카소의 모습은 대단하다”고 말했다.
그가 마티스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도 그렇고 피카소에 관해 말할 때도 그저 “좋다” 또는 “대단하다”라고만 말했는데 과연 그가 대가들의 미학을 제대로 알고나 있었는지 의심이 간다.

워홀은 자신이 회화에서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 제의를 받아들일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중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영화에 미쳐 있었고, 특히 할리우드 영화에 매료되어 “미국 영화가 최고다.
미국 영화는 분명하고 실제 같으며 영상이 놀랍도록 훌륭하다.
미국 영화는 말을 많이 하지 않기 때문에 대단한 것이다.
말을 적게 할수록 더 완벽해진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 차례 할리우드로 가서 제작자들을 만났지만 할리우드로 진출하고 싶은 그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워홀이 파리에서 돌아오자 친구들이 공장에서 ‘가장 훌륭한 50인 Fifty Most Beautiful People’ 깜짝 파티를 열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릴 때마다 워홀은 누가 들어오는지 호기심을 갖고 바라보았는데, 유명가수 주디 갈란드, 발레리노 루돌프 누레예프, 작가 테네시 윌리엄스, 배우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차례로 들어왔다.
모두 워홀이 우상처럼 여기던 스타들인데 그들이 워홀의 파티에 참석한 걸 보면 워홀이 유명인사가 된 것이 분명했다.

이 시기에 워홀과 에디가 뉴욕의 가장 이상적인 연인으로 알려졌다.
워홀의 영화 <음탕한 계집>(1965), <레스토랑>(1965), <부엌>(1965) 등에 출연한 에디는 <부엌>에 관해 “아주 비논리적인 영화로 성격과 동기가 없는 완전히 웃기는 영화다”라고 말했다.
시나리오를 쓴 타벨은 “내가 할 일은 무의미한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었으며, 의미 없는 말을 쓰는 것이었다.
...
앤디가 ‘줄거리를 없애라!’ 하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성격 없는 배역들을 등장시켜야 했다”고 했다.
워홀과 에디가 함께 외출하는 일이 잦았고 함께 파티에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T셔츠에 같은 색의 바지를 입고 파티에 간 적도 있었다.
워홀은 말했다.
“사람들은 에디가 나를 닮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건 내가 바랬던 것이 아니라 에디가 바랬던 것으로 내게도 놀라운 일이다.”
잡지 <에스콰이어>가 워홀에게 인생의 동반자로 누굴 꼽겠느냐고 묻자 워홀은 “에디다. 그녀는 나보다 더 내게 잘 해준다”고 응답했다.

그러나 1965년 9월 에디의 입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워홀이 스타로 알려진 만큼 자신은 유명하지 못하다면서 투덜거렸고 워홀과 헤어져야겠다고 말했다.
에디의 친구들은 워홀과 헤어지면 배우로서의 인기가 하락할 것이라면서 워홀 옆에 바짝 붙어있으라고 말해주었다.
두 사람이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워홀은 에디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는데, 에디는 자신이 워홀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워홀은 그럴 수 없다고 반대했다.
에디의 불만은 갈수록 커져갔다.
워홀의 다음 영화에 에디의 역이 아예 없었던 것으로 봐서 두 사람의 관계가 아주 나빴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주일에 5-6백 달러를 지불하면서 영화를 제작하는 워홀은 아직 본전을 못 건지고 있는 형편이었으므로 에디를 주인공으로 쓰는 문제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영화에 몰두하면서도 틈이 나면 워홀은 그림을 제작했다.
캠벨 수프통조림도 다시 수십 점 제작했는데, 그중 한 점은 캠벨사의 의뢰를 받은 것이었다.
그는 전기의자도 여러 점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했지만 밝은 색을 사용한 것 외에는 새로운 시도가 없었다.
1965년 10월 펜실베이니아 대학 현대미술관 관장 그린이 주최한 자신의 전시회에 참석하기 위해 워홀은 친구들과 함께 필라델피아로 갔다.
에디와 워홀은 주로 밤에 다투었고 낮에는 태연하게 연인처럼 행동했으므로 사람들은 두 사람의 이중적 관계를 눈치 채지 못했다.

전시회 하루 전 날 많은 사람들이 워홀을 만나기 위해 미술관으로 몰려들었다.
TV 카메라맨이 라이트를 들이댔으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밀리는 바람에 그림에 부딪치기도 했다. 관장 그린은 그대로 두었다가는 그림을 망치든지 도난이라도 당할 것 같아 관리인에게 벽에 걸린 작품들을 모두 치우라고 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워홀에게 몰려와 사인을 요구했고 워홀은 두어 시간 사인을 해주다가 뒷문으로 달아났다.
워홀은 나중에 술회했다. “별난 전시회였다.
미술관에 그림은 없고 사람들만 있었다. 1960년대는 사람들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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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해프닝 

<비디오아트의 마에스트로 백남준 vs 팝아트의 마이더스 앤디 워홀>(숨비소리) 중에서





백남준은 1959년 11월 뒤셀도르프 22번가에 소재한 장 피에르 빌헬름의 갤러리 22에서 <케이지에게 바침: 테이프레코더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 Homage to John Cage: Music for Tape Recorder and Piano>을 선보였는데, 깡통을 발로 차서 유리판을 깨고 그 유리가 계란과 장난감자동차를 치도록 만들고, 피아노를 공격하기 위해 돌진하고 테이프레코더에서는 재생한 다양한 소리가 나오는 음악적 해프닝이었다.
다양한 소리란 수탉의 놀라서 내는 소리, 모터사이클의 소리와 함께 베토벤의 교향곡 5번, 독일 가곡,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2번 외에도 시끌벅적한 복권당첨 소리, 장난감 소리, 사이렌 소리 등이었다.
해프닝은 그가 케이지로부터 받은 영향에 대해 감사를 표한 것으로 일상생활에 존재하는 온갖 소리를 음악으로 주장하는 것이었지만, 쾰른 스튜디오의 전자음악과 케이지의 작곡에서 찾아볼 수 없는 부조리하고 공격적인 행위였다.
이 작품은 백남준이 악기에 놀라운 파괴력을 가지고 공격하는 행위음악의 전기를 열었다.
케이지의 관심사가 소리를 해방시키는 것이었던 데 반해 백남준의 관심사는 전통 음악과 공연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가 1963년에 “피아노는 터부이다. 이것은 파괴되어야만 한다”고 말했을 때 1959년과 1962년 사이 그가 행위음악에서 파괴적인 요소를 상대화하려고 한 후기 진술보다 더 솔직한 것이었다.
당시 언론은 그를 ‘파괴 예술가’로 낙인찍었고, 그는 언론을 조소했다.
그는 말했다.

“사람들은 어떤 변화 형식에는 ‘파괴’라 하고 또 다른 변화 형식에는 ‘건설’이란 라벨을 붙이는데, 뉴턴의 법칙에 따르면 둘 다 같다.”

<케이지에게 바침: 테이프레코더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에서 백남준은 테이프레코더를 사용했는데 이것을 처음 작품에 사용한 사람은 케이지로 1952년에 <윌리엄 믹스 William Mix>에서 사용했고, 그 후 다수의 전위 음악가들이 테이프레코더를 작품에 사용했다.
<케이지에게 바침: 테이프레코더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은 백남준의 첫 해프닝 작품으로 그를 일약 전위예술가들 가운데 선두주자로 부상하게 만들었다.
해프닝에 케이지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작곡가 윤이상이 관람한 것으로 알려졌고, 훗날 각별한 사이로 진전될 요제프 보이스가 관전했다.

갤러리 22의 주인 장 피에르 빌헬름Jean-Pierre Wilhelm에 관해 백남준은 훗날 회상했다.

“갤러리 22는 화가들에게 동경의 꽃이었다.
그곳에서 내가 데뷔 콘서트를 가졌으므로 독일 예술계의 신진 및 중진의 다수가 온 것이다.
보이스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
빌헬름 없이 플럭서스를 말할 수는 없다.
세 번이나 나의 생애의 전환점을 마련해준 그는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
심장병은 그 집안의 내력으로 유태인인 그는 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에서 반나치 저항운동에 참가해 2년 동안 지하생활을 하느라 심장병이 악화되었고, 1966년 50대에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자각하고는 나와 샤롯이 함께 기거하고 있던 보이스의 집에 스스로 찾아온 것이다.
사진사 레베까지 데리고 온 그는 대화를 나누던 중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낸 후 미술계에서의 은퇴선언을 낭독했으며, 그 내용이 레베 박사에 의해서 기록되었다.
빌헬름이 돌아가고 ‘저 늙은이 왜 저렇게 유난을 부리느냐’고 놀렸는데, 그는 이듬해에 타계했다.”

쾰른시대의 악명 높은 작품은 그가 1960년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의 아틀리에에서 소개한 것으로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습작 Etude for Piano Forte>은 쇼팽의 곡을 피아노로 연주하던 백남준이 갑자기 무대에서 내려와 관람하던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고 그 옆에 앉아 있던 튜더에게 샴푸 세례를 한 뒤 사라졌다가 근처 술집에서 전화로 해프닝이 종료되었음을 알린 것이었다.
넥타이를 자른 행위는 해석하기에 따라서 남성우월주의에 손상을 가하는 것이지만, 다른 해프닝 예술가들과는 달리 익살이 내포되어 있어 그가 관람자를 선동하는 데 더 비중을 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객석에 앉아 있던 케이지와 튜더에게는 공격을 가했으면서도 함께 앉아 있던 슈톡하우젠은 공격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슈톡하우젠과 전자음악에 더 이상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백남준의 해프닝을 위해 자신의 아틀리에를 공연장으로 개방한 마리 바우어마이스터는 나중에 슈톡하우젠의 아내가 되었다.
백남준을 이해하고 후원한 그녀는 백남준이 뉴욕으로 이주할 때는 뉴욕의 보니노 화랑을 소개하여 그로 하여금 그곳에서 여러 차례 전시회를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관람자의 참여를 해프닝에 유도하는 것은 중요했는데, 백남준은 1963년 그의 예술운동 기관지 <전위 힌두이즘을 위한 대학>에 기고한 ‘음악의 새로운 존재론’에서 이 점을 역설했다.

“...
음악의 존재론적 형태를 새롭게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음악회에서는 소리가 움직이고 청중은 앉아 있다.
나의 행위음악에서는 소리가 움직이고 청중은 공격당한다.
<방 스무 개를 위한 교향곡>(1961)에서는 소리도 청중도 움직인다.
<버스 음악 1번>(1961)에서는 소리가 앉아 있고 청중이 소리를 찾아간다.
<음악의 전시회>(1961)에서는 청중이 소리를 만든다.
길거리에서 공연한 <움직이는 극장>(1962)에서는 소리가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은 우연히 소리를 만난다.
<움직이는 극장>의 매력은 ‘선험적 경이’에 있다.
즉 사람들은 초대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무슨 곡인지, 왜 그 곡을 듣는지, 작곡가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방 스무 개를 위한 교향곡 Symphony for 20 Rooms>은 스무 개의 방에서 발생할 음악적, 비음악적 해프닝에 대한 지침을 명기한 악보로 제시된 것으로 실현될 수도 있고 악보로만 존재할 수도 있다.
한 방에서는 수도꼭지에서 물이 흐르고 벽에 골동시계가 똑딱거리는 가운데 테이프레코더에서는 갖가지 소리가 재생되었다.
또 다른 방에서는 우리에 갇힌 수탉이 꼬꼬댁거리거나 여러 개의 텍스트가 낭독되거나 ‘장치된 피아노 prepared piano’가 설치된다.
초대된 참여자는 스무 개의 방을 순회하면서 다양한 소리의 사건들을 경험하게 된다.
이 작품은 캐프로의 1959년 작품 <여섯 부분으로 나뉜 18개의 해프닝>을 상기하게 하는데, 두 작품 모두 독립된 방에서 동시에 발생하는 비논리적인 해프닝으로 구성되고 참여자로 하여금 방들을 순회하면서 다양한 상황들을 직접 경험하도록 유도한다.

백남준은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의 아틀리에에서의 두 번째 해프닝 공연에서 불가리아계 미국 조각가, 실험예술가 크리스토Christo(본명은 흐리스토 야바체프Christo Javacheff, 1935-)를 처음 만났다.
크리스토는 1952-56년 소피아 소재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뒤 프라하, 빈, 제네바에서 잠시 체류하다가 1958-64년에는 파리에서 지냈다.
그는 백남준과 같은 해인 1964년에 뉴욕에 정착하고 1973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포장 empaquetage’으로 캔버스천이나 반투명 비닐 같은 물질로 포장한 물체와 그 결과를 미술이라고 주장하는 행위였다.
백남준은 훗날 크리스토에 관해 회상했다.

“내가 처음 크리스토를 만난 건 1960-61년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의 아틀리에에서였다.
나는 29살이었고 그는 24살이었을 것이다.
(백남준은 그가 자신보다 5살 아래라고 잘 못 알고 있었다)
크리스토는 불로 누룽지처럼 반소시킨 종이를 콜라주한 오브제를 보여주었다.
그 다음 해 그는 쾰른의 하로 라우하우스의 갤러리에서 데뷔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에 갔더니 그 크리스토 놈이 내 피아노 두 점을 포장하고 흰색 물감을 철덕철덕 칠해 놓은 것이 아닌가.
피아노는 내가 친구 벤야민 패터슨의 콘서트를 위해 빌려주었던 것으로 다음 전시회를 맡은 크리스토가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나 보따리처럼 광목으로 싸버렸던 것이다.
훌륭한 전시회였지만 작품은 한 점도 안 팔렸고, 전시회가 끝난 뒤 모든 작품은 고철상에 팔렸다.
전시회가 끝나는 날 나는 내 피아노를 돌려받고 투덜거리면서 크리스토의 광목을 길가에서 벗겼다.
광목을 벗길 때 나의 ‘장치된 피아노’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렸다.
주인 하로 라우하우스는 ‘아, 백의 개인적 거리 콘서트이다’라고 웅얼거렸다.
우리 두 사람은 10년 후 억대가 될 크리스토의 초기 명작을 부수고 있는지는 꿈에도 몰랐다.
여하튼 비엔에 소장되어 있는 나의 피아노에는 그때 크리스토가 남긴 흰색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의 아틀리에에서의 백남준의 두 번째 해프닝에는 우려할 점이 있었다.
그것은 케이지의 예술철학에 대한 곡해가 내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백남준의 퍼포먼스를 관람한 후 케이지는 자신이 과연 젊은 예술가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었다.
케이지에 의하면 모든 것이 흘러가고 있으므로 개인의 소망이나 욕망을 배제함으로써만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젊은 예술가들이 무nothing라는 상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알고는 그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포기했다.

캐프로는 성행하는 해프닝에 대한 우려를 지적했다.

“젊은 예술가들이 주도하고 있는 해프닝은 대부분 케이지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미리 계획하지 않으면서도 연극적으로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정작 케이지 자신은 최근에 유행하는 해프닝과 볼거리를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젊은 예술가들이 우연과 불확정성의 개념을 잘못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캐프로의 말은 “우연을 추구하는 방법의 전반적 개념이 너무 방대하므로 세심하게 주의하지 않으면 이미 알고 있는 개념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한 케이지의 충고를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케이지는 해프닝과 이벤트가 점차 과격해지는 것에 대한 우려를 토로한 적이 있었다.

“우연의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영역에까지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날 사람들은 모든 것을 쉽게만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원래 의도했던 기본정신이 사라지고 있다.”

1962년을 전후한 백남준의 해프닝은 주로 악보를 발표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다분히 개념적이었다.
“노란색 팬티를 벗어 벽에 걸어라”로 시작되는 1962년의 선정적 음악 <앨리슨을 위한 세레나데 Serenade for Alison>, "월경의 피로 각 나라 국기를 물들여 화랑에 전시하라“는 외설적 내용의 <아름다운 여류화가의 연대기 Chronicle of a Beautiful Paintress> 또한 단순반복적인 방법으로 개념화한 작품이다.
특기할 점은 케이지의 음악적 해프닝에 비해 백남준의 쾰른시대의 작품에는 볼거리가 많아 훨씬 시각적이라는 것과 에로티시즘이며 이는 플럭서스에서의 활동에서도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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