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선재 강의(2011 5-3)
오늘날의 미술은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채 정체상태이다
(경주에 있는 아트 선재에 가서 강의했습니다. 다음은 제 강의 노트입니다.)
1960년대를 이해하는 것이 오늘날의 미술을 이해하는 지름길입니다. 오늘날의 미술은 1960년대에 발생한 다양한 장르들이 반복적으로 답습되고 있으며,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채 정체상태입니다. 매우 지루한 현상입니다.
개념과 진부한 것에 관심을 둔 미국의 1960년대 미술
1965년경 미니멀아트 예술가들은 곧 개념미술 예술가들로 불리게 될 예술가들과 뉴욕의 막스의 캔자스시티 주점에서 종종 만나 토론했습니다. 대학을 막 졸업한 그들은 그린버그에 의해서 주도되어온 형식주의를 해체하고자 했으므로 그들의 토론은 매우 이론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토론했으며, 미술에서의 개념의 성격이 열띤 논쟁과 토론이 되었습니다. 미술은 침대나 의자처럼 명확하게 한정된 사물의 물리적 유형으로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라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습니다.
우리는 작품의 순수한 시각적 측면보다는 그 작품이 지닌 정서적, 역사적, 문화적 측면을 더 깊게 음미해야 합니다. 회화를 통해서 단지 그림만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화가가 살았던 시대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은 물론 그 화가가 감정과 희망 그리고 사상까지도 알아야 합니다. 이는 시각적 감상이 즐거운 것이 되려면 정신적 요소를 필요로 한다는 걸 말해줍니다. 심미적 경험은 반드시 시각을 통해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사고능력에 도전하는 정보로 생깁니다.
악보 읽는 기술이 매우 뛰어난 사람은 연주를 들을 필요가 없으며, 듣는 것보다 오히려 교향곡 악보를 읽는 걸 더 좋아합니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가상의 음이 실제 연주보다 훨씬 더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비물질적인 개념미술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시각적 이미지가 아니라 사고능력에 도전하는 정보이기 때문입니다.
미술에서 우리는 아마추어이며 애호가다
아마추어amateur와 애호가dilettante(딜레탕트)는 전문가의 수준에 다소 미치지 못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을 의미하는 것처럼 와전되었습니다. 그러나 원래 아마추어란 말은 라틴어의 아마레amare, 즉 ‘사랑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한 말로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와 유사하게 애호가도 ‘~에서 즐거워하다’라는 라틴어 델렉따레delectare가 어원으로 특정 활동을 즐기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두 단어의 본래의 뜻은 성취보다는 경험에 좀 더 비중을 두는 것이었으며, 얼마나 많은 성취를 하는가보다는 어떤 일을 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주관적 보상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두 단어만큼 경험 자체의 소중함에 대한 우리의 태도 변화를 극명하게 나타내주는 건 없습니다. 아마추어가 되는 건 그 분야에서 전문가들과 경쟁하기 위함이 아니라 상징적 훈련을 통해서 정신적 기술을 발전시키고 의식을 정리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수준에서 아마추어적 학식은 나름대로의 기반을 갖게 되는 것이며, 때로는 전문적 학식보다 더 큰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송나라 사람 莊子(장자)가 말한 逍遙遊(소요유)에서 遊(유)는 유람하다wandering(or flowing)는 뜻입니다. 소요유는 자유롭게 이리저리 유람한다는 말입니다. 장자는 유가 올바른 삶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외적 보상에 연연해하지 않고 자발적이며, 완전한 헌신의 삶, 즉 완전한 자기 목적적인 경험을 의미합니다. 아마추어와 애호가가 바로 이런 자기 목적적인 경험, 즉 플로우경험 혹은 최적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단지 눈으로 볼 수 있는 작품만을 감상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화가가 살았던 시대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은 물론 그 화가가 감정과 희망 그리고 사상까지도 볼 수 있으려면 독서를 통한 공부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16세기 북유럽 화가들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르네상스와 종교혁명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이 왜 그런 작품을 제작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프랑스 혁명을 알아야 합니다. 모던 회화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시작되었는지 알려면 회화 양식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다다를 이해하려면 1차 세계대전의 상황을 알아야 하고,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를 이해하려면 2차 세계대전의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심미적 경험은 상당 부분 이러한 정보로 생깁니다. 독서는 집중과 몰두가 요구되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얻는 피드백의 만족감으로 플로우경험을 얻게 됩니다. 플로우경험이 곧 행복입니다.
우리가 능동적이지 않고 수동적일 때 대중적인 여가, 대중문화, 심지어 고급문화까지도 우리의 정신을 좀먹는 기생충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심리적 에너지만을 흡수할 뿐이며, 그 대가로 어떤 실재적인 힘도 제공해주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전보다 더욱 지치고 의기소침하게 만들어줄 뿐입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행복의 원천이 ‘사랑과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루의 생활에서 유쾌한 활동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가장 많은 응답이 ‘행복해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 ‘내가 하는 말에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 ‘친구와 함께 있는 것’, ‘성적 매력이 주목받는 것’ 등입니다. 우울하고 불행해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주된 특징 중 하나는 위와 같은 일들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은 지옥이다’라고 우리에게 경고하는 오래된 금언도 있습니다. 힌두교의 현자들과 기독교의 은자들은 광란의 속세를 멀리 벗어난 고요함을 추구했습니다. 사람들이 겪은 가장 부정적인 경험에 관한 조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사건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직장에서는 공정하지 못한 상사나 무례한 사람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가정에서는 무책임한 배우자, 고마워할 줄 모르는 자녀, 참견하기 좋아하는 친척들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깨어 있는 시간의 3분의 1을 혼자서 보내게 됩니다. 혼자 있게 되면 곧 우울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면한 도전도 없고 별다른 할 일도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고독감으로 인해 심하지는 않지만 감각을 못 느끼는 증세를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혼자 있는 것을 참아내고 더 나아가 그것을 즐기지 못하는 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어떤 임무도 성취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혼자 있을 때 우리의 의식을 통제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식을 통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홀로 있는 시간에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시청합니다. 텔레비전이 우리의 의식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눈앞의 깜박이는 화면이 의식에 어느 정도의 질서를 회복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뻔히 예상할 수 있는 줄거리, 눈에 익은 주인공들, 심지어는 반복되는 광고까지도 일종의 안심을 주는 자극이 되는 것입니다. 텔레비전과 상호작용을 하는 동안 우리의 머릿속에 개인의 걱정거리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화면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가 우리의 마음속으로부터 불쾌한 걱정들을 차단시켜줍니다. 이런 식으로 우울함을 떨쳐버리는 건 주의의 낭비입니다. 크게 얻는 것도 없이 많은 양의 주의력을 소모해버리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건 시간을 때우는 한 방법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큐멘터리라든가 좋은 영화를 감상하는 건 의식을 통제하는 법을 배우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과 마찬가지로 마약도 우울한 생각을 떨쳐버리게 해줍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마약을 복용하고 신비로운 작품을 만들어보지만, 그들은 결국 창작을 위해서는 맑은 정신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약의 영향을 받은 상태에서 만들어진 작품은 좋은 작품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복합성이 떨어져서 너무나 명백하고 자아도취적인 경향을 띠게 됩니다. 화학물질에 힘입어 예민해진 의식은, 나중에 작가가 명료한 정신으로 돌아와 사용할 수 있는 색다른 이미지나 생각, 감정 등을 낳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정신을 점차 화학물질에 의존하게 되어 결국은 스스로 정신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할 위험이 따르게 됩니다. 장 미셸 바스키아는 결국 마약 복용으로 죽었습니다.
경험의 질을 통제할 능력이 있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주의력을 조직해줄 만한 외적 요구 없이 혼자 있는 상황에서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가의 여부입니다. 친구를 만나고 극장이나 연주장에 가는 건 쉬운 일입니다. 집중이 필요하고 기술을 증진시켜주며 자아를 성장시켜주는 독서를 하며 여가를 보내는 것과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때우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고독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야수나 신, 둘 중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신까지는 아니더라도 텔레비전, 극장, 레스토랑, 음악회 등 문명생활의 도움 없이도 플로우경험을 할 수 있는 자신만의 정신적 일과를 설정하는 건 중요합니다. 고독을 하나의 기회로 보지 않고 피해야만 하는 조건으로 보는 사람은 그런 상황에 처하면 당황하기 일쑤입니다. 자아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 기분전환에만 의지하게 됩니다.